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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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잡자 2021.04.06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식 리딩방 기사 잘 봤습니다 대형 증권회사(ㅋㅇ)의 문어발식 리딩방에 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가 2007년도 부터인것 같아요 정부는 손놓고 있어요 후속기사 꼭 부탁드립니다 불법 사기는 가정을 풍비박산 냅니다

 

 

남편이 복직했다,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됐다

임아영

9월 1일 일요일 밤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다음날은 월요일이기도 했지만 남편의 복직일, 첫째의 2학기 #개학일,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자기 직전까지 남편과 아이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첫째의 2학기 #방과후수업 시간, #돌봄교실 시간, #피아노학원 시간을 표로 정리했고 중간에 둘째 어린이집 하원 시간까지 정리했다. 할아버지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아이들의 활동과 휴식 시간도 고려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묘하게 불안했다.

월요일 오전 7시 남편은 아이들과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또 나는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준비물을 점검했다. 돌봄교실에 가져 갈 색연필과 사인펜은 사지 못해 내일 가져가기로 하고 둘째 #어린이집 이불까지 개켰다. 오전 8시20분이 되자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기 위해 집에 오셨다. 10분 후 다같이 집을 나왔다. 남편과 나는 회사로, 첫째와 둘째는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려다주러.

아이들과 빠빠이를 하며 헤어지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의 바지를 보고서다. 8월 30일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시면서 9월 2일부터 아이들의 등하교(원)를 책임지시기로 했다. 아버지는 첫날 검정색 긴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장은 아닌 것 같은데 정장 디자인으로 나온 등산 바지인가.’ 할아버지가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하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학교, 어린이집에 와서 손주들이 속상해하면 어쩌나’를 걱정하셨다. 여전히 엄마가 데리러오는 아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아빠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라는 게 걱정되셨을 터이다. 하얀색 티셔츠에 정갈한 검정색 바지를 갖춰(?) 입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 걱정 때문인가 싶었다.

첫째에게는 한 번 물어봤다. “2학기가 되면 아빠가 회사를 다시 가고 할아버지가 학교를 데려다주실 텐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싫을 것 같아?” 첫째는 “왜?”라고 오히려 물었다. “다들 엄마가 오는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속상할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에 첫째는 “괜찮은데?”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이에게 웃으며 협박(?)했다.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속상해하면 나쁜 거야.” 늘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엄마, 아빠가 할 일을 대신 해주시는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나 다름 없어.”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이가 ‘엄마의 부재’를 속상해할까봐 전전긍긍한다.

하필이라 말하면 안 되지만 하필... 남편 복직 다음날에는 둘째 #어린이집 #참관수업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둘다 참여하기 어려워서 할아버지가 나서시기로 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이집 알림장에 사진이 올라왔다.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웃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보니 뭉클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어색하실까봐 같이 나서신 듯했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얼마나 복 받은 상황이야.” 그래, 맞다. 복받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항상 나는 고맙지만도 않고 미안하지만도 않은, 고마움, 미안함, 죄책감, 사회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맞댄다. 퇴근하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고생하셨지. 안 오던 할아버지까지 오니 엄마, 아빠, 할머니에 할아버지까지 부르셔야 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참관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참여한 부모들을 부를 때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만 불러도 됐을텐데 ‘할아버지’까지 와서 한 사람 더 불러야 했다는 얘기였다.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의 절대적 도움으로 아이를 키우는 ‘복받은 우리 부부’는 다시 #맞벌이 부부로 돌아왔다. 남편은 복직해 정신이 없고 나도 남편이 복직하니 정신이 없다. 남편이야 6개월간 쉬던 회사를 나오니 정신이 없지만 나는 다니던 회사를 다니는데 너무 피곤해 밤마다 뻗었다. 양육 구조를 다시 맞벌이 부부 구조로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헷갈리실까봐 매일 아침 ‘오늘 동선’을 메시지로 전달하면서 깨달았다. ‘다시 외줄에 올라왔구나. 조금만 삐끗하면 떨어지는 외줄에.’ 아무리 친정부모님이 계셔도 남편이 아이들을 돌봤던 육아휴직 시절의 ‘안도’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육아는 우리 부부의 일이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이 아니니까. 묘하게 계속 울적했다. 둘째를 낳고 회사로 돌아온 후 나는 자주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우울감이 또 휘감을까 두려웠다.

내가 꿈꾸는 육아는 내가 출근하며 아이를 어린이집·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퇴근하며 아이를 데려와 저녁을 먹이는 풍경이다. 조부모가 ‘독박 육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조부모가 도와줄 수 없어서 역차별을 받는 가정이 없는 그런 풍경 말이다. 늘 마음 한켠엔 언젠가 어떤 고리 하나라도 문제가 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 생계부양자는 아빠고 돌봄을 담당하는 건 엄마니까. 우리 부부가 서로를 그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우리도 사회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남편과 함께 출근하는 길 짧았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을 오래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과 복직 전날 밤 첫째 방과후수업에 대해 논의할 때였다. 2학기부터 돌봄교실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 돌봄교실 시간과 방과후수업 시간이 겹쳐서 1학기에 하던 방과후수업 중 2개를 빼려고 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보드게임 수업은 두자. 쑥스러움 많은 아이가 친구들과 같이 보드게임 하면서 사회성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더라.” 남편은 1학기 방과후수업 참관을 도맡았다. ‘남편이 내가 보지 못했던 아이의 표정을 다 보고 있었구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이 오래 그리울 것 같다. 다행히 아빠가 회사에 다시 가고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 남편과 내가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육아를 할 순 없지만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어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시대에는 ‘외줄’을 떠올리지 않는 환경이 되길 바라면서.

 

할아버지가 첫째는 학교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황경상

 

“아빠 오늘부터 회사 가는 거야?”

“응~”

“아쉽다.”

거의 반년에 걸친 육아휴직을 끝내고 출근하는 첫날, 학교에 가려고 함께 현관을 나서던 첫째가 말했다.

“회사 가서 잘 하고 와~”

녀석, 훌쩍 컸구나. 괜히 미안했다. 이제부터 데려다줄 수 없다는 사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잘 보살펴 줄 테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이 나도 마음 속 한구석에서 솟구쳤다.

복직하기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 시간들을 나는 잘 보낸 것일까. 아이들에게 나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을까. 휴직을 하면서 결심했던 수많은 다짐들을 나는 잘 실천했나. 자신이 서질 않았다.

첫째와는 함께 만들기도 더 많이 하고 컴퓨터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둘째와는 밖에서 더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렇지만 늘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느라, 빨리 밥을 먹고 씻고 자야 한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목표했던 것에 반에 반도 채우지 못했다. 생활습관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서 납득시키기보다는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일이 더 많았다. 나 스스로도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에 조금 남는 시간에는 운동도 하고 책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애당초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렇게 시간이 남을 정도로 녹록지가 않았다.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복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 자리에서 첫째에게 아빠가 육아휴직하고 나서 뭐가 기억에 가장 남았느냐고 물어봤다. 어떤 대답을 할까. 막상 돌아온 대답은 싱거웠다. “양천탐험하고 떡볶이!”

‘양천탐험’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별 것 아니었다. 구청에서 주민들에게 건강을 위한 산책로를 만들었는데, 그걸 알려주기 위해 보도블록에 박아 놓은 표지판을 찾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첫째는 유난히도 그 표지판을 신기해했다. 새롭게 하나를 찾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다.

방학을 한 뒤에는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 하나를 듣고 하굣길에 나와 함께 그걸 찾으러 다녔다.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하나하나 더 찾을 때마다 첫째는 신나서 뛰어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 때로는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걸어야 했지만 첫째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녀석과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 먹었다. 밥 차려 먹기 귀찮아서 먹자고 한 것인데, 첫째는 그것도 몹시 좋아했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는 녀석이 ‘헥헥’하면서 물을 마셔가며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그런 별 거 아닌 일이 녀석에게는 너무나 기억에 남았나보다.

둘째 녀석은 여행 중 머물던 숙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고 나오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수건을 여기에 좀 걸어 놔라~” 아마도 손을 닦을 수건이 없었나보다. 잔망스런 말투에 아연실색했다가 한편으론 흐뭇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당연히 집안일은 아빠가 하는 것이고, 수건도 아빠가 걸어놔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나보다. 헛물켠 셈은 아닌 것이다.

첫째가 인형들 사이에 노트북(?)을 놓고 회사놀이를 하고 있다.

 

두 녀석은 숙소에서 ‘회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숙소 밖 마당에 앉아 있던 나에게는 ‘부장님’의 역할을 맡겼다. 첫째 녀석은 회사에 가는 아빠, 혹은 엄마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둘째 녀석은 집에 있는 아이 역할이다. 둘이서 현관문을 드나들며 열심히 논다. 첫째는 테이블에 장난감으로 노트북 컴퓨터도 만들어놓고 뭔가를 심각하게 두들긴다. “이거 어떻게 하는 놀이야?”라고 묻자 첫째가 답한다.

 “응, 내가 동생한테 회사에 가면서 자고 있으면 들어온다고 하고 회사에 갔다가 그 다음에 동생이 자고 있으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놀이야.”

살짝 말문이 막혔다. 우리 부부가 매일 같이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오늘은 늦게 오는 날이라 자고 있으면 들어올 거야” 하는 말을 녀석들은 잊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와의 시간을 그렇게나 갈구하는 녀석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우리 때는 그런 것을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며 부러워하는 선배들도 계신다. 여건이 안 되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행운이지만, 이대로 육아휴직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뭔가 찜찜하고 아쉽다.

복직 둘째 날, 회식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 녀석들을 보니 왠지 인상이 달라 보인다. 그새 부쩍 큰 느낌이다. 겨우 하루 안 봤는데. 괜히 녀석들의 머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었다.

 

아빠의 복직 직전 휴가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바다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이 끝났다 [부부 육아 일기] 1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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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하고 싶다

임아영

토요일 수영 강습에 가는 날이었다. 8세 첫째가 수영을 시작하고 두번째 강습을 가는 날. 원래도 겁이 많은 녀석이라 겨우겨우 설득을 해서 수업을 받기로 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갔던 남편이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데리고서였다. “왜 다시 왔어? 수영 안 갔어?”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영장 앞에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했다. 겁에 질린 아이를 우선 안고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 “괜찮아, 수영 오늘 안 가도 돼.” 그러나 속에서는 ‘왜 이렇게 작은 일에 겁을 내는 거야’ 답답했다. 표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이를 다독였다. 5분쯤 지났을까. 다시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친구가 와 있을테니 한번 다시 가보자. 친구 수영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수영장에 도착해 친구가 수영하는 모습을 봤지만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이가 물을 겁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로 ‘나쁜 생각’도 올라왔다. ‘친구는 가서 잘 하는데 너는 도대체 왜 못하는거야? 그래서 도대체 어떡하려고?’ 어릴 적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이 제일 싫었는데 말이다. 폭발한 건 수학을 가르치면서다. 집중 못하는 게 당연한 8세인데 내 기준은 한없이 높다. “왜 자꾸 딴 곳을 보는거야. 문제를 푸는데 집중하라고.” 내 말이 반복되자 아이는 풀이 죽는다. 풀이 죽은 눈을 보고 있으면 괴롭다. 그러나 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을 한다. 그러다 내 말에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제발 엄마 말에 대답을 똑바로 하라고!” 화를 내고 나면 자괴감이 피어오른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누웠다. “아까 엄마가 화냈을 때 무서웠어?” 아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팔에 기댄 아이의 고개가 움직이자 마음이 아프다.

‘이제 시작인가. 보육의 단계가 끝나고 이제 교육의 단계가 되어서 그런가.’ 사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어른’이 된 나는 아이에게 다칠 어려움을 ‘막고 싶은’ 존재가 됐다. 물론 부모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세상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지만. 어릴 때 엄마는 말했다. “네가 잘 된다면 엄마는 바랄 것이 없어.” 고3 때 독서실에서 밤늦게 오는 나를 보는 아빠는 늘 미안해했다. “힘들어서 어쩌나. 참으란 말 밖에 할 수 없구나.” 그 말들을 듣는 어렸던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자식을 키우며 어떤 불안과 어떤 괴로움을 맞닦뜨렸을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 힘만으로 키우지 못하는 구조에서 남편과 나는 #부모님의도움 을 받아 #양육 을 유지하고 있다. 첫째, 둘째를 #어린이집 에 등원시키고 또 하원시켜 우리 부부의 퇴근까지 아이들을 봐주신 건 ‘내 엄마’였다. 서른이 넘어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유지하기 어려운 생활. 나는 이 구조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부모님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상이 #조부모 도움 없으면 아이를 키우기 힘든데 ‘정말 복 받은 상황’이라 말하기에 그렇다고 체념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는, 여전히 아이와 다름 없이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불쾌하다.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양육을 부부의 힘만으로 할 수 없기에 수반되는 갈등들이 몰아치면 ‘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면 모든게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도 올라온다. 그럴 때 생각한다. ‘서른여덟인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부모님에게 독립하지 못했구나.’ 딸이 위험할까봐 독서실에 데리러오던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열아홉살이었지만 남편이 복직하면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나는 서른여덟이다. 서른여덟인 내가 부모님에게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지원을 받지 않고 버티면 결국 노동시장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은 나이기에 ‘부모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에 이른다.

한국은 ‘가족 자원’으로 버티는 구조다. #가족자원 이 있는 사람은 복받은 자고 가족 자원이 없는 사람은 차별적 상황에 몰린다. 청년이 취업이 어렵고 결혼도 혼자 힘으로 하기 힘든 구조에서 부모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부모는 도대체 아이를 몇 살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내 불안은 거기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면 독립할 수 있는 사회 구조라면 양육이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을텐데. 아이가 수영하는 게 무섭다고 겁을 내는 것이, 아이가 빼기를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이 아이가 혼자 서지 못할까봐 지레 겁 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믿어줘야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다시 사회를 들여다보면 또 두려워진다.

내 부모는 내게 헌신했고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다들 헌신하고 싶어서 헌신하는 것일까. 사회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가족 자원에 의지하는 풍경을 볼 때 두렵다. 그러나 가족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구조가 유지된다면 아마 나도 아이들에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가족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회를 믿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자식과 부모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당위의 문장들로 세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려 한다. ‘아이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안을 동력 삼아 아이에게 헌신하지 않도록 양육의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문장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게 두렵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말해본다.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

황경상

 

“우리를 키우기 싫어서 그런 거지?”

 원래는 요즘 들어 죽어라고 말 안 듣는 녀석들을 곯려주려고 했다. 아내가 진짜 엄마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현관문을 나서면서 “진짜 엄마는 곧 올 거야”라고 거짓 연기를 했다. 잠시 있다가 다시 집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은 안도 반, 야유 반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첫째 녀석이 뱉은 말이 그랬다. ‘요 녀석, 많이 컸네’ 싶다가 뭔가 마음이 찌릿하다.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냐? 키우기 싫어서 그랬다니.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른이 다 돼 가지고도 가끔 아이한테 이렇게 서운하다. “야, 우리가 정말 얼마나 힘들게 너희를 키우는지 아냐”라는 ‘치사빤스’ 같은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한 번은 또 이랬다. 책을 읽어달라고 해서 나름대로 등장인물 각각의 목소리를 살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아이가 그런다. “연기하지 말고 그냥 읽어~” 갑자기 마음이 팍 상했다. 완전히 삐쳐 버렸다. 책 읽는 것도 그만뒀다. “아빠가 나름대로 얼마나 정성들여 읽어주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아이한테 심통을 부렸다. 나는 왜 싸우려고 하는 걸까, 저 꼬맹이들이랑. 다 큰 어른이.

아이들에게 해 주는 것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나는 보상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너희들도 이렇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자꾸만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생각하려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란다. 희생이나 헌신에 보답을 바라는 모습에 더욱 입맛이 아리다. 내가 좋아서, 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아이들인데.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부모님에게 얼마나 서운한 말들을 많이 던졌을까. 고교시절 한 번은 내가 꼭 갖고 싶었던 것(아마 좀 더 나은 성능의 컴퓨터였던 것 같다)을 사 주시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같은 책을 사 모으며 부모님에 이렇게 말했다. “돈 한 번 원 없이 벌어봤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을까.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하루 종일 두 녀석과 함께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막 뽀얗게 씻긴 녀석들과 모기장을 친 침대 위에 누웠다. 마침 점점 저물어가는 여름의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온전히 나에게 기댄 작은 머리통 두 개와 들척지근한 옅은 땀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말 그대로 행복했다. 요 녀석들과 함께 보낸 이 시간이 언제고 그리울 것 같다. 이 달콤함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일을 그저 헌신이나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얻는 것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 이야기책을 읽어주면서 농담 삼아 말했다. “아빠는 벵에돔 좋아해, 커서 이거 사줘야 해~” 그러니까 아이가 말한다. “아빠, 아빠는 초코를 좋아하니까 초코 벵에돔 사줄게.” 웃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더 보탤 말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껴안고 한 번 입을 맞춰볼 뿐이다.

