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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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잡자 2021.04.06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식 리딩방 기사 잘 봤습니다 대형 증권회사(ㅋㅇ)의 문어발식 리딩방에 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가 2007년도 부터인것 같아요 정부는 손놓고 있어요 후속기사 꼭 부탁드립니다 불법 사기는 가정을 풍비박산 냅니다

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 아이들이 불평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을 잘 줘야지, 이렇게.”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어른 젓가락’을 쥐여주고 힘을 주는 연습을 열심히 하게 했다. 학교 급식을 먹을 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성인용 수저를 쓴다고 해서다. 아직 어른 젓가락을 쥐기에는 작은 첫째의 손을 만져보며 조금 안쓰러웠지만 ‘학교가 그렇다면 네가 적응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오문봉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됐다. 그는 초등학교 급식에서의 성인용 수저 제공에 문제가 있다며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아… 잘못된 건데 나는 아이 보고 적응하라 했구나.’ 씁쓸한 기분이 스쳤다.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를 쓴다
한 선생님의 문제제기를 듣고 나서야
아이에게 적응하라 했던 나를 돌아봤다

 

오 선생님은 지난해 5월 교무회의에서 아이들에게 아동용 수저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지급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자 고민 끝에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그가 진정을 넣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갖고 다녀라’부터 ‘수저가 무슨 인권이냐’까지.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어른 수저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그런 불평을 학교에 말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웠다. 선생님 말대로 아이들은 사안별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세상에 대한 상을 머릿속에 구성하고 있을 터이다.

 

인권위는 ‘초등학교 급식에서 성인용 수저 제공 관련 의견표명’이라는 제목의 결정문을 내면서 “학교 급식에 관한 계획을 수립·시행할 때, 아동이 사용하기에 알맞은 수저 등의 제공을 포함하여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까. ‘노키즈 존’ 논란을 볼 때면 늘 갑갑했다. 아이들은 열 살 정도는 되어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는데 시끄럽고 부산스럽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일정 공간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도는 점점 좁아지고 차도는 넓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 도시에서 천지분간 못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식은땀이 난다. ‘학교 앞 시속 30㎞ 규정’이 있는데도 쌩쌩 지나가는 차를 보면 속수무책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른이 모는 차는 쌩쌩 달려도 되고 뛰는 아이들은 어떤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세상이라 말하면 비약일까.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잘못됐다고 말해야 할까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동이 스스로의 권리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선에 있는 걸까. 부모는 어디까지 세상의 질서를 배우라고 말하고 어느 선부터는 세상의 질서가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적응하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기는 정녕 어려운 걸까. 가끔 부모인 나도 아이들의 관점보다는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글을 썼을 때 남편이 말했다. “이제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말자.” 육아에 대한 글이지만 내 글의 주요 등장인물은 나와 남편, 아이들이다. 아이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쓰는 글이 아이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이후부터 글에 아이들 이름은 넣지 않고 ‘첫째, 둘째’라고 쓴다. 아이들에 대한 내 관점을 글로 쓰는 것을 아이들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처음 ‘폭풍육아’를 쓸 때부터 아이들 사진은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이 돌아다니면 사진도 같이 돌아다닐 텐데 아이들의 얼굴은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삽화를 썼지만 언젠가부터 아이들 옆모습, 뒷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쓰고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허락받지는 않았다. 가끔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나온 것을 본 첫째는 자기 얼굴이 나왔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기분이 묘하다. ‘아직 뭘 몰라서 좋아하는 걸 수도 있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고 허락도 받지 않고 써서 미안해.’ 사실 이런 생각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첫째가 어릴 때는 SNS에 사진을 많이 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가 신기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아이를 자랑하고 싶었을 거다. ‘내 소유물도 아닌데.’ 아이가 커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부터 SNS에 사진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관점보다 내 관점에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 같을 때 미안하다
이 글도 허락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선거연령 만 18세로 하향, 청소년인권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들의 기사를 읽다가 “우리는 미래 세대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머리를 맞은 듯했다. 그들은 자신도 현재를 살고 있는 주체라고 말했다. 어릴 적 어른들은 늘 말했다. 어린이는 미래의 꿈나무라고. 아니다,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현재를 살고 있다. 오 선생님은 인터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계기로 어린이와 학생들을 차별하지 말고 배려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익숙한 생각과 행동이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겠다. 내가 권리의 주체라면 작고 힘없는 존재들도 권리의 주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자고.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무조건 뛴다. 걸어가야 할 순간에도 뛰고 뛰어야 할 순간에도 뛴다.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뛴다. 어른들은 뛰어야 할 때도 굳이 걷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을 순식간에 벗어나 아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마다 학교,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면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손길은 늘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왜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고 하는 것일까

 

아이들을 대하는 내 손길은 늘 무심코 빨라진다. 밥을 먹일 때도 그렇다. 밥상머리에 딱 앉아서 한 그릇 뚝딱 하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둘째는 숟가락을 들고 다니며 먹일 때가 많다. 먹이다 보면 입에 든 밥을 다 삼키지도, 심지어 씹지도 않은 녀석에게 다음 숟가락을 떠서 입에 갖다 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숟가락으로 뜨는 밥의 양도 점점 늘어난다. 그 위에 반찬도 2~3개씩 한꺼번에 올린다. 종종 채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밥과 반찬은 숟가락에서 낙하한다. 녀석이 도리질이라도 칠라치면 밥과 반찬은 폭발한 포탄처럼 흩어진다.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씻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물놀이에만 심취해 있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빨리 녀석들을 적당히 달래 씻겨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안 씻겠다는 녀석들의 손을 잡아 끌어서 양치질을 시키고 비누칠을 하고 머리를 감기는 내 손길은 점점 급해진다. 거친 손길 탓에 아이들의 몸에 손톱자국을 길게 남기기도 한다. ‘아파! 아파!’ 하고 난리를 친다. 발을 씻기려다 아이가 욕조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게 한 적도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다 씻기고 안아서 나오다 화장실 문짝이나 벽에 아이의 머리를 찧은 적도 여러 번이다. 칫솔질도 너무 세게 시켜 칫솔에 피가 묻어 나온 적도 있다.

 

나는 왜 아이들과 있으면 뭔가를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 하는 것일까. 나와 달리 아이들은 뭐든 긴 시간을 들여서 하고, 그걸 반복해서 또 하는 걸 좋아한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물론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는 것은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흔해빠진 일상이다. 반대로 모든 게 처음인 아이는 뭐든 한 번 더 해보고 싶어 한다.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니,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는 금세 후회를 한다.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조금만 시간을 들여 설득하면 가끔 아이들은 놀랄 정도로 잘 따라준다. 첫째가 네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장난감에 빠져 노는 녀석이 칫솔질을 하자니까 너무 싫어하기에 “그럼 그거 다 하고 나서 양치하는 거야” 하고 말해줬다. 그냥 지쳐서 거의 반은 포기한 채 한 말이었다. 근데 녀석이 5분쯤 지나니까 “인제 이거 다 했으니깐 치카치카 하자”면서 오는 게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꼭 안아주었다. 물론 칫솔질을 막상 시작하자 또 떼를 쓰고 인상을 쓰긴 했지만.

