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복직했다,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됐다

임아영

9월 1일 일요일 밤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다음날은 월요일이기도 했지만 남편의 복직일, 첫째의 2학기 #개학일,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자기 직전까지 남편과 아이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첫째의 2학기 #방과후수업 시간, #돌봄교실 시간, #피아노학원 시간을 표로 정리했고 중간에 둘째 어린이집 하원 시간까지 정리했다. 할아버지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아이들의 활동과 휴식 시간도 고려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묘하게 불안했다.

월요일 오전 7시 남편은 아이들과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또 나는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준비물을 점검했다. 돌봄교실에 가져 갈 색연필과 사인펜은 사지 못해 내일 가져가기로 하고 둘째 #어린이집 이불까지 개켰다. 오전 8시20분이 되자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기 위해 집에 오셨다. 10분 후 다같이 집을 나왔다. 남편과 나는 회사로, 첫째와 둘째는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려다주러.

아이들과 빠빠이를 하며 헤어지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의 바지를 보고서다. 8월 30일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시면서 9월 2일부터 아이들의 등하교(원)를 책임지시기로 했다. 아버지는 첫날 검정색 긴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장은 아닌 것 같은데 정장 디자인으로 나온 등산 바지인가.’ 할아버지가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하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학교, 어린이집에 와서 손주들이 속상해하면 어쩌나’를 걱정하셨다. 여전히 엄마가 데리러오는 아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아빠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라는 게 걱정되셨을 터이다. 하얀색 티셔츠에 정갈한 검정색 바지를 갖춰(?) 입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 걱정 때문인가 싶었다.

첫째에게는 한 번 물어봤다. “2학기가 되면 아빠가 회사를 다시 가고 할아버지가 학교를 데려다주실 텐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싫을 것 같아?” 첫째는 “왜?”라고 오히려 물었다. “다들 엄마가 오는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속상할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에 첫째는 “괜찮은데?”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이에게 웃으며 협박(?)했다.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속상해하면 나쁜 거야.” 늘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엄마, 아빠가 할 일을 대신 해주시는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나 다름 없어.”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이가 ‘엄마의 부재’를 속상해할까봐 전전긍긍한다.

하필이라 말하면 안 되지만 하필... 남편 복직 다음날에는 둘째 #어린이집 #참관수업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둘다 참여하기 어려워서 할아버지가 나서시기로 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이집 알림장에 사진이 올라왔다.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웃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보니 뭉클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어색하실까봐 같이 나서신 듯했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얼마나 복 받은 상황이야.” 그래, 맞다. 복받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항상 나는 고맙지만도 않고 미안하지만도 않은, 고마움, 미안함, 죄책감, 사회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맞댄다. 퇴근하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고생하셨지. 안 오던 할아버지까지 오니 엄마, 아빠, 할머니에 할아버지까지 부르셔야 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참관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참여한 부모들을 부를 때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만 불러도 됐을텐데 ‘할아버지’까지 와서 한 사람 더 불러야 했다는 얘기였다.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의 절대적 도움으로 아이를 키우는 ‘복받은 우리 부부’는 다시 #맞벌이 부부로 돌아왔다. 남편은 복직해 정신이 없고 나도 남편이 복직하니 정신이 없다. 남편이야 6개월간 쉬던 회사를 나오니 정신이 없지만 나는 다니던 회사를 다니는데 너무 피곤해 밤마다 뻗었다. 양육 구조를 다시 맞벌이 부부 구조로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헷갈리실까봐 매일 아침 ‘오늘 동선’을 메시지로 전달하면서 깨달았다. ‘다시 외줄에 올라왔구나. 조금만 삐끗하면 떨어지는 외줄에.’ 아무리 친정부모님이 계셔도 남편이 아이들을 돌봤던 육아휴직 시절의 ‘안도’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육아는 우리 부부의 일이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이 아니니까. 묘하게 계속 울적했다. 둘째를 낳고 회사로 돌아온 후 나는 자주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우울감이 또 휘감을까 두려웠다.

내가 꿈꾸는 육아는 내가 출근하며 아이를 어린이집·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퇴근하며 아이를 데려와 저녁을 먹이는 풍경이다. 조부모가 ‘독박 육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조부모가 도와줄 수 없어서 역차별을 받는 가정이 없는 그런 풍경 말이다. 늘 마음 한켠엔 언젠가 어떤 고리 하나라도 문제가 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 생계부양자는 아빠고 돌봄을 담당하는 건 엄마니까. 우리 부부가 서로를 그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우리도 사회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남편과 함께 출근하는 길 짧았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을 오래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과 복직 전날 밤 첫째 방과후수업에 대해 논의할 때였다. 2학기부터 돌봄교실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 돌봄교실 시간과 방과후수업 시간이 겹쳐서 1학기에 하던 방과후수업 중 2개를 빼려고 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보드게임 수업은 두자. 쑥스러움 많은 아이가 친구들과 같이 보드게임 하면서 사회성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더라.” 남편은 1학기 방과후수업 참관을 도맡았다. ‘남편이 내가 보지 못했던 아이의 표정을 다 보고 있었구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이 오래 그리울 것 같다. 다행히 아빠가 회사에 다시 가고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 남편과 내가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육아를 할 순 없지만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어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시대에는 ‘외줄’을 떠올리지 않는 환경이 되길 바라면서.

 

할아버지가 첫째는 학교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황경상

 

“아빠 오늘부터 회사 가는 거야?”

“응~”

“아쉽다.”

거의 반년에 걸친 육아휴직을 끝내고 출근하는 첫날, 학교에 가려고 함께 현관을 나서던 첫째가 말했다.

“회사 가서 잘 하고 와~”

녀석, 훌쩍 컸구나. 괜히 미안했다. 이제부터 데려다줄 수 없다는 사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잘 보살펴 줄 테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이 나도 마음 속 한구석에서 솟구쳤다.

복직하기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 시간들을 나는 잘 보낸 것일까. 아이들에게 나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을까. 휴직을 하면서 결심했던 수많은 다짐들을 나는 잘 실천했나. 자신이 서질 않았다.

첫째와는 함께 만들기도 더 많이 하고 컴퓨터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둘째와는 밖에서 더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렇지만 늘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느라, 빨리 밥을 먹고 씻고 자야 한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목표했던 것에 반에 반도 채우지 못했다. 생활습관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서 납득시키기보다는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일이 더 많았다. 나 스스로도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에 조금 남는 시간에는 운동도 하고 책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애당초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렇게 시간이 남을 정도로 녹록지가 않았다.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복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 자리에서 첫째에게 아빠가 육아휴직하고 나서 뭐가 기억에 가장 남았느냐고 물어봤다. 어떤 대답을 할까. 막상 돌아온 대답은 싱거웠다. “양천탐험하고 떡볶이!”

‘양천탐험’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별 것 아니었다. 구청에서 주민들에게 건강을 위한 산책로를 만들었는데, 그걸 알려주기 위해 보도블록에 박아 놓은 표지판을 찾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첫째는 유난히도 그 표지판을 신기해했다. 새롭게 하나를 찾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다.

방학을 한 뒤에는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 하나를 듣고 하굣길에 나와 함께 그걸 찾으러 다녔다.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하나하나 더 찾을 때마다 첫째는 신나서 뛰어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 때로는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걸어야 했지만 첫째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녀석과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 먹었다. 밥 차려 먹기 귀찮아서 먹자고 한 것인데, 첫째는 그것도 몹시 좋아했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는 녀석이 ‘헥헥’하면서 물을 마셔가며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그런 별 거 아닌 일이 녀석에게는 너무나 기억에 남았나보다.

둘째 녀석은 여행 중 머물던 숙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고 나오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수건을 여기에 좀 걸어 놔라~” 아마도 손을 닦을 수건이 없었나보다. 잔망스런 말투에 아연실색했다가 한편으론 흐뭇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당연히 집안일은 아빠가 하는 것이고, 수건도 아빠가 걸어놔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나보다. 헛물켠 셈은 아닌 것이다.

첫째가 인형들 사이에 노트북(?)을 놓고 회사놀이를 하고 있다.

 

두 녀석은 숙소에서 ‘회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숙소 밖 마당에 앉아 있던 나에게는 ‘부장님’의 역할을 맡겼다. 첫째 녀석은 회사에 가는 아빠, 혹은 엄마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둘째 녀석은 집에 있는 아이 역할이다. 둘이서 현관문을 드나들며 열심히 논다. 첫째는 테이블에 장난감으로 노트북 컴퓨터도 만들어놓고 뭔가를 심각하게 두들긴다. “이거 어떻게 하는 놀이야?”라고 묻자 첫째가 답한다.

 “응, 내가 동생한테 회사에 가면서 자고 있으면 들어온다고 하고 회사에 갔다가 그 다음에 동생이 자고 있으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놀이야.”

살짝 말문이 막혔다. 우리 부부가 매일 같이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오늘은 늦게 오는 날이라 자고 있으면 들어올 거야” 하는 말을 녀석들은 잊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와의 시간을 그렇게나 갈구하는 녀석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우리 때는 그런 것을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며 부러워하는 선배들도 계신다. 여건이 안 되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행운이지만, 이대로 육아휴직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뭔가 찜찜하고 아쉽다.

복직 둘째 날, 회식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 녀석들을 보니 왠지 인상이 달라 보인다. 그새 부쩍 큰 느낌이다. 겨우 하루 안 봤는데. 괜히 녀석들의 머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었다.

 

아빠의 복직 직전 휴가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바다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이 끝났다 [부부 육아 일기] 1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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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하고 싶다

임아영

토요일 수영 강습에 가는 날이었다. 8세 첫째가 수영을 시작하고 두번째 강습을 가는 날. 원래도 겁이 많은 녀석이라 겨우겨우 설득을 해서 수업을 받기로 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갔던 남편이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데리고서였다. “왜 다시 왔어? 수영 안 갔어?”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영장 앞에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했다. 겁에 질린 아이를 우선 안고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 “괜찮아, 수영 오늘 안 가도 돼.” 그러나 속에서는 ‘왜 이렇게 작은 일에 겁을 내는 거야’ 답답했다. 표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이를 다독였다. 5분쯤 지났을까. 다시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친구가 와 있을테니 한번 다시 가보자. 친구 수영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수영장에 도착해 친구가 수영하는 모습을 봤지만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이가 물을 겁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로 ‘나쁜 생각’도 올라왔다. ‘친구는 가서 잘 하는데 너는 도대체 왜 못하는거야? 그래서 도대체 어떡하려고?’ 어릴 적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이 제일 싫었는데 말이다. 폭발한 건 수학을 가르치면서다. 집중 못하는 게 당연한 8세인데 내 기준은 한없이 높다. “왜 자꾸 딴 곳을 보는거야. 문제를 푸는데 집중하라고.” 내 말이 반복되자 아이는 풀이 죽는다. 풀이 죽은 눈을 보고 있으면 괴롭다. 그러나 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을 한다. 그러다 내 말에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제발 엄마 말에 대답을 똑바로 하라고!” 화를 내고 나면 자괴감이 피어오른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누웠다. “아까 엄마가 화냈을 때 무서웠어?” 아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팔에 기댄 아이의 고개가 움직이자 마음이 아프다.

‘이제 시작인가. 보육의 단계가 끝나고 이제 교육의 단계가 되어서 그런가.’ 사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어른’이 된 나는 아이에게 다칠 어려움을 ‘막고 싶은’ 존재가 됐다. 물론 부모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세상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지만. 어릴 때 엄마는 말했다. “네가 잘 된다면 엄마는 바랄 것이 없어.” 고3 때 독서실에서 밤늦게 오는 나를 보는 아빠는 늘 미안해했다. “힘들어서 어쩌나. 참으란 말 밖에 할 수 없구나.” 그 말들을 듣는 어렸던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자식을 키우며 어떤 불안과 어떤 괴로움을 맞닦뜨렸을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 힘만으로 키우지 못하는 구조에서 남편과 나는 #부모님의도움 을 받아 #양육 을 유지하고 있다. 첫째, 둘째를 #어린이집 에 등원시키고 또 하원시켜 우리 부부의 퇴근까지 아이들을 봐주신 건 ‘내 엄마’였다. 서른이 넘어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유지하기 어려운 생활. 나는 이 구조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부모님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상이 #조부모 도움 없으면 아이를 키우기 힘든데 ‘정말 복 받은 상황’이라 말하기에 그렇다고 체념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는, 여전히 아이와 다름 없이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불쾌하다.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양육을 부부의 힘만으로 할 수 없기에 수반되는 갈등들이 몰아치면 ‘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면 모든게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도 올라온다. 그럴 때 생각한다. ‘서른여덟인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부모님에게 독립하지 못했구나.’ 딸이 위험할까봐 독서실에 데리러오던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열아홉살이었지만 남편이 복직하면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나는 서른여덟이다. 서른여덟인 내가 부모님에게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지원을 받지 않고 버티면 결국 노동시장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은 나이기에 ‘부모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에 이른다.

한국은 ‘가족 자원’으로 버티는 구조다. #가족자원 이 있는 사람은 복받은 자고 가족 자원이 없는 사람은 차별적 상황에 몰린다. 청년이 취업이 어렵고 결혼도 혼자 힘으로 하기 힘든 구조에서 부모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부모는 도대체 아이를 몇 살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내 불안은 거기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면 독립할 수 있는 사회 구조라면 양육이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을텐데. 아이가 수영하는 게 무섭다고 겁을 내는 것이, 아이가 빼기를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이 아이가 혼자 서지 못할까봐 지레 겁 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믿어줘야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다시 사회를 들여다보면 또 두려워진다.

내 부모는 내게 헌신했고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다들 헌신하고 싶어서 헌신하는 것일까. 사회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가족 자원에 의지하는 풍경을 볼 때 두렵다. 그러나 가족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구조가 유지된다면 아마 나도 아이들에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가족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회를 믿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자식과 부모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당위의 문장들로 세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려 한다. ‘아이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안을 동력 삼아 아이에게 헌신하지 않도록 양육의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문장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게 두렵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말해본다.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

황경상

 

“우리를 키우기 싫어서 그런 거지?”

 원래는 요즘 들어 죽어라고 말 안 듣는 녀석들을 곯려주려고 했다. 아내가 진짜 엄마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현관문을 나서면서 “진짜 엄마는 곧 올 거야”라고 거짓 연기를 했다. 잠시 있다가 다시 집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은 안도 반, 야유 반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첫째 녀석이 뱉은 말이 그랬다. ‘요 녀석, 많이 컸네’ 싶다가 뭔가 마음이 찌릿하다.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냐? 키우기 싫어서 그랬다니.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른이 다 돼 가지고도 가끔 아이한테 이렇게 서운하다. “야, 우리가 정말 얼마나 힘들게 너희를 키우는지 아냐”라는 ‘치사빤스’ 같은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한 번은 또 이랬다. 책을 읽어달라고 해서 나름대로 등장인물 각각의 목소리를 살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아이가 그런다. “연기하지 말고 그냥 읽어~” 갑자기 마음이 팍 상했다. 완전히 삐쳐 버렸다. 책 읽는 것도 그만뒀다. “아빠가 나름대로 얼마나 정성들여 읽어주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아이한테 심통을 부렸다. 나는 왜 싸우려고 하는 걸까, 저 꼬맹이들이랑. 다 큰 어른이.

아이들에게 해 주는 것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나는 보상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너희들도 이렇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자꾸만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생각하려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란다. 희생이나 헌신에 보답을 바라는 모습에 더욱 입맛이 아리다. 내가 좋아서, 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아이들인데.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부모님에게 얼마나 서운한 말들을 많이 던졌을까. 고교시절 한 번은 내가 꼭 갖고 싶었던 것(아마 좀 더 나은 성능의 컴퓨터였던 것 같다)을 사 주시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같은 책을 사 모으며 부모님에 이렇게 말했다. “돈 한 번 원 없이 벌어봤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을까.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하루 종일 두 녀석과 함께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막 뽀얗게 씻긴 녀석들과 모기장을 친 침대 위에 누웠다. 마침 점점 저물어가는 여름의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온전히 나에게 기댄 작은 머리통 두 개와 들척지근한 옅은 땀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말 그대로 행복했다. 요 녀석들과 함께 보낸 이 시간이 언제고 그리울 것 같다. 이 달콤함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일을 그저 헌신이나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얻는 것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 이야기책을 읽어주면서 농담 삼아 말했다. “아빠는 벵에돔 좋아해, 커서 이거 사줘야 해~” 그러니까 아이가 말한다. “아빠, 아빠는 초코를 좋아하니까 초코 벵에돔 사줄게.” 웃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더 보탤 말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껴안고 한 번 입을 맞춰볼 뿐이다.

조해진의 소설 『단순한 진심』은 어릴 때 철길에서 기관사에게 발견된 뒤 그 집에서 1년 정도를 보내다가 프랑스로 입양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얼핏 보면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 타인일지라도 아주 잠깐이나마 곁을 내어줬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포옹은 누군가를 안으며 동시에 나를 안는 것”이라고 썼다.

