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함께 ‘반반 육아’](5) 아동 스스로의 권리
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 아이들이 불평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을 잘 줘야지, 이렇게.”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어른 젓가락’을 쥐여주고 힘을 주는 연습을 열심히 하게 했다. 학교 급식을 먹을 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성인용 수저를 쓴다고 해서다. 아직 어른 젓가락을 쥐기에는 작은 첫째의 손을 만져보며 조금 안쓰러웠지만 ‘학교가 그렇다면 네가 적응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오문봉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됐다. 그는 초등학교 급식에서의 성인용 수저 제공에 문제가 있다며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아… 잘못된 건데 나는 아이 보고 적응하라 했구나.’ 씁쓸한 기분이 스쳤다.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를 쓴다
한 선생님의 문제제기를 듣고 나서야
아이에게 적응하라 했던 나를 돌아봤다
오 선생님은 지난해 5월 교무회의에서 아이들에게 아동용 수저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지급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자 고민 끝에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그가 진정을 넣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갖고 다녀라’부터 ‘수저가 무슨 인권이냐’까지.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어른 수저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그런 불평을 학교에 말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웠다. 선생님 말대로 아이들은 사안별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세상에 대한 상을 머릿속에 구성하고 있을 터이다.
인권위는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 제공 관련 의견표명’이라는 제목의 결정문을 내면서 “학교 급식에 관한 계획을 수립·시행할 때, 아동이 사용하기에 알맞은 수저 등의 제공을 포함하여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까. ‘노키즈 존’ 논란을 볼 때면 늘 갑갑했다. 아이들은 열 살 정도는 되어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는데 시끄럽고 부산스럽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일정 공간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도는 점점 좁아지고 차도는 넓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 도시에서 천지분간 못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식은땀이 난다. ‘학교 앞 시속 30㎞ 규정’이 있는데도 쌩쌩 지나가는 차를 보면 속수무책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른이 모는 차는 쌩쌩 달려도 되고 뛰는 아이들은 어떤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세상이라 말하면 비약일까.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잘못됐다고 말해야 할까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동이 스스로의 권리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선에 있는 걸까. 부모는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고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세상의 질서가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기는 정녕 어려운 걸까. 가끔 부모인 나도 아이들의 관점보다는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글을 썼을 때 남편이 말했다. “이제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말자.” 육아에 대한 글이지만 내 글의 주요 등장인물은 나와 남편, 아이들이다. 아이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쓰는 글이 아이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이후부터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않고 ‘첫째, 둘째’라고 쓴다. 아이들에 대한 내 관점을 글로 쓰는 것을 아이들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처음 ‘폭풍육아’를 쓸 때부터 아이들 사진은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이 돌아다니면 사진도 같이 돌아다닐 텐데 아이들의 얼굴은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삽화를 썼지만 언젠가부터 아이들 옆모습, 뒷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쓰고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허락받지는 않았다. 가끔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나온 것을 본 첫째는 자기 얼굴이 나왔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기분이 묘하다. ‘아직 뭘 몰라서 좋아하는 걸 수도 있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고 허락도 받지 않고 써서 미안해.’ 사실 이런 생각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첫째가 어릴 때는 SNS에 사진을 많이 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가 신기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아이를 자랑하고 싶었을 거다. ‘내 소유물도 아닌데.’ 아이가 커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부터 SNS에 사진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관점보다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이 글도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선거연령 만 18세로 하향, 청소년인권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들의 기사를 읽다가 “우리는 미래 세대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머리를 맞은 듯했다. 그들은 자신도 현재를 살고 있는 주체라고 말했다. 어릴 적 어른들은 늘 말했다. 어린이는 미래의 꿈나무라고. 아니다,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현재를 살고 있다. 