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으면 어른 된다’는 말이 싫었다. 인간의 성장이나 성숙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나는 많이 변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 자체가 달라진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는 보수일 수도, 어떤 각도에서는 진보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판단은 미루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를 낳은 후의 나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20대의 나는 자주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불안해했다. 아이를 낳은 30대의 나는 그런 20대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이가 내 불안을 줄여준 것인지, 엄마 노릇을 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불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를 낳고 훨씬 안정됐다.


 

육아로 성취의 삶 멀어질까 두렵던 나
그런데 성취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사회가 주입한 메시지, 틀렸음을 알았다

 

물론 육아는 힘들었다. 아이는 24시간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확보되지 않자 아이를 돌보기 위한 준비가 하나도 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나 외의 존재를 온전히 돌본 적이 없었구나. 이런 종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었구나.’ 몸이 ‘돌봄의 하루’에 적응하면서 ‘돌보는 존재’를 배워가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은 무엇인가. ‘아이를 낳게 되면 모든 것이 멈춰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었다. 육아휴직 전 나는 ‘아이를 기르는 동안 성취의 삶과는 멀어지겠지만’이라고 적었었다. 그런데 그 ‘성취’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나는 그동안 주입받아왔던 사회의 메시지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결혼한 지 7년,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를 써온 남편은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이다.

■ 누군가를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첫아이를 낳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벅찰 때였다. 어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지어 혼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아기를 보고 두려웠을 때.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맞은편에 십여명의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했다. ‘저 사람들도 내 아기처럼 아기였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우리 모두 언젠간 아이였고 누군가의 도움, 돌봄 없이는 클 수 없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나는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돌보러 얼른 가야 할 것 같아서.


 

언젠가 노인이 되어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시절이 올 것이다. 아주 조금 겸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라는 미숙한 존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로 올라가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성취의 메시지에 가슴 떨린 적이 많았다. 잘하고 싶었다. 일도, 일 밖의 것들도. 그것들이 나를 괴롭혀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 성취는 누구의 기준인가? 그 기준에 따르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성취가 될 수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높이 올라가려는 남성의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임신하고 배가 나오니 달릴 수 없었다. 아이를 안고서도 달릴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삶은 후퇴한 삶인가? 주로 여성들이 해온 출산, 양육의 가치를 폄하해온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회사에서부터 대중매체, 정치권까지 아이 기르는 삶을 폄하하는 말은 곳곳에 있었다. 기저귀도 한번 갈아보지 않은 자들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 엉덩이가 짓무르지 않게 노력하는 삶’을 깔아뭉갤 때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구나.’


 

아침에 아이들이 파고드는 행복한 시간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멈춰서며 배웠다
꼭 성취 위해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실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이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르게 살겠다고 아등바등한 결과는 나 또한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해왔다는 슬픈 깨달음이었다. 아이가 내게 알려줬다. ‘엄마, 나는 엄마가 필요해요.’ 아이의 눈빛이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나는 주춤했다. 멈춰서야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온해졌다. 달리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침에 일어난 작은 아이들이 내 품에 파고들 때다. 이 행복을 왜 나는 밀어내려고 했을까. 아이를 낳기 전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꼭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가 사뿐사뿐 걷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어릴수록 걸음에 몸무게를 싣는다. 20㎏이 넘는 첫째보다 13㎏에 불과한 둘째의 발소리가 훨씬 크다. 사뿐사뿐 걷는 것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런 작은 것들을 배워왔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배운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심어주려고 했던 모성은 여전히 내게 없지만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스스로 내 모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어쩌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이렇게 모성을 긍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를 낳은 이후의 내가 더 좋다. 내가 모성을 긍정하는 이유다.


 

■모두가 돌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내가 모성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남편 덕분이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써왔다. 돌볼 시간을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남편과 나도 많이 싸웠다.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전쟁이니까. “남편 좀 풀어주라”는 농담 앞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릴 때도 많지만, 또 어떤 날은 남편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잖아’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으면 힘이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남편과 논의한다. ‘여성의 전유물인 돌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하는 돌봄’으로 ‘서로돌봄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니까.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 된다는 것
벅차고 힘들지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돌봄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남편이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남편이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은 처음이다. 오랜 시간 아이 둘을 돌봐온 친정엄마의 무릎이 탈이 났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오전 11시40분에 하교한다. 선택지가 없고 너무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당장 경제적인 상황을 걱정해야 해 오래 육아휴직을 쓸 수는 없다. 길어도 6개월만 쓰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돌봄을 전담하는 존재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결이 남편에게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줄 것이다. 남편이 돌봄의 기쁨을 많이 누리길 바란다. 내가 육아휴직을 했을 때 그랬듯이.