조해진의 소설 『단순한 진심』은 어릴 때 철길에서 기관사에게 발견된 뒤 그 집에서 1년 정도를 보내다가 프랑스로 입양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얼핏 보면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 타인일지라도 아주 잠깐이나마 곁을 내어줬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포옹은 누군가를 안으며 동시에 나를 안는 것”이라고 썼다.

물론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일과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일은 다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역시 아이라는 타인에게 곁을 내 주는 일이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오히려 자신의 울타리만 더 크고 공고하게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아이를 통해 난생처음 온전히 내 곁을 내 주는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이 세상으로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아이를 낳은 뒤 나와 전의 나를 비교하면, 더 젊었을 때의 나는 더 건조하게 세상을 바라봤고 나를 둘러싼 껍데기는 더 단단했다. 지금은 적어도 아이를 통해서 좀 더 생각한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줬던 사람들, 웃으며 자신의 넉넉한 곁을 내어줬던 사람들의 고마움을. 아이와 함께 살아갈 다른 아이들을, 그리고 나와 함께 늙어갈 그 부모들을.

아마도 부모님은 이미 아셨던 것 같다.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나아가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곁을 주고 보듬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라고.

 

[출처] 부모는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부부 육아 일기] 12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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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

임아영

아이들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 보고 있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사회가 여전히 여자인 나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건 10년 전 취업 때였다. 졸업반이던 시절 원서를 많이도 썼다. 50번까지 세고 더 세지 않았던 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들의 취업이 힘들다는데 민간 기업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서류 합격도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불합격 문자를, 불합격 메일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두려웠다.

 

밥 사주겠다는 동기를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앉아있었던 날이었다. 양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 동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가 명함을 주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울컥해서였다. 앞이 캄캄한 ‘두려움’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남자 동기들, 후배들의 ‘취직’이었다. 남자 동기, 후배들이 취직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민간 기업에서는 여자들을 원하지 않는구나. 뽑는다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양 자체가 적구나.’ 그러면서도 지금 어느 시대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자책했다.

 

 3년이 걸려 어렵게 취직했다. 회사에는 여자 선배보다 남자 선배가 항상 많았다. 딱히 #남녀차별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도, 사회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막은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여성들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서 깨달았다. 세상은 여자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한 뒤 일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이는 엄마가 봐야 잘 크지”라는 말을 다들 너무 당연하게 할 때 무력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키울 시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사회는 남편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이 둘을 낳으며 #육아휴직 을 2번 하면서 내가 시간을 쓰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성 외교부장관, #여성대통령 이 나온 사회에서 뭐가 불만이냐는 시각을 적지 않게 만난다. 아니다. ‘논쟁의 초점이 잘못돼서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곳들에 여성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됐지만 여전히 #절반 은 되지 못했으며 이 속도가 더딘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큼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이다. 여성들이 #임금노동#돌봄노동#이중 으로 떠안게 되면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남성들은 방관자가 된다.

 

회사 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 해야 하는 여성을 회사에서 덜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입사 12년차가 되니 이해가 된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다. 수익을 목표로 하는 회사에서 여성은 언젠가 회사 일을 딱 8시간만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니(8시간도 겨우 해낼 수 있는 인력이 되니) 8시간 이상 뽑아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갑지 않은 노동력이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남성은 #생계부양자 역할이, 여성은 #돌봄노동자 의 역할이 강화되며 불평등은 심화된다. 여성들이 20대 후반에는 고용률 83%대까지 오르다가 30대 후반에는 57%까지 떨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20대에도 30대, 50대 초반까지 남성의 고용률은 90%대로 비슷하게 유지되지만 여성들은 직장에서 살아남는 자와 살아남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사회는 이 여성들을 이렇게 분리한다. ‘워킹맘’과 ‘전업맘’이라면서.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보고 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앞서 말한 ‘억울함’들이 조금은 해소됐다. 남편이 여성들의 영역에 들어와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내가 임금노동을 하는 구조가 되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됐다. 입사 동기인 우리는 남성의 육아휴직도 수용하는 좋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안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커녕 여성의 육아휴직도 꺼린다. 그런 사업장에서 여성을 채용하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하다. 야근이든 주말 근무든 해낼 수 있는 노동력을 원해서 아닌가? 도대체 지금은 몇 년인지, 2019년 아니었던가.

 

우리 부부는 동기이기 때문에 월급이 거의 같다. 군대를 다녀온 호봉 차가 있지만 크지 않다. 누가 육아휴직을 해도 사실상 한쪽의 월급에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보통 아내의 임금이 적다. 급여가 적은 쪽이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가정 경제로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다보니 쳇바퀴 돌듯 여성들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진다. ‘#성별임금격차 ’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OECD가 발표한 성별 남녀 임금 격차를 보면 한국이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컸다. OECD 평균이 13.8%였지만 한국은 36.7%나 됐다. 평균보다도 2배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는 거다. 성별 임금 격차가 30%를 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여성의 월평균 임금은 244만9000원으로 남성 평균 임금은 356만2000원의 68% 수준으로 고용률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시간제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주로 여성이 일하면서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도 OECD 국가 가운데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여성 시간제 근로자는 197만1000명으로 전체 비정규직 근로자의 53.6%를 차지했다.

 

 #경력단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출산과 양육으로 회사를 그만뒀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재취업을 하는데 대부분 이전 직장보다 임금이 낮아지거나 비정규직이 된다. 2018년 기준 여성노동자 중 50.7%가 비정규직인 반면, 남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33.2%다. 아이 낳은 친구들은 가끔 자조한다. “왜 이렇게 버텨야 하나 싶지만 지금 그만두면 이만한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임신, 출산 등으로 일자리를 놓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답은 ‘성평등한 노동 시장’이다. 남성도 집 안으로 들어와 돌봄을 담당하고 사업장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시장이다. 임금 격차로 벌어지는 비자발적 퇴사들, 결국 여성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지게 되는 악순환을 바꾸지 못한다면 취업 시장에서부터 여성이 더 불리한 상황을 바꿔낼 수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대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원치 않게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여성만 괴로운 게 아니다. 그 괴로움은 남성에게도 전이된다. 가부장의 짐을 짊어지고 팍팍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아들들은 팍팍한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아이들을 돌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기쁨을 일부가 독점하지 않는 사회, 엄마 아빠 모두가 시민-노동자-부모-개인의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그런 사회 말이다.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

황경상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언젠가 문득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런 거 없어.”

 “그래도 아버지가 했던 뭐 기억나는 말 같은 건 있을 거 아녜요.”

  “촌 사람들이 뭘, 임시 풀칠하기 바쁜데, 누가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살아라 그런 말을 해.”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한 분만은 아니셨다. 늘 시골집에 가면 “우리 깅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동네 슈퍼에 가서 빠다코코낫 과자와 콜라를 사 주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더 젊은 시절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일하러 나간다, 일어나라’ 그러셨지.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어. 똥장군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서 밭에 뿌려놓고 학교에 갔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집안 농사일과 군대 36개월, 그리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구하기 위한 분투였던 것 같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직업 구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아버지 시대라고 일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기사를 해 보겠다고 대형 면허를 따기도 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달랐을까.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할아버지가 일하는 논이 전부 우리 것인 줄 아셨다고 했다. 실제로는 다 남의 논을 부치는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오직 일밖에 모르셔야 했을 것이다. 장인어른도 비슷하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장인어른이 한창 일했던 1980년대, 1990년대는 #주5일 근무 시대도 아니었다. 주6일, 때로는 일요일까지 일하셨던 장인어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으면 ‘아버지들의 삶이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 장인어른도 IMF의 화살을 비껴가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회사에 인생을 바쳤지만 그 회사는 노후도 보장하지 못했고 안전한 삶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장인어른은 끊임없이 일하셨다.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던 40대부터 6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말이다. 그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랫동안 한국의 남자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오랫동안 생계부양자로서 주어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를 쓰셨다. 1981년생 나라고 그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신혼 초, 갑자기 집주인이 전세 대신 월세를 달라고 했을 때 대신 전세금을 더 올려주겠다며 한참을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탓만도 아닌데 그때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걸 느꼈다. 내가 좀 더 수입이 많았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그러나 그건 괜한 혼자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한 섀도복싱이었다. 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 탓이 아니야, 함께 해결하자”고 했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혹시 남편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 년 동안 내가 대신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테니 한 번 해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편도 그렇게 해 줘야 해.” 물론 능력도 취향도 없는 내가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공상과학소설에 가깝지만, 그 마음만큼은 너무나 고마워서 마음속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부양자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나눠지겠다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상황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친구들 중에는 #맞벌이 도 있지만 온전히 생계를 남자인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도 있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야, 그런 게 되냐?”라며 신기해하면서 부러워한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킬 때면 요즈음엔 자주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는 아빠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데리러 오는 사람 중에 남자는 거의 없다. 모든 남성들이 육아를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남성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여전히 남성의 육아휴직이 희귀한 문화에서 ‘아빠 육아휴직’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 생각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회사를 안 가게 되니 “회사 나오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는 “아직은 괜찮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회사 일보다 덜 힘들어서는 아니다. 두 가지 일은 너무 다른 종류의 일이라 비교하기 힘들다. 다만 만 10년이 넘게 회사를 다니며 이렇게 회사와 거리를 두게 된 지금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은 매우 소중하고 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며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지만 또 한편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늘 유쾌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시대, ‘이 일을 조금씩 모두가 나눠서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아내와 내가, 아이가 있는 다른 동료와 내가 일을 나눠서 한다면 우리는 훨씬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돌보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시간 말이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회사에 알렸을 때 한 여자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맙다”고 했다. 쑥스럽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말했다. “자신이 돌봄노동자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여자 후배에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맙겠어. 나에게 그런 남자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정말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을 거야.” 기껏 6개월 육아휴직으로 그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면구스러웠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여성들이 얼마나 일터에서 고민이 많을지 이해가 됐다.

 

 아버지의 시대는 남성이 생계부양을 하는 #가부장적모델 의 사회였다. “아버지도 고생만 많이 하다가 갔지.” 아버지는 대화 끝에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말씀 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아마도 자전거를 타고 쓰러지지 않도록 무작정 페달을 계속 굴려야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많이 부빌 수 있는,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꿔본다. 우리 아들들의 시대에는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이 더 조화롭게 균형을 잡기를

 

[출처] 왜 남성에게 생계부양,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강요할까요? [부부 육아 일기] 11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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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 아이들이 불평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을 잘 줘야지, 이렇게.”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어른 젓가락’을 쥐여주고 힘을 주는 연습을 열심히 하게 했다. 학교 급식을 먹을 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성인용 수저를 쓴다고 해서다. 아직 어른 젓가락을 쥐기에는 작은 첫째의 손을 만져보며 조금 안쓰러웠지만 ‘학교가 그렇다면 네가 적응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오문봉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됐다. 그는 초등학교 급식에서의 성인용 수저 제공에 문제가 있다며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아… 잘못된 건데 나는 아이 보고 적응하라 했구나.’ 씁쓸한 기분이 스쳤다.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를 쓴다
한 선생님의 문제제기를 듣고 나서야
아이에게 적응하라 했던 나를 돌아봤다

 

오 선생님은 지난해 5월 교무회의에서 아이들에게 아동용 수저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지급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자 고민 끝에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그가 진정을 넣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갖고 다녀라’부터 ‘수저가 무슨 인권이냐’까지.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어른 수저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그런 불평을 학교에 말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웠다. 선생님 말대로 아이들은 사안별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세상에 대한 상을 머릿속에 구성하고 있을 터이다.

 

인권위는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 제공 관련 의견표명’이라는 제목의 결정문을 내면서 “학교 급식에 관한 계획을 수립·시행할 때, 아동이 사용하기에 알맞은 수저 등의 제공을 포함하여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까. ‘노키즈 존’ 논란을 볼 때면 늘 갑갑했다. 아이들은 열 살 정도는 되어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는데 시끄럽고 부산스럽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일정 공간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도는 점점 좁아지고 차도는 넓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 도시에서 천지분간 못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식은땀이 난다. ‘학교 앞 시속 30㎞ 규정’이 있는데도 쌩쌩 지나가는 차를 보면 속수무책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른이 모는 차는 쌩쌩 달려도 되고 뛰는 아이들은 어떤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세상이라 말하면 비약일까.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잘못됐다고 말해야 할까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동이 스스로의 권리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선에 있는 걸까. 부모는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고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세상의 질서가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기는 정녕 어려운 걸까. 가끔 부모인 나도 아이들의 관점보다는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글을 썼을 때 남편이 말했다. “이제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말자.” 육아에 대한 글이지만 내 글의 주요 등장인물은 나와 남편, 아이들이다. 아이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쓰는 글이 아이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이후부터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않고 ‘첫째, 둘째’라고 쓴다. 아이들에 대한 내 관점을 글로 쓰는 것을 아이들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처음 ‘폭풍육아’를 쓸 때부터 아이들 사진은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이 돌아다니면 사진도 같이 돌아다닐 텐데 아이들의 얼굴은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삽화를 썼지만 언젠가부터 아이들 옆모습, 뒷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쓰고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허락받지는 않았다. 가끔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나온 것을 본 첫째는 자기 얼굴이 나왔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기분이 묘하다. ‘아직 뭘 몰라서 좋아하는 걸 수도 있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고 허락도 받지 않고 써서 미안해.’ 사실 이런 생각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첫째가 어릴 때는 SNS에 사진을 많이 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가 신기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아이를 자랑하고 싶었을 거다. ‘내 소유물도 아닌데.’ 아이가 커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부터 SNS에 사진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관점보다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이 글도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선거연령 만 18세로 하향, 청소년인권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들의 기사를 읽다가 “우리는 미래 세대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머리를 맞은 듯했다. 그들은 자신도 현재를 살고 있는 주체라고 말했다. 어릴 적 어른들은 늘 말했다. 어린이는 미래의 꿈나무라고. 아니다,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현재를 살고 있다. 오 선생님은 인터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계기로 어린이와 학생들을 차별하지 말고 배려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익숙한 생각과 행동이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겠다. 내가 권리의 주체라면 작고 힘없는 존재들도 권리의 주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자고.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무조건 뛴다. 걸어가야 할 순간에도 뛰고 뛰어야 할 순간에도 뛴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뛴다. 어른들은 뛰어야 할 때도 굳이 걷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을 순식간에 벗어나 아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마다 학교,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면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손길은 늘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왜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고 하는 것일까

 

아이들을 대하는 내 손길은 늘 무심코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그렇다. 밥상머리에 딱 앉아서 한 그릇 뚝딱 하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둘째는 숟가락을 들고 다니며 먹일 때가 많다. 먹이다 보면 입에 든 밥을 다 삼키지도, 심지어 씹지도 않은 녀석에게 다음 숟가락을 떠서 입에 갖다 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숟가락으로 뜨는 밥의 양도 점점 늘어난다. 그 위에 반찬도 2~3개씩 한꺼번에 올린다. 종종 채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밥과 반찬은 숟가락에서 낙하한다. 녀석이 도리질이라도 칠라치면 밥과 반찬은 폭발한 포탄처럼 흩어진다.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씻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물놀이에만 심취해 있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빨리 녀석들을 적당히 달래 씻겨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안 씻겠다는 녀석들의 손을 잡아 끌어서 양치질을 시키고 비누칠을 하고 머리를 감기는 내 손길은 점점 급해진다. 거친 손길 탓에 아이들의 몸에 손톱자국을 길게 남기기도 한다. ‘아파! 아파!’ 하고 난리를 친다. 발을 씻기려다 아이가 욕조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게 한 적도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다 씻기고 안아서 나오다 화장실 문짝이나 벽에 아이의 머리를 찧은 적도 여러 번이다. 칫솔질도 너무 세게 시켜 칫솔에 피가 묻어 나온 적도 있다.

 

나는 왜 아이들과 있으면 뭔가를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 하는 것일까. 나와 달리 아이들은 뭐든 긴 시간을 들여서 하고, 그걸 반복해서 또 하는 걸 좋아한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물론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는 것은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흔해빠진 일상이다. 반대로 모든 게 처음인 아이는 뭐든 한 번 더 해보고 싶어 한다.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니,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는 금세 후회를 한다.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조금만 시간을 들여 설득하면 가끔 아이들은 놀랄 정도로 잘 따라준다. 첫째가 네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장난감에 빠져 노는 녀석이 칫솔질을 하자니까 너무 싫어하기에 “그럼 그거 다 하고 나서 양치하는 거야” 하고 말해줬다. 그냥 지쳐서 거의 반은 포기한 채 한 말이었다. 근데 녀석이 5분쯤 지나니까 “인제 이거 다 했으니깐 치카치카 하자”면서 오는 게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꼭 안아주었다. 물론 칫솔질을 막상 시작하자 또 떼를 쓰고 인상을 쓰긴 했지만.