 

아이들이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 달리면 외려 덜 넘어졌다

 

아이들이 막 달려가는 게 무서워 잡아채다가 되레 넘어지게 만든 일이 많았다. 스스로 판단해서 달리는 아이들은 뒤뚱뒤뚱하면서도 오히려 덜 넘어졌다. 목욕을 할 때도 처음에는 비누칠을 하고 헹구고 물기를 닦는 일까지 일체의 권한을 주지 않고 내가 다 알아서 했다. 언젠가 그냥 지쳐서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냈다. 수건을 맡기면서 알아서 닦으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잘 닦아서 놀랐다. 뭐든 그렇다. 양치질도, 일을 보고 뒤를 닦는 일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혼자서 잘해냈다. 문제는 내가 믿고 기다려주지 못한다는 거다. 늘 더 완벽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해내길 바란다. 혼자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수건을 들어 닦거나 칫솔을 뺏어 이를 문질러버린다.

 

첫째가 혼자 옷 입는 훈련을 할 때였다. 바지는 제법 혼자 입고 벗는데 윗옷은 잘 입고 벗지 못했다. 머리에 옷이 걸려 제대로 빼지 못하는 것이다. 한 번은 혼자 바지를 입느라 용을 쓰고 있고 있기에 윗옷을 입히겠다고 머리에 티셔츠를 넣으려고 하니 녀석이 막 짜증을 냈다. “이따가~ 이따가~ 바지 입고~” 아, 내가 또 마음이 급했구나.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좀 더 시간을 내 준다면 그 시간들이
아이 삶에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다

 

단순히 생활습관을 길러주는 데서만 벌어지는 문제일까. 요즘 덧셈, 뺄셈을 어려워하는 첫째와 문제를 풀고 앉아 있다 보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 “왜 그걸 몰라?” 하면서 윽박지르다가도 모르는 게 당연한데 싶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언젠가 녀석들이 더 커서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난 조바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똑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아이와 어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뭐든 차근차근 기다려준다면, 아이에게 좀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면, 그 짧은 시간들이 아이의 삶에는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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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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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육아휴직한 뒤 진짜 동지가 됐다

임아영

아이를 낳고서는 주말에도 쉴 수 없다. 늘상 수면 부족이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게는 아이를 돌보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지친 표정으로 “쉬고 싶다”고 외친다. 물론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엄마, 여기는 도깨비 집이야.” 그림책을 본 뒤 둘째가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형상(?)을 그려놓고 말했다. “엄마는 무서워”라며 과장되게 말하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엄마,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아이를 낳고 느꼈던 평온함과 환희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물론 아무리 예뻐도 나도 사람이니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예쁘지만, 기쁘지만 엄마도 쉬고 싶어.’ 어떤 무한루프 같은 것일까. #양육의 환희와 양육의 고통은 이어져 있다.

증조할아버지댁에 갔다가 거위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주말 두 아이는 공원에서 킥보드를 탔다. 그냥 유유히 앉아서 킥보드를 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작 36개월인 둘째는 헬맷을 씌우고 무릎, 팔꿈치에 보호대를 해줘도 불안하다. ‘아, 킥보드를 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이가 너무 타고 싶어했다. 킥보드를 타는 둘째를 남편이 따라다녔다. 3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힘들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다. 남편이 힘들어 보이면 양가적 감정이 든다. ‘어쩌나’ 하는 애잔한 감정도 들지만 ‘너도 더 힘들어봐라’라는 못된 생각도 올라온다. 남편의 잘못은 아니다. 세상이 내게 양육의 의무를 더 지라고 말할 때 나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그 화살은 종종 남편에게 간다. ‘남편, 미안해. 그런데 구조에 화를 낼 순 없잖아.’

남편이 둘째를 돌보는 동안 나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첫째를 돌봤다. #초등 1학년인 첫째는 혼자서도 킥보드를 잘 탄다. 문제는 킥보드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 첫째가 공원에서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도 아니고 두발 자전거! 아이는 삼촌이 선물로 사준 자전거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가 타니 관심이 생겼다.

‘아이의 첫 자전거’는 드라마 속 묘사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어른 남자가 8세 아이 자전거 높이에 맞춰 허리를 구부려 계속 잡아줘야 하는 일.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부모의 체력을 고려해주지 않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보채기 시작했다. 첫째는 집에 있는 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며 씻었으면 좋겠건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접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돌아왔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나도 힘들어.”

남편이 휴직하고 곧잘 하는 말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지러져 있는 거실을 훑어보고 “좀 치우지” 말하게 될 때, 첫째의 #주간학습계획표에 뭔가 빼먹은 게 있을 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 때 남편은 말한다. “나도 힘들어.” 8세, 4세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먹을 것을 흩뿌리며(?) 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 어린이집 준비물을 빼먹고 회사에서 후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왜 남편에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까.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이미 소진된 표정이다. “어때? 회사 일이 나아, 육아가 나아?” “회사 일이 낫지”라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 남편과 역할을 바꿔서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남편이 짠해질 때 이상하게도 ‘동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얼마 전 첫째 숙제에 대해 남편과 논의하다가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남편이 다른 것 다 해놔야지. 첫째 초등학교 적응 때문에 육아휴직한 이유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 남편에게 사과해! 애들 때문에 정신 없는 것 알면서.” 그 친구는 전업주부였다. 돌봄을 전담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도 역할을 바꾸고 보니 남편의 상황보다는 나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아, 이런 건 내가 오기 전에 다 해놓지.’ 얼마나 싫어하던 말이던가.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 다들 말한다. “경상씨가 참 대단해요.” 그럼 나도 모르게 욱한다. “저는 #육아휴직 두 번이나 했고요. #신생아를 키웠어요.” 그 뒤에는 ‘다 큰 애들 보는 게 뭐가 힘들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나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신생아든, 미운 네 살이든, 초등학교에 간 아동이든 육아는 고된 일이다. 남편이 육아휴직 하기 전까지 항상 조정하는 것은 나였다. “남편 내가 힘들어, 일을 더 나눠서 해줘.” 울며 사정한 날들도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돌봄노동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안사람’을 위해 회사에서 뛰어와야 한다. 처음에는 ‘그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어?’라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들었지만 퇴근 후 지친 남편의 표정을 보면 ‘서로의 상황을 비교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울던 첫째. 첫째가 덜 울었다면 육아는 덜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서야 남편이 진짜 내 편 같다. 몸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이제 정말 함께 하며 서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햇볕이 뜨거운 날 남편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오래 서 있으면 힘들텐데.’ 둘째는 이제 장난감을 찾을 때도 아빠를 부른다. “엄마가 찾아줄게”라고 하면 “엄마 말고 아빠”라고 말한다. 아빠와의 시간이 쌓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라며 아이들이 매달릴 때 후련하다가도 남편이 짠해진다.

