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아동은 초·중등교육법 제13조에 의하여 아래 학교에 배정되었사오니, 이 통지서는 취학할 초등학교의 예비소집에 참석할 때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야근 후 집에 돌아오니 탁자 위에 ‘취학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아, 꼬맹이가 벌써 ‘초딩’이 되다니. 아이를 낳은 게 엊그제 같은데 학부모가 되다니. 태어날 때 신장이 54㎝였던 아기는 이제 2배 이상 자라 120㎝를 넘어섰다. 이제 두 팔로도 안기 힘들어진 첫째가 가끔 31개월 된 둘째처럼 안아달라고 하면 곤란해진다.


 

“두진아 엄마가 안아주고 싶은데….” 못내 미안해져 잠깐 업으면 첫째는 “엄마가 힘들어하니 내려올게”라며 의젓하게 군다. 이렇게 의젓하게 굴 정도로 커버린 내 아이가 이제 ‘학생’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학생’이 된다는 게 너무 짠하다. 한국에서 학생이 된다는 건 적어도 내겐 ‘경쟁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겨우 만 6년1개월 산 어린이인데 ‘경쟁’이라니.


 

마냥 꼬맹이같던 첫째가 ‘초딩’이라니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지는 세상에서
아이가 클수록 내 가슴은 불안을 품는다


 

2012년 태어난 첫째는 예민한 아기였다. 많이 울었고 엄마 품을 떠나는 걸 두려워했다. “울지마 아가야. 엄마 여기 있잖아.” 조리원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아기를 내 배 위에 눕혀 재워야 했다. 아기는 엎드린 채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만 잠이 들었다. 조금만 떨어져도 비명을 지르듯 우는 아기를 안고 가끔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내가 너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마’ 했다. 그러다가 가끔 아이의 두려움이 내게 옮겨오면,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치면 나 역시 크게 울었다. 그러고 나면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안정을 줘야 하는 당신이 내게 이러면 어떡하냐는 듯이.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내 안에 불안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더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을 가다듬지 못하는 엄마인 것이 미안했다.


 

아이가 커 갈수록 아이 뒤의 세상이 비쳐 걱정이 더 커진다. 이제 군대에서의 사고를 봐도, 구조의 모순이 누적되고 누적돼 터져버리는 사건들을 봐도, 비정규직의 안타까운 죽음을 봐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졌다. 그 장애물들이 혹시나 아이의 인생에 드리울까 두렵다. 담담해지려고 호흡을 가다듬어도끔찍한 사고가 연상되는 사회다. 아니, 어쩌면 세상 자체가 그런 것일까. 어릴 적 엄마가 내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딸을 믿으라” 했는데. 엄마가 된 나는 작은 것에도 불안해한다. 부모가 담담하고 담대해야 아이가 굳게 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내 ‘가슴’은 자주 불안을 품는다.


 

■ 한국 사회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 사회에서 그 불안은 교육의 사다리 위로 올라갈수록 증폭된다. “두진이 엄마는 영어 안 시켜요?”라는 말을 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내 눈빛도 흔들릴 것이다.


 

친정엄마가 “다른 애들은 이것저것 많이도 하던데 학습지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실 때 “일곱살이 무슨 학습지예요”라고 대답하지만 주변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사교육 시장의 소비자가 됐다는 사실에 나도 불안하다. 초등학교에 가면 본격적인 선행 사교육 시장이 열릴 텐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초등학생이 되면 어차피 경쟁에 노출될 텐데 유치원 때까지는 그냥 마음껏 놀게 하고 싶다”고 대답해왔는데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시기가 온 것이다.

 

 

숫자 개념을 몰라도 ‘423탄’까지 이어진 책을 만든 아이. 책 내용을 설명하며 상상을 펼친다.

