워킹맘이라는 말이 숨기려는 것
<워킹맘이라는 말이 숨기려는 것>
한 언니의 글에서 “워킹맘이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다. ‘밖에 나가 일하는 엄마’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 언니가 ‘취업모’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저 임금노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 ‘워킹맘’이라는 단어에 숨은 가사노동과 육아에 대한 경시, 어쩌면 천시를 나도 몰랐던 건가. 한 국회의원이 ‘밥하는 아줌마’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화가 났다. 국회의원 정도 되는 여자는 밥하는 아줌마들을 무시해도 되나.
두 번의 육아휴직 동안 ‘잘 쉬어’, ‘쉬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들으면 분했다. ‘쉬긴 뭘 쉬어. 하루종일 신생아랑 있어봐라’ 라며 입술을 꽉 깨물 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산 우리 엄마. 엄마는 두진이와 이준이를 봐주면서도 “놀면 뭐해. 손자들 돌봐주는 거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엄마가 놀긴 뭘 놀았어요. 나를 키우고 수많은 일들을 했잖아”라고 말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조차도 휴직하기 전 글을 썼었다. “이제 내가 성취라 믿어온 것들은 잠시 멈춰지겠지만”이라고.
이 ‘성취’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좋은 회사 직원으로 살라’는 이 성취의 기준을 별생각없이 받아들였던 10대 20대의 나를 돌아보는 요즘, 그 성취의 기준이 흔들리는 요즘,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성취를 지향하라고 가르쳐야 하는지 헷갈린다.
두진이가 일곱살이 되면 혼자 설거지하고 싶다는 소망을 그렸다.
두진이가 열심히 설거지하면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서 칭찬해주는 모습. 사진에 엄마는 없지만 할머니는 있다. 이 사진을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해야 하는 건지 나는 여전히 헷갈린다.
아이를 낳고 난 내 시간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회사 와서 밥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해방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그런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렸다는 고백을 하는 중이다. ‘돌봄’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내 몸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돌보는 경험.
주말에는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쓴다. 작은 존재를 돌보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작은 아이 기저귀를 갈고 졸리면 혼자 자지 못하는 둘째를 안고 어르는 이 ‘작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하루종일 그 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길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엄마의 노고를 새삼 되새기는 중이다.
고3 때 새벽에 일어나 아침 일찍 학교를 갈 때 엄마는 늘 새 밥을 지어줬다. 내가 좋아하는 두릅을 데쳐주고 삼치를 구워줬던 엄마의 밥상을 ‘받고’ 학교를 가는 일이 당연했었다. 그런데 ‘임금노동’을 하는 나는 집안일을 다 ‘아웃소싱’한다. 빨래는 건조기에, 반찬은 ‘더반찬’ 배송에 의지한다. 아직 두 돌도 안 된 우리 둘째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사온 반찬’을 먹여 키운다. 나는 가끔, 아이들 밥상이 내가 먹었던 밥상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헷갈린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아웃소싱해야 하는 내 인생이 맞는 건가.
그렇지만 난 여전히 내 일을 좋아한다. 회사 가는 것이 좋고 회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좋다. ‘82년생 김지영 세대’들은 다 그럴 것이다. 자기를 증명하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런데 합계출산율이 1.06명을 찍을 것이라는 시대에 나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평일엔 친정엄마의 ‘돌봄노동’ 의지해 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엄마에게 미안한 ‘죄인’ 신세지만 또 친정엄마의 ‘돌봄노동’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늘 안도한다.
운이 좋아서다. 서울에 계시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흔쾌히 돌봐주겠다고 하는 ‘운’ 말이다. 그래서 난 가끔 내가 쓰는 글이 두렵다. 친정엄마를 착취해 일을 유지하는 내 상황이 도와줄 가족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어떤 엄마들을 속상하게 만들까봐.
그런데 왜 엄마들만 자꾸 일이냐, 육아냐를 선택해야 하나. 왜 엄마들만 ‘전업맘’, ‘워킹맘’으로 구분하나. 맞춤형 보육 논쟁 때 어린이집에 보내는 전업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에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는 하루종일 아이만 돌봐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아이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경단녀’들은 아이에게 속박된 신세로 늙어야만 하나. 공부를 하든, 취업준비를 하든 자기 시간을 가지면 안되나. 정말 답답할 때는 친구를 만나 커피숍에서 브런치를 먹으면 안되나.
육아휴직 중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친정엄마가 바쁘실 때라서 치과 예약을 두 번 미루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몸에 달라붙어있는 이 작은 아기 때문에 내 이 치료도 못 받는 게 ‘엄마의 신세’다. 그마저도 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난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가끔 ‘워킹맘의 성공 서사’를 읽는다. 대부분 ‘할머니 육아’ 덕분에 끝까지 갈 수 있었던 얘기들이다. 어떤 회보에서 워킹맘이 자식 대학 잘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을 읽을 때는 울적했다. 할머니 덕분에 아이를 키우고 결국 엄마가 아이의 적성을 파악해 학원을 고르고 ‘서포트’해 대학을 잘 보내는 이야기, 개인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답답했다. 이제 난 그런 성공 서사가 지겹다. 내 아이들에게 이 구조에서는 이렇게 사는 게 유리하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1500원짜리 커피를 사 먹었다가 어떤 ‘남자’들이 자기를 ‘맘충’이라고 욕하는 걸 듣는다. 토요판에 일하며 아이 키우다 소진된다고 글을 쓰니 ‘외벌이하며 아껴쓰라’는 댓글이 달렸다. 여자들은 일하러 나오면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비난받고 집에 있으면 ‘논다’고 비난받는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전업맘은 ‘논다’고 말하고 워킹맘은 ‘죄인’이 되는 세상이니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거다.
입사 동기인 남편과 나는 월급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누가 그만둬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가끔 헷갈린다. 남성은 나가서 일하고 여성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가부장적 모델’을 버린 국가들이 출산율 반등에 성공했다. 엄마들만 전업맘, 워킹맘, 경단녀로 구분하는 사회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암담한 미래 뿐이다. 돌봄노동을 아빠와 엄마가 함께 할 수 있어야, 아빠가 돌봄노동을 할 수 있도록 집에 일찍 돌아와야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배우자보다 임금이 낮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활기차게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길. 하루종일 회사에서 시달리느라 아이 얼굴도 못 보는 한국 남성들도 일찍 퇴근해 아이하고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소망해본다.
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된 “워킹맘이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는 말을 했던 언니는 밖에서 보기엔 ‘전업주부’다. 임금노동을 하진 않지만 수많은 활동을 한다. 임금노동보다 의미있어보이는! 아이를 공동육아로 키우면서 선생님을 하고 아이 초등학교 교육도 공동육아처럼 시키고 싶어 학교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정치하는엄마들’이라는 공동대표로도 열심히 뛰고 있다. 그가 쓴 발제문, 토론문을 보면 어떤 전문가가 쓴 글보다도 훌륭하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활동들이 ‘돈’으로 치환되지 않을 뿐. 지난해 만난 사람 중 가장 빛나는 사람, 응원한다는 말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