 

아이들이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 달리면 외려 덜 넘어졌다

 

아이들이 막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가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서 달리는 아이들은 뒤뚱뒤뚱하면서도 오히려 덜 넘어졌다. 목욕을 할 때도 처음에는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물기를 닦는 일까지 일체의 권한을 주지 않고 내가 다 알아서 했다. 언젠가 그냥 지쳐서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냈다. 수건을 맡기면서 알아서 닦으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잘 닦아서 놀랐다. 뭐든 그렇다. 양치질도, 일을 보고 뒤를 닦는 일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혼자서 잘해냈다. 문제는 내가 믿고 기다려주지 못한다는 거다. 늘 더 완벽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해내길 바란다. 혼자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수건을 들어 닦거나 칫솔을 뺏어 이를 문질러버린다.

 

첫째가 혼자 옷 입는 훈련을 할 때였다. 바지는 제법 혼자 입고 벗는데 윗옷은 잘 입고 벗지 못했다. 머리에 옷이 걸려 제대로 빼지 못하는 것이다. 한 번은 혼자 바지를 입느라 용을 쓰고 있고 있기에 윗옷을 입히겠다고 머리에 티셔츠를 넣으려고 하니 녀석이 막 짜증을 냈다. “이따가~ 이따가~ 바지 입고~” 아, 내가 또 마음이 급했구나.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좀 더 시간을 내 준다면 그 시간들이
아이 삶에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다

 

단순히 생활습관을 길러주는 데서만 벌어지는 문제일까. 요즘 덧셈, 뺄셈을 어려워하는 첫째와 문제를 풀고 앉아 있다 보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 “왜 그걸 몰라?” 하면서 윽박지르다가도 모르는 게 당연한데 싶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언젠가 녀석들이 더 커서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난 조바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똑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아이와 어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뭐든 차근차근 기다려준다면, 아이에게 좀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면, 그 짧은 시간들이 아이의 삶에는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91633005&code=940100#csidx2592926dd97dac39815b131f5fe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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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보며 웃고 울었던 시간과 바꾸고 싶지 않다

임아영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디나 그렇듯 가끔은 굉장히 지치고 고단하다. 날씨마저 푹푹 쪄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순간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아이들이 나를 맞았다. 그리고 첫째가 내게 묻는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좀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 기분 안 좋은 거 어떻게 알았어?” 어려운 질문인지 대답은 안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아들이라니, 그저 감동할 뿐이다.

끝이 아니다. 씻고나서 소파에 기대서 좀 쉬고 있는데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린다. “뭐해?”라고 물으니 “편지 써”라는 답이 돌아왔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엄마한테 편지 쓴거야?” 아이를 끌어안았다. 기특한 아이야, 기특한 우리 아이야.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엄마 회사는 어때? 회사는 잘 하고 있어?” 아이의 성격대로 공들여 쓴 흔적을 엿보면서 농담으로 답했다. “엄마, 회사에서 별로 잘 못하고 있어.” 어쩌면 솔직한 대답이었다. 오늘의 회사는 내게 힘든 곳이었으니까. 아이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엄마.” 오늘은 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갑자기 명치 끝이 싸해졌다.

첫째 아이가 써준 편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첫째가 좀 늦게 퇴근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고생했어.” 고생했다니. 이제 남편과 나도 서로 쑥스러워서 하지 않는 말을 아이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고마워 고마워 아이야. 이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구나.

 

#육아에 관한 글을 쓰면 가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힘들고 괴롭기만 육아, 왜 하느냐, 절대 안 하겠다”고. 남녀가 불균등하게 #돌봄노동을 하게 되는 구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장시간 노동 문제와 엄마에게 양육 부담을 더 지우는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인데 육아란 곧 괴로움이라 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듯이 육아도 마찬가지다. 괴로움과 환희가 뒤섞여 있다.

 

우리 부부는 첫째를 좀 어렵게 키웠다.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돌 전 첫째는 잠을 한 시간 이상 혼자 자지 못하는 예민한 아기였다. 둘째를 낳고 세상 모든 아기가 첫째처럼 잠을 못 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지 않고) 앉아 있던 둘째가 우리 부부에겐 너무 신기한 존재였다. 첫째가 8세가 된 지금에서야 겁이 많은 아이라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첫째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둘째를 낳았다.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첫째가 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첫째가 어린이가 되어가는 속도를 내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둘째를 낳으면 다시 아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30대 후반이 되면서 가끔은 ‘내 30대는 육아를 하느라 지나간 것 아닌가’라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그럼 아이들이 없던 시절이 그립느냐고 하면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서른에 결혼해 서른하나에 첫째를 낳았는데 돌아보면 아이들을 낳고 난 뒤의 나는 훨씬 편안해졌다. 엄마가 된 이후의 내가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보다 좋다. 물론 육아의 구조에 분노할 때는 많았지만. 그것은 구조에 대한 분노지 아이들에 대한,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이제 첫째가 8세, 둘째가 4세. 아이들을 몸으로 부대껴 키워야 하는 시기가 열 살까지라 본다면 내게 이제 6년이 남은 셈이다. 육아가 끝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그 이후에는 다른 고민들이 커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이렇게 힘든데도 아이들을 낳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가끔 후배들이 #육아에 대해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연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교류”라고. 20대의 연애와도 서른이 되어서 한 결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설명하자는 게 아니다. 다르다는 것. 연애가 달콤쌉싸름한 것이라면 육아는 그보다 훨씬 깊다고 느낀다. 깊게 아름다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고 무얼까.’ 아이들을 길렀던 30대는 내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될 것이다.

 

유전자의 신비일지도 모른다. 내 배에서 나온 나를 닮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란. 어떤 면에선 맹목적이라 헌신적일 수 있고 또 맹목적이라 무모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어떤 존재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했나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존재가 온전하길 기도하게 되는 경험.’ 내게 육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아서 묘하게 서운하지만 그게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지. 자기 위해서 불을 끄고 다같이 누우면 내 오른쪽에 누워 있는 둘째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엄마 어디에 뽀뽀할까? 입술에 해야겠다.” 그리고나서는 입술에 뽀뽀했다가 또 볼에 뽀뽀하고 또 이마에.

 

이렇게 작은 존재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면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뭉클하다. ‘고마워, 두진아 이준아. 언젠가 엄마는 너희들이 엄마에게 사랑을 퍼부어줬던 지금의 기억을 돌려보며 괴로운 한 순간을 나고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엄마에게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줘서. 또 고마워. 많이 웃게 해줘서. 그저 고마워.’ 그러니까 육아가 괴로울 것이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괴로운 것은 사회 구조고 돌봄노동은 고되지만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웃고 울었던 시간과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이 같은 양말을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해

황경상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2049년. 내 나이가 칠십에 가까워진다. 우연히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의 통로를 알게 됐다면 무얼 하고 싶을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사건이 내 삶 속에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 의지대로 바꿀 수도 없고 나처럼 무지한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볼 수 있는 순간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을 것 같다.

하교를 하면서 가방을 들어줬더니 ‘아빠 힘들지 않아?’ 라고 물으며 다시 자기가 들겠다고 나서는 첫째 녀석의 살짝 찌푸린 툼벙한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림책을 읽어주면 책 속의 강아지가 귀엽다며 책에다 얼굴을 비비대는 둘째 녀석의 애교를 보고 싶을 것 같다. 단 10초만의 시간이라도 좋다. 금방 다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요 놈들!’ 하고 볼 한 번 꼬집어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 만약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추억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대답하기 어려웠을 거다.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은 정말 짧다. 담으려고 하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진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나 학교 다닐 때 뭐 기억나시는 것 없어요?” 물으니 이렇게 말하신다. “니 어렸을 적 대구 달성공원에 갔던 거는 기억나는데… 내가 일만 했지, 뭐 했나?”

 

늘 “니가 알아서 다 했지 뭐”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중학교 때는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매일 아침 나를 학교 앞까지 태워 주시고 출근을 하셨다. 추운 겨울, 차에서 나오는 따스한 히터 바람을 쐬며 달콤한 쪽잠을 잤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워낙에 표현이 서툴기도 하시지만, 그때 만약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고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분명 더 풍성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힘은 든다. 아이들은 수시로 변한다. 식탁에 겨우 앉혀서 밥을 먹이려는데 갑자기 ‘똥꼬’가 아프다고 약을 발라달라고 한다. 아침에 웬일로 멀쩡히 혼자서 준비를 잘 하더니, 학교가려고 막 나서는데 갑자기 숙제를 안 했다며 꺼내들어 화를 돋우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제 집 앞 놀이터에서 봤던 지렁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든다. #배변훈련을 하는 둘째는 씻으러 들어갔다가 대변을 다섯 번이나 바닥에 봤다. 닦고 또 닦느라 지치게 만들고 놓고도 낄낄 대며 웃는다.

 

이 변화무쌍한 아이들 앞에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러다가도 “아빠 사랑해~ 아빠 더위?”하면서 잘 맞지도 않는 선풍기 리모컨을 들고 와서 에어컨에다 대고 막 눌러대는 아이를 보면서 뭉클해진다.

 

아이들이 판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빠 판다가 형제 판다를 돌보고 있다.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안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갑작스레 불러오는 한 줄기 바람에, 어쩌다 귀에 들어온 익숙한 멜로디에, 오랜만에 맡은 익숙한 향내에 과거로 순간 이동한다. 나도 가끔 라면을 끓일 때 희게 부풀어 오른 면을 보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괴식’ 말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라면을 면만 따로 끓인 다음에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스프를 뿌려서 주셨다. 의외로 꽤 맛있었다. 지금 다시 해 볼 자신은 없지만. 아버지는 군대에서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세대니, 그런 ‘괴식’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도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준다. 스마트폰에 음식 조리법을 틀어놓고 들여다보면서 주방을 동분서주해 보지만 사실 내가 봐도 맛은 없다. 궁중떡볶이를 했는데 떡이 다 뭉그러져서 첫째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둘째는 기껏 만들어놓은 카레가 맵다며 먹지 않는다. 대충 있는 걸로 먹일까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었더니……. 몹시 속상하다. 그러다 녀석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 너희들도 뭉개진 떡국 떡을 보면서, 카레의 알싸한 후추 맛을 새삼 느끼면서 아빠가 해 준 ‘괴식’을 생각하겠지. 아니, 내가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인지,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시간여행은 보통 시간을 마음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의 시간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내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어쩌면 ‘시간여행’이다.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여행 속에서 아이들의 뺨을 부비며 “뭐 먹고 싶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을 수 있는 이 시간으로 언제 건 다시 돌아오고 싶을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서 종종대고 돌아다니는 녀석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에 담는 것뿐이다. 돌아오지 못할 걸 알기에, 언젠가는 이 모습이 그리워 찾아 헤맬 걸 알기에.

 

[출처] 육아가 괴롭고 힘들기만 한 건 아녜요. [부부 육아일기 10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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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중할 것은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임아영

“그래도 해야지. 안 할거야?”

저녁마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첫째 수학 문제집 때문이다. 8세 첫째는 몸을 베베 꼰다. 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다. 수업 시간에 다하지 못한 숙제를 들고오는데다 담임선생님이 집에서 문제를 매일 풀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기싸움이 시작된다. “할 거야, 안 할 거야?”라는 딱딱한 말에 “할 거야”라는 하기 싫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힘겹게 2~3쪽을 푸는 동안 수 번을 한숨을 참고 나면 아이가 다 푼다. ‘아이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구나.’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풀었다니 정말 잘했다! 우리 아들 최고!” 칭찬을 퍼부어주고 끝난다.

학교를 보내기 직전 나는 아이가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셀 수 있는 것도 기특했는데 막상 초등 1학년이 되니 아이 반에 빼기를 못하는 아이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걱정이 돼서 주변 엄마한테 물었더니 “선행을 하나도 안 해서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초등학생 입학 전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고요?” 거창한 #선행학습이 아니다. 숫자를 세게 하고 한 자리수 덧셈, 뺄셈을 무난하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놓는다는 뜻이다. ‘엄마표 수학’이다. “벌써 보수를 아는 아이들도 있어요.” 담임선생님은 선행을 하는 아이가 많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셨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아이가 처음 #수학익힘책을 숙제로 들고 왔을 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횟수가 늘자 예민해졌다. “왜 수업 시간에 다 못하는 거야?” 아이를 다그치게 됐다. 엄마의 무서운 표정에 아이는 더 긴장했다. 결국 아이는 평소보다 더 답을 찾기 힘들어했다. 대충 풀고 함께 누워서 아이를 재우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다 배우고 와서 쉽게 하는 일을 너는 하나도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구나. 엄마가 무심하게 학교를 보내서 미안하다.’

#유아사교육 시장은 계속 확장 중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동네를 걸으면 판촉 전단지 수 장을 받았다. 뇌를 발달시키는 수학, 골라 읽게 해주는 독서교육, 무슨무슨 한자, 중국어 등등. 무슨 자신감인지, 아이에게 수학, 영어 관련 지식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초등학교 시기로 진입하면 뛰기 싫어도 숨이 가쁘게 뛰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인데 엄마가 너를 ‘학생’이 되기 전부터 괴롭히고 싶지 않다. 놀아라, 맘껏 놀아라. 7세가 마지노선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엄마표 수학을 할 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연습하고 온 것을 우리 아이는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 부부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은데 세상이 미취학 아동에게 ‘놀이’를 권하지 않고 ‘학습’을 권하는 게 싫다고 해서 학습을 피하면 결국 힘든 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들 아닐까.

좋은 영어 학원 #레벨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영어과외를 하는 건 꽤 지난 문화(?)라 했다.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만드는 한 어린이집 선생님은 말했다. 오래 사교육에 노출된 6세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겨 왔는데 계속 자유롭게 놀게 해주자 물었단다. “선생님, 공부 언제 해요?” 그 아이는 친구와 장난하다 갈등(?)이 생기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했다. “너 수학 지옥에 빠지고 싶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과연 어떤 어른들인가. 다들 유아 사교육을 하니 어린이집, 유치원도 자유롭기 힘들다 한다. 아무리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짜려고 해도 부모들이 ‘학습’을 시켜달라고 해서다. 첫째는 #병설유치원을 다녔는데 병설유치원은 #공립유치원이기 때문에 #누리과정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런 교육과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방과후수업을 듣는 아이들 중 영어학원에 가기 위해 2~3시에 학원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취재를 하다 만난 어린이집 원장님, 유치원 원장님들은 ‘도대체 엄마들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시장의 문제일까. 사교육 업체들은 부모들의 불안을 집요하게도 부추긴다. 청년 취업률이 사상 최저인 세상에서,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부모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임금 격차가 큰 사회에서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보통 사람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힘든 구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내 아이만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밀어붙이는 것을 어디까지 나무랄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20년 뒤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부모들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눈 오는 날 자식이 가는 길은 싹싹 쓸어놔야 안심이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모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교육 업체들을 규제(?)하면 좀 나아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첫째가 5세가 됐을 때 둘째를 낳았다. 조리원 친구에게서 ‘#가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가 다양한 도형을 가지고 놀면서 수 감각을 갖추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6세 아들에게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수업을 해주고 간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내가 묘하게 창피했고 창의력, 수리력 등등 좋은 말로 무장되어 있는 교구 광고를 보면서 너무 사고 싶어졌다. 첫째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며 너무 아이에 대해 무심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죄책감도 올라왔다. 광고에 취하고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자 교구를 구매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몇 달간 선생님이 아이를 가르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어느 날 이 수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5세 아이한테 ‘이등변삼각형’을 가르쳐서였다. 지나가듯 말하는 용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나 어릴 땐 초등학교 때는 선행학습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쯤 이미 중학교 과정을 마친다 한다. 물론 일부 이야기일 테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겁에 질린다.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로 선행을 해야 아이가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우선 이번 여름방학 때는 빼기 연습을 매일매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교육 기관을 다니는 동안 모든 아이들이 선행을 해서 우리 아이가 뒤처지면 어떻게 해야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날 수업을 미리 예습하고 가게 하면 될까. 그정도는 #선행이 아니고 ‘예습’이니 좋은 교육 방법이니까.

이렇게 답이 없는 불안이 올라올 때면 중요한 질문을 떠올린다.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그런 적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나갈 수 있는 아이, 괴롭고 힘든 날이 있어도 따뜻하고 좋은 날의 기억으로 견뎌낼 수 있는 아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에 투항하지 않고 스스로 사고해 세상이 나아지는 방향을 고민하는 아이.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늘어놓고 나면 ‘모두들 #선행학습하는 사회’에 대한 부모로서의 불안은 좀 가라앉는다. 선행을 한다고 저 거창한 단어들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남는 답은 다시 ‘나’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엄마는 둘째를 업고 대관령 목장길을 걷고 있다.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줄 수 있어"

황경상

창문 밖에는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렌지 빛 뿌연 불빛이 듬성듬성 내비치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첫째 아이와 나란히 앉았다. 왠지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앞에는 녀석이 학교에서 가져온 ‘빼기’ 숙제가 있었다. 시계바늘은 벌써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녀석이 안쓰러워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이 있어.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아빠도 어른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늘 공부하는 거 봤지? 공부가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어. 잘 할 수 있지?”