가끔 궁금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함께 회사를 다니고 함께 돌봄노동을 나누게 되면 나는 이전보다 덜 화가 나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내가 힘든 것은 ‘구조’니까. 그러나 남편이 육아휴직하기 이전의 남편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시간이 매우 귀하다고 느낀다.

 

 

매일의 지난함을 함께 통과하는 '동지'

황경상

첫째가 태어나고 한 달 즈음 되었을 때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아내는 아침에 출근한 나에게 방긋방긋 웃는 첫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혼자 갓난쟁이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 좀 나아지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또 왔다. 정말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울기도 했다. 아침에 방긋댄 건 잠깐이고 그 이후로는 내내 칭얼거렸던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가 보니 아내의 안경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행여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홀로 집에 남아있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립감이었을 터다. 육아휴직 시절 아내는 퇴근하는 나를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오는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터다.

처음 첫째를 낳고 나서 아내는 젖 먹이는 것조차 힘들어 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간호사에게 하소연을 하자 간호사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는 원래 그래야 해요.”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는데, 어쨌든 엄마는 그 모든 걸 버텨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어머니에게 나를 처음 낳았을 때도 그렇게 힘드셨냐고 물었다.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애는 하루 종일 울어대는데 젖은 잘 안 나오고 해서 몹시 힘들었고, 울기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산후조리를 돕던 할머니가 산후에 울면 눈이 나빠진다고 해서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지금은 아이들도 많이 컸다. 둘이 놀면 그냥 놔두고 다른 일을 해도 될 정도다. ‘그래, 예전 이 녀석들 어렸을 때보다 지금은 많이 편하지.’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간에 가다가 쉴 수는 없다는 것, 귀찮거나 힘들다고 열 번 중 한 번쯤은 놓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열 번 잘 해도 한 번 못하면 못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언젠가 들었던 잠수함사령부의 모토는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라고 한다. 잠수함은 바다 속에서 아무리 작전을 잘 수행하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바다 위로 나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육아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친다. 매일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인정을 못 받는다. 늘 전쟁하듯이 최선을 다하지만 한 번 삐끗하면 개념 없고 무관심한 부모가 되기 십상이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 등원을 시키면서 감기약을 유치원가방에 넣어두고 깜박 잊은 채 투약지시서를 쓰지 못했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왜 약만 넣어뒀냐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단다. 나는 졸지에 투약지시서도 쓸 줄 모르고 약만 넣어둔 개념 없는 아빠가 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런데 지시서를 안 썼는데 약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첫째가 다른 친구가 약 먹는 걸 보더니 자기도 달라고 했단다. 눈치 없는 녀석.

얼마 전 새벽녘에 빗소리에 깼다가 다시 겨우 잠을 청했는데 아이가 일어난다. ‘아빠 나가자, 나가 놀자’ 아휴, 정말. 죽겠다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아내가 데리고 나간다. 30분인가 눈을 더 붙였을까. 어렴풋하게 아이들과 엄마의 재잘거리는 희미한 소리에 선잠을 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에 몸을 묻고 안락하게 누워있으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잠이 덜 깬 채로 내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대는데 부엌에서는 엄마가 뭔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희미하게 음식 냄새도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면 괜히 안심이 됐다.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그 투닥거리는 소리는 바로 매일 다가오는 일상에 맞서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하는’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소리였다는 것을. 귀찮다고, 힘들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내는 소리였다는 것을. 매일 아침 엄마도 얼마나 일어나느라 힘들었을까. 엄마도 이불에 몸을 더 파묻고 누워있고 싶었을 텐데. 엄마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아내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신 장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육아가 온전히 내 영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한 번 그 지난함을 생각하게 된다. 잘 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오직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그 일.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불가피하게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아내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풀 죽은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 정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데... 놀려고 일부러 늦게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 역시 서운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일 때문에 늦어’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머릿속으로는 다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야속하다. 일을 마친 아내는 집에 와도 파김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어떤 때는 그게 더 낫다는 걸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알게 됐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곁에만 있어도 동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 맥주 한잔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으로 우리는 드디어 동지가 됐다 [부부 육아일기 8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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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으로 가족 나들이 떠난 날. 아이들이 업어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스카프를 잡고 따라오라고 이끈다. 두 아들이 다루는 노하우가 느는 만큼, 육아의 불안감도 커진다.

 

▲덧셈 뺄셈 늦는다고…다그친 엄마, 아이가 어려움 겪을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는 얼마 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덟 살이 되고 학교 가면서 힘든 일이 많아졌어.” 아이가 가끔 이렇게 툭 말을 던지면 마음이 싸해진다. “왜? 뭐가 힘들어?” “글씨 쓰는 것도 힘들고 교과서 하는 것도 힘들어.” 수업시간이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직 10분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가 40분 동안 앉아 있으려면 힘들겠지. 뭐 하나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빠를 닮아 글씨도 꾹꾹 눌러쓰는 첫째를 보면서 이렇게 공들여 하면 힘들 텐데 속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던 터라 더 마음이 싸해졌다.

 

아이가 며칠 동안 수학익힘책을 나머지 공부로 들고 왔다. 유치원을 다니며 ‘엄마표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낸 우리 부부의 방침(?)이 무리였던 걸까. 영어도 8세에 노출을 시작한 결정이 잘못된 걸까. 의외로 영어는 흥미로워하며 할머니가 주민센터 수업에서 배워와 알려준 영어 뜻을 내게 묻기도 했다. “엄마, you have a good memory가 무슨 뜻인 줄 알아?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야.”

 

의외의 복병은 ‘빼기’였다. 덧셈·뺄셈은커녕 숫자 공부를 거의 해본 적 없어서인지 힘들어한다. 어린이날 서점에 데려가 아이가 좋아하는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을 선물로 사주면서 수학 문제집을 두 권 샀다. 퇴근을 하고서는 옆에 앉아 같이 수학 문제집을 푼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얼른 집에 가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다.

 

선행학습 없이 학교 보낸 게 무리였을까
숫자 공부 해본 적 없는 아이가 힘들단다
학교에선 놀이·점심시간만 좋다는데…

 

모든 아이가 빛난다. 우리 아이도 빛나는 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풍기 하나를 봐도 어디로 전기가 들어와 날개가 돌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아이다. 12월생이라 조금 늦고 뭐든 꼼꼼하게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수학의 원리야 익히면 금세일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그럼 학교 다니면서 즐거울 때는 언제야?” “놀이시간이랑 점심시간.” 1학년은 2교시가 끝나고 30분간 놀이시간이 있다. “엄마도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점심 먹으러 다녔던 것 같아.” 아이를 다독이고 싶었다.