물론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일과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일은 다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역시 아이라는 타인에게 곁을 내 주는 일이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오히려 자신의 울타리만 더 크고 공고하게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아이를 통해 난생처음 온전히 내 곁을 내 주는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이 세상으로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아이를 낳은 뒤 나와 전의 나를 비교하면, 더 젊었을 때의 나는 더 건조하게 세상을 바라봤고 나를 둘러싼 껍데기는 더 단단했다. 지금은 적어도 아이를 통해서 좀 더 생각한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줬던 사람들, 웃으며 자신의 넉넉한 곁을 내어줬던 사람들의 고마움을. 아이와 함께 살아갈 다른 아이들을, 그리고 나와 함께 늙어갈 그 부모들을.

아마도 부모님은 이미 아셨던 것 같다.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나아가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곁을 주고 보듬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라고.

 

[출처] 부모는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부부 육아 일기] 12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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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

임아영

아이들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 보고 있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사회가 여전히 여자인 나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건 10년 전 취업 때였다. 졸업반이던 시절 원서를 많이도 썼다. 50번까지 세고 더 세지 않았던 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들의 취업이 힘들다는데 민간 기업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서류 합격도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불합격 문자를, 불합격 메일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두려웠다.

 

밥 사주겠다는 동기를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앉아있었던 날이었다. 양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 동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가 명함을 주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울컥해서였다. 앞이 캄캄한 ‘두려움’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남자 동기들, 후배들의 ‘취직’이었다. 남자 동기, 후배들이 취직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민간 기업에서는 여자들을 원하지 않는구나. 뽑는다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양 자체가 적구나.’ 그러면서도 지금 어느 시대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자책했다.

 

 3년이 걸려 어렵게 취직했다. 회사에는 여자 선배보다 남자 선배가 항상 많았다. 딱히 #남녀차별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도, 사회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막은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여성들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서 깨달았다. 세상은 여자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한 뒤 일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이는 엄마가 봐야 잘 크지”라는 말을 다들 너무 당연하게 할 때 무력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키울 시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사회는 남편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이 둘을 낳으며 #육아휴직 을 2번 하면서 내가 시간을 쓰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성 외교부장관, #여성대통령 이 나온 사회에서 뭐가 불만이냐는 시각을 적지 않게 만난다. 아니다. ‘논쟁의 초점이 잘못돼서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곳들에 여성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됐지만 여전히 #절반 은 되지 못했으며 이 속도가 더딘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큼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이다. 여성들이 #임금노동#돌봄노동#이중 으로 떠안게 되면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남성들은 방관자가 된다.

 

회사 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 해야 하는 여성을 회사에서 덜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입사 12년차가 되니 이해가 된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다. 수익을 목표로 하는 회사에서 여성은 언젠가 회사 일을 딱 8시간만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니(8시간도 겨우 해낼 수 있는 인력이 되니) 8시간 이상 뽑아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갑지 않은 노동력이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남성은 #생계부양자 역할이, 여성은 #돌봄노동자 의 역할이 강화되며 불평등은 심화된다. 여성들이 20대 후반에는 고용률 83%대까지 오르다가 30대 후반에는 57%까지 떨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20대에도 30대, 50대 초반까지 남성의 고용률은 90%대로 비슷하게 유지되지만 여성들은 직장에서 살아남는 자와 살아남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사회는 이 여성들을 이렇게 분리한다. ‘워킹맘’과 ‘전업맘’이라면서.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보고 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앞서 말한 ‘억울함’들이 조금은 해소됐다. 남편이 여성들의 영역에 들어와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내가 임금노동을 하는 구조가 되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됐다. 입사 동기인 우리는 남성의 육아휴직도 수용하는 좋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안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커녕 여성의 육아휴직도 꺼린다. 그런 사업장에서 여성을 채용하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하다. 야근이든 주말 근무든 해낼 수 있는 노동력을 원해서 아닌가? 도대체 지금은 몇 년인지, 2019년 아니었던가.

 

우리 부부는 동기이기 때문에 월급이 거의 같다. 군대를 다녀온 호봉 차가 있지만 크지 않다. 누가 육아휴직을 해도 사실상 한쪽의 월급에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보통 아내의 임금이 적다. 급여가 적은 쪽이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가정 경제로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다보니 쳇바퀴 돌듯 여성들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진다. ‘#성별임금격차 ’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OECD가 발표한 성별 남녀 임금 격차를 보면 한국이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컸다. OECD 평균이 13.8%였지만 한국은 36.7%나 됐다. 평균보다도 2배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는 거다. 성별 임금 격차가 30%를 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여성의 월평균 임금은 244만9000원으로 남성 평균 임금은 356만2000원의 68% 수준으로 고용률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시간제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주로 여성이 일하면서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도 OECD 국가 가운데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여성 시간제 근로자는 197만1000명으로 전체 비정규직 근로자의 53.6%를 차지했다.

 

 #경력단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출산과 양육으로 회사를 그만뒀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재취업을 하는데 대부분 이전 직장보다 임금이 낮아지거나 비정규직이 된다. 2018년 기준 여성노동자 중 50.7%가 비정규직인 반면, 남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33.2%다. 아이 낳은 친구들은 가끔 자조한다. “왜 이렇게 버텨야 하나 싶지만 지금 그만두면 이만한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임신, 출산 등으로 일자리를 놓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답은 ‘성평등한 노동 시장’이다. 남성도 집 안으로 들어와 돌봄을 담당하고 사업장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시장이다. 임금 격차로 벌어지는 비자발적 퇴사들, 결국 여성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지게 되는 악순환을 바꾸지 못한다면 취업 시장에서부터 여성이 더 불리한 상황을 바꿔낼 수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대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원치 않게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여성만 괴로운 게 아니다. 그 괴로움은 남성에게도 전이된다. 가부장의 짐을 짊어지고 팍팍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아들들은 팍팍한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아이들을 돌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기쁨을 일부가 독점하지 않는 사회, 엄마 아빠 모두가 시민-노동자-부모-개인의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그런 사회 말이다.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

황경상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언젠가 문득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런 거 없어.”

 “그래도 아버지가 했던 뭐 기억나는 말 같은 건 있을 거 아녜요.”

  “촌 사람들이 뭘, 임시 풀칠하기 바쁜데, 누가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살아라 그런 말을 해.”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한 분만은 아니셨다. 늘 시골집에 가면 “우리 깅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동네 슈퍼에 가서 빠다코코낫 과자와 콜라를 사 주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더 젊은 시절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일하러 나간다, 일어나라’ 그러셨지.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어. 똥장군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서 밭에 뿌려놓고 학교에 갔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집안 농사일과 군대 36개월, 그리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구하기 위한 분투였던 것 같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직업 구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아버지 시대라고 일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기사를 해 보겠다고 대형 면허를 따기도 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달랐을까.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할아버지가 일하는 논이 전부 우리 것인 줄 아셨다고 했다. 실제로는 다 남의 논을 부치는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오직 일밖에 모르셔야 했을 것이다. 장인어른도 비슷하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장인어른이 한창 일했던 1980년대, 1990년대는 #주5일 근무 시대도 아니었다. 주6일, 때로는 일요일까지 일하셨던 장인어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으면 ‘아버지들의 삶이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 장인어른도 IMF의 화살을 비껴가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회사에 인생을 바쳤지만 그 회사는 노후도 보장하지 못했고 안전한 삶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장인어른은 끊임없이 일하셨다.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던 40대부터 6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말이다. 그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랫동안 한국의 남자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오랫동안 생계부양자로서 주어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를 쓰셨다. 1981년생 나라고 그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신혼 초, 갑자기 집주인이 전세 대신 월세를 달라고 했을 때 대신 전세금을 더 올려주겠다며 한참을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탓만도 아닌데 그때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걸 느꼈다. 내가 좀 더 수입이 많았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그러나 그건 괜한 혼자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한 섀도복싱이었다. 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 탓이 아니야, 함께 해결하자”고 했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혹시 남편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 년 동안 내가 대신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테니 한 번 해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편도 그렇게 해 줘야 해.” 물론 능력도 취향도 없는 내가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공상과학소설에 가깝지만, 그 마음만큼은 너무나 고마워서 마음속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부양자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나눠지겠다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상황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친구들 중에는 #맞벌이 도 있지만 온전히 생계를 남자인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도 있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야, 그런 게 되냐?”라며 신기해하면서 부러워한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킬 때면 요즈음엔 자주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는 아빠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데리러 오는 사람 중에 남자는 거의 없다. 모든 남성들이 육아를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남성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여전히 남성의 육아휴직이 희귀한 문화에서 ‘아빠 육아휴직’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 생각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회사를 안 가게 되니 “회사 나오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는 “아직은 괜찮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회사 일보다 덜 힘들어서는 아니다. 두 가지 일은 너무 다른 종류의 일이라 비교하기 힘들다. 다만 만 10년이 넘게 회사를 다니며 이렇게 회사와 거리를 두게 된 지금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은 매우 소중하고 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며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지만 또 한편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늘 유쾌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시대, ‘이 일을 조금씩 모두가 나눠서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아내와 내가, 아이가 있는 다른 동료와 내가 일을 나눠서 한다면 우리는 훨씬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돌보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시간 말이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회사에 알렸을 때 한 여자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맙다”고 했다. 쑥스럽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말했다. “자신이 돌봄노동자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여자 후배에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맙겠어. 나에게 그런 남자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정말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을 거야.” 기껏 6개월 육아휴직으로 그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면구스러웠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여성들이 얼마나 일터에서 고민이 많을지 이해가 됐다.

 

 아버지의 시대는 남성이 생계부양을 하는 #가부장적모델 의 사회였다. “아버지도 고생만 많이 하다가 갔지.” 아버지는 대화 끝에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말씀 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아마도 자전거를 타고 쓰러지지 않도록 무작정 페달을 계속 굴려야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많이 부빌 수 있는,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꿔본다. 우리 아들들의 시대에는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이 더 조화롭게 균형을 잡기를

 

[출처] 왜 남성에게 생계부양,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강요할까요? [부부 육아 일기] 11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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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보며 웃고 울었던 시간과 바꾸고 싶지 않다

임아영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디나 그렇듯 가끔은 굉장히 지치고 고단하다. 날씨마저 푹푹 쪄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순간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아이들이 나를 맞았다. 그리고 첫째가 내게 묻는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좀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 기분 안 좋은 거 어떻게 알았어?” 어려운 질문인지 대답은 안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아들이라니, 그저 감동할 뿐이다.

끝이 아니다. 씻고나서 소파에 기대서 좀 쉬고 있는데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린다. “뭐해?”라고 물으니 “편지 써”라는 답이 돌아왔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엄마한테 편지 쓴거야?” 아이를 끌어안았다. 기특한 아이야, 기특한 우리 아이야.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엄마 회사는 어때? 회사는 잘 하고 있어?” 아이의 성격대로 공들여 쓴 흔적을 엿보면서 농담으로 답했다. “엄마, 회사에서 별로 잘 못하고 있어.” 어쩌면 솔직한 대답이었다. 오늘의 회사는 내게 힘든 곳이었으니까. 아이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엄마.” 오늘은 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갑자기 명치 끝이 싸해졌다.

첫째 아이가 써준 편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첫째가 좀 늦게 퇴근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고생했어.” 고생했다니. 이제 남편과 나도 서로 쑥스러워서 하지 않는 말을 아이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고마워 고마워 아이야. 이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구나.

 

#육아에 관한 글을 쓰면 가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힘들고 괴롭기만 육아, 왜 하느냐, 절대 안 하겠다”고. 남녀가 불균등하게 #돌봄노동을 하게 되는 구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장시간 노동 문제와 엄마에게 양육 부담을 더 지우는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인데 육아란 곧 괴로움이라 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듯이 육아도 마찬가지다. 괴로움과 환희가 뒤섞여 있다.

 

우리 부부는 첫째를 좀 어렵게 키웠다.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돌 전 첫째는 잠을 한 시간 이상 혼자 자지 못하는 예민한 아기였다. 둘째를 낳고 세상 모든 아기가 첫째처럼 잠을 못 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지 않고) 앉아 있던 둘째가 우리 부부에겐 너무 신기한 존재였다. 첫째가 8세가 된 지금에서야 겁이 많은 아이라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첫째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둘째를 낳았다.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첫째가 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첫째가 어린이가 되어가는 속도를 내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둘째를 낳으면 다시 아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30대 후반이 되면서 가끔은 ‘내 30대는 육아를 하느라 지나간 것 아닌가’라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그럼 아이들이 없던 시절이 그립느냐고 하면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서른에 결혼해 서른하나에 첫째를 낳았는데 돌아보면 아이들을 낳고 난 뒤의 나는 훨씬 편안해졌다. 엄마가 된 이후의 내가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보다 좋다. 물론 육아의 구조에 분노할 때는 많았지만. 그것은 구조에 대한 분노지 아이들에 대한,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이제 첫째가 8세, 둘째가 4세. 아이들을 몸으로 부대껴 키워야 하는 시기가 열 살까지라 본다면 내게 이제 6년이 남은 셈이다. 육아가 끝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그 이후에는 다른 고민들이 커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이렇게 힘든데도 아이들을 낳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가끔 후배들이 #육아에 대해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연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교류”라고. 20대의 연애와도 서른이 되어서 한 결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설명하자는 게 아니다. 다르다는 것. 연애가 달콤쌉싸름한 것이라면 육아는 그보다 훨씬 깊다고 느낀다. 깊게 아름다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고 무얼까.’ 아이들을 길렀던 30대는 내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될 것이다.

 

유전자의 신비일지도 모른다. 내 배에서 나온 나를 닮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란. 어떤 면에선 맹목적이라 헌신적일 수 있고 또 맹목적이라 무모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어떤 존재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했나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존재가 온전하길 기도하게 되는 경험.’ 내게 육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아서 묘하게 서운하지만 그게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지. 자기 위해서 불을 끄고 다같이 누우면 내 오른쪽에 누워 있는 둘째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엄마 어디에 뽀뽀할까? 입술에 해야겠다.” 그리고나서는 입술에 뽀뽀했다가 또 볼에 뽀뽀하고 또 이마에.

 

이렇게 작은 존재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면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뭉클하다. ‘고마워, 두진아 이준아. 언젠가 엄마는 너희들이 엄마에게 사랑을 퍼부어줬던 지금의 기억을 돌려보며 괴로운 한 순간을 나고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엄마에게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줘서. 또 고마워. 많이 웃게 해줘서. 그저 고마워.’ 그러니까 육아가 괴로울 것이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괴로운 것은 사회 구조고 돌봄노동은 고되지만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웃고 울었던 시간과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이 같은 양말을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해

황경상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2049년. 내 나이가 칠십에 가까워진다. 우연히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의 통로를 알게 됐다면 무얼 하고 싶을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사건이 내 삶 속에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 의지대로 바꿀 수도 없고 나처럼 무지한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볼 수 있는 순간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을 것 같다.

하교를 하면서 가방을 들어줬더니 ‘아빠 힘들지 않아?’ 라고 물으며 다시 자기가 들겠다고 나서는 첫째 녀석의 살짝 찌푸린 툼벙한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림책을 읽어주면 책 속의 강아지가 귀엽다며 책에다 얼굴을 비비대는 둘째 녀석의 애교를 보고 싶을 것 같다. 단 10초만의 시간이라도 좋다. 금방 다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요 놈들!’ 하고 볼 한 번 꼬집어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 만약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추억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대답하기 어려웠을 거다.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은 정말 짧다. 담으려고 하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진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나 학교 다닐 때 뭐 기억나시는 것 없어요?” 물으니 이렇게 말하신다. “니 어렸을 적 대구 달성공원에 갔던 거는 기억나는데… 내가 일만 했지, 뭐 했나?”

 

늘 “니가 알아서 다 했지 뭐”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중학교 때는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매일 아침 나를 학교 앞까지 태워 주시고 출근을 하셨다. 추운 겨울, 차에서 나오는 따스한 히터 바람을 쐬며 달콤한 쪽잠을 잤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워낙에 표현이 서툴기도 하시지만, 그때 만약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고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분명 더 풍성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힘은 든다. 아이들은 수시로 변한다. 식탁에 겨우 앉혀서 밥을 먹이려는데 갑자기 ‘똥꼬’가 아프다고 약을 발라달라고 한다. 아침에 웬일로 멀쩡히 혼자서 준비를 잘 하더니, 학교가려고 막 나서는데 갑자기 숙제를 안 했다며 꺼내들어 화를 돋우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제 집 앞 놀이터에서 봤던 지렁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든다. #배변훈련을 하는 둘째는 씻으러 들어갔다가 대변을 다섯 번이나 바닥에 봤다. 닦고 또 닦느라 지치게 만들고 놓고도 낄낄 대며 웃는다.

 

이 변화무쌍한 아이들 앞에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러다가도 “아빠 사랑해~ 아빠 더위?”하면서 잘 맞지도 않는 선풍기 리모컨을 들고 와서 에어컨에다 대고 막 눌러대는 아이를 보면서 뭉클해진다.