고개는 끄덕였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면서 졸려하는 모양새다. 밤 11시에 우리는 왜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나. 자려고 막 침대에 누웠더니 첫째 아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맞다. 빼기 숙제 있는데…”

그때부터 전쟁이었다. 하기는 싫은데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녀석은 어째야 좋을지 몰라 몸을 비비 꼬았다. 책상에 앉혀서 몇 문제를 풀었는데 계속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짓을 했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마, 아빠는 숙제 안 해 가도 상관없어.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아빠는 도와주는 거고.” 다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더니 녀석은 눈물을 흘리는지 코를 계속 훌쩍인다. 다시 녀석의 손을 잡고 스탠드 불빛을 켜 주고 앉혔다. “동생 재우고 갈 테니까 하고 있어.”

둘째를 재우고 가보니 의외로 문제를 다 풀어 놓았다. ‘역시, 안 해서 그렇지. 할 수 있어.’ 아뿔싸, 답을 확인해 보니 다 틀렸다. 녀석은 어쨌건 빨리 답을 채우기 위해서 위에 1을 쓰면 밑에 2를 쓰고 하는 식으로 칸을 채워놓은 것이다. 다시 지우고 하나하나 문제를 풀게 했다. 녀석은 졸음이 쏟아지는지 하품을 했다. 윽박질렀다가 달랬다가를 반복했다. 녀석은 겨우 바둑돌을 이용해 이리저리 세어 보더니 칸을 채웠다. “고생했어, 아들~ 얼른 들어가 자!”

처음부터 이렇게 공부하라고 다그쳤던 건 아니다. 이제껏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고 뭐라 한 적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언젠가 첫째는 #한글 쓰기책에다 ‘바 버 보 부 브 비’를 열심히 따라 쓰고 난 뒤 페이지 위에다 ‘80점’이라고 적었다. 왜 80점이라고 적었느냐고 물으니 잘못 쓴 글자들을 가리켰다. 그때 둘째가 바닥에 대소변을 흘려서 정신없었던 나는 “왜 80점이야? 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100점이야”라고 무심결에 말해 주었다. 전쟁 끝에 애들을 재우고 책상 위에 앉아 무심히 첫째가 남긴 책을 보니 ‘80점’에 줄이 쓱쓱 그어져 있고 그 옆에 ‘100점’이라고 다시 쓰여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아이들이란 이렇게 작은 말에도 힘을 얻는구나. 결과보다는 언제나 과정을 칭찬해주자고 결심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저렇게 수학을 어려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자꾸만 소리가 커지고 아이를 다그치게 된다. 육아휴직을 한 목적 중에는 첫째의 1학년 적응을 잘 돌봐주기 위한 것도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교육청에서 1학년 부모 준비를 위한 간담회 행사를 열어서 가 본 적이 있다. 실제 교육현장에 계시는 1학년 선생님과 부모 몇 명이 원탁에 앉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글은 어느 정도 써야 하나, 숫자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나 걱정이 돼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자는 읽을 수 있을 정도면 되고, 숫자는 10까지 셀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하셨다. 가끔 덧셈, 뺄셈을 어려워해서 1학기가 지나도록 못 따라가는 아이가 있기도 하는데 방학 때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글자도 제법 읽고 숫자도 100까지는 셀 줄 아는 첫째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덧셈, 뺄셈을 어려워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또 그렇게 잘 할 줄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며 학교 운동장에 서 있으면 꼭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이런저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고, 어떤 수업을 듣게 하고 이런 말들이다. 이런 걸 안 시키면 안 되는 걸까, 너무 손 놓고 있는 건 아닌가. 공부 뿐만 아니라 음악은, 미술은, 수영은… 또 어떻게 시켜야 하나. 잠시 아이를 떠올리며 불안해진다. 그 모든 걸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다들 하는데 우리 아이만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 나중에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돼서다.

그러다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너무 못 믿는 게 아닐까. 너무 조바심을 내느라 아이의 잠재력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건 아닐까. 아이의 자신감을 걱정하기에 앞서 나부터 자신감이 없어진 건 아닌지. 곧 방학에 들어가는 아이와 함께 하루 계획을 세웠다. 방학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아빠와 함께 있어야 한다. 수학 연습을 하고 책을 읽고, #그림일기를 쓰고 컴퓨터도 배워 보기로 했다. “아빠는 너를 끌고 밀어줄 수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 줄 수 있어.” 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아이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둘쨰가 집에서 형이 만든 종이접기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출처]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부부 육아일기 9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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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많은 시간 함께 한 둘째아이의 성장은 '할마할빠' 육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던 육아 시스템은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잠시 정상궤도를 찾았으나 오는 9월 남편이 복직하면 '할아버지 육아'로 이어질 예정이다.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라고?
아이들과 함께한 1년은 소중하다

 

첫아이를 낳고 복직한 2014년부터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다. 딸과 사위가 회사에 가면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 3~4시쯤 데려와 저녁밥을 먹이고 딸과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것은 친정엄마였다. 만 6년 반 아이를 기르는 동안 사회는 나를 ‘주양육자’라 불렀지만 아이의 ‘진짜 양육자’는 외할머니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양육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그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부랴부랴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지만 훌륭한 아빠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였다. 아이들을 낳고 1년씩 육아휴직할 수 있는 고마운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정작 내가 키운 기간은 겨우 2년4개월뿐이었다. 첫째가 14개월 때부터 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옆에 있었던 것은 나도, 남편도 아닌 ‘외할머니’였다.

 

저녁 약속을 안 잡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다
그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 였다

 

지난해 12월 그런 엄마가 병원을 세 곳씩 다니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무릎이, 이가, 어깨가 탈이 났다고 했다. 원래도 무릎이 약한 편이었는데 내 아들들을 돌보다 무릎이 더 나빠져 ‘어느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으냐’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엄마는 “원래 무릎이 안 좋았다. 네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늙으면 원래 무릎이 나빠진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돌보다 나빠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딱히 뭘 잘못한 것은 없지만 이 구조에서 비켜나 있는 그가 미웠다.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그러다 내가 많이 아팠다. 근무 중 열이 나기 시작했고 몸이 노곤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데 계속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겨우 마감하고 보고한 뒤 집에 가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폐렴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 하나만 회사를 그만두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많은 여성들이 결국 가는 길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내 손으로 돌보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만두지 마라, 아영아. 네가 열심히 해온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기의 순간에도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돌봄 노동으로 엄마의 몸 곳곳이 상하자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남편이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남편의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는 구조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서 점심만 먹고 하교할 것이었고 내 퇴근까지 7시간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마운 회사는 다시 남편의 6개월 육아휴직을 결정했고 남편이 휴직하자 집안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야 남편은 양육자의 위치에 겨우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도 지속 가능하진 않다. 9월에 남편이 복직하면 친정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고마운 일이다. 또다시 나는 친정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것은 ‘행운’이다.

 

가끔 주변에서 “친정부모님께 감사해야겠다”는 말을 듣는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선의다. 그러나 듣는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고맙지 않다. ‘고맙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서다. 내 미안함, 내 죄책감을 ‘고맙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 일이지 내 부모님 일이 아니다. 나는 딸이 일을 유지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역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살기 힘든 서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의 호의를 역이용하는 것뿐이다. ‘미안하면 용돈을 많이 드리라’는 말도 유쾌하지 않다. 에너지를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젊은 우리가 할 일이다. 퇴근 후 지쳐 있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 ‘용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육아휴직한 후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생 나와 동생을 돌보고 손주들까지 돌본 엄마에게 찾아온 자유. 목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엄마 너무 즐거운 거 아녜요?”라고 놀리면 엄마는 대답한다. “얼마나 좋은지 아니.”

 

그러나 별수 없다. 이렇게 잘난 척 말해도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다. 주변에서는 그럼에도 그게 얼마나 행운이냐고 다들 거든다. 안다. 양가가 다 지방이어서 아이를 물리적으로 돌봐줄 수 없는 집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그러나 잊지 말자.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양육의 의무가 없다. 양육의 의무는 나와 남편에게 있다. 온 동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돌보느라 허리를 펼 수 없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할아버지·할머니 육아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결국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지만…
이런 ‘행운’에 기대서야 돌아가는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그런 가정에 대해서도 다들 손쉽게 말한다. “사람을 쓰라”고. 그러나 돌봄을 자기 일로 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 대학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를 돌봐주시던 장모님이 수술해야 하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다 썼고 육아휴직 기회가 남은 건 자신뿐인데 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어차피 1년 쉬어도 해결 안되니까 이모님을 고용해야지.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야.”

 

그 회사 상사에게 묻고 싶다. 그건 아이를 돌봐본 적 없는 당신의 답 아니냐고. 아이의 1년, 아빠의 1년은 길다. 1년이라도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아빠의 양육 기회를 당신은 빼앗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정녕 당신이 좋은 상사이자 선배라면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아빠들도 자기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그렇게 변하는 속도가 더뎌서 미안하다”고.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육아휴직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슈퍼맨’이 돼볼 수 없었을 것

 

요즘 둘째는 배변훈련 중이다. 기저귀를 차고 있으면 편한 마음에 계속 대소변을 거기다 볼까봐 아예 아랫도리를 벗겨놓거나 배변팬티를 입혀놓았다. 몇 번은 ‘쉬 마려워요’ ‘똥 마려워요’ 하면서 변기를 찾는 듯해 금방 하겠다 싶었다. 착각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발목과 손에 변을 묻힌 상태로 돌아다니는데 정작 ‘큰 덩어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잠시 동안 세 장의 배변팬티를 적셨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좀 되는가 싶다가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리셋이다.

 

생각해보면 첫째의 배변훈련은 장모님이 시작하셨다. 배변훈련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둘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첫째는 12월생이라 배변훈련이 더 어려웠다. 한두 달 뒤면 유치원에 가는지라 더 초조했다. 유치원에 가면 대소변을 가려야 한다는데…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장모님은 첫째를 어르고 달래셨다. 그때는 이 훈련이 이렇게 힘든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막상 육아휴직을 하고 내가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기저귀를 더 채워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처음 태어난 첫째를 받아 안았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뭔가 잘못 만져서 아픈 건 아닌지. 얼른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아이를 안겨드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게 된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때 갓 태어난 첫째를 안고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물론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더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갓 태어난 첫째를 안는 순간 겁이 나서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안겨드렸다
장차 육아를 맡기게 될 것이란 상징처럼

 

아이를 키우는 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물심양면으로 무한대의 도움을 주셨다. 공치사 한 번 하신 적이 없지만 늘 송구스러웠다.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을 보내지 못할 때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실 장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지저분한 집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갔는데 온통 어질러진 좁은 집에서 피란민처럼 앉아 계시는 모습을 봤을 때도 송구했다. 우리 부부가 둘 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재우고 계실 때도 있었다. 쉬시는 것도 아니고 안 쉬시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계시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실 때 몹시 죄송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이 예전에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침도 잘 안 먹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시간 맞춰 데려가는 것은 젊은 나도 지치는 일이다. 데려다줬다 데려오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만보가 넘어가는 걸 보면서 왜 장모님이 짧은 거리임에도 차로 아이들을 등원시키셨는지 알게 됐다. 더구나 무릎까지 안 좋으신데.

 

육아휴직을 하고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의 노고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할머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잘 돌봐주셨는지 생각한다. 심지어 가끔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야단쳤다 싶을 때는 내가 돌보는 게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잘못하는 일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순간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기꺼이 맡아주신다고, 편하다고,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

 

일하는 시간과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삶을 지탱하는 축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다. 첫째가 네 살 때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우는 녀석을 두고 애써 뒤돌아서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시큰한 콧잔등을 만지며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지구를 구하러 간다고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할 만큼 내 일이 급하고 중요한 일인가. 아이가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만화 <미생>에는 ‘워킹맘’ 선 차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두고 정신없이 통화하며 출근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아이가 엄마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선 차장은 다시 뒤돌아와서 아이를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생활 때문에… 널 미루지 않을게!’ 이 부분은 왜 몇 번이나 봐도 가슴이 찌릿한지. 많은 부모들도 그랬을 터다.

 

품 속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랐다
부모의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게 지원하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다. 첫째는 어느덧 양치질을, 세수를 혼자 하더니 이제는 샤워도 조금씩 혼자 하고 몸을 닦고 나오는 일도 스스로하기 시작했다. 머리감기도 조금만 연습하면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작은 아기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욕조에서 씻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에게 온몸을 맡기고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보며 무한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아마도 아주아주 잠시 동안 아이는 내 품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부모와 보낼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부쩍 더워진 날씨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둘째에게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쳐주었더니 말한다. “아빠 손에서는 바람이 나와?” 둘째에게 아빠는 손에서 장풍이 쉭쉭 나오는 슈퍼맨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슈퍼맨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나는 행운아지만, 많은 아빠들도 이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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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육아휴직한 뒤 진짜 동지가 됐다

임아영

아이를 낳고서는 주말에도 쉴 수 없다. 늘상 수면 부족이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게는 아이를 돌보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지친 표정으로 “쉬고 싶다”고 외친다. 물론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엄마, 여기는 도깨비 집이야.” 그림책을 본 뒤 둘째가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형상(?)을 그려놓고 말했다. “엄마는 무서워”라며 과장되게 말하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엄마,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아이를 낳고 느꼈던 평온함과 환희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물론 아무리 예뻐도 나도 사람이니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예쁘지만, 기쁘지만 엄마도 쉬고 싶어.’ 어떤 무한루프 같은 것일까. #양육의 환희와 양육의 고통은 이어져 있다.

증조할아버지댁에 갔다가 거위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주말 두 아이는 공원에서 킥보드를 탔다. 그냥 유유히 앉아서 킥보드를 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작 36개월인 둘째는 헬맷을 씌우고 무릎, 팔꿈치에 보호대를 해줘도 불안하다. ‘아, 킥보드를 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이가 너무 타고 싶어했다. 킥보드를 타는 둘째를 남편이 따라다녔다. 3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힘들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다. 남편이 힘들어 보이면 양가적 감정이 든다. ‘어쩌나’ 하는 애잔한 감정도 들지만 ‘너도 더 힘들어봐라’라는 못된 생각도 올라온다. 남편의 잘못은 아니다. 세상이 내게 양육의 의무를 더 지라고 말할 때 나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그 화살은 종종 남편에게 간다. ‘남편, 미안해. 그런데 구조에 화를 낼 순 없잖아.’

남편이 둘째를 돌보는 동안 나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첫째를 돌봤다. #초등 1학년인 첫째는 혼자서도 킥보드를 잘 탄다. 문제는 킥보드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 첫째가 공원에서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도 아니고 두발 자전거! 아이는 삼촌이 선물로 사준 자전거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가 타니 관심이 생겼다.

‘아이의 첫 자전거’는 드라마 속 묘사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어른 남자가 8세 아이 자전거 높이에 맞춰 허리를 구부려 계속 잡아줘야 하는 일.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부모의 체력을 고려해주지 않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보채기 시작했다. 첫째는 집에 있는 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며 씻었으면 좋겠건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접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돌아왔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나도 힘들어.”

남편이 휴직하고 곧잘 하는 말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지러져 있는 거실을 훑어보고 “좀 치우지” 말하게 될 때, 첫째의 #주간학습계획표에 뭔가 빼먹은 게 있을 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 때 남편은 말한다. “나도 힘들어.” 8세, 4세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먹을 것을 흩뿌리며(?) 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 어린이집 준비물을 빼먹고 회사에서 후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왜 남편에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까.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이미 소진된 표정이다. “어때? 회사 일이 나아, 육아가 나아?” “회사 일이 낫지”라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 남편과 역할을 바꿔서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남편이 짠해질 때 이상하게도 ‘동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얼마 전 첫째 숙제에 대해 남편과 논의하다가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남편이 다른 것 다 해놔야지. 첫째 초등학교 적응 때문에 육아휴직한 이유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 남편에게 사과해! 애들 때문에 정신 없는 것 알면서.” 그 친구는 전업주부였다. 돌봄을 전담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도 역할을 바꾸고 보니 남편의 상황보다는 나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아, 이런 건 내가 오기 전에 다 해놓지.’ 얼마나 싫어하던 말이던가.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 다들 말한다. “경상씨가 참 대단해요.” 그럼 나도 모르게 욱한다. “저는 #육아휴직 두 번이나 했고요. #신생아를 키웠어요.” 그 뒤에는 ‘다 큰 애들 보는 게 뭐가 힘들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나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신생아든, 미운 네 살이든, 초등학교에 간 아동이든 육아는 고된 일이다. 남편이 육아휴직 하기 전까지 항상 조정하는 것은 나였다. “남편 내가 힘들어, 일을 더 나눠서 해줘.” 울며 사정한 날들도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돌봄노동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안사람’을 위해 회사에서 뛰어와야 한다. 처음에는 ‘그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어?’라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들었지만 퇴근 후 지친 남편의 표정을 보면 ‘서로의 상황을 비교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울던 첫째. 첫째가 덜 울었다면 육아는 덜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서야 남편이 진짜 내 편 같다. 몸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이제 정말 함께 하며 서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햇볕이 뜨거운 날 남편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오래 서 있으면 힘들텐데.’ 둘째는 이제 장난감을 찾을 때도 아빠를 부른다. “엄마가 찾아줄게”라고 하면 “엄마 말고 아빠”라고 말한다. 아빠와의 시간이 쌓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라며 아이들이 매달릴 때 후련하다가도 남편이 짠해진다.

