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07.21 이해인 수녀님의 사인
  2. 2014.05.01 교황이 방문할 내포 천주교 성지 ②
  3. 2014.04.29 교황이 방문할 내포 천주교 성지 ①

 

 

이게 뭘까요? ㅎㅎ

 

15일 이해인 수녀님의 신간 <교황님의 트위터>(분도출판사) 출간 기자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기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부산 광안리 앞 조개껍질입니다. 수녀님은 부산 수도원에 계시죠.

기자간담회에서 조개껍질을 받기는 처음이네요. ㅎ

 

게다가 조개껍질마다 '말씀'이 담겨 있었습니다.

뒤에 종이로 돌돌 말려 있었는데요.

 

제게 온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뭔가 제 상황에 적합한 '말씀'이군요.

계속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기자간담회가 끝나고서는 기자들에게 싸인을 해주셨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께 제일 처음 선물받은 책이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었습니다.

싸인을 받게 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그런데 싸인을 받으러 기다리는데 갑자기 수녀님이 '스티커'를 찾으시더군요.

무슨 스티커.. 말씀이지? 싶었는데...

 

 

색색의 스티커를 붙이시는 수녀님의 손! ㅎㅎ

소녀 감성 수녀님이셨습니다... ^^

 

 

 

이번에 수녀님이 낸 <교황님의 트위터>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위터에 남긴 말을

이 수녀님이 묵상한 글과 기도를 더한 책입니다.

 

책 왼쪽에는 교황님의 트위터 글,

오른쪽에는 수녀님의 묵상글과 기도가 담겼습니다.

 

 

지난해 8월 9일 트위터에 남긴 글입니다.

"We are all jars of clay, fragile and poor, yet we carry within us an immense treasure"(우리는 모두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엄청난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이런 묵상글을 더했습니다.

"저 자신의 약함, 단점, 실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삶이 힘겹고 괴로울 때는 얼른 화살기도를 바치며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해보기도 하고,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처럼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것처럼 저도 당신을 사랑하려면 당신의 사랑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해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신을 미워하고 낙담하며 아무렇게나 팽개쳐 둘 순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보물임을 알면 다른 이들도 보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님, 제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되 스스로를 멸시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당신의 사랑받는 보물임을 잊지 않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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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성지 중심으로 돌아봤습니다.

 

먼저 신리 성지.

 

 

 

 

 

<신리 성지>

조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우촌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41 041)363-1359

 

신리 성지는 1860년대 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으로 1865년 위앵 신부는 400여명 주민 모두가 신자라고 기록했다. 이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완전히 초토화된다. 교회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 42명인데 단일 마을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손씨 집성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신리에는 손씨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조선의 카타콤바(지하무덤)’로 불리는 이유다.

 

 

 

 

다음은 홍주 성지.

 

 

 

<홍주 성지>

충남 홍성군 고암리 552-11

 

홍주 성지는 공주의 황새바위 다음으로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기록상으로는 212명의 순교자가 있는데 이름 없는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정이었던 황일광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백정이라 가까이 갈 수도 없었던 양반들이 ‘형제님’이라 불러주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일광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다. 난 두 개의 천국을 봤다”고 말한다.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그도 홍주에서 순교했다.

 

 

 

 

 

마지막은 교황이 오셔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할 해미 성지입니다.

 

 

 

 

 

 

 

<해미 성지>

무명 순교자 생매장지

충남 서산지 해미면 성지1로 13, 041)688-3183

 

서산 해미 순교 성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해미는 내포의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들어선 군사요충지였다.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000여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부족해지자 관군들은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넣어 생매장했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유해 터에서 발견된 치아와 뼛조각들이 전시돼 있다. 놀라운 것은 어린이들의 치아도 많이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내동댕이쳐 죽였던 돌다리 ‘자리개돌’도 보존돼 있다.

순교자들의 재판을 했던 읍성의 동헌부터 해미 시내를 거쳐 유해 발굴터까지 1.5㎞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에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은 천주교주교회의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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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내포 천주교 성지에 1박 2일 동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내포 지역은

충남 서북부 당진·예산·홍성·서산 등을 포괄하는 지역을 말하는데요.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곳이자 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곳입니다.

이 지역을 돌아보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포'의 의미?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내포(內浦)라는 지명은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을 말한다. 내포는 예로부터 물과 통하는 지역이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천주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온 것도 지리적 여건 덕분이다. 프랑스 사제들은 바닷길을 따라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 지역에 천주교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 신자가 많았던 만큼 박해 피해도 컸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4년 보고서에 “잿더미에서 소생한 내포에 작은 신자 집단이 생겼고 이곳은 옛날 가장 혹심하고 잔인한 박해가 계속 일어났던 곳입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는데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교황은

솔뫼 성지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해미 읍성에서 폐막 미사를 집전할 예정입니다.

 

저는 6곳의 성지를 돌아봤습니다.

여사울 성지, 합덕성당, 솔뫼 성지, 신리 성지, 홍주 성지, 해미 성지 등 6곳입니다.

 

 

첫번째 여사울 성지입니다.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  041)332-7860

한국인 사제 1·2호인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집안에 복음을 전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2~1801)의 생가터다. 여사울은 서학이 학문 차원을 넘어 신앙으로 퍼져 나가는 ‘복음의 못자리’ 역할을 한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졌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는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때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했다.

 

 

 

두번째 돌아본 곳은 합덕성당입니다.

 

 

 

 

 

<합덕성당>

내포의 첫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

충남 당진시 합덕면 합덕읍 275  041)363-1061

 

합덕성당은 내포의 첫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이다. 현재 합덕리 주민 중 95%가 가톨릭 신자일 정도로 천주교 영향이 컸다. 김성태 주임신부(41)는 “예산, 당진 어느 동네를 가도 순교자가 있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1890년 양촌과 간양골에 파견된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 합덕성당과 공세리성당의 전신이 되었다. 1899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처음에는 한옥 성당과 사제관에서 시작했다. 제7대 페렝 신부 때 서양식으로 건축해 1929년 완성한 건물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다.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 합덕성당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관(洋館)'으로 불리며 합덕의 상징이 되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학교의 전신인 교리학교를 설립했고 고아들을 위한 성영회도 운영했다. 성장 사제관은 근대식 병원의 역할도 했다.

 

 

이후 합덕 성당부터 3.2㎞ 거리인 솔뫼 성지까지 이어진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안내판은 이 길이 순례길임을 알렸는데요.

물고기(익투스)는 천주교에서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한 시간여 걸어서 솔뫼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솔뫼 성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  041)361-5021~2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생가 터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에 원래 순례객이 많지 않은 때인데도 매일 100여명으로 방문객이 늘었다.

1836년 16세였던 김대건은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반년이나 걸어서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5년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다 이듬해 효수형에 처해졌다. 사제 생활 1년1개월 만이었고 이때 불과 스물다섯살이었다. 이용호 신부(47)는 “라틴어와 불어, 영어, 중국어까지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는 계급 사회였던 조선에서 만인의 평등을 꿈꾼 사상가였고 서세동점의 세계 정세를 간파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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