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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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잡자 2021.04.06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식 리딩방 기사 잘 봤습니다 대형 증권회사(ㅋㅇ)의 문어발식 리딩방에 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가 2007년도 부터인것 같아요 정부는 손놓고 있어요 후속기사 꼭 부탁드립니다 불법 사기는 가정을 풍비박산 냅니다

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아이들이 요가 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뿌듯함과 서운함 교차하지만…더 많은 시간 함께 부대낄 수 있기를

 

요가 동작을 흉내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 육아휴직에 들어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와 등산했던 봄날, 아빠와 계곡으로 휴가 갔던 여름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계곡에 친 텐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나는 계속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텐트 속에 수집(?)하고 있었다. 속으로 ‘잠자리가 아빠 코나 눈두덩이를 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러나 평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는 늘 내가 잠들어야 퇴근했다. 열 살 때 수영장에서 넘어져 이를 크게 다쳤던 날에도 아빠는 늦게 왔다. 앞니 중 하나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버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정류장에 나타났을 때 엄마가 울던 표정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없이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동분서주했다. 몇 군데 치과를 돌아 겨우 치료를 한 밤 아빠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심했던 밤도 또렷하다.

 

나는 어릴 적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 분위기와 많이 달랐던 듯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는 자주 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다가 가끔은 어릴 적 아빠와 내 모습이 겹쳐진다. 최근 엄마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가 정말 놀랐다며 말씀하셨다. “아니, 아빠들이 다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왔더라~” 남편도 당연히 입학식에 왔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아이 입학식, 졸업식에 가는 걸 회사에서 뭐라고 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다 돌아보니 아빠는 내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빠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테고 회사 상사들은 면박을 줬을 테다. “엄마만 가면 되지, 왜 아빠가 유난스럽게 졸업식을 가느냐”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부르며 울 때가 많았다. 엄마가 모든 것의 디폴트인 줄 알았는데 첫째 때와 달라 신기했다. 아마 다른 점은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가 있었다는 점일 거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단 느낌을 주지 않고 싶어 첫째는 주로 내가 돌봤고 둘째는 남편이 담당(?)하게 하며 첫째가 안 볼 때 사랑을 몰아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둘째 기저귀를 갈았던 횟수는 첫째 때보다 현저히 적다. 남편이 주로 갈아서다. 목욕의 횟수도 비슷하다. 남편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킬 때 나는 보통 첫째를 마크(?)하고 있었다.

 

관계란 결국 시간에 비례한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누리길 바래
그것은 아이들의 권리이자 아빠의 권리

 

최근 어린이집 선생님이 보내준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준이가 점심 시간에 김치 먹으면서 ‘아빠 집에서도 김치 먹었어’라며 자랑을 했어요.” 내가 댓글을 달았다. “이준이는 이제 아빠 이야기만 하네요.”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우리 이준이는 뭐든지 ‘아빠 집’이라 표현하고 ‘아빠가 입혀줬어요’ ‘아빠한테 칭찬해주세요’라고 말을 해요. 아빠랑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어요.” 뿌듯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아니다, 엄마!” 하루 종일 아빠를 불러서인지 엄마를 옆에 놓고도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결국 관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모든 관계가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하나도 쓰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아빠를 더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좋아했지만 내 곁에 자주 없었던 ‘아빠와 나’와 다르게 일상에서 자주 아빠를 누릴 수 있기를.

 

지금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는
아빠가 아이들을 키워야 많이 풀려
육아휴직 사업장이 더 많아지길 기대

 

아빠가 나를 키울 때는 아버지가 생계를 부양하고 어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당연해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남편이 ‘행운아’처럼 보일까봐 가끔 걱정스럽다. 남편은 여전히 흔하지 않은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들은 아빠를 누릴 시간을 얻었다. 여전히 이런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목소리 높이고 싶다. 2019년에는 그런 사업장이 많아지길 꿈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저출산·고령화를 진정 걱정한다면 회사와 아이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엄마들의 일을 아빠들이 나눌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빠가 아이를 키워야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말이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아빠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제 둘째 이준이가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첫째 두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달려 학교에 데려다줬다. 얼른 회사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떼쟁이 둘째가 아빠 손을 잡고 나타났다. 반가웠지만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안 이준이는 “엄마랑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 엉엉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울적하다. 버스 차창을 보며 목 끝의 뜨거움을 느끼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준이는 아빠랑 있는데 왜.’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안심이 됐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이 아빠 손을 잡고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아이들과 소통 정말 어렵지만…아빠 역할은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

 

첫째가 어버이날 편지를 쓰고 있다. 둘째는 첫쨰 하는 것을 따라하는 중이다.

 

‘으앙~’ 유모차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둘째가 갑자기 깨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막 집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유모차를 집 밖으로 끌어냈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젤리를 줘도 싫다고 막무가내로 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반쯤 포기하고 그냥 뒀다. 뭔가 서러움이 있다면 일단 배출이라도 해라 싶었다. 녀석은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집이 떠나가라 운다. 씻지 않은 손에 구정물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덕지덕지 바른다. 설거지를 하며 애써 모른 체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좋은 아빠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울음소리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싶었을 때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 다시 물었더니 말한다. “형아 데리러 갔는데, 형아 어디 갔어!” 아까 학교에 형을 데리러 간다고 나섰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형아’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는 혼자 다시 집에 있게 된 셈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대체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그저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지식들을 얻는 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 데 도움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장 한구석에 꽂아두면서 언젠가 이 책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게 ‘꼰대’의 생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에게 뭘 더 안겨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액션’보다는 아이들에게 ‘리액션’해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내 차례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상대방의 전략을 지켜보는 턴(turn) 방식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어떤 개입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될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더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육 과정을 게임으로 치자면
리얼타임 전략 시물레이션일 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발전