 

그럼에도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여전히 벅찬 일일 것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자신의 지난해 일기를 보여줬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이준이는 어느새 제법 말을 한다. ‘아빠 미워!!’ 이준이는 얼마 전부터 단것을 못 먹게 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못 갖고 놀게 하거나 하면 이런 말을 한다. 어제는 친구가 갖고 온 장난감을 하염없이 갖고 놀기에 이제 자자 했더니 ‘시러. 여기 더 있스 거야’라고 한다. 어제 아침에는 녀석을 안고 교차로에 서 있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녀석과 손을 잡고 어린이집까지 걸었다. 이준이 녀석과 손잡고 걸으면 좋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녀석의 작은 손을 잡고 걷는 일 자체가 좋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한다. 한참을 손잡고 같이 걷던 녀석은 갑자기 ‘아나저요’라고 한다. 번쩍 들어 안아준 녀석이 내 품에 폭 안긴다. 폭 안긴 녀석을 안고 봄날 가로수의 연둣빛으로 가득한 교차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인생의 짧은 순간은 그렇게 간다. 그날따라 이준이는 어린이집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며 울었다. 울지 않아도 녀석이 빠빠이 하며 손 흔드는 모습만 봐도 늘 가슴이 아팠다. 녀석의 손은 늘 내 가슴을 휘저어 놓곤 했다. 아, 그냥 녀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 전체를 봐선 나은 일 아닌가. 두진이 때도 똑같이 들던 생각이다. 못난 아빠는 또 이렇게 글을 남긴다.”(2018년 5월11일)


 

남편의 일기를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이집에서 아이에게 손을 흔들 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남편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 전체를 봐서는 나은 일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 모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잠을 하도 안 자서 애먹였던 아기 두진이는 이제 엄마를 걱정해줄 줄 아는 어린이가 됐다. 어제 둘째의 장난으로 머리를 꽈당 박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있었다. 두진이가 내게 와서 “엄마 괜찮아?”라며 짧은 팔로 나를 안고 ‘호호’ 불기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질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들을 내게 돌려주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데 ‘내가 너를 돌보는 것인가, 네가 나를 돌보는 것인가’ 눈물이 나려 했다. 남편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보여준 육아일기
아이를 통해 배우고 위로받던 내 모습이
그의 일기 안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두진이가 오늘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힘이 센데 왜 힘들어해?’ 청소기를 돌리면서 꽤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보다. ‘그러게. 힘이 센데 왜 나는 힘들어하고 있을까.’ 몸이 너무 피곤하다. 오후 4~5시만 되면 뇌가 흐물흐물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애들을 볼 때도 별일 아닌데 소리를 빽 지르고는 금세 후회를 한다. 오늘도 잠자리에서 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해 두진아, 너한테 더 사랑을 줘야 하는데…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 녀석은 듣고도 암말도 않는다. 자면서 가끔 녀석의 손을 만지작거려본다.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부서질 것만 같았던 손은 제법 두툼해졌다. 최근에 장인어른이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 어디선가 그 말을 들었나보다. 몇 주 전인가, 책을 읽어주는데 갑자기 ‘아빠는 수순하지 마’ 이런다. 뭔 말인가 싶어서 몇 번 다시 물어보자 ‘눈 많이 써서 아프면 안돼’라고 말한다. 아빠는 수술하지 말라는 얘기였던 거다. 수술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마음이 뜨끈해졌다.”(2018년 4월23일)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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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es 2019.02.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너무 좋아요.. 출산 후 육아분담 계획 세우는 중인데 흘러흘러 이 곳을 발견했어요. 저도 워킹맘 이란 단어를 증오하는 사람이예요. (여자에게 가사육아노동과 근로노동을 떠넘기는 느낌이랄까?)
    기자님처럼 저도 아기라는 인생의 첫경험을 남편과 온전히 함께하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9.03.03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킹맘은 엄마들한테 모든 것을 전가하는 말이지요. ㅠㅠ 저도 웬만하면 워킹맘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육아분담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니... 파이팅입니다!! 많은 순간 지치고 멈춰서고 싶을 때가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아기를 보며 힘내시길요. 앞 문장을 쓰고 나니 많은 일들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 낳은 후의 제가 더 좋아요. 엄마든, 아빠든 아이 낳은 후의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댓글 감사합니다.