 

아이들이 판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빠 판다가 형제 판다를 돌보고 있다.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안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갑작스레 불러오는 한 줄기 바람에, 어쩌다 귀에 들어온 익숙한 멜로디에, 오랜만에 맡은 익숙한 향내에 과거로 순간 이동한다. 나도 가끔 라면을 끓일 때 희게 부풀어 오른 면을 보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괴식’ 말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라면을 면만 따로 끓인 다음에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스프를 뿌려서 주셨다. 의외로 꽤 맛있었다. 지금 다시 해 볼 자신은 없지만. 아버지는 군대에서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세대니, 그런 ‘괴식’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도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준다. 스마트폰에 음식 조리법을 틀어놓고 들여다보면서 주방을 동분서주해 보지만 사실 내가 봐도 맛은 없다. 궁중떡볶이를 했는데 떡이 다 뭉그러져서 첫째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둘째는 기껏 만들어놓은 카레가 맵다며 먹지 않는다. 대충 있는 걸로 먹일까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었더니……. 몹시 속상하다. 그러다 녀석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 너희들도 뭉개진 떡국 떡을 보면서, 카레의 알싸한 후추 맛을 새삼 느끼면서 아빠가 해 준 ‘괴식’을 생각하겠지. 아니, 내가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인지,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시간여행은 보통 시간을 마음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의 시간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내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어쩌면 ‘시간여행’이다.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여행 속에서 아이들의 뺨을 부비며 “뭐 먹고 싶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을 수 있는 이 시간으로 언제 건 다시 돌아오고 싶을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서 종종대고 돌아다니는 녀석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에 담는 것뿐이다. 돌아오지 못할 걸 알기에, 언젠가는 이 모습이 그리워 찾아 헤맬 걸 알기에.

 

[출처] 육아가 괴롭고 힘들기만 한 건 아녜요. [부부 육아일기 10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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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중할 것은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임아영

“그래도 해야지. 안 할거야?”

저녁마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첫째 수학 문제집 때문이다. 8세 첫째는 몸을 베베 꼰다. 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다. 수업 시간에 다하지 못한 숙제를 들고오는데다 담임선생님이 집에서 문제를 매일 풀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기싸움이 시작된다. “할 거야, 안 할 거야?”라는 딱딱한 말에 “할 거야”라는 하기 싫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힘겹게 2~3쪽을 푸는 동안 수 번을 한숨을 참고 나면 아이가 다 푼다. ‘아이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구나.’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풀었다니 정말 잘했다! 우리 아들 최고!” 칭찬을 퍼부어주고 끝난다.

학교를 보내기 직전 나는 아이가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셀 수 있는 것도 기특했는데 막상 초등 1학년이 되니 아이 반에 빼기를 못하는 아이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걱정이 돼서 주변 엄마한테 물었더니 “선행을 하나도 안 해서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초등학생 입학 전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고요?” 거창한 #선행학습이 아니다. 숫자를 세게 하고 한 자리수 덧셈, 뺄셈을 무난하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놓는다는 뜻이다. ‘엄마표 수학’이다. “벌써 보수를 아는 아이들도 있어요.” 담임선생님은 선행을 하는 아이가 많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셨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아이가 처음 #수학익힘책을 숙제로 들고 왔을 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횟수가 늘자 예민해졌다. “왜 수업 시간에 다 못하는 거야?” 아이를 다그치게 됐다. 엄마의 무서운 표정에 아이는 더 긴장했다. 결국 아이는 평소보다 더 답을 찾기 힘들어했다. 대충 풀고 함께 누워서 아이를 재우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다 배우고 와서 쉽게 하는 일을 너는 하나도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구나. 엄마가 무심하게 학교를 보내서 미안하다.’

#유아사교육 시장은 계속 확장 중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동네를 걸으면 판촉 전단지 수 장을 받았다. 뇌를 발달시키는 수학, 골라 읽게 해주는 독서교육, 무슨무슨 한자, 중국어 등등. 무슨 자신감인지, 아이에게 수학, 영어 관련 지식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초등학교 시기로 진입하면 뛰기 싫어도 숨이 가쁘게 뛰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인데 엄마가 너를 ‘학생’이 되기 전부터 괴롭히고 싶지 않다. 놀아라, 맘껏 놀아라. 7세가 마지노선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엄마표 수학을 할 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연습하고 온 것을 우리 아이는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 부부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은데 세상이 미취학 아동에게 ‘놀이’를 권하지 않고 ‘학습’을 권하는 게 싫다고 해서 학습을 피하면 결국 힘든 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들 아닐까.

좋은 영어 학원 #레벨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영어과외를 하는 건 꽤 지난 문화(?)라 했다.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만드는 한 어린이집 선생님은 말했다. 오래 사교육에 노출된 6세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겨 왔는데 계속 자유롭게 놀게 해주자 물었단다. “선생님, 공부 언제 해요?” 그 아이는 친구와 장난하다 갈등(?)이 생기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했다. “너 수학 지옥에 빠지고 싶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과연 어떤 어른들인가. 다들 유아 사교육을 하니 어린이집, 유치원도 자유롭기 힘들다 한다. 아무리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짜려고 해도 부모들이 ‘학습’을 시켜달라고 해서다. 첫째는 #병설유치원을 다녔는데 병설유치원은 #공립유치원이기 때문에 #누리과정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런 교육과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방과후수업을 듣는 아이들 중 영어학원에 가기 위해 2~3시에 학원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취재를 하다 만난 어린이집 원장님, 유치원 원장님들은 ‘도대체 엄마들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시장의 문제일까. 사교육 업체들은 부모들의 불안을 집요하게도 부추긴다. 청년 취업률이 사상 최저인 세상에서,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부모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임금 격차가 큰 사회에서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보통 사람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힘든 구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내 아이만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밀어붙이는 것을 어디까지 나무랄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20년 뒤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부모들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눈 오는 날 자식이 가는 길은 싹싹 쓸어놔야 안심이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모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교육 업체들을 규제(?)하면 좀 나아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첫째가 5세가 됐을 때 둘째를 낳았다. 조리원 친구에게서 ‘#가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가 다양한 도형을 가지고 놀면서 수 감각을 갖추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6세 아들에게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수업을 해주고 간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내가 묘하게 창피했고 창의력, 수리력 등등 좋은 말로 무장되어 있는 교구 광고를 보면서 너무 사고 싶어졌다. 첫째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며 너무 아이에 대해 무심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죄책감도 올라왔다. 광고에 취하고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자 교구를 구매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몇 달간 선생님이 아이를 가르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어느 날 이 수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5세 아이한테 ‘이등변삼각형’을 가르쳐서였다. 지나가듯 말하는 용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나 어릴 땐 초등학교 때는 선행학습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쯤 이미 중학교 과정을 마친다 한다. 물론 일부 이야기일 테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겁에 질린다.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로 선행을 해야 아이가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우선 이번 여름방학 때는 빼기 연습을 매일매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교육 기관을 다니는 동안 모든 아이들이 선행을 해서 우리 아이가 뒤처지면 어떻게 해야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날 수업을 미리 예습하고 가게 하면 될까. 그정도는 #선행이 아니고 ‘예습’이니 좋은 교육 방법이니까.

이렇게 답이 없는 불안이 올라올 때면 중요한 질문을 떠올린다.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그런 적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나갈 수 있는 아이, 괴롭고 힘든 날이 있어도 따뜻하고 좋은 날의 기억으로 견뎌낼 수 있는 아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에 투항하지 않고 스스로 사고해 세상이 나아지는 방향을 고민하는 아이.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늘어놓고 나면 ‘모두들 #선행학습하는 사회’에 대한 부모로서의 불안은 좀 가라앉는다. 선행을 한다고 저 거창한 단어들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남는 답은 다시 ‘나’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엄마는 둘째를 업고 대관령 목장길을 걷고 있다.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줄 수 있어"

황경상

창문 밖에는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렌지 빛 뿌연 불빛이 듬성듬성 내비치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첫째 아이와 나란히 앉았다. 왠지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앞에는 녀석이 학교에서 가져온 ‘빼기’ 숙제가 있었다. 시계바늘은 벌써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녀석이 안쓰러워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이 있어.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아빠도 어른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늘 공부하는 거 봤지? 공부가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어. 잘 할 수 있지?”

고개는 끄덕였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면서 졸려하는 모양새다. 밤 11시에 우리는 왜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나. 자려고 막 침대에 누웠더니 첫째 아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맞다. 빼기 숙제 있는데…”

그때부터 전쟁이었다. 하기는 싫은데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녀석은 어째야 좋을지 몰라 몸을 비비 꼬았다. 책상에 앉혀서 몇 문제를 풀었는데 계속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짓을 했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마, 아빠는 숙제 안 해 가도 상관없어.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아빠는 도와주는 거고.” 다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더니 녀석은 눈물을 흘리는지 코를 계속 훌쩍인다. 다시 녀석의 손을 잡고 스탠드 불빛을 켜 주고 앉혔다. “동생 재우고 갈 테니까 하고 있어.”

둘째를 재우고 가보니 의외로 문제를 다 풀어 놓았다. ‘역시, 안 해서 그렇지. 할 수 있어.’ 아뿔싸, 답을 확인해 보니 다 틀렸다. 녀석은 어쨌건 빨리 답을 채우기 위해서 위에 1을 쓰면 밑에 2를 쓰고 하는 식으로 칸을 채워놓은 것이다. 다시 지우고 하나하나 문제를 풀게 했다. 녀석은 졸음이 쏟아지는지 하품을 했다. 윽박질렀다가 달랬다가를 반복했다. 녀석은 겨우 바둑돌을 이용해 이리저리 세어 보더니 칸을 채웠다. “고생했어, 아들~ 얼른 들어가 자!”

처음부터 이렇게 공부하라고 다그쳤던 건 아니다. 이제껏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고 뭐라 한 적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언젠가 첫째는 #한글 쓰기책에다 ‘바 버 보 부 브 비’를 열심히 따라 쓰고 난 뒤 페이지 위에다 ‘80점’이라고 적었다. 왜 80점이라고 적었느냐고 물으니 잘못 쓴 글자들을 가리켰다. 그때 둘째가 바닥에 대소변을 흘려서 정신없었던 나는 “왜 80점이야? 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100점이야”라고 무심결에 말해 주었다. 전쟁 끝에 애들을 재우고 책상 위에 앉아 무심히 첫째가 남긴 책을 보니 ‘80점’에 줄이 쓱쓱 그어져 있고 그 옆에 ‘100점’이라고 다시 쓰여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아이들이란 이렇게 작은 말에도 힘을 얻는구나. 결과보다는 언제나 과정을 칭찬해주자고 결심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저렇게 수학을 어려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자꾸만 소리가 커지고 아이를 다그치게 된다. 육아휴직을 한 목적 중에는 첫째의 1학년 적응을 잘 돌봐주기 위한 것도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교육청에서 1학년 부모 준비를 위한 간담회 행사를 열어서 가 본 적이 있다. 실제 교육현장에 계시는 1학년 선생님과 부모 몇 명이 원탁에 앉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글은 어느 정도 써야 하나, 숫자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나 걱정이 돼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자는 읽을 수 있을 정도면 되고, 숫자는 10까지 셀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하셨다. 가끔 덧셈, 뺄셈을 어려워해서 1학기가 지나도록 못 따라가는 아이가 있기도 하는데 방학 때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글자도 제법 읽고 숫자도 100까지는 셀 줄 아는 첫째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덧셈, 뺄셈을 어려워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또 그렇게 잘 할 줄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며 학교 운동장에 서 있으면 꼭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이런저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고, 어떤 수업을 듣게 하고 이런 말들이다. 이런 걸 안 시키면 안 되는 걸까, 너무 손 놓고 있는 건 아닌가. 공부 뿐만 아니라 음악은, 미술은, 수영은… 또 어떻게 시켜야 하나. 잠시 아이를 떠올리며 불안해진다. 그 모든 걸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다들 하는데 우리 아이만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 나중에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돼서다.

그러다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너무 못 믿는 게 아닐까. 너무 조바심을 내느라 아이의 잠재력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건 아닐까. 아이의 자신감을 걱정하기에 앞서 나부터 자신감이 없어진 건 아닌지. 곧 방학에 들어가는 아이와 함께 하루 계획을 세웠다. 방학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아빠와 함께 있어야 한다. 수학 연습을 하고 책을 읽고, #그림일기를 쓰고 컴퓨터도 배워 보기로 했다. “아빠는 너를 끌고 밀어줄 수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 줄 수 있어.” 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아이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둘쨰가 집에서 형이 만든 종이접기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출처]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부부 육아일기 9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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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많은 시간 함께 한 둘째아이의 성장은 '할마할빠' 육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던 육아 시스템은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잠시 정상궤도를 찾았으나 오는 9월 남편이 복직하면 '할아버지 육아'로 이어질 예정이다.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라고?
아이들과 함께한 1년은 소중하다

 

첫아이를 낳고 복직한 2014년부터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다. 딸과 사위가 회사에 가면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 3~4시쯤 데려와 저녁밥을 먹이고 딸과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것은 친정엄마였다. 만 6년 반 아이를 기르는 동안 사회는 나를 ‘주양육자’라 불렀지만 아이의 ‘진짜 양육자’는 외할머니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양육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그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부랴부랴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지만 훌륭한 아빠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였다. 아이들을 낳고 1년씩 육아휴직할 수 있는 고마운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정작 내가 키운 기간은 겨우 2년4개월뿐이었다. 첫째가 14개월 때부터 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옆에 있었던 것은 나도, 남편도 아닌 ‘외할머니’였다.

 

저녁 약속을 안 잡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다
그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 였다

 

지난해 12월 그런 엄마가 병원을 세 곳씩 다니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무릎이, 이가, 어깨가 탈이 났다고 했다. 원래도 무릎이 약한 편이었는데 내 아들들을 돌보다 무릎이 더 나빠져 ‘어느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으냐’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엄마는 “원래 무릎이 안 좋았다. 네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늙으면 원래 무릎이 나빠진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돌보다 나빠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딱히 뭘 잘못한 것은 없지만 이 구조에서 비켜나 있는 그가 미웠다.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그러다 내가 많이 아팠다. 근무 중 열이 나기 시작했고 몸이 노곤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데 계속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겨우 마감하고 보고한 뒤 집에 가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폐렴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 하나만 회사를 그만두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많은 여성들이 결국 가는 길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내 손으로 돌보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만두지 마라, 아영아. 네가 열심히 해온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기의 순간에도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돌봄 노동으로 엄마의 몸 곳곳이 상하자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남편이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남편의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는 구조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서 점심만 먹고 하교할 것이었고 내 퇴근까지 7시간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마운 회사는 다시 남편의 6개월 육아휴직을 결정했고 남편이 휴직하자 집안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야 남편은 양육자의 위치에 겨우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도 지속 가능하진 않다. 9월에 남편이 복직하면 친정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고마운 일이다. 또다시 나는 친정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것은 ‘행운’이다.

 

가끔 주변에서 “친정부모님께 감사해야겠다”는 말을 듣는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선의다. 그러나 듣는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고맙지 않다. ‘고맙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서다. 내 미안함, 내 죄책감을 ‘고맙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 일이지 내 부모님 일이 아니다. 나는 딸이 일을 유지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역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살기 힘든 서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의 호의를 역이용하는 것뿐이다. ‘미안하면 용돈을 많이 드리라’는 말도 유쾌하지 않다. 에너지를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젊은 우리가 할 일이다. 퇴근 후 지쳐 있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 ‘용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육아휴직한 후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생 나와 동생을 돌보고 손주들까지 돌본 엄마에게 찾아온 자유. 목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엄마 너무 즐거운 거 아녜요?”라고 놀리면 엄마는 대답한다. “얼마나 좋은지 아니.”

 

그러나 별수 없다. 이렇게 잘난 척 말해도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다. 주변에서는 그럼에도 그게 얼마나 행운이냐고 다들 거든다. 안다. 양가가 다 지방이어서 아이를 물리적으로 돌봐줄 수 없는 집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그러나 잊지 말자.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양육의 의무가 없다. 양육의 의무는 나와 남편에게 있다. 온 동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돌보느라 허리를 펼 수 없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할아버지·할머니 육아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결국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지만…
이런 ‘행운’에 기대서야 돌아가는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그런 가정에 대해서도 다들 손쉽게 말한다. “사람을 쓰라”고. 그러나 돌봄을 자기 일로 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 대학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를 돌봐주시던 장모님이 수술해야 하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다 썼고 육아휴직 기회가 남은 건 자신뿐인데 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어차피 1년 쉬어도 해결 안되니까 이모님을 고용해야지.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야.”