 

내가 그렇게 좋은 리액션을 보여줬나 돌이켜보면 백점 만점에 오십점이나 될까 싶다. 가급적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잘하는 모습을 칭찬해주되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주고, 조금 서툴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갖기보다 북돋워주려고 늘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리액션은커녕 준비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다시 집에 헐레벌떡 돌아와 집어서 갖다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아지는 모습도 발견한다. 리액션이란 본디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더 중요하듯 아이들 역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면 아빠를 더 신뢰하고 따르게 되리라 나 혼자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첫째가 1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아내 없이 혼자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말을 잘 못하던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 종일 나와 시간을 보내더니 곧잘 ‘아빠’ 하면서 달려들었다. 급기야 밤에 뒤척이며 보채다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아빠’ ‘아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라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져
내 아이와의 추억은 둘이 고루 섞였으면

 

그 첫째 녀석이 제법 크더니 출근하는 나에게 동생을 한번 안아주고 가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둘째가 돌을 갓 지나서였을 때였다. 왜냐고 물으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동생이 ‘아빠’ ‘아빠’ 하고 울어서란다. 둘째는 그즈음 “아빠 돈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의문 역시 첫째가 풀어주었다. “야, 아빠가 좋다고 아빠 돈대 그러는 거지?” 녀석들의 볼을 한번 꼬집어보며 웃었다.

 

첫째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둘이서 탄 적이 있다. 기차를 타고 너무나 신나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아빠는 이미 꿈을 이뤘어? 아빠는 이미 커서 틀려버렸어? 아빠는 꿈이 없어?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야? 막막했다. 한 1분여간의 고심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응, 그래?”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나의 그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제법 많다. 아버지와 나는 씨름도 하고, 암벽에도 오르고, 잠옷 바람으로 함께 누워 있기도 한다. 사진 속 ‘브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 앞에 서 있을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일하러 나가시던 굽은 등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일상’이었다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내 아이들과의 추억은 일상과 이벤트를 고루 섞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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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 엄마

임아영


 

두진이를 낳고 #초보엄마 였을 때였다. 엄마 몸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잠을 깨 울어버리는 아기를 두고 집 밖을 나오는 상상을 한 번씩 했다. 그 상상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왔지만.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 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을. 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 주말이면 나도 조금쯤은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면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소리치게 된다.

어느 일요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내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책 읽어줘요.” 첫째는 왼쪽 어깨에 기대고 둘째는 등 뒤에 매달렸다. 24kg이 넘은 여덟살 첫째와 14kg이 넘은 만 35개월의 둘째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 아이들의 살이 무겁고 덥다. 점점 몸무게가 늘어나는 아이들의 몸에 눌리면 아이라도 매우 아프다. 나도 모르게 “그만 좀!”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엄마 갑자기 왜 그래’라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가도 후련하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마도 나 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 말은 삼키고 만다.

엄마가 되고서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엄마 몸에 발 하나라도 닿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는 나를 더듬어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도 푹 자지 못하는 #좀비 가 되어가자 깨달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존재를 달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는 것이구나.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도 했지만 자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아이들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내 안테나가 아이들의 안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 #안고부비고싶은존재들 이 무거웠다가 멀어질까 다시 두려워지는 이 마음. 이 마음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구나.

두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를 잠자리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두진이는 언제쯤 혼자 자고 싶어?” 아직 동생이 어려서 네 식구 모두 함께 자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두진이는 말했다. “엄마, 난 혼자 자기 싫어.” 의존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돼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혼자 잘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항상 같이 자줄 수는 없는 거야.” 두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고학년은 몇 학년인데?” “10학년!” 풋 웃음이 나왔다. “10학년은 없어(웃음).”

이 얘기를 동네 엄마에게 전해주니 그 엄마는 말했다. “고1 때까지 같이 자겠다는 얘기네요.” 순간 변성기의 수염 난 소년이 떠올라 또 풋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소년이 엄마와 함께 잠들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따로 재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 #시간거지 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나마 엄마아빠 품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내게 발차기를 하거나 등 밑에 발 집어넣기 기술(?)을 시전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버려 “제발!” 외친 적도 있지만 잠결에 아이들을 안아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운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깨서 새벽 혼자 운 날도 있었다. 커버리는 게 아까워서. 정말 이상하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버겁고 아깝고 부담스럽고 잃어버릴까 두려운 이 감정 말이다.

얼마 전부터 두진이가 잘 때 팔베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엄마, 불편해.” 팔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베개를 하면 불편하다고 했다. 늘 왼쪽 팔엔 두진, 오른쪽 팔엔 이준이를 장착(?)하고 자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는데. 방전되는 휴대폰이 충전되는 것처럼 90, 95, 99, 100%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내 팔에서 떨어져 혼자 베개를 베고 자기 시작하다니. 허전했다. 팔베개를 하면 불편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였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것이 언제였냐는듯이 나는 그 건강한 신호조차 아쉬워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킥보드를 수리하는(?) 둘째와 그를 코치해주는 첫째

 

그렇게 내 몸에서 분리되길 원했던 아이들은 이제 곧 자기 혼자 설 것이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했던 내 말들이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날들이 곧 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삶이 이런 것인지 잘 몰랐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결이 다른 이 마음. 아이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의 부드러운 볼에 뽀뽀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먼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 것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은 나를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이제야 나는 이 세상에 발딛게 된 기분이 든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연두색 새싹처럼 여리지만 어떤 색깔보다 예쁜 아이들의 유년, 그 #유년 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의 젊음.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인생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은 아빠

황경상

요즘 첫째는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다. <수박 수영장> <메리> 같은 책은 내가 봐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아이와 등교를 하면서 안녕달 작가의 책에 대해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학교 도서실에 보니까 안녕달 아저씨가 쓰신 다른 책도 있더라고~ 이따 빌리러 가자!”

