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함께 ‘반반 육아’] 아이들이 아빠를 엄마보다 더 찾을 때
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뿌듯함과 서운함 교차하지만…더 많은 시간 함께 부대낄 수 있기를
요가 동작을 흉내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 육아휴직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와 등산했던 봄날, 아빠와 계곡으로 휴가 갔던 여름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계곡에 친 텐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나는 계속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텐트 속에 수집(?)하고 있었다. 속으로 ‘잠자리가 아빠 코나 눈두덩이를 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러나 평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는 늘 내가 잠들어야 퇴근했다. 열 살 때 수영장에서 넘어져 이를 크게 다쳤던 날에도 아빠는 늦게 왔다. 앞니 중 하나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버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정류장에 나타났을 때 엄마가 울던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없이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했다. 몇 군데 치과를 돌아 겨우 치료를 한 밤 아빠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했던 밤도 또렷하다.
나는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 분위기와 많이 달랐던 듯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다가 가끔은 어릴 적 아빠와 내 모습이 겹쳐진다. 최근 엄마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가 정말 놀랐다며 말씀하셨다. “아니, 아빠들이 다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왔더라~” 남편도 당연히 입학식에 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아이 입학식, 졸업식에 가는 걸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다 돌아보니 아빠는 내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빠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테고 회사 상사들은 면박을 줬을 테다. “엄마만 가면 되지, 왜 아빠가 유난스럽게 졸업식을 가느냐”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부르며 울 때가 많았다. 엄마가 모든 것의 디폴트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와 달라 신기했다. 아마 다른 점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가 있었다는 점일 거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단 느낌을 주지 않고 싶어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는 남편이 담당(?)하게 하며 첫째가 안 볼 때 사랑을 몰아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둘째 기저귀를 갈았던 횟수는 첫째 때보다 현저히 적다. 남편이 주로 갈아서다. 목욕의 횟수도 비슷하다. 남편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킬 때 나는 보통 첫째를 마크(?)하고 있었다.
관계란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누리길 바래
그것은 아이들의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
최근 어린이집 선생님이 보내준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준이가 점심 시간에 김치 먹으면서 ‘아빠 집에서도 김치 먹었어’라며 자랑을 했어요.” 내가 댓글을 달았다. “이준이는 이제 아빠 이야기만 하네요.”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우리 이준이는 뭐든지 ‘아빠 집’이라 표현하고 ‘아빠가 입혀줬어요’ ‘아빠한테 칭찬해주세요’라고 말을 해요. 아빠랑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어요.” 뿌듯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니다, 엄마!” 하루 종일 아빠를 불러서인지 엄마를 옆에 놓고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결국 관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관계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하나도 쓰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아빠를 더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좋아했지만 내 곁에 자주 없었던 ‘아빠와 나’와 다르게 일상에서 자주 아빠를 누릴 수 있기를.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는
아빠가 아이들을 키워야 많이 풀려
육아휴직 사업장이 더 많아지길 기대
아빠가 나를 키울 때는 아버지가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당연해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남편이 ‘행운아’처럼 보일까봐 가끔 걱정스럽다. 남편은 여전히 흔하지 않은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들은 아빠를 누릴 시간을 얻었다. 여전히 이런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목소리 높이고 싶다. 2019년에는 그런 사업장이 많아지길 꿈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저출산·고령화를 진정 걱정한다면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엄마들의 일을 아빠들이 나눌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말이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아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제 둘째 이준이가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첫째 두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달려 학교에 데려다줬다. 얼른 회사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떼쟁이 둘째가 아빠 손을 잡고 나타났다. 반가웠지만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이준이는 “엄마랑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 엉엉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울적하다. 버스 차창을 보며 목 끝의 뜨거움을 느끼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준이는 아빠랑 있는데 왜.’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안심이 됐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고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아이들과 소통 정말 어렵지만…아빠 역할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
‘으앙~’ 유모차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둘째가 갑자기 깨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막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유모차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젤리를 줘도 싫다고 막무가내로 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반쯤 포기하고 그냥 뒀다. 뭔가 서러움이 있다면 일단 배출이라도 해라 싶었다. 녀석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집이 떠나가라 운다. 씻지 않은 손에 구정물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덕지덕지 바른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모른 체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좋은 아빠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싶었을 때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 다시 물었더니 말한다. “형아 데리러 갔는데, 형아 어디 갔어!” 아까 학교에 형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형아’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는 혼자 다시 집에 있게 된 셈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대체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지식들을 얻는 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 데 도움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서 언젠가 이 책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에게 뭘 더 안겨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액션’보다는 아이들에게 ‘리액션’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내 차례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상대방의 전략을 지켜보는 턴(turn) 방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어떤 개입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될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더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육 과정을 게임으로 치자면
리얼타임 전략 시물레이션일 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발전
내가 그렇게 좋은 리액션을 보여줬나 돌이켜보면 백점 만점에 오십점이나 될까 싶다. 가급적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잘하는 모습을 칭찬해주되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북돋워주려고 늘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리액션은커녕 준비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다시 집에 헐레벌떡 돌아와 집어서 갖다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아지는 모습도 발견한다. 리액션이란 본디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더 중요하듯 아이들 역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나 혼자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첫째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아내 없이 혼자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말을 잘 못하던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 종일 나와 시간을 보내더니 곧잘 ‘아빠’ 하면서 달려들었다. 급기야 밤에 뒤척이며 보채다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 ‘아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라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져
내 아이와의 추억은 둘이 고루 섞였으면
그 첫째 녀석이 제법 크더니 출근하는 나에게 동생을 한번 안아주고 가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둘째가 돌을 갓 지나서였을 때였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동생이 ‘아빠’ ‘아빠’ 하고 울어서란다. 둘째는 그즈음 “아빠 돈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의문 역시 첫째가 풀어주었다. “야, 아빠가 좋다고 아빠 돈대 그러는 거지?” 녀석들의 볼을 한번 꼬집어보며 웃었다.
첫째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둘이서 탄 적이 있다. 기차를 타고 너무나 신나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아빠는 이미 꿈을 이뤘어? 아빠는 이미 커서 틀려버렸어? 아빠는 꿈이 없어?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야? 막막했다. 한 1분여간의 고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응, 그래?”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의 그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제법 많다. 아버지와 나는 씨름도 하고, 암벽에도 오르고, 잠옷 바람으로 함께 누워 있기도 한다. 사진 속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 앞에 서 있을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일하러 나가시던 굽은 등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었다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내 아이들과의 추억은 일상과 이벤트를 고루 섞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