 

그 회사 상사에게 묻고 싶다. 그건 아이를 돌봐본 적 없는 당신의 답 아니냐고. 아이의 1년, 아빠의 1년은 길다. 1년이라도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아빠의 양육 기회를 당신은 빼앗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정녕 당신이 좋은 상사이자 선배라면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아빠들도 자기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그렇게 변하는 속도가 더뎌서 미안하다”고.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육아휴직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슈퍼맨’이 돼볼 수 없었을 것

 

요즘 둘째는 배변훈련 중이다. 기저귀를 차고 있으면 편한 마음에 계속 대소변을 거기다 볼까봐 아예 아랫도리를 벗겨놓거나 배변팬티를 입혀놓았다. 몇 번은 ‘쉬 마려워요’ ‘똥 마려워요’ 하면서 변기를 찾는 듯해 금방 하겠다 싶었다. 착각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발목과 손에 변을 묻힌 상태로 돌아다니는데 정작 ‘큰 덩어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잠시 동안 세 장의 배변팬티를 적셨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좀 되는가 싶다가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리셋이다.

 

생각해보면 첫째의 배변훈련은 장모님이 시작하셨다. 배변훈련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둘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첫째는 12월생이라 배변훈련이 더 어려웠다. 한두 달 뒤면 유치원에 가는지라 더 초조했다. 유치원에 가면 대소변을 가려야 한다는데…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장모님은 첫째를 어르고 달래셨다. 그때는 이 훈련이 이렇게 힘든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막상 육아휴직을 하고 내가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기저귀를 더 채워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처음 태어난 첫째를 받아 안았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뭔가 잘못 만져서 아픈 건 아닌지. 얼른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아이를 안겨드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게 된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때 갓 태어난 첫째를 안고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물론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더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갓 태어난 첫째를 안는 순간 겁이 나서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안겨드렸다
장차 육아를 맡기게 될 것이란 상징처럼

 

아이를 키우는 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물심양면으로 무한대의 도움을 주셨다. 공치사 한 번 하신 적이 없지만 늘 송구스러웠다.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을 보내지 못할 때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실 장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지저분한 집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갔는데 온통 어질러진 좁은 집에서 피란민처럼 앉아 계시는 모습을 봤을 때도 송구했다. 우리 부부가 둘 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재우고 계실 때도 있었다. 쉬시는 것도 아니고 안 쉬시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계시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실 때 몹시 죄송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이 예전에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침도 잘 안 먹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시간 맞춰 데려가는 것은 젊은 나도 지치는 일이다. 데려다줬다 데려오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만보가 넘어가는 걸 보면서 왜 장모님이 짧은 거리임에도 차로 아이들을 등원시키셨는지 알게 됐다. 더구나 무릎까지 안 좋으신데.

 

육아휴직을 하고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의 노고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할머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잘 돌봐주셨는지 생각한다. 심지어 가끔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야단쳤다 싶을 때는 내가 돌보는 게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잘못하는 일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순간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기꺼이 맡아주신다고, 편하다고,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

 

일하는 시간과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삶을 지탱하는 축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다. 첫째가 네 살 때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우는 녀석을 두고 애써 뒤돌아서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시큰한 콧잔등을 만지며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지구를 구하러 간다고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할 만큼 내 일이 급하고 중요한 일인가. 아이가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만화 <미생>에는 ‘워킹맘’ 선 차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두고 정신없이 통화하며 출근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아이가 엄마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선 차장은 다시 뒤돌아와서 아이를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생활 때문에… 널 미루지 않을게!’ 이 부분은 왜 몇 번이나 봐도 가슴이 찌릿한지. 많은 부모들도 그랬을 터다.

 

품 속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랐다
부모의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게 지원하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다. 첫째는 어느덧 양치질을, 세수를 혼자 하더니 이제는 샤워도 조금씩 혼자 하고 몸을 닦고 나오는 일도 스스로하기 시작했다. 머리감기도 조금만 연습하면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작은 아기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욕조에서 씻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에게 온몸을 맡기고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보며 무한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아마도 아주아주 잠시 동안 아이는 내 품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부모와 보낼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부쩍 더워진 날씨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둘째에게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쳐주었더니 말한다. “아빠 손에서는 바람이 나와?” 둘째에게 아빠는 손에서 장풍이 쉭쉭 나오는 슈퍼맨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슈퍼맨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나는 행운아지만, 많은 아빠들도 이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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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육아휴직한 뒤 진짜 동지가 됐다

임아영

아이를 낳고서는 주말에도 쉴 수 없다. 늘상 수면 부족이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게는 아이를 돌보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지친 표정으로 “쉬고 싶다”고 외친다. 물론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엄마, 여기는 도깨비 집이야.” 그림책을 본 뒤 둘째가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형상(?)을 그려놓고 말했다. “엄마는 무서워”라며 과장되게 말하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엄마,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아이를 낳고 느꼈던 평온함과 환희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물론 아무리 예뻐도 나도 사람이니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예쁘지만, 기쁘지만 엄마도 쉬고 싶어.’ 어떤 무한루프 같은 것일까. #양육의 환희와 양육의 고통은 이어져 있다.

증조할아버지댁에 갔다가 거위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주말 두 아이는 공원에서 킥보드를 탔다. 그냥 유유히 앉아서 킥보드를 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작 36개월인 둘째는 헬맷을 씌우고 무릎, 팔꿈치에 보호대를 해줘도 불안하다. ‘아, 킥보드를 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이가 너무 타고 싶어했다. 킥보드를 타는 둘째를 남편이 따라다녔다. 3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힘들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다. 남편이 힘들어 보이면 양가적 감정이 든다. ‘어쩌나’ 하는 애잔한 감정도 들지만 ‘너도 더 힘들어봐라’라는 못된 생각도 올라온다. 남편의 잘못은 아니다. 세상이 내게 양육의 의무를 더 지라고 말할 때 나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그 화살은 종종 남편에게 간다. ‘남편, 미안해. 그런데 구조에 화를 낼 순 없잖아.’

남편이 둘째를 돌보는 동안 나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첫째를 돌봤다. #초등 1학년인 첫째는 혼자서도 킥보드를 잘 탄다. 문제는 킥보드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 첫째가 공원에서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도 아니고 두발 자전거! 아이는 삼촌이 선물로 사준 자전거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가 타니 관심이 생겼다.

‘아이의 첫 자전거’는 드라마 속 묘사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어른 남자가 8세 아이 자전거 높이에 맞춰 허리를 구부려 계속 잡아줘야 하는 일.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부모의 체력을 고려해주지 않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보채기 시작했다. 첫째는 집에 있는 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며 씻었으면 좋겠건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접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돌아왔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나도 힘들어.”

남편이 휴직하고 곧잘 하는 말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지러져 있는 거실을 훑어보고 “좀 치우지” 말하게 될 때, 첫째의 #주간학습계획표에 뭔가 빼먹은 게 있을 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 때 남편은 말한다. “나도 힘들어.” 8세, 4세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먹을 것을 흩뿌리며(?) 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 어린이집 준비물을 빼먹고 회사에서 후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왜 남편에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까.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이미 소진된 표정이다. “어때? 회사 일이 나아, 육아가 나아?” “회사 일이 낫지”라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 남편과 역할을 바꿔서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남편이 짠해질 때 이상하게도 ‘동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얼마 전 첫째 숙제에 대해 남편과 논의하다가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남편이 다른 것 다 해놔야지. 첫째 초등학교 적응 때문에 육아휴직한 이유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 남편에게 사과해! 애들 때문에 정신 없는 것 알면서.” 그 친구는 전업주부였다. 돌봄을 전담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도 역할을 바꾸고 보니 남편의 상황보다는 나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아, 이런 건 내가 오기 전에 다 해놓지.’ 얼마나 싫어하던 말이던가.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 다들 말한다. “경상씨가 참 대단해요.” 그럼 나도 모르게 욱한다. “저는 #육아휴직 두 번이나 했고요. #신생아를 키웠어요.” 그 뒤에는 ‘다 큰 애들 보는 게 뭐가 힘들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나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신생아든, 미운 네 살이든, 초등학교에 간 아동이든 육아는 고된 일이다. 남편이 육아휴직 하기 전까지 항상 조정하는 것은 나였다. “남편 내가 힘들어, 일을 더 나눠서 해줘.” 울며 사정한 날들도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돌봄노동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안사람’을 위해 회사에서 뛰어와야 한다. 처음에는 ‘그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어?’라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들었지만 퇴근 후 지친 남편의 표정을 보면 ‘서로의 상황을 비교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울던 첫째. 첫째가 덜 울었다면 육아는 덜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서야 남편이 진짜 내 편 같다. 몸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이제 정말 함께 하며 서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햇볕이 뜨거운 날 남편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오래 서 있으면 힘들텐데.’ 둘째는 이제 장난감을 찾을 때도 아빠를 부른다. “엄마가 찾아줄게”라고 하면 “엄마 말고 아빠”라고 말한다. 아빠와의 시간이 쌓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라며 아이들이 매달릴 때 후련하다가도 남편이 짠해진다.

가끔 궁금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함께 회사를 다니고 함께 돌봄노동을 나누게 되면 나는 이전보다 덜 화가 나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내가 힘든 것은 ‘구조’니까. 그러나 남편이 육아휴직하기 이전의 남편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시간이 매우 귀하다고 느낀다.

 

 

매일의 지난함을 함께 통과하는 '동지'

황경상

첫째가 태어나고 한 달 즈음 되었을 때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아내는 아침에 출근한 나에게 방긋방긋 웃는 첫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혼자 갓난쟁이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 좀 나아지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또 왔다. 정말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울기도 했다. 아침에 방긋댄 건 잠깐이고 그 이후로는 내내 칭얼거렸던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가 보니 아내의 안경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행여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홀로 집에 남아있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립감이었을 터다. 육아휴직 시절 아내는 퇴근하는 나를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오는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터다.

처음 첫째를 낳고 나서 아내는 젖 먹이는 것조차 힘들어 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간호사에게 하소연을 하자 간호사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는 원래 그래야 해요.”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는데, 어쨌든 엄마는 그 모든 걸 버텨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어머니에게 나를 처음 낳았을 때도 그렇게 힘드셨냐고 물었다.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애는 하루 종일 울어대는데 젖은 잘 안 나오고 해서 몹시 힘들었고, 울기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산후조리를 돕던 할머니가 산후에 울면 눈이 나빠진다고 해서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지금은 아이들도 많이 컸다. 둘이 놀면 그냥 놔두고 다른 일을 해도 될 정도다. ‘그래, 예전 이 녀석들 어렸을 때보다 지금은 많이 편하지.’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간에 가다가 쉴 수는 없다는 것, 귀찮거나 힘들다고 열 번 중 한 번쯤은 놓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열 번 잘 해도 한 번 못하면 못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언젠가 들었던 잠수함사령부의 모토는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라고 한다. 잠수함은 바다 속에서 아무리 작전을 잘 수행하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바다 위로 나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육아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친다. 매일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인정을 못 받는다. 늘 전쟁하듯이 최선을 다하지만 한 번 삐끗하면 개념 없고 무관심한 부모가 되기 십상이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 등원을 시키면서 감기약을 유치원가방에 넣어두고 깜박 잊은 채 투약지시서를 쓰지 못했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왜 약만 넣어뒀냐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단다. 나는 졸지에 투약지시서도 쓸 줄 모르고 약만 넣어둔 개념 없는 아빠가 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런데 지시서를 안 썼는데 약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첫째가 다른 친구가 약 먹는 걸 보더니 자기도 달라고 했단다. 눈치 없는 녀석.

얼마 전 새벽녘에 빗소리에 깼다가 다시 겨우 잠을 청했는데 아이가 일어난다. ‘아빠 나가자, 나가 놀자’ 아휴, 정말. 죽겠다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아내가 데리고 나간다. 30분인가 눈을 더 붙였을까. 어렴풋하게 아이들과 엄마의 재잘거리는 희미한 소리에 선잠을 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에 몸을 묻고 안락하게 누워있으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잠이 덜 깬 채로 내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대는데 부엌에서는 엄마가 뭔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희미하게 음식 냄새도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면 괜히 안심이 됐다.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그 투닥거리는 소리는 바로 매일 다가오는 일상에 맞서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하는’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소리였다는 것을. 귀찮다고, 힘들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내는 소리였다는 것을. 매일 아침 엄마도 얼마나 일어나느라 힘들었을까. 엄마도 이불에 몸을 더 파묻고 누워있고 싶었을 텐데. 엄마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아내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신 장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육아가 온전히 내 영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한 번 그 지난함을 생각하게 된다. 잘 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오직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그 일.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불가피하게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아내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풀 죽은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 정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데... 놀려고 일부러 늦게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 역시 서운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일 때문에 늦어’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머릿속으로는 다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야속하다. 일을 마친 아내는 집에 와도 파김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어떤 때는 그게 더 낫다는 걸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알게 됐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곁에만 있어도 동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 맥주 한잔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으로 우리는 드디어 동지가 됐다 [부부 육아일기 8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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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으로 가족 나들이 떠난 날. 아이들이 업어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스카프를 잡고 따라오라고 이끈다. 두 아들이 다루는 노하우가 느는 만큼, 육아의 불안감도 커진다.

 

▲덧셈 뺄셈 늦는다고…다그친 엄마, 아이가 어려움 겪을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는 얼마 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덟 살이 되고 학교 가면서 힘든 일이 많아졌어.” 아이가 가끔 이렇게 툭 말을 던지면 마음이 싸해진다. “왜? 뭐가 힘들어?” “글씨 쓰는 것도 힘들고 교과서 하는 것도 힘들어.” 수업시간이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직 10분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가 40분 동안 앉아 있으려면 힘들겠지. 뭐 하나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빠를 닮아 글씨도 꾹꾹 눌러쓰는 첫째를 보면서 이렇게 공들여 하면 힘들 텐데 속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던 터라 더 마음이 싸해졌다.

 

아이가 며칠 동안 수학익힘책을 나머지 공부로 들고 왔다. 유치원을 다니며 ‘엄마표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낸 우리 부부의 방침(?)이 무리였던 걸까. 영어도 8세에 노출을 시작한 결정이 잘못된 걸까. 의외로 영어는 흥미로워하며 할머니가 주민센터 수업에서 배워와 알려준 영어 뜻을 내게 묻기도 했다. “엄마, you have a good memory가 무슨 뜻인 줄 알아?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야.”

 

의외의 복병은 ‘빼기’였다. 덧셈·뺄셈은커녕 숫자 공부를 거의 해본 적 없어서인지 힘들어한다. 어린이날 서점에 데려가 아이가 좋아하는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을 선물로 사주면서 수학 문제집을 두 권 샀다. 퇴근을 하고서는 옆에 앉아 같이 수학 문제집을 푼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얼른 집에 가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다.

 

선행학습 없이 학교 보낸 게 무리였을까
숫자 공부 해본 적 없는 아이가 힘들단다
학교에선 놀이·점심시간만 좋다는데…

 

모든 아이가 빛난다. 우리 아이도 빛나는 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풍기 하나를 봐도 어디로 전기가 들어와 날개가 돌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아이다. 12월생이라 조금 늦고 뭐든 꼼꼼하게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수학의 원리야 익히면 금세일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그럼 학교 다니면서 즐거울 때는 언제야?” “놀이시간이랑 점심시간.” 1학년은 2교시가 끝나고 30분간 놀이시간이 있다. “엄마도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점심 먹으러 다녔던 것 같아.” 아이를 다독이고 싶었다.

 

공부하며 집중 않는 아이에 화 내고…
다음날 만난 담임 선생님의 차분한 말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연습하면 돼요”

 

물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생각을 하자 화가 났다. “집중 안 할 거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학도 국어도 안 해도 돼. 공부 안 해도 돼.” 단호한 말투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눈이 똥그래졌던 첫째는 엄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했다. 차분한 말이 돌아왔다. “어머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이가 이해력이 떨어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연습만 하면 돼요. 수학은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는 그대로다.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다. 덧셈·뺄셈을 못할 리가 없는데 다른 아이보다 늦다고 불안해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라니. 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면서도 나는 불안했다. 드라마에서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산재를 은폐하는 사업장에서 근로감독관이 활약해 문제를 풀지만 드라마는 판타지고 현실은 대부분 시궁창이다. “엄마, 나는 커서 버스기사 안될 거야.” 사장의 말도 안되는 지시에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운전하며 꾸벅꾸벅 조는 버스기사들의 장면이 지나간 뒤 첫째가 말했다. “버스기사는 잘못하게 되잖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말했다. “아냐, 기사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회사 사장의 잘못이야.” 허공을 맴도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웠다. 우리 아이는 커서 안전한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인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인가. 아이가 빼기를 못한다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아이가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마음 탓일 게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잘 살 수 있는 걸까. 사람값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를 갖는 것, 갈수록 이렇게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뭐 어때, 결과는 내 몫이 아니야.” 내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쿨한 내가 왜 아이들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지는가. 부모가 되고 보니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는 거였다. 인생이란 괴로움과 후회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내 아이는 그 괴로움과 후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불가능한 마음을 품고선 어떤 세상인가 올려다보면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한다. 남편에게 말했다. “부모가 되면서 사회를 다시 잘게 잘게 쪼개 먹는 느낌이야.” 어릴 땐 엄마가 비관적 전망을 말하면 화를 냈다. “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부모가 되어보니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자식이 어떤 일에 처했을 때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사회를 좀 더 잘 알게 되어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못 맞출까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지는 부모 마음
결국 그 불안을 가다듬는 게 숙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숙제는 불안을 가다듬는 것 아닐까.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 속에 자랐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야, 어떻게 살고 싶어? 무엇이 너를 즐겁게 하고 어떤 순간이 너를 두근거리게 하니.’