“작가님이 책을 한 권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권도 쓴다고?”

“그럼 작가들은 여러 권을 쓰기도 하지. 안녕달 아저씨도 한 권만 쓰셨을 리가 없지.”

“근데, 아빠. 안녕달 작가님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잖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나는 그림책 작가님을 그냥 남자, 아저씨라고 생각했을까. 안녕달 작가님은 필명을 쓰시는데 책에도 간단한 소개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여성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고정관념 을 단숨에 깨 주었다.

 “아, 맞다. 그래, 그럼 우리 그냥 작가님이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중에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진짜 여성이셨다.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매일매일 배우고 깨닫는다.

집 주변 곳곳에는 형형색색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전에는 그 꽃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봄이 되면 그저 꽃이 피는가보다 싶었다. 아이들은 그런 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자 둘째가 말했다. “아빠, 꽃잎이 아프면 어쩌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들에게는 꽃잎 하나, 풀잎 한 줄기, 나무 한 그루도 다 소중하다. 소중한 것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이름을 알려줘야 하는데 나도 도리가 없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게 포털사이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렌즈 기능이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에 있는 꽃과 유사한 꽃을 백과사전에서 찾아서 보여주는데 제법 정확하다.

 

아이들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된 제비꽃

 

제비꽃, 꽃잔디, 데이지, #애기똥풀 … 나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면 아이들은 이름을 불러보며 즐거워한다. 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도 그저 다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중에 좀 생김새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달라 한다. 사진을 찍어보니 #쥐똥나무 라고 알려준다. 그때부터 이건 사철나무, 이건 쥐똥나무 하면서 구별하면서 다닌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는 작고 동그란 나무 열매를 모으면서 좋아하기에 확인해 보니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천지사방에 떨어져 있어도 이름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바짝 말라버린 나무열매를 땅 속에 심고 있기에 “그건 심어도 싹이 안 나, 이미 씨는 다 날아가 버린 거야”라고 말하자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영혼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만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다시 나는, 이 나이에 배운다.

아이들 덕분에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

 

나무열매를 모으고 만들고 하면서 신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서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또 함께 데리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많이 놀았잖아요. 우리한테는 왜 그래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정말 우리는 밖에서 많이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실내에서 놀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나 놀랍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리자 첫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수줍음이 많은가봐, 내 손으로 안 와.”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아이들의 말들은 정말 잊어버릴까봐 두려워 매일 메모장에 기록하지만 빠뜨린 게 구할이다. 육아를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 예쁜 말이 가슴에 꽂혀 다시 한 번 아이들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마음을 아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매일매일 풀어서 다듬는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배우고 얻는 게 더 많다.

“아들, 오늘도 잘 하고 와!”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첫째에게 소리치자 데리고 있던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들이 뭐야?”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이놈아!”

아직은 가르칠 것도 많지만 말이다.

 

[출처] 부모로 성장한다고 느낄 때 [부부 육아일기 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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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키우는 것

임아영

벚꽃이 흩날리는 하원길에서 둘째.

남편과 나는 2008년 함께 회사에 입사했다. 흔한 연애 레퍼토리처럼 입사 동기가 친구가 되었고, 친구가 연인이 되어 부부가 됐다. 일한 지 만 10년, 결혼한 지 만 7년. #사내커플 이니 “남편이랑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 불편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답은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이어폰 같은 것들을 집에 놓고 오면 급히 빌릴 수도 있고 편한 점도 많다. 출퇴근길 회사 일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는 것도 좋다. 우리는 밤에도 맥주 한 잔 하며 ‘회사 얘기’를 한다. 늘 “이제는 회사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면서도. 남편과 회사 얘기를 나누는 것은 즐겁다. 내 일, 내 동료에 대해 온전히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괴로울 때는 서로의 성별로 사회적 역할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사 엘리베이터에 남편과 함께 탔는데 한 선배가 나를 보며 물었다. “밥은 해주냐?” 나는 당황했다. 신혼 초 우리는 번갈아 아침밥을 했다. 내가 하는 날도 남편이 하는 날도 있었다. 결혼 전 약속도 했다. 서로를 사회적 성별의 틀로 가두지 말자고. “나는 당신에게 #생계부양자 의 역할을 강요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도 내게 가사노동과 육아를 더 많이 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선배의 별뜻 없는(?) 질문에 내 표정은 이미 나빠졌을 것이다. “제가 왜 밥을 해줘야 되죠?” 말투도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부터 그 선배는 우리를 보면 남편을 향해 묻는다. “밥은 해줬어?”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다.

사람들은 장난을 섞어 집요하게 물었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을 하느냐고. 우리는 서로를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로 국한시키고 있지 않은데도. 남편은 적극적으로 육아를 하고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됐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후 친정아버지도 말씀하셨다. “황서방이 고생하네.” 나는 두 아이들 모두 돌 지날 때까지 키웠다. 몸으로 낳고 몸으로 키웠던 2년을 떠올리면 가끔 아득하다. 혼자 잠들지도, 혼자 먹지도, 혼자 씻지도 못하는 존재들 앞에서 무력했던 마음들이 떠올라서. 엄마는 그 정도는 당연하게 해내야 ‘엄마’가 되지만 아빠는 엄마가 하는 일의 일부만 해내고 ‘훌륭한 아빠’가 된다.