가끔 궁금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함께 회사를 다니고 함께 돌봄노동을 나누게 되면 나는 이전보다 덜 화가 나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내가 힘든 것은 ‘구조’니까. 그러나 남편이 육아휴직하기 이전의 남편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시간이 매우 귀하다고 느낀다.

 

 

매일의 지난함을 함께 통과하는 '동지'

황경상

첫째가 태어나고 한 달 즈음 되었을 때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아내는 아침에 출근한 나에게 방긋방긋 웃는 첫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혼자 갓난쟁이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 좀 나아지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또 왔다. 정말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울기도 했다. 아침에 방긋댄 건 잠깐이고 그 이후로는 내내 칭얼거렸던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가 보니 아내의 안경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행여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홀로 집에 남아있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립감이었을 터다. 육아휴직 시절 아내는 퇴근하는 나를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오는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터다.

처음 첫째를 낳고 나서 아내는 젖 먹이는 것조차 힘들어 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간호사에게 하소연을 하자 간호사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는 원래 그래야 해요.”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는데, 어쨌든 엄마는 그 모든 걸 버텨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어머니에게 나를 처음 낳았을 때도 그렇게 힘드셨냐고 물었다.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애는 하루 종일 울어대는데 젖은 잘 안 나오고 해서 몹시 힘들었고, 울기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산후조리를 돕던 할머니가 산후에 울면 눈이 나빠진다고 해서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지금은 아이들도 많이 컸다. 둘이 놀면 그냥 놔두고 다른 일을 해도 될 정도다. ‘그래, 예전 이 녀석들 어렸을 때보다 지금은 많이 편하지.’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간에 가다가 쉴 수는 없다는 것, 귀찮거나 힘들다고 열 번 중 한 번쯤은 놓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열 번 잘 해도 한 번 못하면 못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언젠가 들었던 잠수함사령부의 모토는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라고 한다. 잠수함은 바다 속에서 아무리 작전을 잘 수행하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바다 위로 나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육아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친다. 매일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인정을 못 받는다. 늘 전쟁하듯이 최선을 다하지만 한 번 삐끗하면 개념 없고 무관심한 부모가 되기 십상이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 등원을 시키면서 감기약을 유치원가방에 넣어두고 깜박 잊은 채 투약지시서를 쓰지 못했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왜 약만 넣어뒀냐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단다. 나는 졸지에 투약지시서도 쓸 줄 모르고 약만 넣어둔 개념 없는 아빠가 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런데 지시서를 안 썼는데 약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첫째가 다른 친구가 약 먹는 걸 보더니 자기도 달라고 했단다. 눈치 없는 녀석.

얼마 전 새벽녘에 빗소리에 깼다가 다시 겨우 잠을 청했는데 아이가 일어난다. ‘아빠 나가자, 나가 놀자’ 아휴, 정말. 죽겠다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아내가 데리고 나간다. 30분인가 눈을 더 붙였을까. 어렴풋하게 아이들과 엄마의 재잘거리는 희미한 소리에 선잠을 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에 몸을 묻고 안락하게 누워있으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잠이 덜 깬 채로 내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대는데 부엌에서는 엄마가 뭔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희미하게 음식 냄새도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면 괜히 안심이 됐다.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그 투닥거리는 소리는 바로 매일 다가오는 일상에 맞서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하는’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소리였다는 것을. 귀찮다고, 힘들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내는 소리였다는 것을. 매일 아침 엄마도 얼마나 일어나느라 힘들었을까. 엄마도 이불에 몸을 더 파묻고 누워있고 싶었을 텐데. 엄마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아내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신 장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육아가 온전히 내 영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한 번 그 지난함을 생각하게 된다. 잘 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오직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그 일.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불가피하게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아내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풀 죽은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 정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데... 놀려고 일부러 늦게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 역시 서운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일 때문에 늦어’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머릿속으로는 다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야속하다. 일을 마친 아내는 집에 와도 파김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어떤 때는 그게 더 낫다는 걸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알게 됐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곁에만 있어도 동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 맥주 한잔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으로 우리는 드디어 동지가 됐다 [부부 육아일기 8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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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풍경들

임아영

엄마와 둘쨰가 함께 걷고 있다.

 

결혼 전 경북 구미에 사시는 시부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러 갔다 돌아오던 길이었다. 6월 초였는데 꽤 더운 날씨였고 기차의 에어컨은 고장나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 준비 과정의 첫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는데 안도했고 편히 쉬고 싶었다. 그때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세 살이나 네 살 정도 됐을까. 아마 그 아이도 더워서 그 괴로움을 울음으로 표현했던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났다. 조그맣게 남편에게 말도 했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단호하고 냉정했던 말투가 기억난다. 연애 중이던 남편은 그 아이의 괴로움보다 내가 더워하는 것을 더 신경쓰던 때였다. 남편도 내 말에 호응하며 우리는 그 아이 부모를 원망했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이 울음에 괴로웠다.

아이를 낳고서 그 장면이 꽤 자주 떠오른다.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 #노키즈존 이라며 급기야 어떤 공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우리 아이들을 거부할 때 그때의 내 냉정했던 말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그 부부는 내 말을 들었을까. 작게 말한다고 했겠지만 아마 마음 졸였을 그 부부에게 이 말이 화살이 되지는 않았을까.

 

아이 울음을 부모가 그치게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마트에서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부모가 훈육할 순 있지만 그 행동을 단숨에 그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들을 낳고서야 알게 됐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귀여운 얼굴에 떼쟁이가 나타났다가 천진함이 나타났다가 다시 떼쟁이가 나타난다. 울음으로밖에 의사를 표현할 줄 모르는 돌 전 아기들, 말을 배워도 아직 표현이 능숙하지 못해 어른들과 소통이 안 되면 떼부터 쓰고보는 세 살 네 살 아이들.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이해하게 됐다. 동물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자기 먹이도 찾아다니던데 인간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모든게 늦는 걸까. 이유를 안다 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물음을 안고 온몸으로 아기를 기르던 #육아휴직 시절 나는 자주 외로웠다. 늘 당당하게 살려고 했지만 아이를 안고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내 자세는 묘하게 수세적이었다.

#임신 했을 때였다. #노약자석 에 앉았다가 한 할아버지에게 대놓고 핀잔을 들었다. “임신했어요”라고 작게 말했지만 억울했다. #임산부#교통약자인데 왜 내가 눈치를 보는가. 그러다 문득 교통약자석 표시를 보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 표지가 보였다. 아, 한 번도 장애인의 #이동권 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었구나. 배가 점점 더 부르면서 뛸 수 없게 되고 뒷짐을 져야할 만큼 허리가 아팠다. 뛸 수 없게 되자 문득 거리에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으로 젠더적 #소수자성 에 몰입했지만 과연 난 얼마나 다른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이 있었던가.

혼자 걸어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쉽지 않다. 언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무법자’들이라 달리는 차가 공포스럽다. 아, 이 도시엔 왜 이렇게 차가 많은 걸까. 미세먼지가 심해질 때 아이들이 기관지염에 걸려 소아과에 가면 평소보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소아과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이 작은 아이들이 도시의 삶이 지속가능한지 묻는 것만 같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의 힘만으로 키울 수가 없어 돌만 지나도 #어린이집 을 다닌다. 면역력이 아직 약한 아이들끼리 감기를 옮기고 또 옮겨 항생제를 계속 먹여야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보육의 시기를 거쳐 경쟁이 점점 극심해진다는 교육의 시기로 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줄 알고서도 둘째까지 낳은 나의 배짱은 어디에서 왔는가.

엄마가 되면서 작은 아이의 삶을 다시 살게 된 기분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탐험하며 모든 걸 신기해 하지만 어른이 된 내 눈엔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인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아이가 좀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보통 사람이 안전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에 목소리를 낸다. 물론 뭐 대단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항상 내 어깨 위에 시선을 두고 살았다면 어린 아이들의 시선으로 내려왔다 정도는 말할 수 있을까. 다짐을 해본다. 작은 존재들, 사회가 애써 권리를 모른 척하는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다짐이 발걸음이 되기를.

벤치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들

황경상

10년 넘게 쉬지 않고 회사에 다녔다.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가 있는 서대문, 광화문에서 보냈다. 낮 시간 동안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가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다. 집안일을 책임지는 주부가 됐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취직하기 전 백수 시절의 기운이 잠깐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갔다하다보면 금세 1만 보가 넘어버리는 스마트폰의 만보계를 보면서 ‘아이는 편도지만 어른은 왕복’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 전에 아이를 돌보셨던 장모님께서 정말 힘드셨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보지 못했던 것들도 많이 보인다. 동네 가게 하나하나를 유심히 본다. 어떤 가게가 사라지고 어떤 가게가 생기는지 알게 된다. 이 동네에 산 지 몇 년 만에 이비인후과가 이렇게 가까운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등어 조림 재료를 사려고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여기서는 생고등어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생선을 사기 위해서는 가까운 시장에 가야 했다. 구경꾼이나 들러리가 아니라 직접 물건을 사러 가 본 시장에는 싸고 좋은 물건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살면서 크게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경제적 여건이나 지방 출신이라는 점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랬다. 스스로는 대단치 않다고 여기지만 어쩌다 보니 남성이자 #정규직 직장인, 비장애인이라는 것만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큰 #기득권 처럼 되어 버렸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입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광화문이나 서대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한 번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왜 그렇게 길거리에 턱이 많은지. 보도블럭은 왜 그렇게 깨진 것들이 많고 길은 울퉁불퉁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곳이 많은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원망한다. 킥보드, 유모차(자전거) 등 바퀴 있는 탈 것들이 없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한 번씩 그 탈 것들의 바퀴가 턱에 탁 걸려서 아이가 휘청하거나 자빠지고, 내가 밀던 유모차가 꼼짝도 못하고 처박히면 몹시 화가 난다. 도무지 우리 사회의 거리란 곳은 두 발로 걷을 수 있는 성인이 아니면 이동하기조차 어렵게 돼 있다. 또 자전거는 왜 이리 인도에서 레이싱을 하는지.

육아휴직을 하고 보통의 ‘아빠’가 아닌 보통의 ‘엄마’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아마 생에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일도 하게 된다. #육아휴직급여 신청을 하면서 헤매다가 센터에 전화를 해 보고서야 휴직 한 달 뒤부터 가능하고 한 달 단위로 계속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휴직 급여인데, 미리 신청해서 원래 급여가 나올 날짜에 받을 수는 없는 것인지. 또 6개월에서 1년을 휴직하는데 매달 나오는 거라면 왜 그걸 매달 신청하게 만들어놨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휴직을 하면서 둘째 어린이집도 종일반이 아니라 맞춤반으로 바뀌면서 시간제한이 생겼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만 아이를 맡기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그보다 일찍 가거나 늦게 데려오면 추가로 #긴급보육서비스 를 사용해야 하는데 한 달에 15시간만 가능하다. 그래서 아침에는 첫째를 초등학교에 8시55분까지 데려다 주고 난 뒤 9시30분까지 주변을 떠돌면서 시간을 번다. 물론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하면 적절히 긴급보육을 사용한다. 오후에도 첫째 하교 시간과 잘 맞지 않으면 그보다 늦게 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비상시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늘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야 하고 부담이 된다.

 

그런데 주변을 산책하다가 첫째 친구 엄마를 만났다. 그 분도 첫째를 등교시킨 뒤 둘째를 데리고 주변을 배회하고 계셨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가 유치원에서 #방과후과정 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9시 반 전에는 등원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상황인지. 나라에서도 기관에서도 정말 열심히 애쓰고 계시지만 정작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누굴 탓해야 할지 모르는 구멍이 생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뭔지 모를 씁쓸한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내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다. 과연 둘을 데리고 제대로 음식이나 입에 넣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됐지만 다행히 #놀이방 이 있는 식당이었다. 아이들을 놀이방에 들여보내고 음식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한데 뭔가 좌불안석이다. 네 살배기 둘째가 혹시나 놀이방에서 심하게 놀다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여다봤다. 오락기에 빠진 첫째를 보고 있자니 가만히 방치하는 게 죄책감이 든다. 옆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혹시 이렇게 흉이나 보지 않는지 걱정된다. ‘저 봐, 아빠가 아이들을 보니까 저렇게 방치하는구만.’ 어쨌든 식사는 훌륭했고 아이들도 잘 먹어줬지만 아내가 퇴근해서 식당에 데리러 올 때까지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고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렀다.

 

식당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환영받을 때도 많지만 주변의 시선을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다. 괜히 아이들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밥알이라도 바닥에 흘리면 물티슈로 치우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이렇게 #눈칫밥 을 먹으며 아이들을 키워 왔을까. 한 번이라도 이렇게 식당에서 온전히 혼자 스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노 키즈 존’을 쉽게 써 붙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애 데리고 왜 나왔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마도 나 역시도 육아휴직을 해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없던 젊은 시절 내가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것처럼.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고, 또 해 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육아는 적어도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 ‘넌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를 걸’이라고 야유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 키우는 게 무슨 벼슬이나 특권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를 키우면서 집에 머물러 있는 일이 결코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거나 주류적인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부분에서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을, 육아휴직을 하면서 정말 몸으로 느낀다.

텃밭에 물 주는 아이들.

 

[출처]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일들 -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7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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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으로 가족 나들이 떠난 날. 아이들이 업어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스카프를 잡고 따라오라고 이끈다. 두 아들이 다루는 노하우가 느는 만큼, 육아의 불안감도 커진다.

 

▲덧셈 뺄셈 늦는다고…다그친 엄마, 아이가 어려움 겪을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는 얼마 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덟 살이 되고 학교 가면서 힘든 일이 많아졌어.” 아이가 가끔 이렇게 툭 말을 던지면 마음이 싸해진다. “왜? 뭐가 힘들어?” “글씨 쓰는 것도 힘들고 교과서 하는 것도 힘들어.” 수업시간이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직 10분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가 40분 동안 앉아 있으려면 힘들겠지. 뭐 하나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빠를 닮아 글씨도 꾹꾹 눌러쓰는 첫째를 보면서 이렇게 공들여 하면 힘들 텐데 속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던 터라 더 마음이 싸해졌다.

 

아이가 며칠 동안 수학익힘책을 나머지 공부로 들고 왔다. 유치원을 다니며 ‘엄마표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낸 우리 부부의 방침(?)이 무리였던 걸까. 영어도 8세에 노출을 시작한 결정이 잘못된 걸까. 의외로 영어는 흥미로워하며 할머니가 주민센터 수업에서 배워와 알려준 영어 뜻을 내게 묻기도 했다. “엄마, you have a good memory가 무슨 뜻인 줄 알아?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야.”

 

의외의 복병은 ‘빼기’였다. 덧셈·뺄셈은커녕 숫자 공부를 거의 해본 적 없어서인지 힘들어한다. 어린이날 서점에 데려가 아이가 좋아하는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을 선물로 사주면서 수학 문제집을 두 권 샀다. 퇴근을 하고서는 옆에 앉아 같이 수학 문제집을 푼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얼른 집에 가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다.

 

선행학습 없이 학교 보낸 게 무리였을까
숫자 공부 해본 적 없는 아이가 힘들단다
학교에선 놀이·점심시간만 좋다는데…

 

모든 아이가 빛난다. 우리 아이도 빛나는 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풍기 하나를 봐도 어디로 전기가 들어와 날개가 돌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아이다. 12월생이라 조금 늦고 뭐든 꼼꼼하게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수학의 원리야 익히면 금세일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그럼 학교 다니면서 즐거울 때는 언제야?” “놀이시간이랑 점심시간.” 1학년은 2교시가 끝나고 30분간 놀이시간이 있다. “엄마도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점심 먹으러 다녔던 것 같아.” 아이를 다독이고 싶었다.