 

얼마 전 동네에서 첫째 유치원 친구 엄마를 만났다. 그는 이미 첫째 딸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보낸 ‘선배 엄마’다. 그는 내게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한글은 다 읽어야 하고 100까지는 셀 수 있어야 하며 10 이하의 숫자를 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학교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한글책을 몇 권 사주는 것 말고는 한글 공부를 시킨 적이 없는 나는 불안해졌다.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붙잡고 ‘숫자 놀이’를 하자고 재촉했다. “두진아 숫자 세보자. 엄마가 먼저 셀게. 일!” 아이는 놀이인 줄 알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이!” 100을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이는 130까지 세고 그만하자고 했다. 그 안도감이란…. 만 3~5세 교육과정을 잘 운영한 유치원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돌봄 공백이 전면화되는 초등학교 1학년
모두들 사교육으로 미리 배우는 구조에서
점점 더 커지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선배 엄마’의 조언이 절대 진실이라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오전 11시40분 하교, ‘돌봄 공백’이 전면화되는 초등학교 1학년. 그 공백을 채우는 것에 이제 아이 교육까지 더해질 것이다. “보육은 할머니가 해줄 수 있지만 교육은 할머니가 해줄 수 없어”라는 말이 횡행하는 사회다. 학교에 가서 다 배우면 된다고 공교육은 말하지만 모두들 사교육을 통해 미리 배우고 오는 구조에서 점점 더 학년이 올라가면, 중학생이 되면, 입시를 코앞에 두면 어떻게 될까. 나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역할에 학습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업무(?)까지 엄마가 짊어진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떤 포즈를 취하게 될까.


 

■ ‘아빠표 한글’은 없으면서

인기 드라마 <SKY(스카이)캐슬>은 ‘학습 매니저 엄마’가 극대화되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아이의 학습을 컨설팅하고 지원하는 전면적인 매니저의 역할을 도맡는 상류층 전업주부. 그는 전업주부지만 가사노동은 입주도우미에게 외주를 준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만큼은 살아야 하니까!”라며 두 주먹에 힘주는 그는 수십억원이 드는 ‘학습 코디’까지 고용해 딸의 서울대 입성에 매진한다. 그런 그에게 원조 대치동 ‘돼지엄마’(입시 정보나 공부법 등과 관련해 정보력이 뛰어난 엄마)인 시어머니가 말한다. “중심은 엄마인 네가 쥐고 있어야 해.” 아이의 성적이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아이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습을 컨설팅하는 매니저 엄마. 소름 끼친다.


 

‘아빠표 놀이’는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
엄마는 아이의 ‘학습 매니저’가 된다
그저 담담하게 사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드라마 속 아빠들은 하나같이 권위적인 ‘가부장’이다. 짐짓 아이 성적에 ‘쿨’한 척하지만 아이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엄마 탓’을 하는 가부장. 남자들은 거들먹거리며 퇴근 후 옷을 아내에게 건네고 아이 성적에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탓한다. 드라마를 빨려들어가듯 보면서도 뒤끝이 쓰다. 2000년하고도 18년이 지난 세상에서 여성은 여전히 자녀를 백업한다. 가사노동을 외주 줄 수 있는 소득을 지녔어도 공부는 전적으로 ‘엄마 책임’이다. 경쟁이 격화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들이 쓰는 전략은 새치기를 해서라도 자녀를 ‘톱’으로 올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톱’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톱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그 세계에서 추방될 것이다. “네가 나한테 인정받을 마지막 기회야.” 남편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는 그에게 그렇게 말한다.