나를 낳은 아빠에게 투덜거렸다. “아빠, 이거 원래 내가 하던 일이야. 심지어 황서방은 겨우 6개월밖에 안 해. 6개월이라고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다른 남자들이랑 비교해봐라.”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왜 남자들하고 비교해요? 이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엄마들하고 비교해야지.” 회사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경상이는 술을 못 마셔서 답답하겠다”고. 처음에는 “집에서 많이 마셔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다가 이제는 나도 다른 답변 기술이 생겼다. “선배는 제가 술을 못 마시고 있는 것은 안 보여요?” 더 하고 싶은 말은 참는다. ‘우리는 열심히 부부가 함께 육아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별뜻 없이 던지는 그 말들이 노력하는 우리에게 상처가 돼요.’

같은 회사의 같은 연차의 남편. 남편은 항상 노력했지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이 구조는 때로 내게 상처가 됐다. 모두들 엄마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니까. 남편이 하는 것은 늘 칭찬받으니까. 나는 가끔 칭찬받는 남편을 질투했다.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제일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명함 이었다. 먼저 취직한 친구들이 명함을 주고받을 때 숨고 싶었다. 깨달았다. ‘한국은 명함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사회구나.’ 명함을 획득하기 위해 울고 버텼던 20대를 기억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엄마가 되니 주변 엄마들이 다들 명함을 스스로 놓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은 전쟁이니까. 나 또한 갈팡질팡했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명함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렇게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기분으로 살 바에는 명함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매번 부딪혔다.

누가 물었다. “엄마가 된 이후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이냐”고. 쌩뚱맞게 #시민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대답은 이랬다. “좋은 기사를 썼을 때, 아니면 동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요. 엄마로서의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나, 동료로서의 나도 있어요. 사회에 좋은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각자 자신의 기능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데 직장에서의 성취감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대단한 기자는 아닐지라도 제가 일해서 제가 번 돈으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게 소중한 것 같아요.”

 

이제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명함 같은 것은 상관없이 모두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많은 선배 여성들이 버텨냈다. 그런데 버텨내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참고 남자 직원과 비교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 명함을 얻고 전투적으로 일하는 모습 외에 아이를 돌보고 함께 성장하는 삶도 시민의 삶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주저앉는 삶이 아니라는 것.

나는 이제 무난하게 있지 않는다. 남편과 나를 성별의 틀로 가두는 말 속에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는 ‘쫄보’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말하지는 못하도록 하는 ‘기운’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여성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남편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해서 칭찬받지만 나는 당연한 것을 하면서도 투덜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그게 너무 불공평해서 억울하지만 나는 남편과 최대한 #돌봄노동 을 나누고 함께 하고 싶다. ‘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큰애 머리 위의 벚꽃.

 

아빠도 육아의 절반 몫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회

황경상

둘째 #어린이집 에서 동네 치안센터를 방문하는 작은 행사를 열었다. 참여할 부모를 모집한다고 해서 나도 신청했다. 아내와 내가 둘 다 일할 때였으면 하기 어려웠을 텐데 육아휴직을 하니 이런 행사도 참여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으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와 치안센터로 향했다. 한 손에는 둘째의 손을, 다른 손에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평화로웠다. 5분 정도의 짧은 거리였지만 아이들과 함께여서 조심조심 천천히 걸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행렬을 지어 나름대로 질서 있게 인도를 가득 메웠다.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둘러보니 어른 남자는 선생님까지 다 포함해도 나 혼자였다. 다른 집은 모두 엄마가 참석했다. 그걸 의식하고 나니 길을 지나가면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저 무심결에 나를 바라본 거였을 텐데도 뭔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괜히 움츠러들었다. 느린 이동속도 탓에 빨리 벗어나지도 못해서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출산 이 문제가 되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 그리고 남성 육아휴직에 대해서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아주 오래 전에 육아를 위해 휴직을 했던 선배는 회사 상사에게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집이 자네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 집사람이 자네 아이를 함께 돌봐줄 수 있다고 하니 휴직은 하지 말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일하는 남자가 육아를 위해 시간을 쏟으면 무조건 쓸데없고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그 상사 역시 몹시 #가부장적 인 사고에 머물러 있었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능력 있는 후배가 일하지 않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굉장한 배려를 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셈이다. 선배는 정말 진지한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하고 휴직을 했다. 막상 휴직에 들어가서도 무춤한 순간이 많았다고 했다. 아빠가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아이들이나 엄마들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해서 ‘학생’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물론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다 보면 심심찮게 아이들의 손을 잡은 아빠들과 마주친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남성 육아휴직이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 육아휴직을 한 선배 역시 아이들과 놀이터에 있다가 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저씨는 뭐 하는 분이기에 이렇게 낮에 일을 안 해요?”

내가 육아휴직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 고교 친구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회사는 남자 비율이 낮긴 하지만, 몇 년 전에 전 직군에서 1명만 남자 육아휴직을 썼어. 아직은 한국 직장에서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인데 멋지다. 아들 녀석들한테 의미 있고 기억되는 시간되길 바란다.” 무척 고맙고도 힘이 됐다. 한편으론 그 친구 역시 육아휴직을 한 번쯤 쓰고 싶었다는 아쉬움이 행간에 묻어나기도 했다. 무탈하게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남성육아휴직자수 는 2017년 1만2000여명에 달한다. 2010년 800여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10년이 안 된 사이에 15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간을 쏟는 일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별스런’ 일이다.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들은 주변에서 과도한 상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많은 분들에게 분에 넘칠 만큼 많은 격려를 받았다. 아이의 친구 엄마들도 부끄럽고 쑥스럽게도 나에게 “대단하시다”라는 말을 자주 해주신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건 남성 육아휴직이 ‘대단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아이를 내가 키우는 일이고, 당연히 참여해야 할 육아의 몫을 나누어 지는 것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아내가 인정해 주겠지?”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나만큼 하는 남자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내의 ‘당연한 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또 어느새 금방 알게 된다. 나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얼마 전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반 단체 생일파티가 있었다. 아내가 일이 있어 내가 참석하게 됐다. 그 자리에도 남자는 나 한 명뿐이었다. 어쩌면 불편했을지도 모를 자리에 온 불청객(?) 아빠를 엄마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휴, 정말 일하는 게 낫지… 애들 키우는 거 진짜 힘들어요.” 엄마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맞장구칠 일도 많았다. “애들 보면 얼마나 화를 낼 일이 많은지… 근데 그럴 일은 없으시죠?”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저도 얼마나 화를 많이 내고 소리를 많이 지르는데요.”