 

공부하며 집중 않는 아이에 화 내고…
다음날 만난 담임 선생님의 차분한 말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연습하면 돼요”

 

물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생각을 하자 화가 났다. “집중 안 할 거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학도 국어도 안 해도 돼. 공부 안 해도 돼.” 단호한 말투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눈이 똥그래졌던 첫째는 엄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했다. 차분한 말이 돌아왔다. “어머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이가 이해력이 떨어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연습만 하면 돼요. 수학은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는 그대로다.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다. 덧셈·뺄셈을 못할 리가 없는데 다른 아이보다 늦다고 불안해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라니. 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면서도 나는 불안했다. 드라마에서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산재를 은폐하는 사업장에서 근로감독관이 활약해 문제를 풀지만 드라마는 판타지고 현실은 대부분 시궁창이다. “엄마, 나는 커서 버스기사 안될 거야.” 사장의 말도 안되는 지시에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운전하며 꾸벅꾸벅 조는 버스기사들의 장면이 지나간 뒤 첫째가 말했다. “버스기사는 잘못하게 되잖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말했다. “아냐, 기사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회사 사장의 잘못이야.” 허공을 맴도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웠다. 우리 아이는 커서 안전한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인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인가. 아이가 빼기를 못한다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아이가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마음 탓일 게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잘 살 수 있는 걸까. 사람값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를 갖는 것, 갈수록 이렇게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뭐 어때, 결과는 내 몫이 아니야.” 내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쿨한 내가 왜 아이들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지는가. 부모가 되고 보니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는 거였다. 인생이란 괴로움과 후회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내 아이는 그 괴로움과 후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불가능한 마음을 품고선 어떤 세상인가 올려다보면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한다. 남편에게 말했다. “부모가 되면서 사회를 다시 잘게 잘게 쪼개 먹는 느낌이야.” 어릴 땐 엄마가 비관적 전망을 말하면 화를 냈다. “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부모가 되어보니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자식이 어떤 일에 처했을 때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사회를 좀 더 잘 알게 되어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못 맞출까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지는 부모 마음
결국 그 불안을 가다듬는 게 숙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숙제는 불안을 가다듬는 것 아닐까.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 속에 자랐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야, 어떻게 살고 싶어? 무엇이 너를 즐겁게 하고 어떤 순간이 너를 두근거리게 하니.’

 

이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려면 사람이 도구로 취급받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가장 아득하다. 이 아득함이 몰아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이 세상에 아이들을 내놓았다는 게.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실컷 놀게 못 해줬나…자책한 아빠, 모든 위험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때는 자주 자전거형 유모차에 태운다. 녀석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지만, 아직 체력이 약한 녀석은 집에 끝까지 오지 못한다. 중간에 안아달라고 칭얼대기 마련이다. 안아주면 녀석을 바라보며 호흡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맞다, 힘들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져서 조금만 걸어도 팔이 뻐근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훌쩍 커버린 녀석은 이제 유모차는 안 타려고 하는데 다행히 자전거형 유모차는 잘 타려고 했다.

 

유모차 타고 집에 가는 둘째를 보며
말 건네는 아주머니 “걸어야 좋아요”
약하게 키운 건 아닌가 마음 무거워진다

 

어느 날도 자전거 유모차에 태워서 오는데 어떤 중년의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만지면서 사물을 느끼면서 가야지 지능이 잘 계발된대요.” 아마도 꽤나 큰 녀석을 자전거에 태워서 가는 모습이 마뜩잖게 보였나보다. “네,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그날따라 짐도 많아서 낑낑대며 가는데 불쑥 화딱지가 났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지나쳐 갔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둘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다들 걸어서 등·하원을 한다. ‘이 녀석, 너무 약하게 키우는 거 아닌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원래도 불안이 많은 성격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나다. 첫째 아이가 갓 태어난 모습을 보고서는 ‘혹시 만졌다가 팔뚝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10초 정도 안았다가 다시 장모님께 건네기도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걱정들이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풀려나와서 뭉게뭉게 부풀어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아이를 낳으면서 공부 걱정은 안 할 줄 알았다. 잘할 거라 믿었다기보다는, 공부보다 세상에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매달리기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막상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걱정을 놓지 못한다. 처음 참관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이는 좀체 선생님의 말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선생님이 하라는 건 하지 않고 몸을 비비 꼬기만 했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하는 ‘꼰대’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학년 꼬마가 집중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아이들을 실컷 뛰어놀게 해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한다. 두 녀석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녀온 뒤 놀이터에서 놀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일찍 들어간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엄마는 벌써 4시간째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해주고 있었다. 다 커서 아이들끼리 놀면 괜찮지만 어린 아이들은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벌서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저녁 먹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하는 시간이 다 늦어져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해주는 그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벌써 두 발 자전거 타는데
보조 바퀴 달고도 페달 겨우 밟는 첫째
몸 쓰며 놀게 해주지 못해 그런가 자책

 

나는 조금만 춥거나 덥거나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곤하면 슬슬 ‘집에 가자’는 신호를 아이들에게 보낸다. ‘아빠 힘들어’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바깥 놀이가 늘 고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째의 친구들은 벌써 자전거를 보조바퀴도 떼고 타는데, 녀석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 페달도 겨우 굴린다. 줄넘기도 아직 서툰 것 같다. 본인도 그게 조금 속상하다는 뜻의 말을 언뜻 내비치기도 한다. 역시 밖에서 몸을 쓰면서 노는 걸 많이 못해줘서 그런가. 또 자책한다.

 

부모는 늘 무한책임이다. 한 엄마는 아이가 이마에 모기가 물렸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제대로 못 봤다는 식으로 얘기해 속상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맞다, 정말,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지만, 뭔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 모든 게 다 내 책임인 것만 같다. 안 해주려고 안 해준 게 아닌데…. 가진 게 많아야 불안이 많다는데, 별로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세상에 제일 중요한 보물단지를 껴안게 됐다.

 

아이들은 강요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부모는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라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세상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오면 그때는 무력감을 느낀다. 얼마 전 첫째가 다니는 학교에서 석면 제거 공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반대 여론이 조성된다고 하자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부실 공사도 생각보다 많았다. 만에 하나 공사 후에 석면이 0.00001%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아이들이 마신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왜 석면이라는 게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걸까. 그래도 잘 감시하고 믿을 만한 업체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학부모들의 반대로 끝내 공사는 무산됐지만 아이는 앞으로도 내가 미처 몰랐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배를 타는 일에 아무런 경각심이 없었던 것처럼. 플라스틱 남용이나 기후위기 문제처럼 뻔히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 예상되지만 무력감만 느껴지는 미래도 있다. 결국은 다시 생각한다. 우리 아이만 모든 불안과 위험을 비켜나가 자라기를 바라는 건 허망하다는 사실을.