 

공부하며 집중 않는 아이에 화 내고…
다음날 만난 담임 선생님의 차분한 말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연습하면 돼요”

 

물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생각을 하자 화가 났다. “집중 안 할 거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학도 국어도 안 해도 돼. 공부 안 해도 돼.” 단호한 말투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눈이 똥그래졌던 첫째는 엄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했다. 차분한 말이 돌아왔다. “어머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이가 이해력이 떨어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연습만 하면 돼요. 수학은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는 그대로다.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다. 덧셈·뺄셈을 못할 리가 없는데 다른 아이보다 늦다고 불안해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라니. 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면서도 나는 불안했다. 드라마에서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산재를 은폐하는 사업장에서 근로감독관이 활약해 문제를 풀지만 드라마는 판타지고 현실은 대부분 시궁창이다. “엄마, 나는 커서 버스기사 안될 거야.” 사장의 말도 안되는 지시에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운전하며 꾸벅꾸벅 조는 버스기사들의 장면이 지나간 뒤 첫째가 말했다. “버스기사는 잘못하게 되잖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말했다. “아냐, 기사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회사 사장의 잘못이야.” 허공을 맴도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웠다. 우리 아이는 커서 안전한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인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인가. 아이가 빼기를 못한다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아이가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마음 탓일 게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잘 살 수 있는 걸까. 사람값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를 갖는 것, 갈수록 이렇게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뭐 어때, 결과는 내 몫이 아니야.” 내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쿨한 내가 왜 아이들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지는가. 부모가 되고 보니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는 거였다. 인생이란 괴로움과 후회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내 아이는 그 괴로움과 후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불가능한 마음을 품고선 어떤 세상인가 올려다보면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한다. 남편에게 말했다. “부모가 되면서 사회를 다시 잘게 잘게 쪼개 먹는 느낌이야.” 어릴 땐 엄마가 비관적 전망을 말하면 화를 냈다. “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부모가 되어보니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자식이 어떤 일에 처했을 때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사회를 좀 더 잘 알게 되어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못 맞출까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지는 부모 마음
결국 그 불안을 가다듬는 게 숙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숙제는 불안을 가다듬는 것 아닐까.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 속에 자랐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야, 어떻게 살고 싶어? 무엇이 너를 즐겁게 하고 어떤 순간이 너를 두근거리게 하니.’

 

이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려면 사람이 도구로 취급받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가장 아득하다. 이 아득함이 몰아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이 세상에 아이들을 내놓았다는 게.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실컷 놀게 못 해줬나…자책한 아빠, 모든 위험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때는 자주 자전거형 유모차에 태운다. 녀석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지만, 아직 체력이 약한 녀석은 집에 끝까지 오지 못한다. 중간에 안아달라고 칭얼대기 마련이다. 안아주면 녀석을 바라보며 호흡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맞다, 힘들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져서 조금만 걸어도 팔이 뻐근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훌쩍 커버린 녀석은 이제 유모차는 안 타려고 하는데 다행히 자전거형 유모차는 잘 타려고 했다.

 

유모차 타고 집에 가는 둘째를 보며
말 건네는 아주머니 “걸어야 좋아요”
약하게 키운 건 아닌가 마음 무거워진다

 

어느 날도 자전거 유모차에 태워서 오는데 어떤 중년의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만지면서 사물을 느끼면서 가야지 지능이 잘 계발된대요.” 아마도 꽤나 큰 녀석을 자전거에 태워서 가는 모습이 마뜩잖게 보였나보다. “네,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그날따라 짐도 많아서 낑낑대며 가는데 불쑥 화딱지가 났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지나쳐 갔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둘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다들 걸어서 등·하원을 한다. ‘이 녀석, 너무 약하게 키우는 거 아닌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원래도 불안이 많은 성격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나다. 첫째 아이가 갓 태어난 모습을 보고서는 ‘혹시 만졌다가 팔뚝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10초 정도 안았다가 다시 장모님께 건네기도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걱정들이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풀려나와서 뭉게뭉게 부풀어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아이를 낳으면서 공부 걱정은 안 할 줄 알았다. 잘할 거라 믿었다기보다는, 공부보다 세상에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매달리기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막상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걱정을 놓지 못한다. 처음 참관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이는 좀체 선생님의 말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선생님이 하라는 건 하지 않고 몸을 비비 꼬기만 했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하는 ‘꼰대’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학년 꼬마가 집중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아이들을 실컷 뛰어놀게 해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한다. 두 녀석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녀온 뒤 놀이터에서 놀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일찍 들어간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엄마는 벌써 4시간째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해주고 있었다. 다 커서 아이들끼리 놀면 괜찮지만 어린 아이들은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벌서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저녁 먹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하는 시간이 다 늦어져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해주는 그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벌써 두 발 자전거 타는데
보조 바퀴 달고도 페달 겨우 밟는 첫째
몸 쓰며 놀게 해주지 못해 그런가 자책

 

나는 조금만 춥거나 덥거나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곤하면 슬슬 ‘집에 가자’는 신호를 아이들에게 보낸다. ‘아빠 힘들어’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바깥 놀이가 늘 고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째의 친구들은 벌써 자전거를 보조바퀴도 떼고 타는데, 녀석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 페달도 겨우 굴린다. 줄넘기도 아직 서툰 것 같다. 본인도 그게 조금 속상하다는 뜻의 말을 언뜻 내비치기도 한다. 역시 밖에서 몸을 쓰면서 노는 걸 많이 못해줘서 그런가. 또 자책한다.

 

부모는 늘 무한책임이다. 한 엄마는 아이가 이마에 모기가 물렸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제대로 못 봤다는 식으로 얘기해 속상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맞다, 정말,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지만, 뭔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 모든 게 다 내 책임인 것만 같다. 안 해주려고 안 해준 게 아닌데…. 가진 게 많아야 불안이 많다는데, 별로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세상에 제일 중요한 보물단지를 껴안게 됐다.

 

아이들은 강요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부모는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라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세상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오면 그때는 무력감을 느낀다. 얼마 전 첫째가 다니는 학교에서 석면 제거 공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반대 여론이 조성된다고 하자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부실 공사도 생각보다 많았다. 만에 하나 공사 후에 석면이 0.00001%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아이들이 마신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왜 석면이라는 게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걸까. 그래도 잘 감시하고 믿을 만한 업체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학부모들의 반대로 끝내 공사는 무산됐지만 아이는 앞으로도 내가 미처 몰랐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배를 타는 일에 아무런 경각심이 없었던 것처럼. 플라스틱 남용이나 기후위기 문제처럼 뻔히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 예상되지만 무력감만 느껴지는 미래도 있다. 결국은 다시 생각한다. 우리 아이만 모든 불안과 위험을 비켜나가 자라기를 바라는 건 허망하다는 사실을.

 

육아책을 보면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다고 해서 절대 아이들이 그 말대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부모는 그저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 하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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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임아영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어젯밤 세 돌이 지난 이준이를 업고 <섬집 아기>를 불러줬다. 여덟살 두진이가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불러줬던 노래였는데. 이준이가 가사를 따라 불렀다. 내 목소리와 이준이의 목소리가 겹쳐지자 문득 두 아이를 업어줬던 날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엄마가 울자 등에 업혀 있던 이준이가 말했다. “엄마 울어? 왜그래?” 그러게. 엄마는 왜 울까. “이준이가 크는 게 아까워서.”

 

이준이가 짐짓 어른스럽게(?)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을 몇 번 해줬던가. 아이의 위로에 이상하게도 더 눈물이 났다.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를 위로해주는 아들이 됐을까? 너무 기특해서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고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준아, 엄마 눈 봐봐.” 어쩌면 이렇게 눈빛이 맑을까. “엄마가 이준이를 정말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섬집 아기>는 이준이보다 두진이에게 많이 불러줬던 동요였다. 돌 전 아기였던 두진이를 키울 때 나는 너무 ‘초보’였다. 아이와 둘이 있는 게 두려웠다. 울어버리는 두진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스스로가 두려웠다. 아기띠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던 두진이는 포대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나를 키울 때 쓰던 포대기. 물론 엄마가 아이를 업듯 아이를 등에 손쉽게 얹은 뒤 포대기로 감지는 못했다. 아이가 졸려 하면 침대에 포대기를 펼쳐놓고 두진이를 포대기 가운데에 눕힌 뒤 침대에 등을 밀착하는 자세로 몸을 뒤로 구부려 아이를 겨우 업었다. 두진이를 키울 땐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이를 업고서 불러주던 노래가 <섬집 아기>였다. 두진이는 이 노래를 불러주면 잠을 잘 잤다. 물론 금세 다시 일어났지만.

 

<섬집 아기>를 부르고 있으면 엄마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했던 초보 엄마 마음이 떠오른다. 요즘 두진이를 몇 번 다그쳤다. “두진아 모르겠어? 두진아 어딜 보는 거야. 두진아 두진아!”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는 빼기를 어려워한다. “두진아 세 개에서 두 개를 빼면 몇 개야?” “한 개!” “그럼 3-2는 뭘까?” “2!”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올라온다. 이래서 자기 자식은 가르칠 수 없는 거라고들 한 건가. 가장 답답할 때는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볼 때다. 아이는 뭐든지 늦다. 느리지만 꼼꼼한 아이라서다.

 

얼마 전에는 ‘ㅏ ㅑ ㅓ ㅕ’를 배우는데 수업 시간에 다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집에서 좀 같이 해보라고까지 했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어 교과서를 보니 사자 그림에 ‘ㅏ’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고 ‘ㅑ’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는 거였다. “두진아 왜 색칠 못했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원래도 자기 표현을 많이 하는 아이가 아니다. “두진아 왜 못했느냐고.” 다시 물어도 묵묵부답. 다시 속이 부글부글한다. 한 번 더 참고 물었다. “두진아 대답해야지. 엄마가 물어보잖아.” 겨우 답이 나온다. “다 할 수가 없었어.” “왜?” 바로 다다다 소리가 나올까봐 꾹 참고 다시 물었다. “두진아 그럼 친구들이 색칠하고 있을 때 두진이는 뭐했어?” 두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왜?” 이해가 잘 안됐지만 다시 물었다. “왜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두진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떤 색을 칠하면 예쁜지 생각했어.” 아... 그랬구나.

 

아이와 함께 색칠을 다시 했다. 아이는 수업 시간에 못한 사자 그림을 다시 칠했고 나는 그 옆 페이지의 여우 그림을 칠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는 말했다. “아, 힘들어.” 아니 칠하기 시작도 안했는데 왜 힘들다는 거야. “엄마, 다 칠하려면 힘들어.” 같이 색칠을 하면서 알게 됐다. 뭐 하나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색연필을 꾹꾹 눌러 빈틈없이 색칠할 생각하니 손도 아프고 걱정되었던 것. 옆에서 내가 색연필을 뉘여 살살 색칠하자 두진이가 계속 참견했다. “엄마, 그렇게 하면 하얀색이 다 보이잖아.” 아... “두진아 이렇게 칠해도 돼. 그렇게 다 하려면 힘들잖아.” 말하고나서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해야 하는 아이다. 남편을 닮았다.

 

첫째가 골똘히 글씨쓰기 숙제를 하고 있다.

 

하루는 더하기 빼기를 하다가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너무 화가 났다. “두진아 하지마. 집중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수학도 국어도 안해도 돼!”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고 집중을 오래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다그치고 말았다. 겨우겨우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났다. 이렇게 다그치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나는 효율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군더더기가 있는 것을 참기 힘들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아이다. 수줍음이 많고 느리다. 말이 많지도 않다. 남편을 닮았다는 생각에 가끔은 남편의 답답한 모습과 연결되며 답답하다. 나를 닮은 둘째가 종알종알 떠들고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된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싫었다. 아이에게는 절대 ‘욱’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모 자식과도 ‘케미’가 있다던데 내가 두진이의 성정을 이해 못하는 엄마인 걸까. 선풍기가 돌아가면 어떤 원리로 선풍기가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아이, 우유를 안 먹으려고 해서 선생님이 “우유를 버리면 물고기가 아파”라고 한 말을 듣고 우유가 어느 관을 타고 버려지는지 생각하는 아이다. 집에서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아이는 3+2를 계산할 때 동그라미 3개를 그리고 2개를 그린 뒤 더했다. “두진아 이렇게 하는 거 누가 알려줬어?” “그냥 내가 했어.” 아이를 믿어줘야 좋은 부모라고 했다. 기특한 아이를 나만 못 믿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급한 게 문제일 수도 있다. 남편이 아이를 자꾸 자기를 닮았다고 규정하지 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이는 그냥 아이다. 첫째는 남편, 둘째를 나를 닮았다며 이미 아이들을 어떤 틀로 규정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식이란 존재는 너무 어렵다. 내가 아닌데 나를 닮은 작은 존재.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존재인데 보살피고 등을 토닥여줘야 하는 존재.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고 세상의 풍파를 잘 헤쳐가는지 뒤에서 바라봐줘야 하는 존재.

 

자책하고 있으니 친구가 말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 하더라고. 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거라고 했어.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아이들이 잘 크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힘내.”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계속 배우는 것은 아마 뒤에서 바라봐주는 존재가 되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법. ‘엄마도 계속 더 엄마가 되어가고 있어. 두진아 이준아, 엄마가 헤매서 미안해. 그래도 조금씩 더 나아질거야. 엄마도 시간이 지나면 더 배울 테니까.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둘쨰가 인형을 안고 잘 보살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황경상

“선생님, 아빠는 맨날 잠만 자요.”

어느 날 큰애가 담임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아마 피곤해서 잠깐 누워있었던 것을 그리 말했나 보다. 육아휴직도 이제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아빠인가보다.

 

가끔은 깜짝 놀라는 일도 있다. 여전히 학교 가는 일에 적응 중인 1학년 첫째는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녀석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있는 모양이다. 지난 번에는 꾸역꾸역 배 아픈 걸 참다가 함께 있던 친구의 엄마가 나한테 전화를 해 줘서 뒤늦게 알게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타일렀다. “아프면 참지 말고 선생님께 얘기하고, 아빠한테 전화를 해 달라고 말씀드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 전화번호는 몰라.” “엄마 전화번호는?” “알아. XXXX에 XXXX” 헉... 아직 아빠 전화번호는 몰랐단 말인가.

 

아빠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에게 ‘만족’이란 없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억울할 때가 있다. 지난번에는 방과후 수업을 내내 서서 참관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실컷 놀려준 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 있어 2~3시간 만에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때 첫째가 ‘아빠! 아빠!’ 하는 걸 못 들었나보다. 내가 대답을 안 했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는 맨날 휴대폰만 보고 있어!” “야, 아빠도 뭐 보낼 게 있어 그래!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왜 아빠한테 그래!”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대충 때우려는 것도 아이들은 귀신처럼 눈치 챈다. 언젠가 첫째가 레고로 조립한 장난감 프로펠러를 돌리면서 “이것 봐 잘 돌아가지?” 하고 내게 자랑을 했다. 아마 그때 몹시 피곤했던 나는 아이에게 눈도 안 돌리고 “응, 잘 돌아가네” 그랬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첫째가 말한다. “아빠는 옆에 눈이 달려있어?” 급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 녀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야, 이렇게 아빠가 곁눈으로 봤어, 안 보고 말하는 줄 알았어?” 녀석은 유심히 옆으로 흘기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믿어보겠다는 눈치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자꾸만 다른 아이들과 우리 아이를 비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이 김치나 나물에 밥을 쓱싹 비운다는 얘기를 듣고는 왜 우리 아이들은 손이 이렇게 많아 가는가 하며 한숨을 쉰다. 목이 쉬도록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불러도 밥을 안 먹는 녀석들, 겨우 한 숟갈 떴다가도 먹기 싫은 반찬이라고 게워내 버리는 녀석들. 그러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는다. ‘도대체 니들은 왜 그러는 거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빠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런 질문을 아이들이 할 법도 하다. “다른 아빠들은 말이지, 몸으로 잘 놀아주는데 아빠 너는 왜 그렇게 늘 퍼져 있니? 또 다른 아빠들은 물어보면 차근차근 설명도 잘 해주고, 화도 안 내는데 아빠는 걸핏하면 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니?”

 그렇다. 요즘은 하도 불끈불끈 화를 내서 아이들이 나를 ‘화내는 인간’으로 기억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다. 언젠가는 갑자기 막 매달리는 첫째 때문에 목과 어깨 언저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하냐고 막 뭐라고 했더니 녀석의 입꼬리가 금세 실룩실룩해지면서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눈망울은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반짝거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빠도 아픈 걸 어째. 미안하다!

 

아빠가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냐고? 아이들이 이해한다면, 좀 어렵더라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빠는 지금 너희들의 시간을 배우는 중이라고.

 

아이도 어른과 비슷하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자기의 스케쥴이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당황스러워한다. 뭘 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미리 말해주고 동의를 구한 뒤 움직여야 뒤탈이 적다. 늘 그걸 까맣게 잊는다. 노는 아이를 갑자기 데려와 씻기고, 집에 있는 아이를 갑자기 어린이집에 데려가 부려놓으려고 한다. 아이들이 울고 떼쓸 때면 ‘아차’ 싶지만 늦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날은 다르다. 서운해 하지만 떼쓰거나 울지는 않는다.