 

과연 의미 있는 역할인지 의심스럽지만 이 사회에서 엄마는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엄마인가, 사회인가. ‘엄마표 한글’ ‘엄마표 수학’ ‘엄마표 놀이’까지 있지만 ‘아빠표’는 하나도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서 남편과 일을 분배해도 사회가 엄마의 일을 강조하면 결국 내 일이 늘어나는 구조. 공교육의 몫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몫이 되는 구조에서 엄마의 역할은 기이하게 늘어난다. 가사노동을 외주 주거나 기계에 맡겨도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은 이상한 쪽으로 확장되는 사회.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아이의 학습 매니저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의 성적보다는 아이의 관심사에 귀 기울여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떠넘겨진 역할을 혼자 떠안지 않겠다. 남편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가 어떤 흥미와 적성을 지니고 있는지 대화하고 싶다.’ 이렇게 다짐해도 불안이 교묘하게 파고든다. 부모는 그저 한발 앞서 걷는 사람일 뿐이고 세상은 빨리 변하며 아이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것,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힘을 내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 ‘스카이캐슬’ 속 괴물 엄마는 왜 호응받는가

말은 쉽다. 초등학교에 가면 영어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압박에 더 전방위적으로 노출될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이 3학년부터 시작한다 해도 이미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배워오는 시대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잘 모르겠다. 모든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원한다. 그 행복의 모습이 어떤 모양이냐가 다를 뿐이다. 임금 격차가 크고 비정규직을 차별하며 기술직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적다면 당연히 행복의 모습은 더 단조로워진다. <스카이캐슬> 속 엄마들이 호응받는 이유는 이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다양한 행복을 상상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양한 행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은 지속적 대화를 나누는 힘
답을 알지만 선택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는 답을 모른다. 다만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다잡을 뿐이다.

만화 <출동! 슈퍼윙스>에 빠져 있는 첫째는 요즘 매일 슈퍼윙스책을 만든다. 1탄부터 423탄까지 나왔다. 100을 넘는 숫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이가 설명하는 책 소개에서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을 듣는다. "엄마, 남극 세종기지는 있잖아~.” 세계를 여행하는 만화를 보는 아이는 세계를 탐험 중이다. 아이가 어릴 때 마트 문화센터를 다녔다. 소근육 경험을 다양하게 해주고 다양한 놀잇감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취지였다. 독박육아의 괴로움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그 돈이 아깝다. 외부 환경보다 집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첫째는 문화센터에서 자주 위축돼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놀고 싶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고교 교사인 친구가 말했다. “부모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지만 중·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아이들과 대화를 하지 않더라고.” ‘공부 못하면 큰일 난다’는 대화만 하게 되는 구조라면 대화를 피하게 되지 않을까. 정말 중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가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힘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답을 안다. 그러나 답을 선택하기 어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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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했던 마음을 기억한다.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내가 제일 싫어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나는 가끔 내 발끝을 보고 있었다. 화가 나서 오므려지는 발을 뚫어져라 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왜요?”라는 질문은 할 생각을 못했지만 항상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억울했던 작은 마음들.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 장녀. 형제는 내게 그 애뿐이었고 나는 그 애가 가끔 좋고 자주 미웠다. 잠든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을 정도로 예뻐했던 기억도 있지만 싸웠던 기억이 더 많다. 부모님 앞에 서면 늘 나보다 어리고 서툰 그애를 도와줘야했고, 도와주는 나는 칭찬받았지만 먼저 뭔가를 하려고 하는 나는 자주 제지받았다. “동생은 아직 잘 못하잖아. 누나가 도와줘야지.”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일곱 살이 된 첫째를 보면 어린 내가 떠오른다. 엄마가 된 나는 첫째에게 말한다. “동생은 아직 잘 못하니까 두진이가 도와줘야지.” 말을 하고선 마음이 안 좋아지면 따로 꼭 두진이를 불러서 말해준다. “동생이 참 귀찮지? 동생은 원래 그런 존재야. 귀찮은 존재. 엄마도 외삼촌이 얼마나 귀찮았다고. 그런데 동생은 엄마 아빠가 세상에 없을 때도 네 곁에 있어줄 사람이야.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두진이가 그 말을 다 알 순 없을 텐데도 가끔 그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 부모로 살면서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깨닫는다.


 

어린시절 들었던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첫째를 보면 당시 억울함이 떠오르지만
결국 해버린 말 “형이니까 도와줘야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눈사람을 만든 아들들.