 

육아책을 보면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다고 해서 절대 아이들이 그 말대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부모는 그저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 하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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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아빠, 설거지하는 엄마

임아영

설거지를 좋아한다.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통 물에 불린 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를 때 음식 찌꺼기가 없어지는 게 좋다. 그 다음에는 비누거품이 묻어있는 그릇을 물에 헹궈낼 때 그릇이 다시 빛을 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또 그릇을 말린 뒤에 정리할 때 가지런해지는 게 좋다. 설거지는 내가 집안일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사노동 을 무척 즐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편이고, 아이 밥을 주로 먹이는 사람도 남편이고, 아이 목욕을 주로 시키는 사람도 남편이다. 참을성을 요하는 일에 나는 치명적이다. 뭐든지 빨리 해내는 것을 즐기는 성격인데다 어떤 일을 해도 들이는 노력 대비 효용을 고려하는 내게 요리, 밥 먹이기는 정말 안 맞는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꾸준하다.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남편은 빨리 시작하고 잘 지치는 내게 “괜찮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금방 지쳐 떨어지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다른 성격은 결혼 후 싸울 때마다 서로를 답답해하는 이유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모든 부부가 그렇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장점이 오래 지내고 나면 단점으로 비춰지는 것은 모든 관계가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밥솥 카스테라.' 힘들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기에 가끔 쿠키나 빵을 만든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한다면 남편은 요리를 좋아한다. 다섯살 때부터 병설유치원에 다닌 첫째는 매달 현장학습을 갔다. 거의 3년간 매달 김밥을 싸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지난 해 유치원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진이가 아빠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빠가 싸시는 거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의 도시락을 만드는 일도 ‘엄마’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남편의 김밥을 자랑하는 것 같을까봐.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니, 어머님은 어떻게 남편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이 요리를 하고 아이들 밥도 주로 먹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굉장히 많이 하는 걸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몸이 바쁘지만 나는 머리가 바쁘다. 한 가정이 굴러가려면(?)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클 때마다 옷을 사고 매주 먹을 음식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대출 상환 계획을 수립하고 10년, 20년 단위의 재무 계획을 점검하는 것은 모두 ‘내 일’이다. 이제 아이들이 더 크면 아이들 관련 행정(?) 업무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교육에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고 예산에 따라 학원을 어디에 보낼지 결정하고 실제 학원비를 결제하는 것도 내 일이 될 것이다. 지금도 첫째 피아노학원과 둘째 어린이집 특활비 결제는 내가 한다.

회사 점심 시간에 정신없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가끔 ‘왜 이 모든 일을 내가 다 맡고 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우선순위 에 따라 일의 순서를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획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집안일을 할 때도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한 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일부는 털어서 널고 일부는 건조기에 돌리고 가끔은 청소기도 살짝 돌리는 것처럼, 일을 가장 빨리 하는 법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가사노동의 기획’ 업무를 결혼 이후 계속 내가 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둘 다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신혼 때는 우리도 가사노동 배분 문제를 가지고 다퉜다. 그러나 돌아보면 각자 잘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남편은 참을성을 요하는 일로, 나는 기획하는 쪽으로. 이제 사실 누가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지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다만, #보이지않는노동 들이 많다는 것은 알리고 싶다.

 

  다들 가사노동이라 하면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중에서 설거지만 하는 내가 우리집에서는 가사노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을 내가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 가사노동에 이렇게 #비가시적분야 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잘한 노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도 가사노동을 전담했던 #친정엄마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 엄마가 어떤 보이지 않는 노동을 ‘그렇게 많이’ 해냈는지 결혼하기 전까지 잘 몰랐다. 신혼 초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수건을 접는 이런 작은(?) 일도 다 엄마가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아서였다. 어릴 때 남동생은 내 꽃무늬 청바지를 물려 입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아직도 한다. “엄마, 왜 누나 청바지를 입혔어요”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둘째를 낳고 보니 첫째 옷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새 옷을 사주는 게 정말 아깝다(물론 나는 성별이 같은 아들들이지만 남동생은 누나의 꽃무늬 바지가 부끄러웠을테다). 엄마가 집안의 총무부장이자 재무부장(?)으로 어떻게든 아끼려 노력했던 게 이해돼서 가끔은 코끝이 시큰하다.

  평생 제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엄마는 환갑이 된 해에야 명절 차례상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우리 가족은 엄마 환갑을 기념해 난생 처음 추석 때 해외여행을 떠났다. “명절에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니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하던 엄마. 그러나 설 연휴에는 아빠와 남동생 생일이 겹쳐 있어서 다시 요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그리워했다. 싱가포르의 식사를. ‘누가 차려준 밥’을. 엄마는 늘 외식을 아까워한다. “바깥 음식은 비싸기만 하지”라면서. 밥을 차려본 사람이라 사 먹는 밥을 아까워하는 것이다. 재료의 원가가 금방 나오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아니예요 엄마. 엄마 밥이 외식보다 저렴한 건 #엄마의노동력#공짜 여서예요. 우리가 그동안 엄마 밥을 공짜로 먹어서예요. 이 사회가 엄마 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서예요.’

 

 가끔은 거창하게 다짐도 한다. 여전히 빚지고 있는 엄마 밥 뒤에 숨은 노동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싶다고. 우리 모두 비가시화된 노동의 값을 제대로 아는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오늘 저녁은 카레다! 아빠가 겨우 저녁밥을 차려주었지만, 거실에는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다.

 

 

죽지 않는 좀비 같은 너란 녀석, 가사노동!

황경상

육아휴직을 하기 전엔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현관 번호키란 정말 귀찮은 물건이었다. 집에 드나들 일이 정말 많은데 그때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야 하다니. 잠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거나 우유를 사러 갔다 올 때도 예외는 없었다.

 

잉여롭게 인터넷을 들여다보다가 스마트폰을 전자키로 등록할 수 있다는 글을 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스마트폰만 갖다 대면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도구적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현관 번호키가 내 ‘도구 중독증’에 걸려든 셈이다. 몇 번 등록을 시도해봤다. 잘 안 됐다. 우리집 키는 안 되나보다 하고 포기했다. 그 중간에 등록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현재 비밀번호를 몇 번 쯤 대충 눌렀던 것 같다.