 

그것이 늘 어렵다. 머릿속에 아직도 아이들의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른들의 시간에만 맞춰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허겁지겁 윽박지르는 일이 반복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조금만 더 헤아려본다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늘부터 너희들의 시간에 맞춰볼게, 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거다. 또 나는 어른들의, 세상의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닦달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어느 날 화장실에서 첫째를 씻기고 있었을 때였다. “아, 좀 크게 해 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안 벌리려는 녀석의 입을 억지로 벌려 칫솔질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아빠! 귀여워!”

 그래,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아주 실패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형제가 킥보드를 타고 있다. 밤이 됐는데도 지칠 줄을 모르는 형제들.

 

 

[출처] 좋은 부모, 그냥 부모 [부부 육아일기 6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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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샤인 2019.06.14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형제맘인데 애들 에너지 못쫒아가죠 ㅎㅎ이미 훌륭한 아빠이세요~ 아이도 어른도 노력하는 모습보다 더 훌륭하다는 의미는 이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요리하는 아빠, 설거지하는 엄마

임아영

설거지를 좋아한다.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통 물에 불린 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를 때 음식 찌꺼기가 없어지는 게 좋다. 그 다음에는 비누거품이 묻어있는 그릇을 물에 헹궈낼 때 그릇이 다시 빛을 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또 그릇을 말린 뒤에 정리할 때 가지런해지는 게 좋다. 설거지는 내가 집안일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사노동 을 무척 즐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편이고, 아이 밥을 주로 먹이는 사람도 남편이고, 아이 목욕을 주로 시키는 사람도 남편이다. 참을성을 요하는 일에 나는 치명적이다. 뭐든지 빨리 해내는 것을 즐기는 성격인데다 어떤 일을 해도 들이는 노력 대비 효용을 고려하는 내게 요리, 밥 먹이기는 정말 안 맞는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꾸준하다.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남편은 빨리 시작하고 잘 지치는 내게 “괜찮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금방 지쳐 떨어지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다른 성격은 결혼 후 싸울 때마다 서로를 답답해하는 이유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모든 부부가 그렇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장점이 오래 지내고 나면 단점으로 비춰지는 것은 모든 관계가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밥솥 카스테라.' 힘들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기에 가끔 쿠키나 빵을 만든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한다면 남편은 요리를 좋아한다. 다섯살 때부터 병설유치원에 다닌 첫째는 매달 현장학습을 갔다. 거의 3년간 매달 김밥을 싸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지난 해 유치원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진이가 아빠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빠가 싸시는 거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의 도시락을 만드는 일도 ‘엄마’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남편의 김밥을 자랑하는 것 같을까봐.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니, 어머님은 어떻게 남편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이 요리를 하고 아이들 밥도 주로 먹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굉장히 많이 하는 걸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몸이 바쁘지만 나는 머리가 바쁘다. 한 가정이 굴러가려면(?)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클 때마다 옷을 사고 매주 먹을 음식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대출 상환 계획을 수립하고 10년, 20년 단위의 재무 계획을 점검하는 것은 모두 ‘내 일’이다. 이제 아이들이 더 크면 아이들 관련 행정(?) 업무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교육에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고 예산에 따라 학원을 어디에 보낼지 결정하고 실제 학원비를 결제하는 것도 내 일이 될 것이다. 지금도 첫째 피아노학원과 둘째 어린이집 특활비 결제는 내가 한다.

회사 점심 시간에 정신없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가끔 ‘왜 이 모든 일을 내가 다 맡고 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우선순위 에 따라 일의 순서를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획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집안일을 할 때도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한 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일부는 털어서 널고 일부는 건조기에 돌리고 가끔은 청소기도 살짝 돌리는 것처럼, 일을 가장 빨리 하는 법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가사노동의 기획’ 업무를 결혼 이후 계속 내가 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둘 다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신혼 때는 우리도 가사노동 배분 문제를 가지고 다퉜다. 그러나 돌아보면 각자 잘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남편은 참을성을 요하는 일로, 나는 기획하는 쪽으로. 이제 사실 누가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지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다만, #보이지않는노동 들이 많다는 것은 알리고 싶다.

 

  다들 가사노동이라 하면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중에서 설거지만 하는 내가 우리집에서는 가사노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을 내가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 가사노동에 이렇게 #비가시적분야 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잘한 노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도 가사노동을 전담했던 #친정엄마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 엄마가 어떤 보이지 않는 노동을 ‘그렇게 많이’ 해냈는지 결혼하기 전까지 잘 몰랐다. 신혼 초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수건을 접는 이런 작은(?) 일도 다 엄마가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아서였다. 어릴 때 남동생은 내 꽃무늬 청바지를 물려 입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아직도 한다. “엄마, 왜 누나 청바지를 입혔어요”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둘째를 낳고 보니 첫째 옷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새 옷을 사주는 게 정말 아깝다(물론 나는 성별이 같은 아들들이지만 남동생은 누나의 꽃무늬 바지가 부끄러웠을테다). 엄마가 집안의 총무부장이자 재무부장(?)으로 어떻게든 아끼려 노력했던 게 이해돼서 가끔은 코끝이 시큰하다.

  평생 제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엄마는 환갑이 된 해에야 명절 차례상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우리 가족은 엄마 환갑을 기념해 난생 처음 추석 때 해외여행을 떠났다. “명절에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니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하던 엄마. 그러나 설 연휴에는 아빠와 남동생 생일이 겹쳐 있어서 다시 요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그리워했다. 싱가포르의 식사를. ‘누가 차려준 밥’을. 엄마는 늘 외식을 아까워한다. “바깥 음식은 비싸기만 하지”라면서. 밥을 차려본 사람이라 사 먹는 밥을 아까워하는 것이다. 재료의 원가가 금방 나오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아니예요 엄마. 엄마 밥이 외식보다 저렴한 건 #엄마의노동력#공짜 여서예요. 우리가 그동안 엄마 밥을 공짜로 먹어서예요. 이 사회가 엄마 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서예요.’

 

 가끔은 거창하게 다짐도 한다. 여전히 빚지고 있는 엄마 밥 뒤에 숨은 노동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싶다고. 우리 모두 비가시화된 노동의 값을 제대로 아는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오늘 저녁은 카레다! 아빠가 겨우 저녁밥을 차려주었지만, 거실에는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다.

 

 

죽지 않는 좀비 같은 너란 녀석, 가사노동!

황경상

육아휴직을 하기 전엔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현관 번호키란 정말 귀찮은 물건이었다. 집에 드나들 일이 정말 많은데 그때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야 하다니. 잠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거나 우유를 사러 갔다 올 때도 예외는 없었다.

 

잉여롭게 인터넷을 들여다보다가 스마트폰을 전자키로 등록할 수 있다는 글을 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스마트폰만 갖다 대면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도구적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현관 번호키가 내 ‘도구 중독증’에 걸려든 셈이다. 몇 번 등록을 시도해봤다. 잘 안 됐다. 우리집 키는 안 되나보다 하고 포기했다. 그 중간에 등록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현재 비밀번호를 몇 번 쯤 대충 눌렀던 것 같다.

 

낮에 일이 있어 아이들을 처가에 잠깐 맡겨두고 저녁 때 집에 들어가려는데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황 서방, 아까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문이 안 열리더라고. 번호가 바뀌었나?”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이 번호, 저 번호를 눌러봐도 번호키는 ‘번호가 틀렸습니다’를 내뱉을 뿐이다. 수 년 만에 안 하던 기도도 여러 번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뭘 잘못 만졌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건 분명했다. 결국 번호키를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열쇠수리공 아저씨는 나를 위로했다. “이런 분들 생각보다 많아요. 공부하시느라 정신 없으신 분들이 주로 그러더라고요.” 나는 공부도 안 하는데... 아무런 위로가 안 됐다. 경제적 손실에 정신적 타격까지 한동안 어질어질했다. 육아휴직을 한 뒤 몸을 좀 만들어보겠다고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좀 하다가 팔이 안 굽혀져서 사흘째 팔꿈치에 파스를 붙였을 때도 이런 참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옛날 옛적 컴퓨터 게임 중에 ‘너구리’ 게임이라는 게 있었다. 이 게임은 마지막 판이 끝없이 계속된다. 가사노동이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 판인 줄 알고 깼는데 또 똑같은 스테이지가 다시 나온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치울거리가 나오는 #뫼비우스 의 띠와 같다. 실컷 청소를 해 놓고 한숨 돌리면 갑자기 저기서 ‘촤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둘째가 뭘 쏟는 소리다. 그런 단순반복을 좀 줄여보겠다고 번호키를 만졌다가 오히려 된통 당했다.

 

자취생활만 10년에 육박하는지라 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노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먹은 그릇을 바로 설거지해 놓고, 방에 청소기를 한 번씩 돌리는 일이 당연하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가사노동이 가욋일이 아니라 주된 노동이 되니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사흘에 한 번 설거지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저 ‘어시스트’ 한다는 느낌으로 가끔 하는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매일매일 할 일들이 죽지도 않는 좀비처럼 다시 나타나 내게 손을 뻗는다.

육체노동이 끝이 아니다. 집안일은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다. 거기서도 나는 젬병이다. 학교에 큰애를 데리러 갔다가 시장에 들르자고 마음먹어 놓고는 지갑을 두고 간다. 코를 훌쩍이는 둘째를 데리러 갈 때 약을 꼭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을 타서 약병에 넣어두고는 식탁에 두고 간다. 학교 도서실에 반납기한이 다 된 책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에코백에 넣어뒀다가 현관에 그냥 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덕분에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책을 가져가야 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책을 빌리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단 집안일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를 갈 일이 있어서 몇 년 만에 세차를 맡기고 보람차게 집에 돌아와 앉으면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전화가 온다. “차 키 안 꽂아두고 가셨어요?” “거기 꽂아놓고 왔는데요.” 당당하게 말하면서 탁자를 보니 차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른 차키를 들고 뛰었다.

 

왜 그럴까 생각도 많이 했다. 심각한 건망증인가? 그냥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걸까? 스마트폰 메모장에 메모도 해 두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안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생각에 한 번 빠지면 그 생각만 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외출할 때면 현관을 나가자, 그 생각밖에 못한다. 결국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한 번 주변을 돌아보면서 빠진 것이 없나 상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또 까먹는다. 그래서 안 된다. #육아휴직 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요즘 아빠가 정리하는 걸 보면 옆에서 도와주곤 한다. 고맙다, 아들!

아내에게 타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난들 어쩌겠나. 결국은 아내가 챙겨야 할 일들을 도맡는다. 메모장에 할 일들을 잔뜩 적어놓고 수시로 내게 미션을 수행했느냐고 묻는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으면 아내도 참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힘쓰는# 집안일 은 가급적 내가 하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사노동 분담이 됐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자면 우리는 남녀의 역할이 조금은 바뀐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육아휴직 뒤에는 더 그렇다. 가끔은 약간 서럽다. 퇴근한 아내가 집에 와서 건조기를 열고 아직 꺼내지 않은 빨래를 꺼내서 접으려고 할 때, 마치 내가 할 일을 안 했다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나 정말, 하루 종일 논 거 아니라고!’ 아마 많은 #전업주부 들이 남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가사노동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 힘들기 때문에.

 

[출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 [부부 육아일기 5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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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아이들이 요가 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뿌듯함과 서운함 교차하지만…더 많은 시간 함께 부대낄 수 있기를

 

요가 동작을 흉내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 육아휴직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와 등산했던 봄날, 아빠와 계곡으로 휴가 갔던 여름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계곡에 친 텐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나는 계속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텐트 속에 수집(?)하고 있었다. 속으로 ‘잠자리가 아빠 코나 눈두덩이를 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러나 평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는 늘 내가 잠들어야 퇴근했다. 열 살 때 수영장에서 넘어져 이를 크게 다쳤던 날에도 아빠는 늦게 왔다. 앞니 중 하나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버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정류장에 나타났을 때 엄마가 울던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없이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했다. 몇 군데 치과를 돌아 겨우 치료를 한 밤 아빠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했던 밤도 또렷하다.

 

나는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 분위기와 많이 달랐던 듯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다가 가끔은 어릴 적 아빠와 내 모습이 겹쳐진다. 최근 엄마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가 정말 놀랐다며 말씀하셨다. “아니, 아빠들이 다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왔더라~” 남편도 당연히 입학식에 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아이 입학식, 졸업식에 가는 걸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다 돌아보니 아빠는 내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빠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테고 회사 상사들은 면박을 줬을 테다. “엄마만 가면 되지, 왜 아빠가 유난스럽게 졸업식을 가느냐”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부르며 울 때가 많았다. 엄마가 모든 것의 디폴트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와 달라 신기했다. 아마 다른 점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가 있었다는 점일 거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단 느낌을 주지 않고 싶어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는 남편이 담당(?)하게 하며 첫째가 안 볼 때 사랑을 몰아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둘째 기저귀를 갈았던 횟수는 첫째 때보다 현저히 적다. 남편이 주로 갈아서다. 목욕의 횟수도 비슷하다. 남편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킬 때 나는 보통 첫째를 마크(?)하고 있었다.

 

관계란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누리길 바래
그것은 아이들의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

 

최근 어린이집 선생님이 보내준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준이가 점심 시간에 김치 먹으면서 ‘아빠 집에서도 김치 먹었어’라며 자랑을 했어요.” 내가 댓글을 달았다. “이준이는 이제 아빠 이야기만 하네요.”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우리 이준이는 뭐든지 ‘아빠 집’이라 표현하고 ‘아빠가 입혀줬어요’ ‘아빠한테 칭찬해주세요’라고 말을 해요. 아빠랑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어요.” 뿌듯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니다, 엄마!” 하루 종일 아빠를 불러서인지 엄마를 옆에 놓고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결국 관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관계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하나도 쓰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아빠를 더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좋아했지만 내 곁에 자주 없었던 ‘아빠와 나’와 다르게 일상에서 자주 아빠를 누릴 수 있기를.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는
아빠가 아이들을 키워야 많이 풀려
육아휴직 사업장이 더 많아지길 기대

 

아빠가 나를 키울 때는 아버지가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당연해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남편이 ‘행운아’처럼 보일까봐 가끔 걱정스럽다. 남편은 여전히 흔하지 않은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들은 아빠를 누릴 시간을 얻었다. 여전히 이런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목소리 높이고 싶다. 2019년에는 그런 사업장이 많아지길 꿈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저출산·고령화를 진정 걱정한다면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엄마들의 일을 아빠들이 나눌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말이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아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제 둘째 이준이가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첫째 두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달려 학교에 데려다줬다. 얼른 회사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떼쟁이 둘째가 아빠 손을 잡고 나타났다. 반가웠지만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이준이는 “엄마랑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 엉엉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울적하다. 버스 차창을 보며 목 끝의 뜨거움을 느끼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준이는 아빠랑 있는데 왜.’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안심이 됐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고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아이들과 소통 정말 어렵지만…아빠 역할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

 

첫째가 어버이날 편지를 쓰고 있다. 둘째는 첫쨰 하는 것을 따라하는 중이다.

 

‘으앙~’ 유모차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둘째가 갑자기 깨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막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유모차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젤리를 줘도 싫다고 막무가내로 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반쯤 포기하고 그냥 뒀다. 뭔가 서러움이 있다면 일단 배출이라도 해라 싶었다. 녀석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집이 떠나가라 운다. 씻지 않은 손에 구정물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덕지덕지 바른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모른 체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좋은 아빠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싶었을 때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 다시 물었더니 말한다. “형아 데리러 갔는데, 형아 어디 갔어!” 아까 학교에 형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형아’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는 혼자 다시 집에 있게 된 셈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대체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지식들을 얻는 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 데 도움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서 언젠가 이 책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에게 뭘 더 안겨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액션’보다는 아이들에게 ‘리액션’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내 차례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상대방의 전략을 지켜보는 턴(turn) 방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어떤 개입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될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더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육 과정을 게임으로 치자면
리얼타임 전략 시물레이션일 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발전

 

내가 그렇게 좋은 리액션을 보여줬나 돌이켜보면 백점 만점에 오십점이나 될까 싶다. 가급적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잘하는 모습을 칭찬해주되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북돋워주려고 늘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리액션은커녕 준비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다시 집에 헐레벌떡 돌아와 집어서 갖다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아지는 모습도 발견한다. 리액션이란 본디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더 중요하듯 아이들 역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나 혼자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첫째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아내 없이 혼자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말을 잘 못하던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 종일 나와 시간을 보내더니 곧잘 ‘아빠’ 하면서 달려들었다. 급기야 밤에 뒤척이며 보채다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 ‘아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라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져
내 아이와의 추억은 둘이 고루 섞였으면

 

그 첫째 녀석이 제법 크더니 출근하는 나에게 동생을 한번 안아주고 가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둘째가 돌을 갓 지나서였을 때였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동생이 ‘아빠’ ‘아빠’ 하고 울어서란다. 둘째는 그즈음 “아빠 돈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의문 역시 첫째가 풀어주었다. “야, 아빠가 좋다고 아빠 돈대 그러는 거지?” 녀석들의 볼을 한번 꼬집어보며 웃었다.

