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 일기/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일들

누런돼지 관리자 2019. 6. 20. 21:02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풍경들

임아영

엄마와 둘쨰가 함께 걷고 있다.

 

결혼 전 경북 구미에 사시는 시부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러 갔다 돌아오던 길이었다. 6월 초였는데 꽤 더운 날씨였고 기차의 에어컨은 고장나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 준비 과정의 첫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는데 안도했고 편히 쉬고 싶었다. 그때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세 살이나 네 살 정도 됐을까. 아마 그 아이도 더워서 그 괴로움을 울음으로 표현했던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났다. 조그맣게 남편에게 말도 했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단호하고 냉정했던 말투가 기억난다. 연애 중이던 남편은 그 아이의 괴로움보다 내가 더워하는 것을 더 신경쓰던 때였다. 남편도 내 말에 호응하며 우리는 그 아이 부모를 원망했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이 울음에 괴로웠다.

아이를 낳고서 그 장면이 꽤 자주 떠오른다.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 #노키즈존 이라며 급기야 어떤 공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우리 아이들을 거부할 때 그때의 내 냉정했던 말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그 부부는 내 말을 들었을까. 작게 말한다고 했겠지만 아마 마음 졸였을 그 부부에게 이 말이 화살이 되지는 않았을까.

 

아이 울음을 부모가 그치게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마트에서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부모가 훈육할 순 있지만 그 행동을 단숨에 그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들을 낳고서야 알게 됐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귀여운 얼굴에 떼쟁이가 나타났다가 천진함이 나타났다가 다시 떼쟁이가 나타난다. 울음으로밖에 의사를 표현할 줄 모르는 돌 전 아기들, 말을 배워도 아직 표현이 능숙하지 못해 어른들과 소통이 안 되면 떼부터 쓰고보는 세 살 네 살 아이들.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이해하게 됐다. 동물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자기 먹이도 찾아다니던데 인간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모든게 늦는 걸까. 이유를 안다 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물음을 안고 온몸으로 아기를 기르던 #육아휴직 시절 나는 자주 외로웠다. 늘 당당하게 살려고 했지만 아이를 안고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내 자세는 묘하게 수세적이었다.

#임신 했을 때였다. #노약자석 에 앉았다가 한 할아버지에게 대놓고 핀잔을 들었다. “임신했어요”라고 작게 말했지만 억울했다. #임산부#교통약자인데 왜 내가 눈치를 보는가. 그러다 문득 교통약자석 표시를 보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 표지가 보였다. 아, 한 번도 장애인의 #이동권 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었구나. 배가 점점 더 부르면서 뛸 수 없게 되고 뒷짐을 져야할 만큼 허리가 아팠다. 뛸 수 없게 되자 문득 거리에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으로 젠더적 #소수자성 에 몰입했지만 과연 난 얼마나 다른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이 있었던가.

혼자 걸어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쉽지 않다. 언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무법자’들이라 달리는 차가 공포스럽다. 아, 이 도시엔 왜 이렇게 차가 많은 걸까. 미세먼지가 심해질 때 아이들이 기관지염에 걸려 소아과에 가면 평소보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소아과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이 작은 아이들이 도시의 삶이 지속가능한지 묻는 것만 같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의 힘만으로 키울 수가 없어 돌만 지나도 #어린이집 을 다닌다. 면역력이 아직 약한 아이들끼리 감기를 옮기고 또 옮겨 항생제를 계속 먹여야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보육의 시기를 거쳐 경쟁이 점점 극심해진다는 교육의 시기로 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줄 알고서도 둘째까지 낳은 나의 배짱은 어디에서 왔는가.

엄마가 되면서 작은 아이의 삶을 다시 살게 된 기분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탐험하며 모든 걸 신기해 하지만 어른이 된 내 눈엔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인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아이가 좀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보통 사람이 안전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에 목소리를 낸다. 물론 뭐 대단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항상 내 어깨 위에 시선을 두고 살았다면 어린 아이들의 시선으로 내려왔다 정도는 말할 수 있을까. 다짐을 해본다. 작은 존재들, 사회가 애써 권리를 모른 척하는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다짐이 발걸음이 되기를.