늘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화를 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는데, 엄마들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위로가 됐다. 그저 우리는 엄마, 아빠를 넘어서 아이를 키우는 #동지 일 뿐이었다. 엄마들의 말을 들어보면, 엄마들이 느끼는 힘든 점도 육아를 오로지 본인만 짊어지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것 같았다.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쓰는 게 보편화되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반의 몫으로 참여하는 사회 분위기가 된다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두렵고 힘든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치안센터 방문 행사 후 아이의 알림장에 이렇게 글을 남겨 주셨다. “등원하고서 ‘아빠랑 경찰관 보러 가요’라고 말하면서 즐거워했어요.”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칭찬받을 일을 하면 곧잘 “아빠가 집에서 가르쳐 줬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여태껏 이룬 성취 중 그 어떤 것 이상으로 감격스러웠다. 앞서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했던 선배는 그때 아이들에게 간식을 만들어주고 함께 보냈던 시간이 지금 와서 몹시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더 많은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통해, 혹은 육아에 쏟는 시간에서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

 

[출처] 아빠육아는 훌륭하고, 엄마육아는 당연하다? [부부 육아일기 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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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라서 괜찮아

임아영

 

첫 아이가 처음 하는 일은 내게도 보통 처음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에 간다면 초등학교 #학부모 는 처음이듯이. 둘째를 낳고서 알게 됐다. 두번째 경험하게 되면 훨씬 유연해지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둘째를 #어린이집 에 처음 보낼 때도 아이에게 미안하고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첫째 때만큼은 아니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던 날은 정말 펑펑 울었다. 어떤 연애의 끝보다 슬프게. 둘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안쓰러움’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보’라서 어려운 이유는 그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펼쳐진 일이 감당 가능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은 그나마 다행이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아이와 함께 겪어야 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부모가 되고보니 가장 힘든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지난 겨우내 첫째가 초등학생이 된다는 게 걱정스러웠다. 약간 내성적인 아이가 학교 생활을 즐거워할지 걱정됐고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아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3월 한 달을 보낸 결론은 ‘할 만 했다’이다. 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고 나도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들어간 첫 달을 잘 보냈다. 모두 남편 덕분이다. 우리 둘다 초보 부모지만 남편과 내가 일을 분담했기에 가능했다. #아빠육아휴직 을 허락한 회사 덕분이기도 하고 아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한 사회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3월 한 달 각종 학교 행사가 쏟아졌다. 말 그대로 ‘쏟아졌다.’ 3월 4일 입학식부터 학부모 #공개수업, #학부모총회, 1학기 상담, 반 모임까지. 보통 하듯 엄마가 다 소화해야 했다면 나는 3~4일을 휴가내야 했을 것이다. 입학식날부터 5일간 10년 근속휴가를 썼고 학부모 총회 때 반차를 썼다.

3월 둘째주부터 육아휴직한 남편은 입학식을 함께 했고 공개 수업, 상담을 맡았다. 엄마들이 주로 오는 반 모임은 다행히 밤에 잡혀 퇴근 후 갈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갈 수 없었던 어린이집 행사도 남편이 갔다. 지난해 내내 ‘열린 어린이집’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미안했던 둘째에게 어느 정도 만회를 할 수 있었다.

34개월 둘째는 치안센터에 가는 ‘열린 어린이집’ 행사에서 계속 아빠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했다. 회사에 있던 나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치안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둘째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초등학교 입학 때 #경단녀 가 가장 많이 생긴다더니 입학 후 첫 3주간은 학교에서 #단축수업 을 해서 만약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곤란했을 상황이었다. 오후 12시40분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남편은 퇴근 후 내게 말했다. “오늘 1만5000보를 걸었어.” 그 다음날은 “오늘은 2만보 가까이 걸었어.”

남편은 오전 8시40분 두 아이를 데리고 학교-어린이집 코스로 데려다주고 오후 12시40분 첫째 학교에 가서 방과후수업이 하는 시간까지 학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두고 기다리다가 다시 집에 가서 오후 3시쯤 첫째 방과후수업이 끝나면 데려오고 또 오후3시30분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잘 걷지도 못하는 둘째, 호기심 많은 첫째를 데리고 왕복하는 일은 고되다. “그래, OO엄마가 애들은 편도지만 부모는 왕복이라 하더라.”

초등학교를 왔다갔다, 어린이집을 왔다갔다 하는 남편의 모습을 회사에서 상상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아, 내가 육아휴직하는 동안 늘 했던 일인데 뭐 그렇게 힘들어’ 싶었다가 ‘그래도 그때 나도 너무 왔다갔다 힘들었지. 남편도 고생하네.’했다가.