 

이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려면 사람이 도구로 취급받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가장 아득하다. 이 아득함이 몰아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이 세상에 아이들을 내놓았다는 게.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실컷 놀게 못 해줬나…자책한 아빠, 모든 위험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때는 자주 자전거형 유모차에 태운다. 녀석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지만, 아직 체력이 약한 녀석은 집에 끝까지 오지 못한다. 중간에 안아달라고 칭얼대기 마련이다. 안아주면 녀석을 바라보며 호흡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맞다, 힘들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져서 조금만 걸어도 팔이 뻐근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훌쩍 커버린 녀석은 이제 유모차는 안 타려고 하는데 다행히 자전거형 유모차는 잘 타려고 했다.

 

유모차 타고 집에 가는 둘째를 보며
말 건네는 아주머니 “걸어야 좋아요”
약하게 키운 건 아닌가 마음 무거워진다

 

어느 날도 자전거 유모차에 태워서 오는데 어떤 중년의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만지면서 사물을 느끼면서 가야지 지능이 잘 계발된대요.” 아마도 꽤나 큰 녀석을 자전거에 태워서 가는 모습이 마뜩잖게 보였나보다. “네,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그날따라 짐도 많아서 낑낑대며 가는데 불쑥 화딱지가 났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지나쳐 갔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둘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다들 걸어서 등·하원을 한다. ‘이 녀석, 너무 약하게 키우는 거 아닌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원래도 불안이 많은 성격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나다. 첫째 아이가 갓 태어난 모습을 보고서는 ‘혹시 만졌다가 팔뚝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10초 정도 안았다가 다시 장모님께 건네기도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걱정들이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풀려나와서 뭉게뭉게 부풀어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아이를 낳으면서 공부 걱정은 안 할 줄 알았다. 잘할 거라 믿었다기보다는, 공부보다 세상에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매달리기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막상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걱정을 놓지 못한다. 처음 참관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이는 좀체 선생님의 말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선생님이 하라는 건 하지 않고 몸을 비비 꼬기만 했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하는 ‘꼰대’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학년 꼬마가 집중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아이들을 실컷 뛰어놀게 해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한다. 두 녀석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녀온 뒤 놀이터에서 놀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일찍 들어간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엄마는 벌써 4시간째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해주고 있었다. 다 커서 아이들끼리 놀면 괜찮지만 어린 아이들은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벌서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저녁 먹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하는 시간이 다 늦어져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해주는 그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벌써 두 발 자전거 타는데
보조 바퀴 달고도 페달 겨우 밟는 첫째
몸 쓰며 놀게 해주지 못해 그런가 자책

 

나는 조금만 춥거나 덥거나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곤하면 슬슬 ‘집에 가자’는 신호를 아이들에게 보낸다. ‘아빠 힘들어’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바깥 놀이가 늘 고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째의 친구들은 벌써 자전거를 보조바퀴도 떼고 타는데, 녀석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 페달도 겨우 굴린다. 줄넘기도 아직 서툰 것 같다. 본인도 그게 조금 속상하다는 뜻의 말을 언뜻 내비치기도 한다. 역시 밖에서 몸을 쓰면서 노는 걸 많이 못해줘서 그런가. 또 자책한다.

 

부모는 늘 무한책임이다. 한 엄마는 아이가 이마에 모기가 물렸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제대로 못 봤다는 식으로 얘기해 속상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맞다, 정말,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지만, 뭔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 모든 게 다 내 책임인 것만 같다. 안 해주려고 안 해준 게 아닌데…. 가진 게 많아야 불안이 많다는데, 별로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세상에 제일 중요한 보물단지를 껴안게 됐다.

 

아이들은 강요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부모는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라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세상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오면 그때는 무력감을 느낀다. 얼마 전 첫째가 다니는 학교에서 석면 제거 공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반대 여론이 조성된다고 하자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부실 공사도 생각보다 많았다. 만에 하나 공사 후에 석면이 0.00001%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아이들이 마신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왜 석면이라는 게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걸까. 그래도 잘 감시하고 믿을 만한 업체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학부모들의 반대로 끝내 공사는 무산됐지만 아이는 앞으로도 내가 미처 몰랐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배를 타는 일에 아무런 경각심이 없었던 것처럼. 플라스틱 남용이나 기후위기 문제처럼 뻔히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 예상되지만 무력감만 느껴지는 미래도 있다. 결국은 다시 생각한다. 우리 아이만 모든 불안과 위험을 비켜나가 자라기를 바라는 건 허망하다는 사실을.

 

육아책을 보면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다고 해서 절대 아이들이 그 말대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부모는 그저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 하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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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임아영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어젯밤 세 돌이 지난 이준이를 업고 <섬집 아기>를 불러줬다. 여덟살 두진이가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불러줬던 노래였는데. 이준이가 가사를 따라 불렀다. 내 목소리와 이준이의 목소리가 겹쳐지자 문득 두 아이를 업어줬던 날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엄마가 울자 등에 업혀 있던 이준이가 말했다. “엄마 울어? 왜그래?” 그러게. 엄마는 왜 울까. “이준이가 크는 게 아까워서.”

 

이준이가 짐짓 어른스럽게(?)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을 몇 번 해줬던가. 아이의 위로에 이상하게도 더 눈물이 났다.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를 위로해주는 아들이 됐을까? 너무 기특해서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고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준아, 엄마 눈 봐봐.” 어쩌면 이렇게 눈빛이 맑을까. “엄마가 이준이를 정말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섬집 아기>는 이준이보다 두진이에게 많이 불러줬던 동요였다. 돌 전 아기였던 두진이를 키울 때 나는 너무 ‘초보’였다. 아이와 둘이 있는 게 두려웠다. 울어버리는 두진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스스로가 두려웠다. 아기띠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던 두진이는 포대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나를 키울 때 쓰던 포대기. 물론 엄마가 아이를 업듯 아이를 등에 손쉽게 얹은 뒤 포대기로 감지는 못했다. 아이가 졸려 하면 침대에 포대기를 펼쳐놓고 두진이를 포대기 가운데에 눕힌 뒤 침대에 등을 밀착하는 자세로 몸을 뒤로 구부려 아이를 겨우 업었다. 두진이를 키울 땐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이를 업고서 불러주던 노래가 <섬집 아기>였다. 두진이는 이 노래를 불러주면 잠을 잘 잤다. 물론 금세 다시 일어났지만.

 

<섬집 아기>를 부르고 있으면 엄마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했던 초보 엄마 마음이 떠오른다. 요즘 두진이를 몇 번 다그쳤다. “두진아 모르겠어? 두진아 어딜 보는 거야. 두진아 두진아!”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는 빼기를 어려워한다. “두진아 세 개에서 두 개를 빼면 몇 개야?” “한 개!” “그럼 3-2는 뭘까?” “2!”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올라온다. 이래서 자기 자식은 가르칠 수 없는 거라고들 한 건가. 가장 답답할 때는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볼 때다. 아이는 뭐든지 늦다. 느리지만 꼼꼼한 아이라서다.

 

얼마 전에는 ‘ㅏ ㅑ ㅓ ㅕ’를 배우는데 수업 시간에 다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집에서 좀 같이 해보라고까지 했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어 교과서를 보니 사자 그림에 ‘ㅏ’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고 ‘ㅑ’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는 거였다. “두진아 왜 색칠 못했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원래도 자기 표현을 많이 하는 아이가 아니다. “두진아 왜 못했느냐고.” 다시 물어도 묵묵부답. 다시 속이 부글부글한다. 한 번 더 참고 물었다. “두진아 대답해야지. 엄마가 물어보잖아.” 겨우 답이 나온다. “다 할 수가 없었어.” “왜?” 바로 다다다 소리가 나올까봐 꾹 참고 다시 물었다. “두진아 그럼 친구들이 색칠하고 있을 때 두진이는 뭐했어?” 두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왜?” 이해가 잘 안됐지만 다시 물었다. “왜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두진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떤 색을 칠하면 예쁜지 생각했어.” 아... 그랬구나.

 

아이와 함께 색칠을 다시 했다. 아이는 수업 시간에 못한 사자 그림을 다시 칠했고 나는 그 옆 페이지의 여우 그림을 칠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는 말했다. “아, 힘들어.” 아니 칠하기 시작도 안했는데 왜 힘들다는 거야. “엄마, 다 칠하려면 힘들어.” 같이 색칠을 하면서 알게 됐다. 뭐 하나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색연필을 꾹꾹 눌러 빈틈없이 색칠할 생각하니 손도 아프고 걱정되었던 것. 옆에서 내가 색연필을 뉘여 살살 색칠하자 두진이가 계속 참견했다. “엄마, 그렇게 하면 하얀색이 다 보이잖아.” 아... “두진아 이렇게 칠해도 돼. 그렇게 다 하려면 힘들잖아.” 말하고나서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해야 하는 아이다. 남편을 닮았다.

 

첫째가 골똘히 글씨쓰기 숙제를 하고 있다.

 

하루는 더하기 빼기를 하다가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너무 화가 났다. “두진아 하지마. 집중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수학도 국어도 안해도 돼!”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고 집중을 오래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다그치고 말았다. 겨우겨우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났다. 이렇게 다그치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나는 효율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군더더기가 있는 것을 참기 힘들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아이다. 수줍음이 많고 느리다. 말이 많지도 않다. 남편을 닮았다는 생각에 가끔은 남편의 답답한 모습과 연결되며 답답하다. 나를 닮은 둘째가 종알종알 떠들고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된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싫었다. 아이에게는 절대 ‘욱’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모 자식과도 ‘케미’가 있다던데 내가 두진이의 성정을 이해 못하는 엄마인 걸까. 선풍기가 돌아가면 어떤 원리로 선풍기가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아이, 우유를 안 먹으려고 해서 선생님이 “우유를 버리면 물고기가 아파”라고 한 말을 듣고 우유가 어느 관을 타고 버려지는지 생각하는 아이다. 집에서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아이는 3+2를 계산할 때 동그라미 3개를 그리고 2개를 그린 뒤 더했다. “두진아 이렇게 하는 거 누가 알려줬어?” “그냥 내가 했어.” 아이를 믿어줘야 좋은 부모라고 했다. 기특한 아이를 나만 못 믿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급한 게 문제일 수도 있다. 남편이 아이를 자꾸 자기를 닮았다고 규정하지 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이는 그냥 아이다. 첫째는 남편, 둘째를 나를 닮았다며 이미 아이들을 어떤 틀로 규정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식이란 존재는 너무 어렵다. 내가 아닌데 나를 닮은 작은 존재.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존재인데 보살피고 등을 토닥여줘야 하는 존재.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고 세상의 풍파를 잘 헤쳐가는지 뒤에서 바라봐줘야 하는 존재.

 

자책하고 있으니 친구가 말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 하더라고. 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거라고 했어.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아이들이 잘 크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힘내.”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계속 배우는 것은 아마 뒤에서 바라봐주는 존재가 되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법. ‘엄마도 계속 더 엄마가 되어가고 있어. 두진아 이준아, 엄마가 헤매서 미안해. 그래도 조금씩 더 나아질거야. 엄마도 시간이 지나면 더 배울 테니까.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둘쨰가 인형을 안고 잘 보살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황경상

“선생님, 아빠는 맨날 잠만 자요.”

어느 날 큰애가 담임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아마 피곤해서 잠깐 누워있었던 것을 그리 말했나 보다. 육아휴직도 이제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아빠인가보다.

 

가끔은 깜짝 놀라는 일도 있다. 여전히 학교 가는 일에 적응 중인 1학년 첫째는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녀석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있는 모양이다. 지난 번에는 꾸역꾸역 배 아픈 걸 참다가 함께 있던 친구의 엄마가 나한테 전화를 해 줘서 뒤늦게 알게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타일렀다. “아프면 참지 말고 선생님께 얘기하고, 아빠한테 전화를 해 달라고 말씀드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 전화번호는 몰라.” “엄마 전화번호는?” “알아. XXXX에 XXXX” 헉... 아직 아빠 전화번호는 몰랐단 말인가.

 

아빠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에게 ‘만족’이란 없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억울할 때가 있다. 지난번에는 방과후 수업을 내내 서서 참관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실컷 놀려준 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 있어 2~3시간 만에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때 첫째가 ‘아빠! 아빠!’ 하는 걸 못 들었나보다. 내가 대답을 안 했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는 맨날 휴대폰만 보고 있어!” “야, 아빠도 뭐 보낼 게 있어 그래!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왜 아빠한테 그래!”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대충 때우려는 것도 아이들은 귀신처럼 눈치 챈다. 언젠가 첫째가 레고로 조립한 장난감 프로펠러를 돌리면서 “이것 봐 잘 돌아가지?” 하고 내게 자랑을 했다. 아마 그때 몹시 피곤했던 나는 아이에게 눈도 안 돌리고 “응, 잘 돌아가네” 그랬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첫째가 말한다. “아빠는 옆에 눈이 달려있어?” 급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 녀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야, 이렇게 아빠가 곁눈으로 봤어, 안 보고 말하는 줄 알았어?” 녀석은 유심히 옆으로 흘기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믿어보겠다는 눈치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자꾸만 다른 아이들과 우리 아이를 비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이 김치나 나물에 밥을 쓱싹 비운다는 얘기를 듣고는 왜 우리 아이들은 손이 이렇게 많아 가는가 하며 한숨을 쉰다. 목이 쉬도록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불러도 밥을 안 먹는 녀석들, 겨우 한 숟갈 떴다가도 먹기 싫은 반찬이라고 게워내 버리는 녀석들. 그러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는다. ‘도대체 니들은 왜 그러는 거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빠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런 질문을 아이들이 할 법도 하다. “다른 아빠들은 말이지, 몸으로 잘 놀아주는데 아빠 너는 왜 그렇게 늘 퍼져 있니? 또 다른 아빠들은 물어보면 차근차근 설명도 잘 해주고, 화도 안 내는데 아빠는 걸핏하면 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니?”

 그렇다. 요즘은 하도 불끈불끈 화를 내서 아이들이 나를 ‘화내는 인간’으로 기억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다. 언젠가는 갑자기 막 매달리는 첫째 때문에 목과 어깨 언저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하냐고 막 뭐라고 했더니 녀석의 입꼬리가 금세 실룩실룩해지면서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눈망울은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반짝거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빠도 아픈 걸 어째. 미안하다!

 

아빠가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냐고? 아이들이 이해한다면, 좀 어렵더라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빠는 지금 너희들의 시간을 배우는 중이라고.

 

아이도 어른과 비슷하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자기의 스케쥴이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당황스러워한다. 뭘 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미리 말해주고 동의를 구한 뒤 움직여야 뒤탈이 적다. 늘 그걸 까맣게 잊는다. 노는 아이를 갑자기 데려와 씻기고, 집에 있는 아이를 갑자기 어린이집에 데려가 부려놓으려고 한다. 아이들이 울고 떼쓸 때면 ‘아차’ 싶지만 늦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날은 다르다. 서운해 하지만 떼쓰거나 울지는 않는다.

 

그것이 늘 어렵다. 머릿속에 아직도 아이들의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른들의 시간에만 맞춰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허겁지겁 윽박지르는 일이 반복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조금만 더 헤아려본다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늘부터 너희들의 시간에 맞춰볼게, 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거다. 또 나는 어른들의, 세상의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닦달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어느 날 화장실에서 첫째를 씻기고 있었을 때였다. “아, 좀 크게 해 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안 벌리려는 녀석의 입을 억지로 벌려 칫솔질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아빠! 귀여워!”

 그래,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아주 실패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형제가 킥보드를 타고 있다. 밤이 됐는데도 지칠 줄을 모르는 형제들.