 

낮에 일이 있어 아이들을 처가에 잠깐 맡겨두고 저녁 때 집에 들어가려는데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황 서방, 아까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문이 안 열리더라고. 번호가 바뀌었나?”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이 번호, 저 번호를 눌러봐도 번호키는 ‘번호가 틀렸습니다’를 내뱉을 뿐이다. 수 년 만에 안 하던 기도도 여러 번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뭘 잘못 만졌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건 분명했다. 결국 번호키를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열쇠수리공 아저씨는 나를 위로했다. “이런 분들 생각보다 많아요. 공부하시느라 정신 없으신 분들이 주로 그러더라고요.” 나는 공부도 안 하는데... 아무런 위로가 안 됐다. 경제적 손실에 정신적 타격까지 한동안 어질어질했다. 육아휴직을 한 뒤 몸을 좀 만들어보겠다고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좀 하다가 팔이 안 굽혀져서 사흘째 팔꿈치에 파스를 붙였을 때도 이런 참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옛날 옛적 컴퓨터 게임 중에 ‘너구리’ 게임이라는 게 있었다. 이 게임은 마지막 판이 끝없이 계속된다. 가사노동이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 판인 줄 알고 깼는데 또 똑같은 스테이지가 다시 나온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치울거리가 나오는 #뫼비우스 의 띠와 같다. 실컷 청소를 해 놓고 한숨 돌리면 갑자기 저기서 ‘촤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둘째가 뭘 쏟는 소리다. 그런 단순반복을 좀 줄여보겠다고 번호키를 만졌다가 오히려 된통 당했다.

 

자취생활만 10년에 육박하는지라 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노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먹은 그릇을 바로 설거지해 놓고, 방에 청소기를 한 번씩 돌리는 일이 당연하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가사노동이 가욋일이 아니라 주된 노동이 되니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사흘에 한 번 설거지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저 ‘어시스트’ 한다는 느낌으로 가끔 하는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매일매일 할 일들이 죽지도 않는 좀비처럼 다시 나타나 내게 손을 뻗는다.

육체노동이 끝이 아니다. 집안일은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다. 거기서도 나는 젬병이다. 학교에 큰애를 데리러 갔다가 시장에 들르자고 마음먹어 놓고는 지갑을 두고 간다. 코를 훌쩍이는 둘째를 데리러 갈 때 약을 꼭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을 타서 약병에 넣어두고는 식탁에 두고 간다. 학교 도서실에 반납기한이 다 된 책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에코백에 넣어뒀다가 현관에 그냥 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덕분에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책을 가져가야 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책을 빌리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단 집안일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를 갈 일이 있어서 몇 년 만에 세차를 맡기고 보람차게 집에 돌아와 앉으면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전화가 온다. “차 키 안 꽂아두고 가셨어요?” “거기 꽂아놓고 왔는데요.” 당당하게 말하면서 탁자를 보니 차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른 차키를 들고 뛰었다.

 

왜 그럴까 생각도 많이 했다. 심각한 건망증인가? 그냥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걸까? 스마트폰 메모장에 메모도 해 두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안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생각에 한 번 빠지면 그 생각만 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외출할 때면 현관을 나가자, 그 생각밖에 못한다. 결국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한 번 주변을 돌아보면서 빠진 것이 없나 상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또 까먹는다. 그래서 안 된다. #육아휴직 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요즘 아빠가 정리하는 걸 보면 옆에서 도와주곤 한다. 고맙다, 아들!

아내에게 타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난들 어쩌겠나. 결국은 아내가 챙겨야 할 일들을 도맡는다. 메모장에 할 일들을 잔뜩 적어놓고 수시로 내게 미션을 수행했느냐고 묻는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으면 아내도 참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힘쓰는# 집안일 은 가급적 내가 하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사노동 분담이 됐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자면 우리는 남녀의 역할이 조금은 바뀐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육아휴직 뒤에는 더 그렇다. 가끔은 약간 서럽다. 퇴근한 아내가 집에 와서 건조기를 열고 아직 꺼내지 않은 빨래를 꺼내서 접으려고 할 때, 마치 내가 할 일을 안 했다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나 정말, 하루 종일 논 거 아니라고!’ 아마 많은 #전업주부 들이 남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가사노동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 힘들기 때문에.

 

[출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 [부부 육아일기 5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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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아이들이 요가 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뿌듯함과 서운함 교차하지만…더 많은 시간 함께 부대낄 수 있기를

 

요가 동작을 흉내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 육아휴직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와 등산했던 봄날, 아빠와 계곡으로 휴가 갔던 여름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계곡에 친 텐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나는 계속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텐트 속에 수집(?)하고 있었다. 속으로 ‘잠자리가 아빠 코나 눈두덩이를 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러나 평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는 늘 내가 잠들어야 퇴근했다. 열 살 때 수영장에서 넘어져 이를 크게 다쳤던 날에도 아빠는 늦게 왔다. 앞니 중 하나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버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정류장에 나타났을 때 엄마가 울던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없이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했다. 몇 군데 치과를 돌아 겨우 치료를 한 밤 아빠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했던 밤도 또렷하다.

 

나는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 분위기와 많이 달랐던 듯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다가 가끔은 어릴 적 아빠와 내 모습이 겹쳐진다. 최근 엄마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가 정말 놀랐다며 말씀하셨다. “아니, 아빠들이 다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왔더라~” 남편도 당연히 입학식에 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아이 입학식, 졸업식에 가는 걸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다 돌아보니 아빠는 내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빠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테고 회사 상사들은 면박을 줬을 테다. “엄마만 가면 되지, 왜 아빠가 유난스럽게 졸업식을 가느냐”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부르며 울 때가 많았다. 엄마가 모든 것의 디폴트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와 달라 신기했다. 아마 다른 점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가 있었다는 점일 거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단 느낌을 주지 않고 싶어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는 남편이 담당(?)하게 하며 첫째가 안 볼 때 사랑을 몰아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둘째 기저귀를 갈았던 횟수는 첫째 때보다 현저히 적다. 남편이 주로 갈아서다. 목욕의 횟수도 비슷하다. 남편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킬 때 나는 보통 첫째를 마크(?)하고 있었다.