■ 둘째를 질투하는 장녀 엄마

‘형아 따라쟁이’ 둘째를 보면 묘한 부러움이 차오른다. 이제 겨우 세 살인 둘째에게 일곱 살 형은 너무 재밌는 선생님이다. 형아가 블록으로 활주로를 만들고 ‘천천히’라고 써놓은 포스트잇을 세 장 붙인 뒤 활주로 끝에 ‘출발’이라고 적어놓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더니 둘째도 옆에서 활주로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설프게 블록을 이어 붙이더니 “엄마, 여기는 이준이 활주로야”라며 웃는 작은 얼굴. 그 모습에 기특했다가도 묘한 부러움이 솟았는데 순간 그 부러움의 정체를 깨닫고 쑥스러워서 혼자 막 웃었다. 세 살 둘째가 서른네 살 남동생처럼 느껴진 거였다. 나의 아기인 둘째를 남동생처럼 생각하고 질투하다니. 모방 대상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따라 할 형제가 있다는 것,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 자신의 선생님이 있다는 것, 엄마 아빠도 해주지 못하는 것을 형이 해준다는 것 말이다.


 

가끔 남편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거 봐, 둘째들은 정말 편하겠다. 저렇게 형아가 하는 것을 따라하기만 해도 되니.” 고등학교 가기 전에 나는 ‘야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그걸 알려줄 언니, 선배가 없었다. 동생은 내 존재 덕분에 편하게 안 사실을 나는 미리 알 방도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을 때 ‘언니나 오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실제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놀잇감을 다양하게 만들어 친구들을 이끄는 편이다. 뽁뽁이를 가지고 소근육 활동을 할 때 둘째가 먼저 친구들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볼까?”라며 머리에도 써보고 얼굴도 가려보고. 친구들이 이준이의 모습을 보고 따라 했다는 어린이집 일기장 기록에 나는 기특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다 형한테 배운 거지, 둘째니까 빠르지!”


 

기질적으로도 첫째와 둘째는 다르다. 첫째는 조심스럽고 주저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둘째는 겁이 없고 자유로운 성격으로 여유롭고 웃음이 많다. 모르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도 “저 세 살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먼저 말 거는 아이.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면서 “또 올게요~”라는 아이. 소아과에 가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나, 코 안 나와”라며 콧물 제거는 오늘 하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하는 아이. 이제 30개월이 된 둘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온다. 첫째는 부끄러워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잘 못했다. 억지로 인사를 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해서 그냥 넘긴 적도 많지만 속으로는 ‘왜 이런 것도 어색해하는 거야?’라며 답답해한 적도 많다.


 

첫째는 온전한 사랑 빼앗긴 것 같아서…
둘째는 사랑을 독차지한 적이 없어서…
엄마인 나는 두 아이 모두에 애잔함 느껴

 

아마 태어난 순서의 차이가 아니라 성격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겁이 많지만 한곳에 서서 오래 사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중력과 관찰력을 가진 첫째와 사교적인 성격의 둘째의 차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 둘이 어떻게 자랄지도 현재로선 전혀 알 수 없다.


 

■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을 때

형제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자라면 좋지만 문제는 항상 싸울 때 벌어진다.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겠다고 다툼을 벌일 때, 처음에는 중재를 시도한다. “두진아, 이준이가 가지고 놀던 거잖아. 이번엔 형아가 양보해.” 아니면 “이준아, 형아한테 나눠줘야지.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하면 어떡해.” 물론 아직 어리니까 중재가 먹히지 않는다. 그럼 결국 “둘 다 하지마.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장난감 가지고 놀 필요도 없어.” 둘 중 하나가 울어야 끝난다. 그때마다 이게 잘하는 훈육인지 헷갈리고 머리가 멍하다. 둘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못하고 있을 때 그제서야 내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이 둘을 낳고 알게 됐다. 첫째는 온전히 부모를 독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단독자처럼 사랑을 독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억이 너무 어릴 적이라 자기 자신에게는 남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장녀였던 나도 이렇게 온전하게 사랑받은 시절이 있었겠구나, 엄마 아빠에게 나뿐이던 시절이 있었겠구나’라는 사실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언제든 모방할 대상이 있어 살기 편한 것처럼 보이는 둘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자가 있어 혼자 사랑받는 시절을 가질 수 없다는 슬픈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가 된 나는 아이 둘을 보면 애잔하다. 첫째는 온전하던 사랑을 빼앗긴 것이 애잔하고, 둘째는 한 번도 혼자서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애잔하다.