억울했던 마음을 기억한다.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내가 제일 싫어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나는 가끔 내 발끝을 보고 있었다. 화가 나서 오므려지는 발을 뚫어져라 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왜요?”라는 질문은 할 생각을 못했지만 항상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억울했던 작은 마음들.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 장녀. 형제는 내게 그 애뿐이었고 나는 그 애가 가끔 좋고 자주 미웠다. 잠든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을 정도로 예뻐했던 기억도 있지만 싸웠던 기억이 더 많다. 부모님 앞에 서면 늘 나보다 어리고 서툰 그애를 도와줘야했고, 도와주는 나는 칭찬받았지만 먼저 뭔가를 하려고 하는 나는 자주 제지받았다. “동생은 아직 잘 못하잖아. 누나가 도와줘야지.”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일곱 살이 된 첫째를 보면 어린 내가 떠오른다. 엄마가 된 나는 첫째에게 말한다. “동생은 아직 잘 못하니까 두진이가 도와줘야지.” 말을 하고선 마음이 안 좋아지면 따로 꼭 두진이를 불러서 말해준다. “동생이 참 귀찮지? 동생은 원래 그런 존재야. 귀찮은 존재. 엄마도 외삼촌이 얼마나 귀찮았다고. 그런데 동생은 엄마 아빠가 세상에 없을 때도 네 곁에 있어줄 사람이야.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두진이가 그 말을 다 알 순 없을 텐데도 가끔 그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 부모로 살면서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깨닫는다.


 

어린시절 들었던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첫째를 보면 당시 억울함이 떠오르지만
결국 해버린 말 “형이니까 도와줘야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눈사람을 만든 아들들.

■ 둘째를 질투하는 장녀 엄마

‘형아 따라쟁이’ 둘째를 보면 묘한 부러움이 차오른다. 이제 겨우 세 살인 둘째에게 일곱 살 형은 너무 재밌는 선생님이다. 형아가 블록으로 활주로를 만들고 ‘천천히’라고 써놓은 포스트잇을 세 장 붙인 뒤 활주로 끝에 ‘출발’이라고 적어놓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더니 둘째도 옆에서 활주로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설프게 블록을 이어 붙이더니 “엄마, 여기는 이준이 활주로야”라며 웃는 작은 얼굴. 그 모습에 기특했다가도 묘한 부러움이 솟았는데 순간 그 부러움의 정체를 깨닫고 쑥스러워서 혼자 막 웃었다. 세 살 둘째가 서른네 살 남동생처럼 느껴진 거였다. 나의 아기인 둘째를 남동생처럼 생각하고 질투하다니. 모방 대상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따라 할 형제가 있다는 것,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 자신의 선생님이 있다는 것, 엄마 아빠도 해주지 못하는 것을 형이 해준다는 것 말이다.


 

가끔 남편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거 봐, 둘째들은 정말 편하겠다. 저렇게 형아가 하는 것을 따라하기만 해도 되니.” 고등학교 가기 전에 나는 ‘야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그걸 알려줄 언니, 선배가 없었다. 동생은 내 존재 덕분에 편하게 안 사실을 나는 미리 알 방도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을 때 ‘언니나 오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실제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놀잇감을 다양하게 만들어 친구들을 이끄는 편이다. 뽁뽁이를 가지고 소근육 활동을 할 때 둘째가 먼저 친구들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볼까?”라며 머리에도 써보고 얼굴도 가려보고. 친구들이 이준이의 모습을 보고 따라 했다는 어린이집 일기장 기록에 나는 기특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다 형한테 배운 거지, 둘째니까 빠르지!”


 

기질적으로도 첫째와 둘째는 다르다. 첫째는 조심스럽고 주저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둘째는 겁이 없고 자유로운 성격으로 여유롭고 웃음이 많다. 모르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도 “저 세 살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먼저 말 거는 아이.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면서 “또 올게요~”라는 아이. 소아과에 가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나, 코 안 나와”라며 콧물 제거는 오늘 하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하는 아이. 이제 30개월이 된 둘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온다. 첫째는 부끄러워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잘 못했다. 억지로 인사를 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해서 그냥 넘긴 적도 많지만 속으로는 ‘왜 이런 것도 어색해하는 거야?’라며 답답해한 적도 많다.


 

첫째는 온전한 사랑 빼앗긴 것 같아서…
둘째는 사랑을 독차지한 적이 없어서…
엄마인 나는 두 아이 모두에 애잔함 느껴

 

아마 태어난 순서의 차이가 아니라 성격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겁이 많지만 한곳에 서서 오래 사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중력과 관찰력을 가진 첫째와 사교적인 성격의 둘째의 차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 둘이 어떻게 자랄지도 현재로선 전혀 알 수 없다.