 

 

[출처] 좋은 부모, 그냥 부모 [부부 육아일기 6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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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샤인 2019.06.14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형제맘인데 애들 에너지 못쫒아가죠 ㅎㅎ이미 훌륭한 아빠이세요~ 아이도 어른도 노력하는 모습보다 더 훌륭하다는 의미는 이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요리하는 아빠, 설거지하는 엄마

임아영

설거지를 좋아한다.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통 물에 불린 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를 때 음식 찌꺼기가 없어지는 게 좋다. 그 다음에는 비누거품이 묻어있는 그릇을 물에 헹궈낼 때 그릇이 다시 빛을 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또 그릇을 말린 뒤에 정리할 때 가지런해지는 게 좋다. 설거지는 내가 집안일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사노동 을 무척 즐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편이고, 아이 밥을 주로 먹이는 사람도 남편이고, 아이 목욕을 주로 시키는 사람도 남편이다. 참을성을 요하는 일에 나는 치명적이다. 뭐든지 빨리 해내는 것을 즐기는 성격인데다 어떤 일을 해도 들이는 노력 대비 효용을 고려하는 내게 요리, 밥 먹이기는 정말 안 맞는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꾸준하다.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남편은 빨리 시작하고 잘 지치는 내게 “괜찮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금방 지쳐 떨어지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다른 성격은 결혼 후 싸울 때마다 서로를 답답해하는 이유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모든 부부가 그렇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장점이 오래 지내고 나면 단점으로 비춰지는 것은 모든 관계가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밥솥 카스테라.' 힘들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기에 가끔 쿠키나 빵을 만든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한다면 남편은 요리를 좋아한다. 다섯살 때부터 병설유치원에 다닌 첫째는 매달 현장학습을 갔다. 거의 3년간 매달 김밥을 싸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지난 해 유치원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진이가 아빠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빠가 싸시는 거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의 도시락을 만드는 일도 ‘엄마’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남편의 김밥을 자랑하는 것 같을까봐.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니, 어머님은 어떻게 남편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이 요리를 하고 아이들 밥도 주로 먹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굉장히 많이 하는 걸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몸이 바쁘지만 나는 머리가 바쁘다. 한 가정이 굴러가려면(?)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클 때마다 옷을 사고 매주 먹을 음식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대출 상환 계획을 수립하고 10년, 20년 단위의 재무 계획을 점검하는 것은 모두 ‘내 일’이다. 이제 아이들이 더 크면 아이들 관련 행정(?) 업무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교육에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고 예산에 따라 학원을 어디에 보낼지 결정하고 실제 학원비를 결제하는 것도 내 일이 될 것이다. 지금도 첫째 피아노학원과 둘째 어린이집 특활비 결제는 내가 한다.

회사 점심 시간에 정신없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가끔 ‘왜 이 모든 일을 내가 다 맡고 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우선순위 에 따라 일의 순서를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획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집안일을 할 때도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한 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일부는 털어서 널고 일부는 건조기에 돌리고 가끔은 청소기도 살짝 돌리는 것처럼, 일을 가장 빨리 하는 법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가사노동의 기획’ 업무를 결혼 이후 계속 내가 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둘 다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신혼 때는 우리도 가사노동 배분 문제를 가지고 다퉜다. 그러나 돌아보면 각자 잘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남편은 참을성을 요하는 일로, 나는 기획하는 쪽으로. 이제 사실 누가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지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다만, #보이지않는노동 들이 많다는 것은 알리고 싶다.

 

  다들 가사노동이라 하면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중에서 설거지만 하는 내가 우리집에서는 가사노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을 내가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 가사노동에 이렇게 #비가시적분야 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잘한 노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도 가사노동을 전담했던 #친정엄마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 엄마가 어떤 보이지 않는 노동을 ‘그렇게 많이’ 해냈는지 결혼하기 전까지 잘 몰랐다. 신혼 초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수건을 접는 이런 작은(?) 일도 다 엄마가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아서였다. 어릴 때 남동생은 내 꽃무늬 청바지를 물려 입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아직도 한다. “엄마, 왜 누나 청바지를 입혔어요”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둘째를 낳고 보니 첫째 옷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새 옷을 사주는 게 정말 아깝다(물론 나는 성별이 같은 아들들이지만 남동생은 누나의 꽃무늬 바지가 부끄러웠을테다). 엄마가 집안의 총무부장이자 재무부장(?)으로 어떻게든 아끼려 노력했던 게 이해돼서 가끔은 코끝이 시큰하다.

  평생 제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엄마는 환갑이 된 해에야 명절 차례상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우리 가족은 엄마 환갑을 기념해 난생 처음 추석 때 해외여행을 떠났다. “명절에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니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하던 엄마. 그러나 설 연휴에는 아빠와 남동생 생일이 겹쳐 있어서 다시 요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그리워했다. 싱가포르의 식사를. ‘누가 차려준 밥’을. 엄마는 늘 외식을 아까워한다. “바깥 음식은 비싸기만 하지”라면서. 밥을 차려본 사람이라 사 먹는 밥을 아까워하는 것이다. 재료의 원가가 금방 나오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아니예요 엄마. 엄마 밥이 외식보다 저렴한 건 #엄마의노동력#공짜 여서예요. 우리가 그동안 엄마 밥을 공짜로 먹어서예요. 이 사회가 엄마 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서예요.’

 

 가끔은 거창하게 다짐도 한다. 여전히 빚지고 있는 엄마 밥 뒤에 숨은 노동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싶다고. 우리 모두 비가시화된 노동의 값을 제대로 아는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오늘 저녁은 카레다! 아빠가 겨우 저녁밥을 차려주었지만, 거실에는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다.

 

 

죽지 않는 좀비 같은 너란 녀석, 가사노동!

황경상

육아휴직을 하기 전엔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현관 번호키란 정말 귀찮은 물건이었다. 집에 드나들 일이 정말 많은데 그때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야 하다니. 잠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거나 우유를 사러 갔다 올 때도 예외는 없었다.

 

잉여롭게 인터넷을 들여다보다가 스마트폰을 전자키로 등록할 수 있다는 글을 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스마트폰만 갖다 대면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도구적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현관 번호키가 내 ‘도구 중독증’에 걸려든 셈이다. 몇 번 등록을 시도해봤다. 잘 안 됐다. 우리집 키는 안 되나보다 하고 포기했다. 그 중간에 등록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현재 비밀번호를 몇 번 쯤 대충 눌렀던 것 같다.

 

낮에 일이 있어 아이들을 처가에 잠깐 맡겨두고 저녁 때 집에 들어가려는데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황 서방, 아까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문이 안 열리더라고. 번호가 바뀌었나?”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이 번호, 저 번호를 눌러봐도 번호키는 ‘번호가 틀렸습니다’를 내뱉을 뿐이다. 수 년 만에 안 하던 기도도 여러 번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뭘 잘못 만졌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건 분명했다. 결국 번호키를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열쇠수리공 아저씨는 나를 위로했다. “이런 분들 생각보다 많아요. 공부하시느라 정신 없으신 분들이 주로 그러더라고요.” 나는 공부도 안 하는데... 아무런 위로가 안 됐다. 경제적 손실에 정신적 타격까지 한동안 어질어질했다. 육아휴직을 한 뒤 몸을 좀 만들어보겠다고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좀 하다가 팔이 안 굽혀져서 사흘째 팔꿈치에 파스를 붙였을 때도 이런 참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옛날 옛적 컴퓨터 게임 중에 ‘너구리’ 게임이라는 게 있었다. 이 게임은 마지막 판이 끝없이 계속된다. 가사노동이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 판인 줄 알고 깼는데 또 똑같은 스테이지가 다시 나온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치울거리가 나오는 #뫼비우스 의 띠와 같다. 실컷 청소를 해 놓고 한숨 돌리면 갑자기 저기서 ‘촤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둘째가 뭘 쏟는 소리다. 그런 단순반복을 좀 줄여보겠다고 번호키를 만졌다가 오히려 된통 당했다.

 

자취생활만 10년에 육박하는지라 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노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먹은 그릇을 바로 설거지해 놓고, 방에 청소기를 한 번씩 돌리는 일이 당연하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가사노동이 가욋일이 아니라 주된 노동이 되니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사흘에 한 번 설거지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저 ‘어시스트’ 한다는 느낌으로 가끔 하는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매일매일 할 일들이 죽지도 않는 좀비처럼 다시 나타나 내게 손을 뻗는다.

육체노동이 끝이 아니다. 집안일은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다. 거기서도 나는 젬병이다. 학교에 큰애를 데리러 갔다가 시장에 들르자고 마음먹어 놓고는 지갑을 두고 간다. 코를 훌쩍이는 둘째를 데리러 갈 때 약을 꼭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을 타서 약병에 넣어두고는 식탁에 두고 간다. 학교 도서실에 반납기한이 다 된 책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에코백에 넣어뒀다가 현관에 그냥 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덕분에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책을 가져가야 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책을 빌리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단 집안일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를 갈 일이 있어서 몇 년 만에 세차를 맡기고 보람차게 집에 돌아와 앉으면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전화가 온다. “차 키 안 꽂아두고 가셨어요?” “거기 꽂아놓고 왔는데요.” 당당하게 말하면서 탁자를 보니 차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른 차키를 들고 뛰었다.

 

왜 그럴까 생각도 많이 했다. 심각한 건망증인가? 그냥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걸까? 스마트폰 메모장에 메모도 해 두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안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생각에 한 번 빠지면 그 생각만 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외출할 때면 현관을 나가자, 그 생각밖에 못한다. 결국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한 번 주변을 돌아보면서 빠진 것이 없나 상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또 까먹는다. 그래서 안 된다. #육아휴직 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요즘 아빠가 정리하는 걸 보면 옆에서 도와주곤 한다. 고맙다, 아들!

아내에게 타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난들 어쩌겠나. 결국은 아내가 챙겨야 할 일들을 도맡는다. 메모장에 할 일들을 잔뜩 적어놓고 수시로 내게 미션을 수행했느냐고 묻는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으면 아내도 참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힘쓰는# 집안일 은 가급적 내가 하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사노동 분담이 됐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자면 우리는 남녀의 역할이 조금은 바뀐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육아휴직 뒤에는 더 그렇다. 가끔은 약간 서럽다. 퇴근한 아내가 집에 와서 건조기를 열고 아직 꺼내지 않은 빨래를 꺼내서 접으려고 할 때, 마치 내가 할 일을 안 했다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나 정말, 하루 종일 논 거 아니라고!’ 아마 많은 #전업주부 들이 남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가사노동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 힘들기 때문에.

 

[출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 [부부 육아일기 5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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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아이들이 요가 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뿌듯함과 서운함 교차하지만…더 많은 시간 함께 부대낄 수 있기를

 

요가 동작을 흉내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 육아휴직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와 등산했던 봄날, 아빠와 계곡으로 휴가 갔던 여름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계곡에 친 텐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나는 계속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텐트 속에 수집(?)하고 있었다. 속으로 ‘잠자리가 아빠 코나 눈두덩이를 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러나 평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는 늘 내가 잠들어야 퇴근했다. 열 살 때 수영장에서 넘어져 이를 크게 다쳤던 날에도 아빠는 늦게 왔다. 앞니 중 하나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버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정류장에 나타났을 때 엄마가 울던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없이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했다. 몇 군데 치과를 돌아 겨우 치료를 한 밤 아빠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했던 밤도 또렷하다.

 

나는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 분위기와 많이 달랐던 듯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다가 가끔은 어릴 적 아빠와 내 모습이 겹쳐진다. 최근 엄마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가 정말 놀랐다며 말씀하셨다. “아니, 아빠들이 다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왔더라~” 남편도 당연히 입학식에 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아이 입학식, 졸업식에 가는 걸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다 돌아보니 아빠는 내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빠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테고 회사 상사들은 면박을 줬을 테다. “엄마만 가면 되지, 왜 아빠가 유난스럽게 졸업식을 가느냐”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부르며 울 때가 많았다. 엄마가 모든 것의 디폴트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와 달라 신기했다. 아마 다른 점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가 있었다는 점일 거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단 느낌을 주지 않고 싶어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는 남편이 담당(?)하게 하며 첫째가 안 볼 때 사랑을 몰아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둘째 기저귀를 갈았던 횟수는 첫째 때보다 현저히 적다. 남편이 주로 갈아서다. 목욕의 횟수도 비슷하다. 남편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킬 때 나는 보통 첫째를 마크(?)하고 있었다.

 

관계란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누리길 바래
그것은 아이들의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

 

최근 어린이집 선생님이 보내준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준이가 점심 시간에 김치 먹으면서 ‘아빠 집에서도 김치 먹었어’라며 자랑을 했어요.” 내가 댓글을 달았다. “이준이는 이제 아빠 이야기만 하네요.”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우리 이준이는 뭐든지 ‘아빠 집’이라 표현하고 ‘아빠가 입혀줬어요’ ‘아빠한테 칭찬해주세요’라고 말을 해요. 아빠랑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어요.” 뿌듯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니다, 엄마!” 하루 종일 아빠를 불러서인지 엄마를 옆에 놓고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결국 관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관계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하나도 쓰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아빠를 더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좋아했지만 내 곁에 자주 없었던 ‘아빠와 나’와 다르게 일상에서 자주 아빠를 누릴 수 있기를.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는
아빠가 아이들을 키워야 많이 풀려
육아휴직 사업장이 더 많아지길 기대

 

아빠가 나를 키울 때는 아버지가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당연해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남편이 ‘행운아’처럼 보일까봐 가끔 걱정스럽다. 남편은 여전히 흔하지 않은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들은 아빠를 누릴 시간을 얻었다. 여전히 이런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목소리 높이고 싶다. 2019년에는 그런 사업장이 많아지길 꿈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저출산·고령화를 진정 걱정한다면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엄마들의 일을 아빠들이 나눌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말이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아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제 둘째 이준이가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첫째 두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달려 학교에 데려다줬다. 얼른 회사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떼쟁이 둘째가 아빠 손을 잡고 나타났다. 반가웠지만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이준이는 “엄마랑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 엉엉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울적하다. 버스 차창을 보며 목 끝의 뜨거움을 느끼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준이는 아빠랑 있는데 왜.’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안심이 됐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고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아이들과 소통 정말 어렵지만…아빠 역할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

 

첫째가 어버이날 편지를 쓰고 있다. 둘째는 첫쨰 하는 것을 따라하는 중이다.

 

‘으앙~’ 유모차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둘째가 갑자기 깨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막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유모차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젤리를 줘도 싫다고 막무가내로 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반쯤 포기하고 그냥 뒀다. 뭔가 서러움이 있다면 일단 배출이라도 해라 싶었다. 녀석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집이 떠나가라 운다. 씻지 않은 손에 구정물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덕지덕지 바른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모른 체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좋은 아빠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싶었을 때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 다시 물었더니 말한다. “형아 데리러 갔는데, 형아 어디 갔어!” 아까 학교에 형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형아’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는 혼자 다시 집에 있게 된 셈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대체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지식들을 얻는 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 데 도움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서 언젠가 이 책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에게 뭘 더 안겨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액션’보다는 아이들에게 ‘리액션’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내 차례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상대방의 전략을 지켜보는 턴(turn) 방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어떤 개입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될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더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육 과정을 게임으로 치자면
리얼타임 전략 시물레이션일 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발전

 

내가 그렇게 좋은 리액션을 보여줬나 돌이켜보면 백점 만점에 오십점이나 될까 싶다. 가급적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잘하는 모습을 칭찬해주되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북돋워주려고 늘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리액션은커녕 준비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다시 집에 헐레벌떡 돌아와 집어서 갖다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아지는 모습도 발견한다. 리액션이란 본디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더 중요하듯 아이들 역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나 혼자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첫째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아내 없이 혼자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말을 잘 못하던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 종일 나와 시간을 보내더니 곧잘 ‘아빠’ 하면서 달려들었다. 급기야 밤에 뒤척이며 보채다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 ‘아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라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져
내 아이와의 추억은 둘이 고루 섞였으면

 

그 첫째 녀석이 제법 크더니 출근하는 나에게 동생을 한번 안아주고 가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둘째가 돌을 갓 지나서였을 때였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동생이 ‘아빠’ ‘아빠’ 하고 울어서란다. 둘째는 그즈음 “아빠 돈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의문 역시 첫째가 풀어주었다. “야, 아빠가 좋다고 아빠 돈대 그러는 거지?” 녀석들의 볼을 한번 꼬집어보며 웃었다.

 

첫째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둘이서 탄 적이 있다. 기차를 타고 너무나 신나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아빠는 이미 꿈을 이뤘어? 아빠는 이미 커서 틀려버렸어? 아빠는 꿈이 없어?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야? 막막했다. 한 1분여간의 고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응, 그래?”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의 그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제법 많다. 아버지와 나는 씨름도 하고, 암벽에도 오르고, 잠옷 바람으로 함께 누워 있기도 한다. 사진 속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 앞에 서 있을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일하러 나가시던 굽은 등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었다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내 아이들과의 추억은 일상과 이벤트를 고루 섞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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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 엄마

임아영


 

두진이를 낳고 #초보엄마 였을 때였다. 엄마 몸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잠을 깨 울어버리는 아기를 두고 집 밖을 나오는 상상을 한 번씩 했다. 그 상상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왔지만.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 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을. 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 주말이면 나도 조금쯤은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면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소리치게 된다.

어느 일요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내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책 읽어줘요.” 첫째는 왼쪽 어깨에 기대고 둘째는 등 뒤에 매달렸다. 24kg이 넘은 여덟살 첫째와 14kg이 넘은 만 35개월의 둘째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 아이들의 살이 무겁고 덥다. 점점 몸무게가 늘어나는 아이들의 몸에 눌리면 아이라도 매우 아프다. 나도 모르게 “그만 좀!”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엄마 갑자기 왜 그래’라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가도 후련하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마도 나 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 말은 삼키고 만다.