 

첫째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둘이서 탄 적이 있다. 기차를 타고 너무나 신나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아빠는 이미 꿈을 이뤘어? 아빠는 이미 커서 틀려버렸어? 아빠는 꿈이 없어?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야? 막막했다. 한 1분여간의 고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응, 그래?”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의 그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제법 많다. 아버지와 나는 씨름도 하고, 암벽에도 오르고, 잠옷 바람으로 함께 누워 있기도 한다. 사진 속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 앞에 서 있을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일하러 나가시던 굽은 등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었다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내 아이들과의 추억은 일상과 이벤트를 고루 섞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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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 엄마

임아영


 

두진이를 낳고 #초보엄마 였을 때였다. 엄마 몸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잠을 깨 울어버리는 아기를 두고 집 밖을 나오는 상상을 한 번씩 했다. 그 상상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왔지만.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 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을. 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 주말이면 나도 조금쯤은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면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소리치게 된다.

어느 일요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내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책 읽어줘요.” 첫째는 왼쪽 어깨에 기대고 둘째는 등 뒤에 매달렸다. 24kg이 넘은 여덟살 첫째와 14kg이 넘은 만 35개월의 둘째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 아이들의 살이 무겁고 덥다. 점점 몸무게가 늘어나는 아이들의 몸에 눌리면 아이라도 매우 아프다. 나도 모르게 “그만 좀!”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엄마 갑자기 왜 그래’라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가도 후련하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마도 나 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 말은 삼키고 만다.

엄마가 되고서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엄마 몸에 발 하나라도 닿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는 나를 더듬어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도 푹 자지 못하는 #좀비 가 되어가자 깨달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존재를 달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는 것이구나.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도 했지만 자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아이들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내 안테나가 아이들의 안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 #안고부비고싶은존재들 이 무거웠다가 멀어질까 다시 두려워지는 이 마음. 이 마음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구나.

두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를 잠자리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두진이는 언제쯤 혼자 자고 싶어?” 아직 동생이 어려서 네 식구 모두 함께 자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두진이는 말했다. “엄마, 난 혼자 자기 싫어.” 의존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돼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혼자 잘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항상 같이 자줄 수는 없는 거야.” 두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고학년은 몇 학년인데?” “10학년!” 풋 웃음이 나왔다. “10학년은 없어(웃음).”

이 얘기를 동네 엄마에게 전해주니 그 엄마는 말했다. “고1 때까지 같이 자겠다는 얘기네요.” 순간 변성기의 수염 난 소년이 떠올라 또 풋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소년이 엄마와 함께 잠들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따로 재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 #시간거지 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나마 엄마아빠 품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내게 발차기를 하거나 등 밑에 발 집어넣기 기술(?)을 시전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버려 “제발!” 외친 적도 있지만 잠결에 아이들을 안아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운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깨서 새벽 혼자 운 날도 있었다. 커버리는 게 아까워서. 정말 이상하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버겁고 아깝고 부담스럽고 잃어버릴까 두려운 이 감정 말이다.

얼마 전부터 두진이가 잘 때 팔베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엄마, 불편해.” 팔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베개를 하면 불편하다고 했다. 늘 왼쪽 팔엔 두진, 오른쪽 팔엔 이준이를 장착(?)하고 자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는데. 방전되는 휴대폰이 충전되는 것처럼 90, 95, 99, 100%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내 팔에서 떨어져 혼자 베개를 베고 자기 시작하다니. 허전했다. 팔베개를 하면 불편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였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것이 언제였냐는듯이 나는 그 건강한 신호조차 아쉬워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킥보드를 수리하는(?) 둘째와 그를 코치해주는 첫째

 

그렇게 내 몸에서 분리되길 원했던 아이들은 이제 곧 자기 혼자 설 것이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했던 내 말들이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날들이 곧 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삶이 이런 것인지 잘 몰랐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결이 다른 이 마음. 아이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의 부드러운 볼에 뽀뽀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먼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 것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은 나를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이제야 나는 이 세상에 발딛게 된 기분이 든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연두색 새싹처럼 여리지만 어떤 색깔보다 예쁜 아이들의 유년, 그 #유년 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의 젊음.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인생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은 아빠

황경상

요즘 첫째는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다. <수박 수영장> <메리> 같은 책은 내가 봐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아이와 등교를 하면서 안녕달 작가의 책에 대해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학교 도서실에 보니까 안녕달 아저씨가 쓰신 다른 책도 있더라고~ 이따 빌리러 가자!”

“작가님이 책을 한 권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권도 쓴다고?”

“그럼 작가들은 여러 권을 쓰기도 하지. 안녕달 아저씨도 한 권만 쓰셨을 리가 없지.”

“근데, 아빠. 안녕달 작가님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잖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나는 그림책 작가님을 그냥 남자, 아저씨라고 생각했을까. 안녕달 작가님은 필명을 쓰시는데 책에도 간단한 소개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여성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고정관념 을 단숨에 깨 주었다.

 “아, 맞다. 그래, 그럼 우리 그냥 작가님이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중에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진짜 여성이셨다.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매일매일 배우고 깨닫는다.

집 주변 곳곳에는 형형색색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전에는 그 꽃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봄이 되면 그저 꽃이 피는가보다 싶었다. 아이들은 그런 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자 둘째가 말했다. “아빠, 꽃잎이 아프면 어쩌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들에게는 꽃잎 하나, 풀잎 한 줄기, 나무 한 그루도 다 소중하다. 소중한 것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이름을 알려줘야 하는데 나도 도리가 없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게 포털사이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렌즈 기능이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에 있는 꽃과 유사한 꽃을 백과사전에서 찾아서 보여주는데 제법 정확하다.

 

아이들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된 제비꽃

 

제비꽃, 꽃잔디, 데이지, #애기똥풀 … 나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면 아이들은 이름을 불러보며 즐거워한다. 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도 그저 다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중에 좀 생김새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달라 한다. 사진을 찍어보니 #쥐똥나무 라고 알려준다. 그때부터 이건 사철나무, 이건 쥐똥나무 하면서 구별하면서 다닌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는 작고 동그란 나무 열매를 모으면서 좋아하기에 확인해 보니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천지사방에 떨어져 있어도 이름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바짝 말라버린 나무열매를 땅 속에 심고 있기에 “그건 심어도 싹이 안 나, 이미 씨는 다 날아가 버린 거야”라고 말하자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영혼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만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다시 나는, 이 나이에 배운다.

아이들 덕분에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

 

나무열매를 모으고 만들고 하면서 신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서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또 함께 데리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많이 놀았잖아요. 우리한테는 왜 그래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정말 우리는 밖에서 많이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실내에서 놀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나 놀랍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리자 첫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수줍음이 많은가봐, 내 손으로 안 와.”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아이들의 말들은 정말 잊어버릴까봐 두려워 매일 메모장에 기록하지만 빠뜨린 게 구할이다. 육아를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 예쁜 말이 가슴에 꽂혀 다시 한 번 아이들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마음을 아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매일매일 풀어서 다듬는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배우고 얻는 게 더 많다.

“아들, 오늘도 잘 하고 와!”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첫째에게 소리치자 데리고 있던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들이 뭐야?”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이놈아!”

아직은 가르칠 것도 많지만 말이다.

 

[출처] 부모로 성장한다고 느낄 때 [부부 육아일기 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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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임아영·황경상 기자는 11년차 입사 동기입니다. 두 아들을 낳으면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양육은 엄마가 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왜 ‘반반 육아’가 중요한지 말하려 합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자…아이에게도,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초등학교 1학년 첫째와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까지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한편으로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남편이 육아휴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2주쯤 지났을 때 어느 퇴근길 집 근처에 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만 하고 갈게.” 대뜸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왜.” 얼른 저녁 시간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미 집 앞이던 나는 더 신나서 말했다. “아니, 맥주 한잔하면서 잠깐만 친구랑 이야기만 하고 갈게.”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따다다다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나 벌써 1층이야.” 나는 가부장 흉내를 내서 신이 났고 남편은 내가 무사히 육아를 하러 돌아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 하고 갈게” “왜?”
나는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던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내며 신이 났다

 

통쾌했다. 언젠가 한 번 꼭 내보고 싶었다.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한 여성 개그맨의 ‘가모장 개그’를 좋아했다.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를 원한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등.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비튼 말 속에서 가부장 언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었으니까. 평등한 삶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깔아뭉개지 않는 삶, 우리의 임금노동이 누군가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삶, 임금노동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돌봄노동을 인정하는 삶 아닐까.

 

아이를 낳고 퇴근 후 회식이 자연스러운 아빠와 퇴근 후 회식할 수 없는 엄마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왔다. 육아는 금을 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내 어깨가 무거워지면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사정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준에서 ‘착한 남편’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 주로 싸움을 걸고 사정하는 쪽은 나였지만 흔쾌히 싸움을 받아주거나 사정을 받아주는 것조차 고마웠다. 그래서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육아 경력은 내 육아 경력과 같다.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다. 길지 않은 육아휴직 기간 원래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인데 뭐가 크게 달라지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상의 결은 달라졌다.

 

남편이 만든 밥을 먹는데 기분이 묘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개운치 않았던 건
숨겨진 돌봄노동의 실체 때문이었다

 

남편이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기분이 묘했다. 시간거지인 맞벌이 부부라 평소 자주 음식을 사 먹었지만 가끔 요리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남편이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휴직 후 먹는 밥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남편이 마파두부밥과 참치전을 해놨다. 원래 손으로 뭔가를 빚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요리를 즐거워했지만 아침을 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엄마 반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해준 고등어조림이 정말 맛있었는데.” 며칠 후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등어 샀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라고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늘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우선 남편은 젊고 힘이 세니 아직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를 맡기기도 미안하지 않았고 사실 육아는 우리 둘의 일이라 미안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생겼다’고 느낀 지점은 아마 ‘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니 ‘밥을 해주는 엄마’가 생겼다. 결혼 후 늘 그리워하던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 따뜻한 엄마 밥.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서 든 생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삶 말고
서로서로 챙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며칠간 밥을 얻어먹고(?) 출근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운치 않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왜 개운치 않을까. 답은 쉽게 찾았다. ‘여전히 나도 누군가 돌봐주는 삶, 누군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는 삶, 자고 일어나 누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오는 삶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구나.’ 결혼하고 나서야 가사노동이 무엇인지 배웠고 아이를 낳고서야 돌봄노동의 실체를 알게 됐다. 이전의 나는 1인분의 삶을 살지 못했구나 하는 깨달음. 남편이 다시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니 안온해졌다. ‘임금노동에만 신경쓰면 되는 삶이 이랬었지.’

 

언젠가 동네 친구가 말했다. “가끔 자신은 집에서 노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다른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삶과 사회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밥을 차려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끔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자들의 칼럼을 읽다 보면 묘하게 우울해졌다. ‘이런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

 

나만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면 될까. 우리 모두 노예가 되지 않게 서로의 돌봄을 나누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돌봄의 영역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 신이 나기만 할 줄 알았다. “남편 좀 풀어주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남편 앞에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할을 바꿨으니 너도 고생해봐라’라는 독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는 답은 거기다.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 귀찮은 일들은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고고한 말을 하는 삶 말고 서로서로 밥을 챙겨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지루한 육체노동이지만…이 뭉클함 없인 인간은 반쪽 아닐까

“아빠 무서워~ 저기서 안 잘 거야.”

둘째가 매일 자던 창가 쪽 침대에서 건너와 내 옆에서 잔다고 한다. 좁은 자리에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모로 누웠다. 따뜻하고 달큼했다.

 

이러다 내 삶이 사라질까 조바심 들지만
작은 일에도 손뼉을 치는 첫째의 표정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일 없이 허무했다. 뭔가 그리우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누군가 만나고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고 싶진 않았다. 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열망했고, 헛헛한 속을 술로 달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갈 틈조차 없다. 첫째와 둘째, 늘 이 녀석들이 내 삶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인지라 이기적인 생각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자신의 삶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다가도 처음으로 아주 간단한 컴퓨터를 가르쳐줬더니 손뼉을 치며 깜짝 놀라는 첫째의 표정을 보며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저 아무렇게나 볶아서 만든 스파게티를 싹 비워버리는 둘째의 입을 바라보며 이것 외에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아침밥을 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반복되는 일상, 생사 다투는 큰일은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워 갈 뿐이다

 

녀석들을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누군가 내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농담 삼아 ‘물병 씻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 물병에는 보통 빨대가 달려 있어 물을 먹이기에 편리하지만 매일 씻어야 한다. 하루라도 안 씻으면 물때가 뿌옇게 낀다. 시커먼 곰팡이까지 생긴다. 씻기는 번거롭다. 빨대와 물통 뚜껑을 일일이 분해해야 한다. 빨대 속은 솔질도 해 줘야 한다. 그러나 씻은 물병에는 머지않아 다시 물을 담아야 한다. 빨대 물병 시기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두 개의 물병을 씻는 일은 주요 일과다.

 

반복되는 일은 많다. 매일 아침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씻기고, 가습기 물을 갈아주고 빨래도 해야 하고… 별것 아닌 일인데 매일 같은 반복에 지치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창궐하는 물때와 곰팡이야말로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사를 다투는 큰일은 없다. 찬란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견디지 못할 분노와 한숨도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울 뿐이다.

 

그것도 엄살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한 달에 한 번 현장학습을 나가면 김밥을 싸 주었다. 아침에 김밥을 싸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 적이 있다. 급식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같이 점심·저녁 도시락을 챙겨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나서다. 나는 겨우 하루치 도시락만 준비해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오셨던 걸까. 일까지 하시면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네가 인제 그걸 알았냐”며 눈물을 살짝 글썽이기도 하셨다.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찰나인 이 때를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

 

육아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녀석들은 내 아이들이지만 엄연한 타인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데 때로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소리도 지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늘 내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이 타인을(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돌봄으로써, 혹은 돌봄을 받으면서 느끼는 어떤 뭉클한 감정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인간은 여전히 반쪽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한다.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몸이 아닌 타인을 챙겨주고 닦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는 그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을 씻어주는 종교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예쁘게 핀 길가의 꽃잎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고, 빈 담뱃갑을 구기지도 않고 땅바닥에 떨궈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한 번도 타인을 돌봐준 적도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일 테다.

 

녀석들은 되레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내일 가져갈 준비물을 밤에 정리해 두겠다고 하자 첫째가 말한다. “아빠, 그러면 잠 오지 않겠어?” 아이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꼭 껴안는다. 신현림 시인은 <침대를 타고 달렸어>라는 시집에서 딸의 일기 중 이런 구절을 인용한다.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시인은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썼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면서 옥수수에 대한 설명을 봤다. 보통 우리는 옥수수 수염을 그저 쓸모없는 털이라고 생각하거나 ‘옥수수 수염차’ 정도만 떠올린다. 그 수염은 사실 한 올 한 올이 다 꽃이다. 그 한 올 한 올 수염마다 옥수수 알이 하나씩 맺힌다고 한다. 생각 없이 씹었던 옥수수 알 하나도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늘 옥수수 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수염이, 아니 꽃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품어내는 시간을 겪고 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이렇게 안고 있을 수 있는 순간, 아주 짧은 이 순간을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이 모두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 헛헛해지더라도 그 얼룩이라도 얼굴에 대고 비볐으면 하는 바람에서.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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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디 2019.05.02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뜻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전 임아영 기자님이 블로그로 글을 쓰신 초반부터 열심히 읽었던 초기 독자고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를 주변 지인에게 널리 추천하는 25살 여성이기도 합니다.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돌봄노동이 얼마나 공적 논의에서 배제되어왔나 크게 깨달았어요. 폭풍육아라고 할 만큼 고된 노동을 이렇게나 내가 몰랐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돌봄노동을 비가시화했던 걸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기자님과 동갑이신 고등학교 은사님이랑 대화했었는데 육아를 사회적 문제로 의제화한 책이 나왔다는 것에 매우 반가워하시더라구요.
    댓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가 바뀌길, 돌봄노동이 사회화되길 고대하며 함께 참여할게요. 늘 건강하시길!

    • 임아영 2019.05.10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초반부터 열심히 읽으셨다니 감동 ㅠㅠ

      여성들이 주로 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돼 온 거라는 생각을 저도 아이를 낳고서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돌봄노동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도 의문스러웠고요. 아이를 낳고서는 어떤 '균형'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됐는데... 아이와 나, 또 나와 남편, 또 일하는 나와 돌보는 나, 또 엄마인 나와 기자인 나와 또 시민인 나 등등등.

      맞벌이 부부가 문제이니 다시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답이 될 수 없고... 결국 남성, 여성 모두 균형을 이루는 삶을 우리 모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장시간 노동체제를 바꾸고 가부장적인 노동 구조를 바꾸고 또 돌봄노동을 모두가 나누는 평화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ㅎ 감사해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