 

■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을 때

형제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자라면 좋지만 문제는 항상 싸울 때 벌어진다.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겠다고 다툼을 벌일 때, 처음에는 중재를 시도한다. “두진아, 이준이가 가지고 놀던 거잖아. 이번엔 형아가 양보해.” 아니면 “이준아, 형아한테 나눠줘야지.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하면 어떡해.” 물론 아직 어리니까 중재가 먹히지 않는다. 그럼 결국 “둘 다 하지마.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장난감 가지고 놀 필요도 없어.” 둘 중 하나가 울어야 끝난다. 그때마다 이게 잘하는 훈육인지 헷갈리고 머리가 멍하다. 둘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못하고 있을 때 그제서야 내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이 둘을 낳고 알게 됐다. 첫째는 온전히 부모를 독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단독자처럼 사랑을 독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억이 너무 어릴 적이라 자기 자신에게는 남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장녀였던 나도 이렇게 온전하게 사랑받은 시절이 있었겠구나, 엄마 아빠에게 나뿐이던 시절이 있었겠구나’라는 사실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언제든 모방할 대상이 있어 살기 편한 것처럼 보이는 둘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자가 있어 혼자 사랑받는 시절을 가질 수 없다는 슬픈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가 된 나는 아이 둘을 보면 애잔하다. 첫째는 온전하던 사랑을 빼앗긴 것이 애잔하고, 둘째는 한 번도 혼자서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애잔하다.


 

둘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하면서 곤란할 때, 발끝을 노려보느라고 엄마 아빠 표정을 보지 못하던 어린 시절 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내 억울함에만 집중하느라 부모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제야 나를 기르던 부모님들의 곤란함을 이해하게 된다. ‘그때 꼭 동생 편을 들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님의 마음을 만난다.


 

아이들 중재해보니 부모님 마음 이해돼
“서로 더 사랑한다”는 형제의 애정 공세
삶의 고단함 버티게 하는 힘이자 행복

 

또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가끔은 그때의 나와 화해하기도 한다. 부모 마음을 몰라 오해했던 그때의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어질 때, 곤란했을 부모님의 어깨를 안아드리고 싶어질 때 양육의 균형추를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는다.


 

아이를 낳기 전엔 아이를 낳고 기르면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성숙한 인간이 되려고 생각했는지 싶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내 바닥을 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아이를 기르는 것만으로 좋은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아이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지 못한다고 느낄 때,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대해 너무 가벼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이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볼 때, 아이였던 나를 기르던 부모님의 마음을 돌아볼 때 제법 할 만한 일이었구나 생각해본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 사랑을 경쟁하는 형제

어젯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다 같이 누웠다. 둘째에게 흔한 레퍼토리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물었다. 둘째는 당연히 “엄마”라는 단답을 했다. 그래서 “그럼 아빠는?” 묻자 둘째는 형아한테 떠넘긴다. “아빠는 형아가 좋아해.” 아빠는 그렇게 떠넘겨도 되는 존재인가 보다. 조용하던 첫째가 “나도 엄마 좋아해~”라고 해서 둘째에게 “형아도 엄마 좋대”라고 하니 둘째가 하는 말. “아니야~ 엄마는 내가 좋아해~~”

집 안에서는 나도 ‘슈퍼스타’다. 퇴근만 하면 내게 안겨드는 아이들을 보고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다. “엄마가 아주 슈퍼스타여.” 형제를 키우는 또 다른 재미. 그들은 나에 대한 사랑을 경쟁한다. 작은 아이들이 나를 향한 사랑을 경쟁할 때 “제발 좀 엄마 혼자 있자”라면서도 입은 귀에 걸려 있는 게 아들 둘 엄마의 속마음이다. 아빠가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를 찾는 이 유전자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배안에서 열 달을 살았던 힘일까.

육아와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게 너무 벅찰 때 가만히 생각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퇴근한 나를 맞으러 아이들이 뛰어나올 때, 그리고 아이들을 재운 뒤 잠든 얼굴을 쓰다듬을 때. 다른 순간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구조에 분노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아이를 낳은 사실 자체를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상상한 적도 있다. 다시 태어나 선택할 수 있다면 난 엄마가 되길 선택할까. 답은 너무 빨리 나왔다. 다시 또 엄마가 될 것이다. 태어날 곳을 바꾸거나 직업을 바꾸고 싶긴 하지만.