벤치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들

황경상

10년 넘게 쉬지 않고 회사에 다녔다.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가 있는 서대문, 광화문에서 보냈다. 낮 시간 동안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가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다. 집안일을 책임지는 주부가 됐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취직하기 전 백수 시절의 기운이 잠깐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갔다하다보면 금세 1만 보가 넘어버리는 스마트폰의 만보계를 보면서 ‘아이는 편도지만 어른은 왕복’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 전에 아이를 돌보셨던 장모님께서 정말 힘드셨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보지 못했던 것들도 많이 보인다. 동네 가게 하나하나를 유심히 본다. 어떤 가게가 사라지고 어떤 가게가 생기는지 알게 된다. 이 동네에 산 지 몇 년 만에 이비인후과가 이렇게 가까운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등어 조림 재료를 사려고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여기서는 생고등어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생선을 사기 위해서는 가까운 시장에 가야 했다. 구경꾼이나 들러리가 아니라 직접 물건을 사러 가 본 시장에는 싸고 좋은 물건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살면서 크게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경제적 여건이나 지방 출신이라는 점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랬다. 스스로는 대단치 않다고 여기지만 어쩌다 보니 남성이자 #정규직 직장인, 비장애인이라는 것만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큰 #기득권 처럼 되어 버렸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입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광화문이나 서대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한 번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왜 그렇게 길거리에 턱이 많은지. 보도블럭은 왜 그렇게 깨진 것들이 많고 길은 울퉁불퉁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곳이 많은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원망한다. 킥보드, 유모차(자전거) 등 바퀴 있는 탈 것들이 없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한 번씩 그 탈 것들의 바퀴가 턱에 탁 걸려서 아이가 휘청하거나 자빠지고, 내가 밀던 유모차가 꼼짝도 못하고 처박히면 몹시 화가 난다. 도무지 우리 사회의 거리란 곳은 두 발로 걷을 수 있는 성인이 아니면 이동하기조차 어렵게 돼 있다. 또 자전거는 왜 이리 인도에서 레이싱을 하는지.

육아휴직을 하고 보통의 ‘아빠’가 아닌 보통의 ‘엄마’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아마 생에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일도 하게 된다. #육아휴직급여 신청을 하면서 헤매다가 센터에 전화를 해 보고서야 휴직 한 달 뒤부터 가능하고 한 달 단위로 계속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휴직 급여인데, 미리 신청해서 원래 급여가 나올 날짜에 받을 수는 없는 것인지. 또 6개월에서 1년을 휴직하는데 매달 나오는 거라면 왜 그걸 매달 신청하게 만들어놨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휴직을 하면서 둘째 어린이집도 종일반이 아니라 맞춤반으로 바뀌면서 시간제한이 생겼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만 아이를 맡기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그보다 일찍 가거나 늦게 데려오면 추가로 #긴급보육서비스 를 사용해야 하는데 한 달에 15시간만 가능하다. 그래서 아침에는 첫째를 초등학교에 8시55분까지 데려다 주고 난 뒤 9시30분까지 주변을 떠돌면서 시간을 번다. 물론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하면 적절히 긴급보육을 사용한다. 오후에도 첫째 하교 시간과 잘 맞지 않으면 그보다 늦게 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비상시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늘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야 하고 부담이 된다.

 

그런데 주변을 산책하다가 첫째 친구 엄마를 만났다. 그 분도 첫째를 등교시킨 뒤 둘째를 데리고 주변을 배회하고 계셨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가 유치원에서 #방과후과정 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9시 반 전에는 등원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상황인지. 나라에서도 기관에서도 정말 열심히 애쓰고 계시지만 정작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누굴 탓해야 할지 모르는 구멍이 생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뭔지 모를 씁쓸한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내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다. 과연 둘을 데리고 제대로 음식이나 입에 넣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됐지만 다행히 #놀이방 이 있는 식당이었다. 아이들을 놀이방에 들여보내고 음식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한데 뭔가 좌불안석이다. 네 살배기 둘째가 혹시나 놀이방에서 심하게 놀다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여다봤다. 오락기에 빠진 첫째를 보고 있자니 가만히 방치하는 게 죄책감이 든다. 옆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혹시 이렇게 흉이나 보지 않는지 걱정된다. ‘저 봐, 아빠가 아이들을 보니까 저렇게 방치하는구만.’ 어쨌든 식사는 훌륭했고 아이들도 잘 먹어줬지만 아내가 퇴근해서 식당에 데리러 올 때까지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고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렀다.

 

식당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환영받을 때도 많지만 주변의 시선을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다. 괜히 아이들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밥알이라도 바닥에 흘리면 물티슈로 치우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이렇게 #눈칫밥 을 먹으며 아이들을 키워 왔을까. 한 번이라도 이렇게 식당에서 온전히 혼자 스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노 키즈 존’을 쉽게 써 붙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애 데리고 왜 나왔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마도 나 역시도 육아휴직을 해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없던 젊은 시절 내가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것처럼.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고, 또 해 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육아는 적어도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 ‘넌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를 걸’이라고 야유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 키우는 게 무슨 벼슬이나 특권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를 키우면서 집에 머물러 있는 일이 결코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거나 주류적인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부분에서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을, 육아휴직을 하면서 정말 몸으로 느낀다.

텃밭에 물 주는 아이들.

 

[출처]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일들 -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7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