 여러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남편의 눈으로 아이를 볼 수 있게 된 거다. 남편이 첫째 아이 공개수업이 간 것은 처음이었다. 유치원 3년 동안 공개수업은 내가 다 참여했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아이가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수업에 약간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

그러나 남편이 보내준 영상을 보고 거꾸로 나는 아이가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5세 때보다 7세 때보다 많이 자란 아이의 모습을 보고 뭉클했다. “아이는 잘 크고 있어. 유치원 때보다 훨씬 의젓해졌네.” 남편도 내 설명을 듣고 안심했다. 우리는 얼마나 각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가. 남편과 아내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우 뭉클했던 순간도 있었다. 남편이 첫째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돌아와서 상담 내용을 요약한 글을 보고서였다. “내가 간 것처럼 복기해 와야해”라는 말을 들어서였겠지만 남편은 정말 꼼꼼하게 상담 내용을 적어왔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했다.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대화를 잘 해 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남편과 육아를 함께 하려고 노력해왔다. 선생님은 그런 의도로 하신 말이 아니겠지만 그동안의 나와 남편의 노력을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건 해봐야 가늠할 수 있다. 초보 부모 3월 한 달 분투기, 할 만했다. 그러나 남편과 같이 할 수 없었다면 괴로웠을 것이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선생님이 이렇게 적으셨다. ‘우리 이준이가 양치질 시간에 “아빠가 사준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아빠가 준비해 준다고 말했다며 칫솔을 보고 좋아했어요. “엄마는 물통을 사줬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준이가 “아빠는 칫솔을 사줘서 멋져요”라고 하자 선생님이 “엄마는?”하고 묻자 “엄마도 멋져요”라고 말해주었어요.’ 아이의 말에 엄마, 아빠 모두 등장하는 것이 정말 나는 기쁘다. 요즘 퇴근하는 길 예전보다 더 발걸음이 빨라진다. 집에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으니까.

 

퇴근한 엄마 등 위에 올라탄 아이들

 

 

 

‘아빠’라는 작은 히어로

황경상

 

 

“뛰어! 뛰어!”

 아침부터 달린다. 아직 덜 풀린 다리가 진짜 풀려버릴 것 같다. 오늘도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옷도 안 입으려는 두 녀석을 데리고 실랑이를 벌이다 학교로 출발하는 시각이 늦어졌다. 마음이 급한데 터덜터덜 따라오던 첫째가 투정을 부린다.

“아빠, 힘들어~ 천천히 가!”, “네가 준비를 늦게 해서 그렇지! 벌써 50분이야~ 지각하겠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차마 남들 볼까봐 화도 못 낸다. 그저 애써 얼굴을 눌러 펴고 첫째의 등을 토닥인다.

그 와중에 둘째는 온갖 사물에 관심을 보인다. “아빠 저건 뭐야?”, “응, 강아지들을 맡겨두는 곳이야.” 첫째 역시 한몫 거든다. “우와~ 아빠! 여기 피자집이 맥주에 치킨집으로 바뀌었어!” 갑자기 이삿짐을 나르는 차가 눈앞에 보이자 둘째가 소리친다. “와, 사다리차다! 보고 싶어~ 멈춰! 멈춰!” 요즘 사다리차에 푹 빠져 있는 둘째가 가만 있질 못한다.

 처음에는 두 녀석의 손을 모두 잡고 걸어 다녔지만, 하도 내 손을 잡아끌고 제멋대로 다니려고 하는 둘째 녀석 때문에 등교 시간이 고무줄처럼 길어졌다. 뒤에서 미는 세발자전거에 둘째를 태웠더니 속도는 나는데 오르막이나 계단, 턱이 많아 휘청휘청한다. 첫째의 손을 잘 잡아주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허둥지둥 교문에 들어서서 첫째를 학교 현관에서 배웅한다. 내가 멀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하면서 손을 흔들다가 사라지는 녀석의 작은 등을 바라보면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콧날이 시큰해진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학교가 쉽지 않았는지 첫 주에는 열감기에 걸려 결석까지 했다.

두 녀석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오면 잠시의 여유가 생긴다. 많은 분들이 #육아휴직 에 응원을 보내주셨지만, 오전 시간은 잠시 쉴 수 있지 않느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왠지 마음이 더 급해진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눈에 밟히는 것도 많다. 이불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 바닥에 살짝 스쳤더니 시커먼 검댕이 묻어나온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탓이다. 대충 걸레로 닦으려다 잘 닦이지 않아 결국 물청소를 했다.

 

냉장고에는 2018년, 심지어 2016년에 유통기한이 끝난 냉동 생선과 언제 넣었는지 모를 누렇게 변색된 미역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곰팡이가 생긴 떡국 떡과 마늘도 꺼내 버렸다. 화장실 변기에는 솔질로도 잘 닦이지 않는 곰팡이가 석 달째 방치돼 있었다. 사 놓고 넉 달째 먹지 않았던 크림 스파게티 소스가 눈에 띈다. 다행히 냄새를 맡아보니 상하진 않았다. ‘그래, 오늘은 이걸 먹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을 데려와야 할 시간이 된다.

 

보통 아내가 가던 #학부모상담도 내가 가기로 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아내와 상의 끝에 몇 가지를 적어서 스마트폰에 저장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학교 운동장에 서서 몇 번이고 그걸 꺼내봤는데 도통 머리에 남질 않는다. 교실 앞으로 가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입사 면접 이후 이렇게 긴장된 건 처음이었다. 살짝 들여다보니 선생님은 계시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 방해해선 안 될 것 같고… 두어 차례 망설이다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먼발치에서 봤을 때는 다소 엄한 인상이셨는데 가까이서 뵈니 달랐다. 선생님은 따뜻한 눈빛으로 쭈뼛쭈뼛하는 아빠를 맞아주셨다. “나중에 크면 아빠랑 대화를 자주 나누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꼭 아빠랑 상의를 하는 아이들도 있더라고요.” 선생님은 육아휴직을 응원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저도 잘 될 진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아빠가 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쉽지만 쉽진 않다. 처음 3주간은 단축수업을 해서 #방과후 수업까지 중간에 1시간이 비었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1시간을 서 있어야 했는데 좀이 쑤셨다. “1시간 동안 벌 서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한 엄마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봄인데 날씨는 왜 이렇게 추운지, 얇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벌벌 떨었다. “아직까지 롱패딩은 필수라니까요.” 정말 그랬다.