 

둘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하면서 곤란할 때, 발끝을 노려보느라고 엄마 아빠 표정을 보지 못하던 어린 시절 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내 억울함에만 집중하느라 부모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제야 나를 기르던 부모님들의 곤란함을 이해하게 된다. ‘그때 꼭 동생 편을 들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님의 마음을 만난다.


 

아이들 중재해보니 부모님 마음 이해돼
“서로 더 사랑한다”는 형제의 애정 공세
삶의 고단함 버티게 하는 힘이자 행복

 

또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가끔은 그때의 나와 화해하기도 한다. 부모 마음을 몰라 오해했던 그때의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어질 때, 곤란했을 부모님의 어깨를 안아드리고 싶어질 때 양육의 균형추를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는다.


 

아이를 낳기 전엔 아이를 낳고 기르면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성숙한 인간이 되려고 생각했는지 싶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내 바닥을 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아이를 기르는 것만으로 좋은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아이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지 못한다고 느낄 때,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대해 너무 가벼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이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볼 때, 아이였던 나를 기르던 부모님의 마음을 돌아볼 때 제법 할 만한 일이었구나 생각해본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 사랑을 경쟁하는 형제

어젯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다 같이 누웠다. 둘째에게 흔한 레퍼토리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물었다. 둘째는 당연히 “엄마”라는 단답을 했다. 그래서 “그럼 아빠는?” 묻자 둘째는 형아한테 떠넘긴다. “아빠는 형아가 좋아해.” 아빠는 그렇게 떠넘겨도 되는 존재인가 보다. 조용하던 첫째가 “나도 엄마 좋아해~”라고 해서 둘째에게 “형아도 엄마 좋대”라고 하니 둘째가 하는 말. “아니야~ 엄마는 내가 좋아해~~”

집 안에서는 나도 ‘슈퍼스타’다. 퇴근만 하면 내게 안겨드는 아이들을 보고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다. “엄마가 아주 슈퍼스타여.” 형제를 키우는 또 다른 재미. 그들은 나에 대한 사랑을 경쟁한다. 작은 아이들이 나를 향한 사랑을 경쟁할 때 “제발 좀 엄마 혼자 있자”라면서도 입은 귀에 걸려 있는 게 아들 둘 엄마의 속마음이다. 아빠가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를 찾는 이 유전자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배안에서 열 달을 살았던 힘일까.

육아와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게 너무 벅찰 때 가만히 생각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퇴근한 나를 맞으러 아이들이 뛰어나올 때, 그리고 아이들을 재운 뒤 잠든 얼굴을 쓰다듬을 때. 다른 순간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구조에 분노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아이를 낳은 사실 자체를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상상한 적도 있다. 다시 태어나 선택할 수 있다면 난 엄마가 되길 선택할까. 답은 너무 빨리 나왔다. 다시 또 엄마가 될 것이다. 태어날 곳을 바꾸거나 직업을 바꾸고 싶긴 하지만.