엄마가 되고서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엄마 몸에 발 하나라도 닿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는 나를 더듬어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도 푹 자지 못하는 #좀비 가 되어가자 깨달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존재를 달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는 것이구나.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도 했지만 자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아이들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내 안테나가 아이들의 안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 #안고부비고싶은존재들 이 무거웠다가 멀어질까 다시 두려워지는 이 마음. 이 마음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구나.

두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를 잠자리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두진이는 언제쯤 혼자 자고 싶어?” 아직 동생이 어려서 네 식구 모두 함께 자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두진이는 말했다. “엄마, 난 혼자 자기 싫어.” 의존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돼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혼자 잘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항상 같이 자줄 수는 없는 거야.” 두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고학년은 몇 학년인데?” “10학년!” 풋 웃음이 나왔다. “10학년은 없어(웃음).”

이 얘기를 동네 엄마에게 전해주니 그 엄마는 말했다. “고1 때까지 같이 자겠다는 얘기네요.” 순간 변성기의 수염 난 소년이 떠올라 또 풋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소년이 엄마와 함께 잠들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따로 재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 #시간거지 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나마 엄마아빠 품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내게 발차기를 하거나 등 밑에 발 집어넣기 기술(?)을 시전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버려 “제발!” 외친 적도 있지만 잠결에 아이들을 안아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운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깨서 새벽 혼자 운 날도 있었다. 커버리는 게 아까워서. 정말 이상하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버겁고 아깝고 부담스럽고 잃어버릴까 두려운 이 감정 말이다.

얼마 전부터 두진이가 잘 때 팔베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엄마, 불편해.” 팔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베개를 하면 불편하다고 했다. 늘 왼쪽 팔엔 두진, 오른쪽 팔엔 이준이를 장착(?)하고 자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는데. 방전되는 휴대폰이 충전되는 것처럼 90, 95, 99, 100%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내 팔에서 떨어져 혼자 베개를 베고 자기 시작하다니. 허전했다. 팔베개를 하면 불편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였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것이 언제였냐는듯이 나는 그 건강한 신호조차 아쉬워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킥보드를 수리하는(?) 둘째와 그를 코치해주는 첫째

 

그렇게 내 몸에서 분리되길 원했던 아이들은 이제 곧 자기 혼자 설 것이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했던 내 말들이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날들이 곧 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삶이 이런 것인지 잘 몰랐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결이 다른 이 마음. 아이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의 부드러운 볼에 뽀뽀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먼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 것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은 나를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이제야 나는 이 세상에 발딛게 된 기분이 든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연두색 새싹처럼 여리지만 어떤 색깔보다 예쁜 아이들의 유년, 그 #유년 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의 젊음.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인생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은 아빠

황경상

요즘 첫째는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다. <수박 수영장> <메리> 같은 책은 내가 봐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아이와 등교를 하면서 안녕달 작가의 책에 대해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학교 도서실에 보니까 안녕달 아저씨가 쓰신 다른 책도 있더라고~ 이따 빌리러 가자!”

“작가님이 책을 한 권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권도 쓴다고?”

“그럼 작가들은 여러 권을 쓰기도 하지. 안녕달 아저씨도 한 권만 쓰셨을 리가 없지.”

“근데, 아빠. 안녕달 작가님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잖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나는 그림책 작가님을 그냥 남자, 아저씨라고 생각했을까. 안녕달 작가님은 필명을 쓰시는데 책에도 간단한 소개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여성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고정관념 을 단숨에 깨 주었다.

 “아, 맞다. 그래, 그럼 우리 그냥 작가님이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중에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진짜 여성이셨다.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매일매일 배우고 깨닫는다.

집 주변 곳곳에는 형형색색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전에는 그 꽃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봄이 되면 그저 꽃이 피는가보다 싶었다. 아이들은 그런 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자 둘째가 말했다. “아빠, 꽃잎이 아프면 어쩌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들에게는 꽃잎 하나, 풀잎 한 줄기, 나무 한 그루도 다 소중하다. 소중한 것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이름을 알려줘야 하는데 나도 도리가 없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게 포털사이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렌즈 기능이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에 있는 꽃과 유사한 꽃을 백과사전에서 찾아서 보여주는데 제법 정확하다.

 

아이들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된 제비꽃

 

제비꽃, 꽃잔디, 데이지, #애기똥풀 … 나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면 아이들은 이름을 불러보며 즐거워한다. 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도 그저 다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중에 좀 생김새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달라 한다. 사진을 찍어보니 #쥐똥나무 라고 알려준다. 그때부터 이건 사철나무, 이건 쥐똥나무 하면서 구별하면서 다닌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는 작고 동그란 나무 열매를 모으면서 좋아하기에 확인해 보니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천지사방에 떨어져 있어도 이름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바짝 말라버린 나무열매를 땅 속에 심고 있기에 “그건 심어도 싹이 안 나, 이미 씨는 다 날아가 버린 거야”라고 말하자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영혼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만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다시 나는, 이 나이에 배운다.

아이들 덕분에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

 

나무열매를 모으고 만들고 하면서 신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서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또 함께 데리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많이 놀았잖아요. 우리한테는 왜 그래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정말 우리는 밖에서 많이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실내에서 놀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나 놀랍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리자 첫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수줍음이 많은가봐, 내 손으로 안 와.”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아이들의 말들은 정말 잊어버릴까봐 두려워 매일 메모장에 기록하지만 빠뜨린 게 구할이다. 육아를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 예쁜 말이 가슴에 꽂혀 다시 한 번 아이들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마음을 아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매일매일 풀어서 다듬는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배우고 얻는 게 더 많다.

“아들, 오늘도 잘 하고 와!”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첫째에게 소리치자 데리고 있던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들이 뭐야?”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이놈아!”

아직은 가르칠 것도 많지만 말이다.

 

[출처] 부모로 성장한다고 느낄 때 [부부 육아일기 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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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임아영·황경상 기자는 11년차 입사 동기입니다. 두 아들을 낳으면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양육은 엄마가 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왜 ‘반반 육아’가 중요한지 말하려 합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자…아이에게도,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초등학교 1학년 첫째와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까지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한편으로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남편이 육아휴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2주쯤 지났을 때 어느 퇴근길 집 근처에 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만 하고 갈게.” 대뜸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왜.” 얼른 저녁 시간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미 집 앞이던 나는 더 신나서 말했다. “아니, 맥주 한잔하면서 잠깐만 친구랑 이야기만 하고 갈게.”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따다다다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나 벌써 1층이야.” 나는 가부장 흉내를 내서 신이 났고 남편은 내가 무사히 육아를 하러 돌아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 하고 갈게” “왜?”
나는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던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내며 신이 났다

 

통쾌했다. 언젠가 한 번 꼭 내보고 싶었다.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한 여성 개그맨의 ‘가모장 개그’를 좋아했다.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를 원한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등.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비튼 말 속에서 가부장 언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었으니까. 평등한 삶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깔아뭉개지 않는 삶, 우리의 임금노동이 누군가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삶, 임금노동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돌봄노동을 인정하는 삶 아닐까.

 

아이를 낳고 퇴근 후 회식이 자연스러운 아빠와 퇴근 후 회식할 수 없는 엄마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왔다. 육아는 금을 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내 어깨가 무거워지면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사정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준에서 ‘착한 남편’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 주로 싸움을 걸고 사정하는 쪽은 나였지만 흔쾌히 싸움을 받아주거나 사정을 받아주는 것조차 고마웠다. 그래서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육아 경력은 내 육아 경력과 같다.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다. 길지 않은 육아휴직 기간 원래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인데 뭐가 크게 달라지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상의 결은 달라졌다.

 

남편이 만든 밥을 먹는데 기분이 묘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개운치 않았던 건
숨겨진 돌봄노동의 실체 때문이었다

 

남편이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기분이 묘했다. 시간거지인 맞벌이 부부라 평소 자주 음식을 사 먹었지만 가끔 요리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남편이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휴직 후 먹는 밥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남편이 마파두부밥과 참치전을 해놨다. 원래 손으로 뭔가를 빚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요리를 즐거워했지만 아침을 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엄마 반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해준 고등어조림이 정말 맛있었는데.” 며칠 후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등어 샀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라고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늘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우선 남편은 젊고 힘이 세니 아직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를 맡기기도 미안하지 않았고 사실 육아는 우리 둘의 일이라 미안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생겼다’고 느낀 지점은 아마 ‘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니 ‘밥을 해주는 엄마’가 생겼다. 결혼 후 늘 그리워하던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 따뜻한 엄마 밥.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서 든 생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삶 말고
서로서로 챙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며칠간 밥을 얻어먹고(?) 출근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운치 않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왜 개운치 않을까. 답은 쉽게 찾았다. ‘여전히 나도 누군가 돌봐주는 삶, 누군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는 삶, 자고 일어나 누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오는 삶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구나.’ 결혼하고 나서야 가사노동이 무엇인지 배웠고 아이를 낳고서야 돌봄노동의 실체를 알게 됐다. 이전의 나는 1인분의 삶을 살지 못했구나 하는 깨달음. 남편이 다시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니 안온해졌다. ‘임금노동에만 신경쓰면 되는 삶이 이랬었지.’

 

언젠가 동네 친구가 말했다. “가끔 자신은 집에서 노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다른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삶과 사회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밥을 차려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끔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자들의 칼럼을 읽다 보면 묘하게 우울해졌다. ‘이런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

 

나만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면 될까. 우리 모두 노예가 되지 않게 서로의 돌봄을 나누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돌봄의 영역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 신이 나기만 할 줄 알았다. “남편 좀 풀어주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남편 앞에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할을 바꿨으니 너도 고생해봐라’라는 독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는 답은 거기다.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 귀찮은 일들은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고고한 말을 하는 삶 말고 서로서로 밥을 챙겨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지루한 육체노동이지만…이 뭉클함 없인 인간은 반쪽 아닐까

“아빠 무서워~ 저기서 안 잘 거야.”

둘째가 매일 자던 창가 쪽 침대에서 건너와 내 옆에서 잔다고 한다. 좁은 자리에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모로 누웠다. 따뜻하고 달큼했다.

 

이러다 내 삶이 사라질까 조바심 들지만
작은 일에도 손뼉을 치는 첫째의 표정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일 없이 허무했다. 뭔가 그리우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누군가 만나고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고 싶진 않았다. 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열망했고, 헛헛한 속을 술로 달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갈 틈조차 없다. 첫째와 둘째, 늘 이 녀석들이 내 삶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인지라 이기적인 생각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자신의 삶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다가도 처음으로 아주 간단한 컴퓨터를 가르쳐줬더니 손뼉을 치며 깜짝 놀라는 첫째의 표정을 보며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저 아무렇게나 볶아서 만든 스파게티를 싹 비워버리는 둘째의 입을 바라보며 이것 외에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아침밥을 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반복되는 일상, 생사 다투는 큰일은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워 갈 뿐이다

 

녀석들을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누군가 내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농담 삼아 ‘물병 씻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 물병에는 보통 빨대가 달려 있어 물을 먹이기에 편리하지만 매일 씻어야 한다. 하루라도 안 씻으면 물때가 뿌옇게 낀다. 시커먼 곰팡이까지 생긴다. 씻기는 번거롭다. 빨대와 물통 뚜껑을 일일이 분해해야 한다. 빨대 속은 솔질도 해 줘야 한다. 그러나 씻은 물병에는 머지않아 다시 물을 담아야 한다. 빨대 물병 시기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두 개의 물병을 씻는 일은 주요 일과다.

 

반복되는 일은 많다. 매일 아침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씻기고, 가습기 물을 갈아주고 빨래도 해야 하고… 별것 아닌 일인데 매일 같은 반복에 지치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창궐하는 물때와 곰팡이야말로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사를 다투는 큰일은 없다. 찬란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견디지 못할 분노와 한숨도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울 뿐이다.

 

그것도 엄살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한 달에 한 번 현장학습을 나가면 김밥을 싸 주었다. 아침에 김밥을 싸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 적이 있다. 급식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같이 점심·저녁 도시락을 챙겨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나서다. 나는 겨우 하루치 도시락만 준비해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오셨던 걸까. 일까지 하시면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네가 인제 그걸 알았냐”며 눈물을 살짝 글썽이기도 하셨다.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찰나인 이 때를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

 

육아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녀석들은 내 아이들이지만 엄연한 타인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데 때로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소리도 지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늘 내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이 타인을(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돌봄으로써, 혹은 돌봄을 받으면서 느끼는 어떤 뭉클한 감정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인간은 여전히 반쪽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한다.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몸이 아닌 타인을 챙겨주고 닦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는 그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을 씻어주는 종교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예쁘게 핀 길가의 꽃잎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고, 빈 담뱃갑을 구기지도 않고 땅바닥에 떨궈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한 번도 타인을 돌봐준 적도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일 테다.

 

녀석들은 되레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내일 가져갈 준비물을 밤에 정리해 두겠다고 하자 첫째가 말한다. “아빠, 그러면 잠 오지 않겠어?” 아이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꼭 껴안는다. 신현림 시인은 <침대를 타고 달렸어>라는 시집에서 딸의 일기 중 이런 구절을 인용한다.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시인은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썼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면서 옥수수에 대한 설명을 봤다. 보통 우리는 옥수수 수염을 그저 쓸모없는 털이라고 생각하거나 ‘옥수수 수염차’ 정도만 떠올린다. 그 수염은 사실 한 올 한 올이 다 꽃이다. 그 한 올 한 올 수염마다 옥수수 알이 하나씩 맺힌다고 한다. 생각 없이 씹었던 옥수수 알 하나도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늘 옥수수 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수염이, 아니 꽃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품어내는 시간을 겪고 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이렇게 안고 있을 수 있는 순간, 아주 짧은 이 순간을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이 모두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 헛헛해지더라도 그 얼룩이라도 얼굴에 대고 비볐으면 하는 바람에서.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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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디 2019.05.02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뜻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전 임아영 기자님이 블로그로 글을 쓰신 초반부터 열심히 읽었던 초기 독자고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를 주변 지인에게 널리 추천하는 25살 여성이기도 합니다.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돌봄노동이 얼마나 공적 논의에서 배제되어왔나 크게 깨달았어요. 폭풍육아라고 할 만큼 고된 노동을 이렇게나 내가 몰랐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돌봄노동을 비가시화했던 걸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기자님과 동갑이신 고등학교 은사님이랑 대화했었는데 육아를 사회적 문제로 의제화한 책이 나왔다는 것에 매우 반가워하시더라구요.
    댓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가 바뀌길, 돌봄노동이 사회화되길 고대하며 함께 참여할게요. 늘 건강하시길!

    • 임아영 2019.05.10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초반부터 열심히 읽으셨다니 감동 ㅠㅠ

      여성들이 주로 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돼 온 거라는 생각을 저도 아이를 낳고서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돌봄노동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도 의문스러웠고요. 아이를 낳고서는 어떤 '균형'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됐는데... 아이와 나, 또 나와 남편, 또 일하는 나와 돌보는 나, 또 엄마인 나와 기자인 나와 또 시민인 나 등등등.

      맞벌이 부부가 문제이니 다시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답이 될 수 없고... 결국 남성, 여성 모두 균형을 이루는 삶을 우리 모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장시간 노동체제를 바꾸고 가부장적인 노동 구조를 바꾸고 또 돌봄노동을 모두가 나누는 평화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ㅎ 감사해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

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키우는 것

임아영

벚꽃이 흩날리는 하원길에서 둘째.

남편과 나는 2008년 함께 회사에 입사했다. 흔한 연애 레퍼토리처럼 입사 동기가 친구가 되었고, 친구가 연인이 되어 부부가 됐다. 일한 지 만 10년, 결혼한 지 만 7년. #사내커플 이니 “남편이랑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 불편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답은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이어폰 같은 것들을 집에 놓고 오면 급히 빌릴 수도 있고 편한 점도 많다. 출퇴근길 회사 일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는 것도 좋다. 우리는 밤에도 맥주 한 잔 하며 ‘회사 얘기’를 한다. 늘 “이제는 회사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면서도. 남편과 회사 얘기를 나누는 것은 즐겁다. 내 일, 내 동료에 대해 온전히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괴로울 때는 서로의 성별로 사회적 역할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사 엘리베이터에 남편과 함께 탔는데 한 선배가 나를 보며 물었다. “밥은 해주냐?” 나는 당황했다. 신혼 초 우리는 번갈아 아침밥을 했다. 내가 하는 날도 남편이 하는 날도 있었다. 결혼 전 약속도 했다. 서로를 사회적 성별의 틀로 가두지 말자고. “나는 당신에게 #생계부양자 의 역할을 강요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도 내게 가사노동과 육아를 더 많이 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선배의 별뜻 없는(?) 질문에 내 표정은 이미 나빠졌을 것이다. “제가 왜 밥을 해줘야 되죠?” 말투도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부터 그 선배는 우리를 보면 남편을 향해 묻는다. “밥은 해줬어?”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다.