 

관계란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누리길 바래
그것은 아이들의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

 

최근 어린이집 선생님이 보내준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준이가 점심 시간에 김치 먹으면서 ‘아빠 집에서도 김치 먹었어’라며 자랑을 했어요.” 내가 댓글을 달았다. “이준이는 이제 아빠 이야기만 하네요.”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우리 이준이는 뭐든지 ‘아빠 집’이라 표현하고 ‘아빠가 입혀줬어요’ ‘아빠한테 칭찬해주세요’라고 말을 해요. 아빠랑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어요.” 뿌듯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니다, 엄마!” 하루 종일 아빠를 불러서인지 엄마를 옆에 놓고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결국 관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관계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하나도 쓰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아빠를 더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좋아했지만 내 곁에 자주 없었던 ‘아빠와 나’와 다르게 일상에서 자주 아빠를 누릴 수 있기를.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는
아빠가 아이들을 키워야 많이 풀려
육아휴직 사업장이 더 많아지길 기대

 

아빠가 나를 키울 때는 아버지가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당연해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남편이 ‘행운아’처럼 보일까봐 가끔 걱정스럽다. 남편은 여전히 흔하지 않은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들은 아빠를 누릴 시간을 얻었다. 여전히 이런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목소리 높이고 싶다. 2019년에는 그런 사업장이 많아지길 꿈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저출산·고령화를 진정 걱정한다면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엄마들의 일을 아빠들이 나눌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말이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아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제 둘째 이준이가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첫째 두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달려 학교에 데려다줬다. 얼른 회사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떼쟁이 둘째가 아빠 손을 잡고 나타났다. 반가웠지만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이준이는 “엄마랑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 엉엉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울적하다. 버스 차창을 보며 목 끝의 뜨거움을 느끼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준이는 아빠랑 있는데 왜.’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안심이 됐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고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아이들과 소통 정말 어렵지만…아빠 역할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

 

첫째가 어버이날 편지를 쓰고 있다. 둘째는 첫쨰 하는 것을 따라하는 중이다.

 

‘으앙~’ 유모차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둘째가 갑자기 깨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막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유모차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젤리를 줘도 싫다고 막무가내로 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반쯤 포기하고 그냥 뒀다. 뭔가 서러움이 있다면 일단 배출이라도 해라 싶었다. 녀석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집이 떠나가라 운다. 씻지 않은 손에 구정물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덕지덕지 바른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모른 체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좋은 아빠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싶었을 때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 다시 물었더니 말한다. “형아 데리러 갔는데, 형아 어디 갔어!” 아까 학교에 형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형아’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는 혼자 다시 집에 있게 된 셈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대체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지식들을 얻는 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 데 도움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서 언젠가 이 책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에게 뭘 더 안겨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액션’보다는 아이들에게 ‘리액션’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내 차례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상대방의 전략을 지켜보는 턴(turn) 방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어떤 개입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될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더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육 과정을 게임으로 치자면
리얼타임 전략 시물레이션일 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발전

 

내가 그렇게 좋은 리액션을 보여줬나 돌이켜보면 백점 만점에 오십점이나 될까 싶다. 가급적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잘하는 모습을 칭찬해주되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북돋워주려고 늘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리액션은커녕 준비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다시 집에 헐레벌떡 돌아와 집어서 갖다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아지는 모습도 발견한다. 리액션이란 본디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더 중요하듯 아이들 역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나 혼자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첫째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아내 없이 혼자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말을 잘 못하던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 종일 나와 시간을 보내더니 곧잘 ‘아빠’ 하면서 달려들었다. 급기야 밤에 뒤척이며 보채다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 ‘아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라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져
내 아이와의 추억은 둘이 고루 섞였으면

 

그 첫째 녀석이 제법 크더니 출근하는 나에게 동생을 한번 안아주고 가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둘째가 돌을 갓 지나서였을 때였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동생이 ‘아빠’ ‘아빠’ 하고 울어서란다. 둘째는 그즈음 “아빠 돈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의문 역시 첫째가 풀어주었다. “야, 아빠가 좋다고 아빠 돈대 그러는 거지?” 녀석들의 볼을 한번 꼬집어보며 웃었다.

 

첫째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둘이서 탄 적이 있다. 기차를 타고 너무나 신나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아빠는 이미 꿈을 이뤘어? 아빠는 이미 커서 틀려버렸어? 아빠는 꿈이 없어?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야? 막막했다. 한 1분여간의 고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응, 그래?”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의 그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제법 많다. 아버지와 나는 씨름도 하고, 암벽에도 오르고, 잠옷 바람으로 함께 누워 있기도 한다. 사진 속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 앞에 서 있을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일하러 나가시던 굽은 등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었다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내 아이들과의 추억은 일상과 이벤트를 고루 섞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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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임아영·황경상 기자는 11년차 입사 동기입니다. 두 아들을 낳으면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양육은 엄마가 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왜 ‘반반 육아’가 중요한지 말하려 합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자…아이에게도,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초등학교 1학년 첫째와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까지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한편으로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남편이 육아휴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2주쯤 지났을 때 어느 퇴근길 집 근처에 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만 하고 갈게.” 대뜸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왜.” 얼른 저녁 시간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미 집 앞이던 나는 더 신나서 말했다. “아니, 맥주 한잔하면서 잠깐만 친구랑 이야기만 하고 갈게.”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따다다다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나 벌써 1층이야.” 나는 가부장 흉내를 내서 신이 났고 남편은 내가 무사히 육아를 하러 돌아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 하고 갈게” “왜?”
나는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던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내며 신이 났다

 

통쾌했다. 언젠가 한 번 꼭 내보고 싶었다.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한 여성 개그맨의 ‘가모장 개그’를 좋아했다.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를 원한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등.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비튼 말 속에서 가부장 언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었으니까. 평등한 삶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깔아뭉개지 않는 삶, 우리의 임금노동이 누군가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삶, 임금노동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돌봄노동을 인정하는 삶 아닐까.

 

아이를 낳고 퇴근 후 회식이 자연스러운 아빠와 퇴근 후 회식할 수 없는 엄마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왔다. 육아는 금을 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내 어깨가 무거워지면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사정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준에서 ‘착한 남편’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 주로 싸움을 걸고 사정하는 쪽은 나였지만 흔쾌히 싸움을 받아주거나 사정을 받아주는 것조차 고마웠다. 그래서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육아 경력은 내 육아 경력과 같다.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다. 길지 않은 육아휴직 기간 원래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인데 뭐가 크게 달라지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상의 결은 달라졌다.

 

남편이 만든 밥을 먹는데 기분이 묘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개운치 않았던 건
숨겨진 돌봄노동의 실체 때문이었다

 

남편이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기분이 묘했다. 시간거지인 맞벌이 부부라 평소 자주 음식을 사 먹었지만 가끔 요리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남편이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휴직 후 먹는 밥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남편이 마파두부밥과 참치전을 해놨다. 원래 손으로 뭔가를 빚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요리를 즐거워했지만 아침을 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엄마 반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해준 고등어조림이 정말 맛있었는데.” 며칠 후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등어 샀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라고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늘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우선 남편은 젊고 힘이 세니 아직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를 맡기기도 미안하지 않았고 사실 육아는 우리 둘의 일이라 미안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생겼다’고 느낀 지점은 아마 ‘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니 ‘밥을 해주는 엄마’가 생겼다. 결혼 후 늘 그리워하던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 따뜻한 엄마 밥.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서 든 생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삶 말고
서로서로 챙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며칠간 밥을 얻어먹고(?) 출근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운치 않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왜 개운치 않을까. 답은 쉽게 찾았다. ‘여전히 나도 누군가 돌봐주는 삶, 누군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는 삶, 자고 일어나 누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오는 삶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구나.’ 결혼하고 나서야 가사노동이 무엇인지 배웠고 아이를 낳고서야 돌봄노동의 실체를 알게 됐다. 이전의 나는 1인분의 삶을 살지 못했구나 하는 깨달음. 남편이 다시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니 안온해졌다. ‘임금노동에만 신경쓰면 되는 삶이 이랬었지.’