 

아이들을 기르는 일은 여전히 고되지만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 아이들이 내게 주는 웃음, 아이들이 내게 전하는 사랑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회사와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와 아이 사이에서 양육의 균형추를 잡는 것은 너무 벅차지만 나는 내가 엄마인 것이 좋다. 그래서 좀 균형을 잘 잡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작은 다짐도 생겼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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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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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아침은 늘 전쟁터다. 아이들은 부모 출근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 유치원에 가느라 시간에 쫓긴다. 가끔 29개월 둘째 입장에서 어린이집에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좀 늦잠을 자도 되는데 엄마가 깨우고 아빠가 밥 안 먹는다고 성화다. 아직 좀 천천히 해도 되는데 엄마 아빠는 항상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린이집에 간다는 뜻이다. 가기 싫은데. 그래도 엄마가 출근하듯 나도 어린이집에 가야한다고 하니까 간다. 어린이집 가는 길에 길가에 떨어진 낙엽도 보고 자동차도 구경하고 싶지만 아빠는 그럴 시간 없다고 나를 안고 뛴다.’


 

어린이집·유치원 안 보낼 수 없던 나
대신 좋은 곳 찾으려 애쓰는 게 최선
한국 사회선 좋은 기관 찾는 것도 ‘복’

 

아이들은 원해서 어린이집, 유치원에 가는 것이 아니다. 29개월밖에 안된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좋은 어린이집, 유치원을 찾으려 애를 쓰는 게 최선이었다. 첫째는 15개월부터, 둘째는 10개월부터 기관에 맡겨 키워왔다. 오전 9시반부터 오후 3시반, 늦게는 5시까지 기관에서 아이를 돌봐줬기에 아직 일을 유지하고 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처음 맡기던 날에는 현관 문 밖을 나서 펑펑 울 정도로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관에 아이를 맡긴 지 만 5년6개월 지난 지금, 선생님들의 보육과 교육 덕분에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랐다고 생각할 만큼 여유로워졌다. 기관에 일찍 맡겨야 했던 환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많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기관을 찾은 것조차 ‘복’이라는 것을 안다.


 

■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이란

두 아이를 기르면서 많은 선생님들에게 양육에 관한 도움을 받았다. 집중력이 좋은 대신 행동 전환이 느린 첫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처음 알려준 사람은 어린이집 선생님이었고, 아이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워킹맘의 처지를 비관할 때 지나치게 낙담할 필요가 없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위로를 건넸던 사람은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둘째가 넘어져 다쳤을 때 나보다 더 슬프게 운 사람도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선생님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절감한다. 첫째를 아꼈던 한 선생님은 내가 모르던 아이의 장점을 찾아내 정말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두진이는 정말 아이들이 안 보는 것까지 보는 아이예요.” 경쾌한 목소리, 아이를 아끼는 눈빛에 정말 고마웠다.


 

국공립의 장점, 둘째 보내면서 실감
학부모 참여 운영위 통해 투명한 운영
사립은 운영위 없거나 자문 역할만

 

우리 아이들은 가정 어린이집, 병설 유치원, 국공립어린이집을 다녔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난 어린이집, 유치원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만 3~5세 공통 과정인 누리과정이라는 교육과정은 이미 통합돼 있는 상태여서 그럴 것이다. 오히려 내게 중요한 것은 공립이냐, 사립이냐였다. 실제 둘째를 올해부터 국공립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더 확신했다.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운영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운영위를 통해 예·결산 내역을 공유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린이집에서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송편 만들기 행사를 했다. 할머니를 초대할 생각을 하다니 조부모가 양육하는 집까지 배려하는구나. 할머니가 와서 송편까지 만든 것에 대해 아이가 매우 신나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어린이집에 고마웠다.


 

공립, 사립을 넘어 핵심은 선생님 처우와 교육환경이다. 고용이 안정돼 있는지 여부가 일선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여유를 만들 수 있는지를 가를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정말 체력적으로 고된데 그에 맞는 급여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근본적 해결책은 교사 1인당 아이 수를 줄이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좋은 환경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정부 당국자들은 진정 모르는 건가.


 