오 선생님은 인터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계기로 어린이와 학생들을 차별하지 말고 배려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익숙한 생각과 행동이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겠다. 내가 권리의 주체라면 작고 힘없는 존재들도 권리의 주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자고.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무조건 뛴다. 걸어가야 할 순간에도 뛰고 뛰어야 할 순간에도 뛴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뛴다. 어른들은 뛰어야 할 때도 굳이 걷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을 순식간에 벗어나 아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마다 학교,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면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손길은 늘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왜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고 하는 것일까
아이들을 대하는 내 손길은 늘 무심코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그렇다. 밥상머리에 딱 앉아서 한 그릇 뚝딱 하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둘째는 숟가락을 들고 다니며 먹일 때가 많다. 먹이다 보면 입에 든 밥을 다 삼키지도, 심지어 씹지도 않은 녀석에게 다음 숟가락을 떠서 입에 갖다 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숟가락으로 뜨는 밥의 양도 점점 늘어난다. 그 위에 반찬도 2~3개씩 한꺼번에 올린다. 종종 채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밥과 반찬은 숟가락에서 낙하한다. 녀석이 도리질이라도 칠라치면 밥과 반찬은 폭발한 포탄처럼 흩어진다.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씻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물놀이에만 심취해 있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빨리 녀석들을 적당히 달래 씻겨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안 씻겠다는 녀석들의 손을 잡아 끌어서 양치질을 시키고 비누칠을 하고 머리를 감기는 내 손길은 점점 급해진다. 거친 손길 탓에 아이들의 몸에 손톱자국을 길게 남기기도 한다. ‘아파! 아파!’ 하고 난리를 친다. 발을 씻기려다 아이가 욕조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게 한 적도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다 씻기고 안아서 나오다 화장실 문짝이나 벽에 아이의 머리를 찧은 적도 여러 번이다. 칫솔질도 너무 세게 시켜 칫솔에 피가 묻어 나온 적도 있다.
나는 왜 아이들과 있으면 뭔가를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 하는 것일까. 나와 달리 아이들은 뭐든 긴 시간을 들여서 하고, 그걸 반복해서 또 하는 걸 좋아한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물론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는 것은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흔해빠진 일상이다. 반대로 모든 게 처음인 아이는 뭐든 한 번 더 해보고 싶어 한다.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니,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는 금세 후회를 한다.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조금만 시간을 들여 설득하면 가끔 아이들은 놀랄 정도로 잘 따라준다. 첫째가 네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장난감에 빠져 노는 녀석이 칫솔질을 하자니까 너무 싫어하기에 “그럼 그거 다 하고 나서 양치하는 거야” 하고 말해줬다. 그냥 지쳐서 거의 반은 포기한 채 한 말이었다. 근데 녀석이 5분쯤 지나니까 “인제 이거 다 했으니깐 치카치카 하자”면서 오는 게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꼭 안아주었다. 물론 칫솔질을 막상 시작하자 또 떼를 쓰고 인상을 쓰긴 했지만.
아이들이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 달리면 외려 덜 넘어졌다
아이들이 막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가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서 달리는 아이들은 뒤뚱뒤뚱하면서도 오히려 덜 넘어졌다. 목욕을 할 때도 처음에는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물기를 닦는 일까지 일체의 권한을 주지 않고 내가 다 알아서 했다. 언젠가 그냥 지쳐서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냈다. 수건을 맡기면서 알아서 닦으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잘 닦아서 놀랐다. 뭐든 그렇다. 양치질도, 일을 보고 뒤를 닦는 일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혼자서 잘해냈다. 문제는 내가 믿고 기다려주지 못한다는 거다. 늘 더 완벽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해내길 바란다. 혼자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수건을 들어 닦거나 칫솔을 뺏어 이를 문질러버린다.
첫째가 혼자 옷 입는 훈련을 할 때였다. 바지는 제법 혼자 입고 벗는데 윗옷은 잘 입고 벗지 못했다. 머리에 옷이 걸려 제대로 빼지 못하는 것이다. 한 번은 혼자 바지를 입느라 용을 쓰고 있고 있기에 윗옷을 입히겠다고 머리에 티셔츠를 넣으려고 하니 녀석이 막 짜증을 냈다. “이따가~ 이따가~ 바지 입고~” 아, 내가 또 마음이 급했구나.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좀 더 시간을 내 준다면 그 시간들이
아이 삶에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다
단순히 생활습관을 길러주는 데서만 벌어지는 문제일까. 요즘 덧셈, 뺄셈을 어려워하는 첫째와 문제를 풀고 앉아 있다 보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 “왜 그걸 몰라?” 하면서 윽박지르다가도 모르는 게 당연한데 싶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언젠가 녀석들이 더 커서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난 조바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똑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아이와 어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뭐든 차근차근 기다려준다면, 아이에게 좀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면, 그 짧은 시간들이 아이의 삶에는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