 

언젠가 동네 친구가 말했다. “가끔 자신은 집에서 노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다른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삶과 사회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밥을 차려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끔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자들의 칼럼을 읽다 보면 묘하게 우울해졌다. ‘이런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

 

나만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면 될까. 우리 모두 노예가 되지 않게 서로의 돌봄을 나누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돌봄의 영역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 신이 나기만 할 줄 알았다. “남편 좀 풀어주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남편 앞에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할을 바꿨으니 너도 고생해봐라’라는 독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는 답은 거기다.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 귀찮은 일들은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고고한 말을 하는 삶 말고 서로서로 밥을 챙겨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지루한 육체노동이지만…이 뭉클함 없인 인간은 반쪽 아닐까

“아빠 무서워~ 저기서 안 잘 거야.”

둘째가 매일 자던 창가 쪽 침대에서 건너와 내 옆에서 잔다고 한다. 좁은 자리에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모로 누웠다. 따뜻하고 달큼했다.

 

이러다 내 삶이 사라질까 조바심 들지만
작은 일에도 손뼉을 치는 첫째의 표정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일 없이 허무했다. 뭔가 그리우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누군가 만나고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고 싶진 않았다. 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열망했고, 헛헛한 속을 술로 달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갈 틈조차 없다. 첫째와 둘째, 늘 이 녀석들이 내 삶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인지라 이기적인 생각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자신의 삶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다가도 처음으로 아주 간단한 컴퓨터를 가르쳐줬더니 손뼉을 치며 깜짝 놀라는 첫째의 표정을 보며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저 아무렇게나 볶아서 만든 스파게티를 싹 비워버리는 둘째의 입을 바라보며 이것 외에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아침밥을 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반복되는 일상, 생사 다투는 큰일은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워 갈 뿐이다

 

녀석들을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누군가 내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농담 삼아 ‘물병 씻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 물병에는 보통 빨대가 달려 있어 물을 먹이기에 편리하지만 매일 씻어야 한다. 하루라도 안 씻으면 물때가 뿌옇게 낀다. 시커먼 곰팡이까지 생긴다. 씻기는 번거롭다. 빨대와 물통 뚜껑을 일일이 분해해야 한다. 빨대 속은 솔질도 해 줘야 한다. 그러나 씻은 물병에는 머지않아 다시 물을 담아야 한다. 빨대 물병 시기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두 개의 물병을 씻는 일은 주요 일과다.

 

반복되는 일은 많다. 매일 아침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씻기고, 가습기 물을 갈아주고 빨래도 해야 하고… 별것 아닌 일인데 매일 같은 반복에 지치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창궐하는 물때와 곰팡이야말로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사를 다투는 큰일은 없다. 찬란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견디지 못할 분노와 한숨도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울 뿐이다.

 

그것도 엄살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한 달에 한 번 현장학습을 나가면 김밥을 싸 주었다. 아침에 김밥을 싸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 적이 있다. 급식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같이 점심·저녁 도시락을 챙겨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나서다. 나는 겨우 하루치 도시락만 준비해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오셨던 걸까. 일까지 하시면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네가 인제 그걸 알았냐”며 눈물을 살짝 글썽이기도 하셨다.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찰나인 이 때를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

 

육아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녀석들은 내 아이들이지만 엄연한 타인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데 때로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소리도 지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늘 내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이 타인을(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돌봄으로써, 혹은 돌봄을 받으면서 느끼는 어떤 뭉클한 감정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인간은 여전히 반쪽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한다.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몸이 아닌 타인을 챙겨주고 닦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는 그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을 씻어주는 종교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예쁘게 핀 길가의 꽃잎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고, 빈 담뱃갑을 구기지도 않고 땅바닥에 떨궈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한 번도 타인을 돌봐준 적도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일 테다.

 

녀석들은 되레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내일 가져갈 준비물을 밤에 정리해 두겠다고 하자 첫째가 말한다. “아빠, 그러면 잠 오지 않겠어?” 아이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꼭 껴안는다. 신현림 시인은 <침대를 타고 달렸어>라는 시집에서 딸의 일기 중 이런 구절을 인용한다.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시인은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썼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면서 옥수수에 대한 설명을 봤다. 보통 우리는 옥수수 수염을 그저 쓸모없는 털이라고 생각하거나 ‘옥수수 수염차’ 정도만 떠올린다. 그 수염은 사실 한 올 한 올이 다 꽃이다. 그 한 올 한 올 수염마다 옥수수 알이 하나씩 맺힌다고 한다. 생각 없이 씹었던 옥수수 알 하나도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늘 옥수수 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수염이, 아니 꽃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품어내는 시간을 겪고 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이렇게 안고 있을 수 있는 순간, 아주 짧은 이 순간을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이 모두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 헛헛해지더라도 그 얼룩이라도 얼굴에 대고 비볐으면 하는 바람에서.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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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디 2019.05.02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뜻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전 임아영 기자님이 블로그로 글을 쓰신 초반부터 열심히 읽었던 초기 독자고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를 주변 지인에게 널리 추천하는 25살 여성이기도 합니다.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돌봄노동이 얼마나 공적 논의에서 배제되어왔나 크게 깨달았어요. 폭풍육아라고 할 만큼 고된 노동을 이렇게나 내가 몰랐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돌봄노동을 비가시화했던 걸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기자님과 동갑이신 고등학교 은사님이랑 대화했었는데 육아를 사회적 문제로 의제화한 책이 나왔다는 것에 매우 반가워하시더라구요.
    댓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가 바뀌길, 돌봄노동이 사회화되길 고대하며 함께 참여할게요. 늘 건강하시길!

    • 임아영 2019.05.10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초반부터 열심히 읽으셨다니 감동 ㅠㅠ

      여성들이 주로 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돼 온 거라는 생각을 저도 아이를 낳고서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돌봄노동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도 의문스러웠고요. 아이를 낳고서는 어떤 '균형'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됐는데... 아이와 나, 또 나와 남편, 또 일하는 나와 돌보는 나, 또 엄마인 나와 기자인 나와 또 시민인 나 등등등.

      맞벌이 부부가 문제이니 다시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답이 될 수 없고... 결국 남성, 여성 모두 균형을 이루는 삶을 우리 모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장시간 노동체제를 바꾸고 가부장적인 노동 구조를 바꾸고 또 돌봄노동을 모두가 나누는 평화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ㅎ 감사해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