 

첫째가 학교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만든 케이크(?)

 

 

그냥 있기 뭣해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놀이터에 섰다. 어색하게 발걸음을 이리저리 뗐더니 아이들은 나를 ‘적’이라고 부르면서 낄낄대며 도망친다. 아이들에게는 악당을 물리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이다.

좀 신나게 놀아주려는 찰나, 첫째 녀석이 나를 물리친다며 모래를 내 머리에 뿌렸다 흥이 식은 것은 물론 울화가 치밀었다. 온몸에 모래가 다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화도 못 냈다. ‘그러지 마, 인제 아빠 안 해’ 하면서 돌아와 바닥에 털퍼덕 앉았는데 뭔가 창피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훈련이 안 돼 있었던 셈이다. 신문에 나온 육아휴직 하는 아빠들 보면 정말 잘 놀아주던데…….

 기운이 빠지는 것도 오래갈 수는 없다. 아직까지 이 작은 녀석들의 우주에서 내 존재는 비중이 크다.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주면 신나 어쩔 줄 모른다. 둘째에게 아직까지 아빠는 ‘신’이다. 어느 흐린 날 둘째가 말했다. “아빠, 비 못 내리게 해 줘!” “아빠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할 수가 없어.” 녀석은 ‘힝!’ 하면서 발을 구른다.

 

첫째는 컴퓨터로 로봇을 조작하는 아주 기초적인 코딩을 알려줬더니 ‘우와’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두한다. 둘째는 막 피어오르는 새싹을 보여주고 만지게 해 줬더니, 어느 날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싹을 보고 “새싹 예쁘다!”라고 말한다. 장난감 지게차, 소방차를 만들어주면 “아빠 멋지다! 고마워!”를 연발한다.

 

아빠와 함께 로봇 만들기 삼매경에 빠진 첫째

 

그 새싹보다 예쁜 것들을 껴안으며 잠들면 달큰한 냄새가 난다.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잘못 대해 준 게 생각나 내가 아빠가 될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 괜히 감당하지도 못할 아이들을 낳은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작은 손을 잡고 누워있으면 마음이 다시 편안해진다. 손을 잡고 오래오래 걸을 시간이 아직은 많이 남았다.

 

 

[출처] 아빠가 간 학부모 상담! 초등학교 행사가 쏟아지는 3월-4월 처음 부모 분투기 [부부 육아일기 2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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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으면 어른 된다’는 말이 싫었다. 인간의 성장이나 성숙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나는 많이 변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 자체가 달라진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는 보수일 수도, 어떤 각도에서는 진보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판단은 미루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를 낳은 후의 나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20대의 나는 자주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불안해했다. 아이를 낳은 30대의 나는 그런 20대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이가 내 불안을 줄여준 것인지, 엄마 노릇을 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불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를 낳고 훨씬 안정됐다.


 

육아로 성취의 삶 멀어질까 두렵던 나
그런데 성취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사회가 주입한 메시지, 틀렸음을 알았다

 

물론 육아는 힘들었다. 아이는 24시간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확보되지 않자 아이를 돌보기 위한 준비가 하나도 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나 외의 존재를 온전히 돌본 적이 없었구나. 이런 종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었구나.’ 몸이 ‘돌봄의 하루’에 적응하면서 ‘돌보는 존재’를 배워가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은 무엇인가. ‘아이를 낳게 되면 모든 것이 멈춰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었다. 육아휴직 전 나는 ‘아이를 기르는 동안 성취의 삶과는 멀어지겠지만’이라고 적었었다. 그런데 그 ‘성취’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나는 그동안 주입받아왔던 사회의 메시지가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결혼한 지 7년,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를 써온 남편은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이다.

■ 누군가를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첫아이를 낳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벅찰 때였다. 어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지어 혼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아기를 보고 두려웠을 때.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맞은편에 십여명의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했다. ‘저 사람들도 내 아기처럼 아기였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우리 모두 언젠간 아이였고 누군가의 도움, 돌봄 없이는 클 수 없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나는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돌보러 얼른 가야 할 것 같아서.


 

언젠가 노인이 되어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시절이 올 것이다. 아주 조금 겸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라는 미숙한 존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도, 아무리 높은 지위로 올라가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성취의 메시지에 가슴 떨린 적이 많았다. 잘하고 싶었다. 일도, 일 밖의 것들도. 그것들이 나를 괴롭혀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 성취는 누구의 기준인가? 그 기준에 따르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성취가 될 수 없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높이 올라가려는 남성의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임신하고 배가 나오니 달릴 수 없었다. 아이를 안고서도 달릴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삶은 후퇴한 삶인가? 주로 여성들이 해온 출산, 양육의 가치를 폄하해온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회사에서부터 대중매체, 정치권까지 아이 기르는 삶을 폄하하는 말은 곳곳에 있었다. 기저귀도 한번 갈아보지 않은 자들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 엉덩이가 짓무르지 않게 노력하는 삶’을 깔아뭉갤 때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구나.’


 

아침에 아이들이 파고드는 행복한 시간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멈춰서며 배웠다
꼭 성취 위해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실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이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르게 살겠다고 아등바등한 결과는 나 또한 기저귀 가는 삶을 무시해왔다는 슬픈 깨달음이었다. 아이가 내게 알려줬다. ‘엄마, 나는 엄마가 필요해요.’ 아이의 눈빛이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나는 주춤했다. 멈춰서야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온해졌다. 달리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침에 일어난 작은 아이들이 내 품에 파고들 때다. 이 행복을 왜 나는 밀어내려고 했을까. 아이를 낳기 전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꼭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가 사뿐사뿐 걷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어릴수록 걸음에 몸무게를 싣는다. 20㎏이 넘는 첫째보다 13㎏에 불과한 둘째의 발소리가 훨씬 크다. 사뿐사뿐 걷는 것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런 작은 것들을 배워왔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배운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심어주려고 했던 모성은 여전히 내게 없지만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스스로 내 모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어쩌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이렇게 모성을 긍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를 낳은 이후의 내가 더 좋다. 내가 모성을 긍정하는 이유다.