사람들은 장난을 섞어 집요하게 물었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을 하느냐고. 우리는 서로를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로 국한시키고 있지 않은데도. 남편은 적극적으로 육아를 하고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됐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후 친정아버지도 말씀하셨다. “황서방이 고생하네.” 나는 두 아이들 모두 돌 지날 때까지 키웠다. 몸으로 낳고 몸으로 키웠던 2년을 떠올리면 가끔 아득하다. 혼자 잠들지도, 혼자 먹지도, 혼자 씻지도 못하는 존재들 앞에서 무력했던 마음들이 떠올라서. 엄마는 그 정도는 당연하게 해내야 ‘엄마’가 되지만 아빠는 엄마가 하는 일의 일부만 해내고 ‘훌륭한 아빠’가 된다.

나를 낳은 아빠에게 투덜거렸다. “아빠, 이거 원래 내가 하던 일이야. 심지어 황서방은 겨우 6개월밖에 안 해. 6개월이라고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다른 남자들이랑 비교해봐라.”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왜 남자들하고 비교해요? 이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엄마들하고 비교해야지.” 회사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경상이는 술을 못 마셔서 답답하겠다”고. 처음에는 “집에서 많이 마셔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다가 이제는 나도 다른 답변 기술이 생겼다. “선배는 제가 술을 못 마시고 있는 것은 안 보여요?” 더 하고 싶은 말은 참는다. ‘우리는 열심히 부부가 함께 육아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별뜻 없이 던지는 그 말들이 노력하는 우리에게 상처가 돼요.’

같은 회사의 같은 연차의 남편. 남편은 항상 노력했지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이 구조는 때로 내게 상처가 됐다. 모두들 엄마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니까. 남편이 하는 것은 늘 칭찬받으니까. 나는 가끔 칭찬받는 남편을 질투했다.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제일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명함 이었다. 먼저 취직한 친구들이 명함을 주고받을 때 숨고 싶었다. 깨달았다. ‘한국은 명함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사회구나.’ 명함을 획득하기 위해 울고 버텼던 20대를 기억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엄마가 되니 주변 엄마들이 다들 명함을 스스로 놓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은 전쟁이니까. 나 또한 갈팡질팡했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명함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렇게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기분으로 살 바에는 명함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매번 부딪혔다.

누가 물었다. “엄마가 된 이후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이냐”고. 쌩뚱맞게 #시민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대답은 이랬다. “좋은 기사를 썼을 때, 아니면 동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요. 엄마로서의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나, 동료로서의 나도 있어요. 사회에 좋은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각자 자신의 기능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데 직장에서의 성취감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대단한 기자는 아닐지라도 제가 일해서 제가 번 돈으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게 소중한 것 같아요.”

 

이제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명함 같은 것은 상관없이 모두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많은 선배 여성들이 버텨냈다. 그런데 버텨내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참고 남자 직원과 비교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 명함을 얻고 전투적으로 일하는 모습 외에 아이를 돌보고 함께 성장하는 삶도 시민의 삶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주저앉는 삶이 아니라는 것.

나는 이제 무난하게 있지 않는다. 남편과 나를 성별의 틀로 가두는 말 속에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는 ‘쫄보’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말하지는 못하도록 하는 ‘기운’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여성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남편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해서 칭찬받지만 나는 당연한 것을 하면서도 투덜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그게 너무 불공평해서 억울하지만 나는 남편과 최대한 #돌봄노동 을 나누고 함께 하고 싶다. ‘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큰애 머리 위의 벚꽃.

 

아빠도 육아의 절반 몫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회

황경상

둘째 #어린이집 에서 동네 치안센터를 방문하는 작은 행사를 열었다. 참여할 부모를 모집한다고 해서 나도 신청했다. 아내와 내가 둘 다 일할 때였으면 하기 어려웠을 텐데 육아휴직을 하니 이런 행사도 참여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으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와 치안센터로 향했다. 한 손에는 둘째의 손을, 다른 손에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평화로웠다. 5분 정도의 짧은 거리였지만 아이들과 함께여서 조심조심 천천히 걸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행렬을 지어 나름대로 질서 있게 인도를 가득 메웠다.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둘러보니 어른 남자는 선생님까지 다 포함해도 나 혼자였다. 다른 집은 모두 엄마가 참석했다. 그걸 의식하고 나니 길을 지나가면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저 무심결에 나를 바라본 거였을 텐데도 뭔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괜히 움츠러들었다. 느린 이동속도 탓에 빨리 벗어나지도 못해서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출산 이 문제가 되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 그리고 남성 육아휴직에 대해서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아주 오래 전에 육아를 위해 휴직을 했던 선배는 회사 상사에게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집이 자네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 집사람이 자네 아이를 함께 돌봐줄 수 있다고 하니 휴직은 하지 말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일하는 남자가 육아를 위해 시간을 쏟으면 무조건 쓸데없고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그 상사 역시 몹시 #가부장적 인 사고에 머물러 있었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능력 있는 후배가 일하지 않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굉장한 배려를 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셈이다. 선배는 정말 진지한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하고 휴직을 했다. 막상 휴직에 들어가서도 무춤한 순간이 많았다고 했다. 아빠가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아이들이나 엄마들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해서 ‘학생’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물론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다 보면 심심찮게 아이들의 손을 잡은 아빠들과 마주친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남성 육아휴직이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 육아휴직을 한 선배 역시 아이들과 놀이터에 있다가 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저씨는 뭐 하는 분이기에 이렇게 낮에 일을 안 해요?”

내가 육아휴직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 고교 친구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회사는 남자 비율이 낮긴 하지만, 몇 년 전에 전 직군에서 1명만 남자 육아휴직을 썼어. 아직은 한국 직장에서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인데 멋지다. 아들 녀석들한테 의미 있고 기억되는 시간되길 바란다.” 무척 고맙고도 힘이 됐다. 한편으론 그 친구 역시 육아휴직을 한 번쯤 쓰고 싶었다는 아쉬움이 행간에 묻어나기도 했다. 무탈하게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남성육아휴직자수 는 2017년 1만2000여명에 달한다. 2010년 800여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10년이 안 된 사이에 15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간을 쏟는 일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별스런’ 일이다.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들은 주변에서 과도한 상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많은 분들에게 분에 넘칠 만큼 많은 격려를 받았다. 아이의 친구 엄마들도 부끄럽고 쑥스럽게도 나에게 “대단하시다”라는 말을 자주 해주신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건 남성 육아휴직이 ‘대단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아이를 내가 키우는 일이고, 당연히 참여해야 할 육아의 몫을 나누어 지는 것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아내가 인정해 주겠지?”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나만큼 하는 남자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내의 ‘당연한 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또 어느새 금방 알게 된다. 나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얼마 전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반 단체 생일파티가 있었다. 아내가 일이 있어 내가 참석하게 됐다. 그 자리에도 남자는 나 한 명뿐이었다. 어쩌면 불편했을지도 모를 자리에 온 불청객(?) 아빠를 엄마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휴, 정말 일하는 게 낫지… 애들 키우는 거 진짜 힘들어요.” 엄마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맞장구칠 일도 많았다. “애들 보면 얼마나 화를 낼 일이 많은지… 근데 그럴 일은 없으시죠?”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저도 얼마나 화를 많이 내고 소리를 많이 지르는데요.”

늘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화를 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는데, 엄마들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위로가 됐다. 그저 우리는 엄마, 아빠를 넘어서 아이를 키우는 #동지 일 뿐이었다. 엄마들의 말을 들어보면, 엄마들이 느끼는 힘든 점도 육아를 오로지 본인만 짊어지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것 같았다.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쓰는 게 보편화되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반의 몫으로 참여하는 사회 분위기가 된다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두렵고 힘든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치안센터 방문 행사 후 아이의 알림장에 이렇게 글을 남겨 주셨다. “등원하고서 ‘아빠랑 경찰관 보러 가요’라고 말하면서 즐거워했어요.”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칭찬받을 일을 하면 곧잘 “아빠가 집에서 가르쳐 줬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여태껏 이룬 성취 중 그 어떤 것 이상으로 감격스러웠다. 앞서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했던 선배는 그때 아이들에게 간식을 만들어주고 함께 보냈던 시간이 지금 와서 몹시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더 많은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통해, 혹은 육아에 쏟는 시간에서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

 

[출처] 아빠육아는 훌륭하고, 엄마육아는 당연하다? [부부 육아일기 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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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으면 어른 된다’는 말이 싫었다. 인간의 성장이나 성숙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나는 많이 변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 자체가 달라진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는 보수일 수도, 어떤 각도에서는 진보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판단은 미루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를 낳은 후의 나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20대의 나는 자주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불안해했다. 아이를 낳은 30대의 나는 그런 20대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이가 내 불안을 줄여준 것인지, 엄마 노릇을 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불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를 낳고 훨씬 안정됐다.


 

육아로 성취의 삶 멀어질까 두렵던 나
그런데 성취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사회가 주입한 메시지, 틀렸음을 알았다

 

물론 육아는 힘들었다. 아이는 24시간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확보되지 않자 아이를 돌보기 위한 준비가 하나도 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나 외의 존재를 온전히 돌본 적이 없었구나. 이런 종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었구나.’ 몸이 ‘돌봄의 하루’에 적응하면서 ‘돌보는 존재’를 배워가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은 무엇인가. ‘아이를 낳게 되면 모든 것이 멈춰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었다. 육아휴직 전 나는 ‘아이를 기르는 동안 성취의 삶과는 멀어지겠지만’이라고 적었었다. 그런데 그 ‘성취’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나는 그동안 주입받아왔던 사회의 메시지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결혼한 지 7년,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를 써온 남편은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이다.

■ 누군가를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첫아이를 낳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벅찰 때였다. 어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지어 혼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아기를 보고 두려웠을 때.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맞은편에 십여명의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했다. ‘저 사람들도 내 아기처럼 아기였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우리 모두 언젠간 아이였고 누군가의 도움, 돌봄 없이는 클 수 없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나는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돌보러 얼른 가야 할 것 같아서.


 

언젠가 노인이 되어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시절이 올 것이다. 아주 조금 겸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라는 미숙한 존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로 올라가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성취의 메시지에 가슴 떨린 적이 많았다. 잘하고 싶었다. 일도, 일 밖의 것들도. 그것들이 나를 괴롭혀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 성취는 누구의 기준인가? 그 기준에 따르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성취가 될 수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높이 올라가려는 남성의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임신하고 배가 나오니 달릴 수 없었다. 아이를 안고서도 달릴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삶은 후퇴한 삶인가? 주로 여성들이 해온 출산, 양육의 가치를 폄하해온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회사에서부터 대중매체, 정치권까지 아이 기르는 삶을 폄하하는 말은 곳곳에 있었다. 기저귀도 한번 갈아보지 않은 자들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 엉덩이가 짓무르지 않게 노력하는 삶’을 깔아뭉갤 때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구나.’


 

아침에 아이들이 파고드는 행복한 시간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멈춰서며 배웠다
꼭 성취 위해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실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이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르게 살겠다고 아등바등한 결과는 나 또한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해왔다는 슬픈 깨달음이었다. 아이가 내게 알려줬다. ‘엄마, 나는 엄마가 필요해요.’ 아이의 눈빛이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나는 주춤했다. 멈춰서야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온해졌다. 달리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침에 일어난 작은 아이들이 내 품에 파고들 때다. 이 행복을 왜 나는 밀어내려고 했을까. 아이를 낳기 전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꼭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가 사뿐사뿐 걷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어릴수록 걸음에 몸무게를 싣는다. 20㎏이 넘는 첫째보다 13㎏에 불과한 둘째의 발소리가 훨씬 크다. 사뿐사뿐 걷는 것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런 작은 것들을 배워왔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배운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심어주려고 했던 모성은 여전히 내게 없지만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스스로 내 모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어쩌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이렇게 모성을 긍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를 낳은 이후의 내가 더 좋다. 내가 모성을 긍정하는 이유다.


 

■모두가 돌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내가 모성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남편 덕분이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써왔다. 돌볼 시간을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남편과 나도 많이 싸웠다.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전쟁이니까. “남편 좀 풀어주라”는 농담 앞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릴 때도 많지만, 또 어떤 날은 남편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잖아’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으면 힘이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남편과 논의한다. ‘여성의 전유물인 돌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하는 돌봄’으로 ‘서로돌봄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니까.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 된다는 것
벅차고 힘들지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돌봄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남편이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남편이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은 처음이다. 오랜 시간 아이 둘을 돌봐온 친정엄마의 무릎이 탈이 났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오전 11시40분에 하교한다. 선택지가 없고 너무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당장 경제적인 상황을 걱정해야 해 오래 육아휴직을 쓸 수는 없다. 길어도 6개월만 쓰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돌봄을 전담하는 존재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결이 남편에게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줄 것이다. 남편이 돌봄의 기쁨을 많이 누리길 바란다. 내가 육아휴직을 했을 때 그랬듯이.


 

그럼에도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여전히 벅찬 일일 것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자신의 지난해 일기를 보여줬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이준이는 어느새 제법 말을 한다. ‘아빠 미워!!’ 이준이는 얼마 전부터 단것을 못 먹게 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못 갖고 놀게 하거나 하면 이런 말을 한다. 어제는 친구가 갖고 온 장난감을 하염없이 갖고 놀기에 이제 자자 했더니 ‘시러. 여기 더 있스 거야’라고 한다. 어제 아침에는 녀석을 안고 교차로에 서 있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녀석과 손을 잡고 어린이집까지 걸었다. 이준이 녀석과 손잡고 걸으면 좋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녀석의 작은 손을 잡고 걷는 일 자체가 좋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한다. 한참을 손잡고 같이 걷던 녀석은 갑자기 ‘아나저요’라고 한다. 번쩍 들어 안아준 녀석이 내 품에 폭 안긴다. 폭 안긴 녀석을 안고 봄날 가로수의 연둣빛으로 가득한 교차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인생의 짧은 순간은 그렇게 간다. 그날따라 이준이는 어린이집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며 울었다. 울지 않아도 녀석이 빠빠이 하며 손 흔드는 모습만 봐도 늘 가슴이 아팠다. 녀석의 손은 늘 내 가슴을 휘저어 놓곤 했다. 아, 그냥 녀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 전체를 봐선 나은 일 아닌가. 두진이 때도 똑같이 들던 생각이다. 못난 아빠는 또 이렇게 글을 남긴다.”(2018년 5월11일)


 

남편의 일기를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이집에서 아이에게 손을 흔들 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남편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 전체를 봐서는 나은 일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 모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잠을 하도 안 자서 애먹였던 아기 두진이는 이제 엄마를 걱정해줄 줄 아는 어린이가 됐다. 어제 둘째의 장난으로 머리를 꽈당 박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있었다. 두진이가 내게 와서 “엄마 괜찮아?”라며 짧은 팔로 나를 안고 ‘호호’ 불기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질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들을 내게 돌려주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데 ‘내가 너를 돌보는 것인가, 네가 나를 돌보는 것인가’ 눈물이 나려 했다. 남편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보여준 육아일기
아이를 통해 배우고 위로받던 내 모습이
그의 일기 안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두진이가 오늘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힘이 센데 왜 힘들어해?’ 청소기를 돌리면서 꽤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보다. ‘그러게. 힘이 센데 왜 나는 힘들어하고 있을까.’ 몸이 너무 피곤하다. 오후 4~5시만 되면 뇌가 흐물흐물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애들을 볼 때도 별일 아닌데 소리를 빽 지르고는 금세 후회를 한다. 오늘도 잠자리에서 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해 두진아, 너한테 더 사랑을 줘야 하는데…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 녀석은 듣고도 암말도 않는다. 자면서 가끔 녀석의 손을 만지작거려본다.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부서질 것만 같았던 손은 제법 두툼해졌다. 최근에 장인어른이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 어디선가 그 말을 들었나보다. 몇 주 전인가, 책을 읽어주는데 갑자기 ‘아빠는 수순하지 마’ 이런다. 뭔 말인가 싶어서 몇 번 다시 물어보자 ‘눈 많이 써서 아프면 안돼’라고 말한다. 아빠는 수술하지 말라는 얘기였던 거다. 수술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마음이 뜨끈해졌다.”(2018년 4월23일)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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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es 2019.02.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너무 좋아요.. 출산 후 육아분담 계획 세우는 중인데 흘러흘러 이 곳을 발견했어요. 저도 워킹맘 이란 단어를 증오하는 사람이예요. (여자에게 가사육아노동과 근로노동을 떠넘기는 느낌이랄까?)
    기자님처럼 저도 아기라는 인생의 첫경험을 남편과 온전히 함께하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9.03.03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킹맘은 엄마들한테 모든 것을 전가하는 말이지요. ㅠㅠ 저도 웬만하면 워킹맘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육아분담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니... 파이팅입니다!! 많은 순간 지치고 멈춰서고 싶을 때가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아기를 보며 힘내시길요. 앞 문장을 쓰고 나니 많은 일들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 낳은 후의 제가 더 좋아요. 엄마든, 아빠든 아이 낳은 후의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