■ 민주적 통제가 답

지난해부터 유치원 운영위원이 됐다. 운영위는 예·결산 내역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아이들 교육재료비, 비품구입비, 인건비까지. 1원 단위까지 공개하기 때문에 샐 틈이 없다. 아이들이 먹는 급식은 특위를 구성해서 점검한다. 방학 때 방과후반 아이들에게 급식을 만들어줄 조리사 선생님을 채용하지 못한 유치원은 결국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급식특위 위원 엄마 2명은 3곳의 도시락 업체를 가서 직접 먹어보고 제일 좋은 곳으로 결정했다. 유치원 운영에 대해 궁금하면 학부모들이 운영위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유치원에 묻기도 한다. 유치원 운영위원회가 도입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운영위원으로 참여해보니 내실화하면 정말 좋은 기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공립유치원 얘기다. 국공립유치원에서 운영위는 심의 기능을 갖지만 사립유치원에서는 자문 기능뿐이다. 그나마 운영위를 구성하지 않은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이야기를 하면 아이를 사립유치원에 보내는 엄마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난 그냥 유치원 원장님이 하는 말만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어요.” 학부모들이 과한 요구를 하면 운영위원회에서 토론을 통해 조정하기도 한다. 한번은 아이들 사진을 자주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려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가 있었지만 다수의 운영위원들이 “선생님들은 이미 많은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과중한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며 “사진 찍을 시간에 더 좋은 교육을 고민하셨으면 좋겠다”고 결론을 냈다. 다수의 토론이 좋은 결론에 닿는 사례였다.


 

사립유치원 감사, 비리 유치원 명단 문제로 유·보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이들 문제도 다 사후 감사로 적발된 것이다. 정부의 사후 감사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부에서 민주적 통제를 하는 게 근본적 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운영위는 유명무실한 경우가 적지 않고 교사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원장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잘못 되면 다른 어린이집 취직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는 너무 당연하다. 원장 그룹은 민간어린이집연합회, 한국유치원총연합회 등 조직으로 단합되지만 교사들은 그럴 방법이 없다. 노조가 있지만 노조에 가입하기 쉽지 않다.


 

■ 어른들이 풀 문제를 회피하지 말자

2015년 누리과정 예산 갈등이 극심했을 때 나는 교육 담당 기자였다. 중앙정부는 시·도 교육청에 빚을 내서라도 누리과정 예산을 충당하라고 했고 교육청은 버티다 지방채를 발행하는 악순환이었다. 어린이집, 유치원에 지원금이 나온다 안 나온다 다들 혼란스러워하자 교육부는 어린이집 대표, 유치원 대표, 학부모 대표를 앉혀놓고 여러 차례 간담회를 열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나는 그런 간담회 현장을 취재하며 참담했다. 어느 자리에서도 진정 아이들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한가한 소리만 오가던 어느 간담회 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뒤에서 수첩에 말을 받아적고 있던 나는 소리치며 말하고 싶었다. “이런 식의 간담회는 하지 말라고요. 선생님들도 정부 지원금 말고는 관심이 없나요?”


 

그러다 사립유치원, 민간어린이집 감사 결과를 보도자료로 읽으면서 괴로웠다. “어떤 유치원은 가보니까 원장이 쇠고기를 일부만 떼서 유치원 냉장고에 넣고 다 자기 집으로 가져갔더라고요.” 이 탐욕스러운 어른들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있을까. 지난해 7월 육아휴직 중이던 나는 서울시교육청이 공립유치원을 늘려야 한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 논의하는 간담회에 간 적이 있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서울시교육청 간담회 장소를 점거(?)해버렸고 교육청 인사들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몇몇 원장선생님은 외쳤다. “휴원해요. 워킹맘들 볼모로 삼아야지.” 귀를 의심했다. 볼모? 교육자가 아니구나.


 

“휴원해요, 워킹맘 볼모로” 외친 원장들
정부 사후 감사만으론 문제 해결 안 돼
기관 내부의 ‘민주적 통제’가 근본 대책

 

‘비리 유치원 명단’이 주요 뉴스이던 몇 주간 기시감을 느꼈다. 사건이 벌어져서 시끄러워지면 급히 땜빵 대책을 만들고 다시 조용해지길 기다리는 그 악순환. 어린이집에서 학대가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어린이집에 폐쇄회로(CC)TV를 들였다. 학대를 예방하겠다며 사건이 벌어진 뒤 사후 대처밖에 할 수 없는 CCTV를 들여놓는 게 우리 사회 실력이다. 교육청, 교육부는 사립유치원, 민간 어린이집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지금까지 방치해왔던 것에 대해 깊이 고개 숙이고,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유치원이, 학교가 자기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 의해 교육이 이뤄져왔다. 아이를 때린 선생님, 아이를 버스에 두고 내린 선생님을 욕하기는 쉽다. 그 뒤의 구조를 드러내 고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땜질 대책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유아 교육, 보육에 공공성을 확보할 때다. 내년에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니까, 둘째도 곧 보육·유아교육 기관을 졸업할 테니 이 시기 동안 내 아이가 안전하기만을 바라면서 지내야 할까. 그러고 싶지 않다. 우리 어른들이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으면 아이들은 또 같은 구조에 놓일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 어른들의 실력이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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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집밥’이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재료를 사와서 만들면 되지만 내가 만들어도, 남편이 만들어도 ‘집밥’ 맛이 안 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엄마밥’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옆동에 사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세요? 집에 밥 있어요?”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신 지도 만 6년. 뻔뻔해진 것도 딱 6년만큼이다. 엄마는 집에 안 계시지만 집에 가 밥을 차려 먹어도 된다고 해서 남편과 나 둘이 가서 호박 된장찌개와 오징어볶음, 고춧잎나물을 와구와구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전기밥솥에 있던 밥과 냉동실에 얼린 밥을 우리 둘이서 다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결혼 후 집안일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반쪽 인간’이었구나
작은 일 하나까지 엄마가 해주셨구나