 

■모두가 돌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내가 모성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남편 덕분이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애써왔다. 돌볼 시간을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남편과 나도 많이 싸웠다.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전쟁이니까. “남편 좀 풀어주라”는 농담 앞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릴 때도 많지만, 또 어떤 날은 남편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잖아’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으면 힘이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남편과 논의한다. ‘여성의 전유물인 돌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하는 돌봄’으로 ‘서로돌봄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니까.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 된다는 것
벅차고 힘들지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돌봄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남편이 3월부터 육아휴직을 한다. 남편이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은 처음이다. 오랜 시간 아이 둘을 돌봐온 친정엄마의 무릎이 탈이 났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오전 11시40분에 하교한다. 선택지가 없고 너무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당장 경제적인 상황을 걱정해야 해 오래 육아휴직을 쓸 수는 없다. 길어도 6개월만 쓰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돌봄을 전담하는 존재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결이 남편에게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줄 것이다. 남편이 돌봄의 기쁨을 많이 누리길 바란다. 내가 육아휴직을 했을 때 그랬듯이.


 

그럼에도 한국에서 남성이 ‘돌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여전히 벅찬 일일 것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자신의 지난해 일기를 보여줬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이준이는 어느새 제법 말을 한다. ‘아빠 미워!!’ 이준이는 얼마 전부터 단것을 못 먹게 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못 갖고 놀게 하거나 하면 이런 말을 한다. 어제는 친구가 갖고 온 장난감을 하염없이 갖고 놀기에 이제 자자 했더니 ‘시러. 여기 더 있스 거야’라고 한다. 어제 아침에는 녀석을 안고 교차로에 서 있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녀석과 손을 잡고 어린이집까지 걸었다. 이준이 녀석과 손잡고 걸으면 좋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녀석의 작은 손을 잡고 걷는 일 자체가 좋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한다. 한참을 손잡고 같이 걷던 녀석은 갑자기 ‘아나저요’라고 한다. 번쩍 들어 안아준 녀석이 내 품에 폭 안긴다. 폭 안긴 녀석을 안고 봄날 가로수의 연둣빛으로 가득한 교차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인생의 짧은 순간은 그렇게 간다. 그날따라 이준이는 어린이집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며 울었다. 울지 않아도 녀석이 빠빠이 하며 손 흔드는 모습만 봐도 늘 가슴이 아팠다. 녀석의 손은 늘 내 가슴을 휘저어 놓곤 했다. 아, 그냥 녀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 전체를 봐선 나은 일 아닌가. 두진이 때도 똑같이 들던 생각이다. 못난 아빠는 또 이렇게 글을 남긴다.”(2018년 5월11일)


 

남편의 일기를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이집에서 아이에게 손을 흔들 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남편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 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 전체를 봐서는 나은 일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 모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잠을 하도 안 자서 애먹였던 아기 두진이는 이제 엄마를 걱정해줄 줄 아는 어린이가 됐다. 어제 둘째의 장난으로 머리를 꽈당 박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있었다. 두진이가 내게 와서 “엄마 괜찮아?”라며 짧은 팔로 나를 안고 ‘호호’ 불기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질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들을 내게 돌려주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데 ‘내가 너를 돌보는 것인가, 네가 나를 돌보는 것인가’ 눈물이 나려 했다. 남편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보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이 보여준 육아일기
아이를 통해 배우고 위로받던 내 모습이
그의 일기 안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두진이가 오늘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힘이 센데 왜 힘들어해?’ 청소기를 돌리면서 꽤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보다. ‘그러게. 힘이 센데 왜 나는 힘들어하고 있을까.’ 몸이 너무 피곤하다. 오후 4~5시만 되면 뇌가 흐물흐물해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애들을 볼 때도 별일 아닌데 소리를 빽 지르고는 금세 후회를 한다. 오늘도 잠자리에서 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해 두진아, 너한테 더 사랑을 줘야 하는데…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 녀석은 듣고도 암말도 않는다. 자면서 가끔 녀석의 손을 만지작거려본다.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부서질 것만 같았던 손은 제법 두툼해졌다. 최근에 장인어른이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 어디선가 그 말을 들었나보다. 몇 주 전인가, 책을 읽어주는데 갑자기 ‘아빠는 수순하지 마’ 이런다. 뭔 말인가 싶어서 몇 번 다시 물어보자 ‘눈 많이 써서 아프면 안돼’라고 말한다. 아빠는 수술하지 말라는 얘기였던 거다. 수술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마음이 뜨끈해졌다.”(2018년 4월23일)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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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es 2019.02.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너무 좋아요.. 출산 후 육아분담 계획 세우는 중인데 흘러흘러 이 곳을 발견했어요. 저도 워킹맘 이란 단어를 증오하는 사람이예요. (여자에게 가사육아노동과 근로노동을 떠넘기는 느낌이랄까?)
    기자님처럼 저도 아기라는 인생의 첫경험을 남편과 온전히 함께하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9.03.03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킹맘은 엄마들한테 모든 것을 전가하는 말이지요. ㅠㅠ 저도 웬만하면 워킹맘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육아분담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니... 파이팅입니다!! 많은 순간 지치고 멈춰서고 싶을 때가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아기를 보며 힘내시길요. 앞 문장을 쓰고 나니 많은 일들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 낳은 후의 제가 더 좋아요. 엄마든, 아빠든 아이 낳은 후의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