 

나는 결혼을 하면서 엄마, 아빠로부터 독립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안일도 별로 안 해봤고 엄마, 아빠 등에 얹혀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쪽 인간’이었다. 내가 반쪽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신혼집에서 나는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며 울었다. ‘엄마가 이런 작은 일까지 다 해줬구나.’ 수건 접기는 그나마 쉬운 쪽이었다. 신혼이어서 찌개도 해먹고 반찬도 해먹었지만 엄마가 해준 집밥 흉내를 내기는 어려웠다. 30년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흉내 내려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지만.


 

신혼 때는 밥을 해먹었지만, 아이를 낳고서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아이 돌보기에 24시간이 맞춰 돌아가던 돌 전, 아이 이유식은 열심히 만들어 먹였지만 내 밥은 대충 먹기 일쑤였다. 그나마 친정엄마가 가져다주시는 반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첫째를 낳고 복직한 나는 아이 반찬을 잘 못 만들어 쩔쩔맸고 둘째를 낳고 복직하면서 배달받는 반찬으로 바꿨다. 일하면서 두 아들을 기르는 우리집에서 아이들 반찬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찬 사먹기’도 금방 끝났다. 아이들이 ‘배달 반찬’을 잘 먹지 않았다. 결국 난 또 엄마에게 반찬을 얻어먹으며 기생 중이다. 여전히 내 임금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다.


 

■ 엄마의 노동, 엄마의 일생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손으로 아이를 기르면서 비로소 나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청소·빨래를 하고 반찬을 만들던 엄마의 하루를. 외환위기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돈도 벌었다. 다만 풀타임 임금노동자로 일한 적이 없을 뿐이다. 엄마는 늘 자신을 ‘솥뚜껑 운전수’라고 말한다. 가끔 엄마가 학원문학상을 받았던 여고생 때, 가계부 일기로 은행에서 상을 받았던 젊은 시절에 대해 묘사할 때 나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우리 엄마가 임금노동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한다. 나처럼 글을 쓰는 일을 했다면, 아마 나보다 잘하지 않았을까?


 

주부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것
여전히 아이들과 나를 돌보는 엄마
나의 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져

 

그 시절은 많이들 그랬다. 생계부양자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돌봤다. 엄마들은 늘 ‘백업’하는 존재였다. 그런 엄마들은 딸을 ‘커리어우먼’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마 자신처럼 ‘백업’하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다행일까. 자라면서 남자와 다르지 않다고 교육받으며 대학을 갔고 겨우 취업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뒤늦게 워킹맘이 되는 것은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면서 뼈빠지게 착취당하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지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는 것이 좋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한번은 지나가듯 말했다. “아빠는 그런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친정부모님에게는 용돈을 드리는 게 그렇더라고.” 자신이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는 뜻이다. 마음이 아팠다. 일평생 아이들을 기르고 가정을 돌본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엄마의 노동을 귀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돌아보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평생 그림자노동을 하며 자기 자신을 귀하게 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 임금노동만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자주 의심했다. 임금노동에 시간을 빼앗겨 막상 내 아이들에게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나의 삶이 과연 ‘진보’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수천번을 생각해봐도 나는 일도 하고 싶고 아이들도 잘 기르고 싶었다. 깨달았다. 이 사회가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문제지, 내가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엄마의 노동에 대해 말한다. “엄마의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엄마가 평생 나를 돌봐준 덕분에 내가 있고 이제는 내 아이들까지 엄마의 돌봄을 받고 있다”고. 또 “내 바이라인은 사실 임아영·두효순 기자라 써야 맞다”고.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일터에서 만든 임금노동의 성취는 온전히 내 것일 수가 없다고 말이다.


 

사적 공간의 일을 귀하게 생각않는 사회
종일 우선순위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하는
엄마의 반찬·집안일은 왜 성취가 아닌가

 

이제 결혼한 지 7년이 됐다. 지난 7년간 남편과 가사노동을 분배하면서 갈등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더 바쁠 때는 내가 남편을 ‘백업’하는 존재가 될까 겁을 먹고 더 악을 쓰고 집안일을 분배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우리 둘 다 ‘소진’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이제야 내가 결혼 전 집안일에 대해 ‘1’도 모르던 ‘반쪽 인간’에서 나아지는 것 같다. 꼭 임금노동을 하는 것만 성취인가? 엄마의 반찬, 엄마의 집안일 스킬은 왜 성취가 아닌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직접 해보고 알게 된 게 또 있다. 흔히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하루 종일 우선순위를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 말이다. 엄마가 음식 만드는 과정을 엿보면 굉장히 정교하다. 국을 끓이면서 샐러드 소스를 만들고 고기를 볶으면서 전을 부치는 과정을 동시에 해내는 일. 맛있게 상을 내려면 완성된 음식을 담는 순서도 중요하다. 엄마는 뭐 하나 대충하지 않는다. 차가운 반찬부터 접시에 담고 메인 반찬을 담은 뒤 밥과 국을 퍼서 먹는다. 그래야 음식이 덜 식기 때문이라는 것을 난 이제야 알게 됐다. 엄마밥을 먹은 지 이제 37년이나 됐는데.


 

주부의 삶은 하루 종일 표가 안 나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수행하는 삶이다. 일평생 그 일을 한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매기고 순서대로 수행하는 작업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아이들을 기르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됐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금노동을 동시에 하면 일의 총량이 늘어나는데 우선순위를 고려해 일의 순서를 배열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집에서는 빠른 일처리가 필요한 것은 내가 맡고 꾸준한 작업이 필요한 것은 남편이 맡는다. 성격이 급한 대신 손이 빠른 나와 성격이 느린 대신 꼼꼼한 남편의 성격대로 자연스럽게 배분됐다. 지난해까지 아이들 기관에 관한 행정 업무를 내가 처리하다가 올해부터는 둘 다 어린이집, 유치원 알리미를 받기 시작했다.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기관에 연락하는 일을 남편과 공유하니 빼먹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남편과 ‘함께’ 육아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의 숙련노동 기록 ‘장모님 레시피’

최근 통계청이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2014년 명목 국내총생산의 24.3%를 차지한다고 평가했다. 시간당 가사노동의 가치는 1만569원으로 3인 가족 기준으로는 연간 2132만원으로 계산됐다. 성별로 보면 1인당 기준 남자는 346만원, 여자는 1076만원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세 배 이상 높았는데 여자가 3배 더 가사노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여자가 가사노동을 3배 더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대가는 지급되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가사노동 평가액 비중이 1999년 20.1%에서 2014년 24.5%로 증가하고, 여자는 같은 기간 79.9%에서 75.5%로 줄었다. 집 안에서 남자들의 노동이 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려 한다. 속도는 너무 느리지만 여성들이 집 밖에 나와 임금노동을 하는 만큼 남성들이 집 안으로 들어와 가정 안의 노동을 분배해야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야 깨달은 엄마의 숙련 노동의 가치
그것이 궁금하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태어난 결과물 ‘장모님 레시피’

 

아이를 낳기 전 난 엄마표 반찬의 비법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야 엄마의 숙련노동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된 나는 ‘엄마의 레시피’가 궁금해졌다. 엄마의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누군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둘이서 엄마의 레시피를 기록하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유튜브 계정 이름은 ‘장모님 레시피’라고 붙였다. 동영상을 뒤져보니 지난해 12월에 미역국 레시피를 올린 게 마지막이다. 호박전과 굴전 요리 과정도 찍어놨는데 아직 올리지 못했다. 게으름을 만회하기 위해 올해 김장 때는 꼭 레시피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동영상을 만들면서 알게 됐다. 엄마는 미역국을 끓일 때 덩어리로 된 소고기를 산다. 보통 잘라진 소고기를 사서 참기름에 볶다가 미역도 볶은 뒤 물을 붓고 끓이지만 엄마는 국물 맛을 깊게 내기 위해 덩어리 고기를 산다고 했다. 푹 삶아서 고기 국물을 우려낸 다음 고기는 식혀서 일일이 찢어 넣는다. 처음부터 엄마가 이렇게 미역국을 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다 제일 맛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 테지. 오늘은 김장할 때 쓸 새우를 사러 강화도에 가셨다. 지난해에는 홍시를 넣었는데 올해는 어떤 실험을 하실지 궁금하다. 언젠가는 꼭 엄마의 레시피 북을 만들어드리고 싶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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