 

아이들을 기르는 일은 여전히 고되지만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 아이들이 내게 주는 웃음, 아이들이 내게 전하는 사랑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회사와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와 아이 사이에서 양육의 균형추를 잡는 것은 너무 벅차지만 나는 내가 엄마인 것이 좋다. 그래서 좀 균형을 잘 잡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작은 다짐도 생겼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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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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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집밥’이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재료를 사와서 만들면 되지만 내가 만들어도, 남편이 만들어도 ‘집밥’ 맛이 안 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엄마밥’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옆동에 사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세요? 집에 밥 있어요?”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신 지도 만 6년. 뻔뻔해진 것도 딱 6년만큼이다. 엄마는 집에 안 계시지만 집에 가 밥을 차려 먹어도 된다고 해서 남편과 나 둘이 가서 호박 된장찌개와 오징어볶음, 고춧잎나물을 와구와구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전기밥솥에 있던 밥과 냉동실에 얼린 밥을 우리 둘이서 다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결혼 후 집안일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반쪽 인간’이었구나
작은 일 하나까지 엄마가 해주셨구나

 

나는 결혼을 하면서 엄마, 아빠로부터 독립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안일도 별로 안 해봤고 엄마, 아빠 등에 얹혀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쪽 인간’이었다. 내가 반쪽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신혼집에서 나는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며 울었다. ‘엄마가 이런 작은 일까지 다 해줬구나.’ 수건 접기는 그나마 쉬운 쪽이었다. 신혼이어서 찌개도 해먹고 반찬도 해먹었지만 엄마가 해준 집밥 흉내를 내기는 어려웠다. 30년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흉내 내려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지만.


 

신혼 때는 밥을 해먹었지만, 아이를 낳고서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아이 돌보기에 24시간이 맞춰 돌아가던 돌 전, 아이 이유식은 열심히 만들어 먹였지만 내 밥은 대충 먹기 일쑤였다. 그나마 친정엄마가 가져다주시는 반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첫째를 낳고 복직한 나는 아이 반찬을 잘 못 만들어 쩔쩔맸고 둘째를 낳고 복직하면서 배달받는 반찬으로 바꿨다. 일하면서 두 아들을 기르는 우리집에서 아이들 반찬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찬 사먹기’도 금방 끝났다. 아이들이 ‘배달 반찬’을 잘 먹지 않았다. 결국 난 또 엄마에게 반찬을 얻어먹으며 기생 중이다. 여전히 내 임금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다.


 

■ 엄마의 노동, 엄마의 일생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손으로 아이를 기르면서 비로소 나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청소·빨래를 하고 반찬을 만들던 엄마의 하루를. 외환위기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돈도 벌었다. 다만 풀타임 임금노동자로 일한 적이 없을 뿐이다. 엄마는 늘 자신을 ‘솥뚜껑 운전수’라고 말한다. 가끔 엄마가 학원문학상을 받았던 여고생 때, 가계부 일기로 은행에서 상을 받았던 젊은 시절에 대해 묘사할 때 나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우리 엄마가 임금노동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한다. 나처럼 글을 쓰는 일을 했다면, 아마 나보다 잘하지 않았을까?


 

주부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것
여전히 아이들과 나를 돌보는 엄마
나의 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져

 

그 시절은 많이들 그랬다. 생계부양자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돌봤다. 엄마들은 늘 ‘백업’하는 존재였다. 그런 엄마들은 딸을 ‘커리어우먼’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마 자신처럼 ‘백업’하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다행일까. 자라면서 남자와 다르지 않다고 교육받으며 대학을 갔고 겨우 취업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뒤늦게 워킹맘이 되는 것은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면서 뼈빠지게 착취당하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지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는 것이 좋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한번은 지나가듯 말했다. “아빠는 그런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친정부모님에게는 용돈을 드리는 게 그렇더라고.” 자신이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는 뜻이다. 마음이 아팠다. 일평생 아이들을 기르고 가정을 돌본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엄마의 노동을 귀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돌아보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평생 그림자노동을 하며 자기 자신을 귀하게 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 임금노동만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자주 의심했다. 임금노동에 시간을 빼앗겨 막상 내 아이들에게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나의 삶이 과연 ‘진보’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수천번을 생각해봐도 나는 일도 하고 싶고 아이들도 잘 기르고 싶었다. 깨달았다. 이 사회가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문제지, 내가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엄마의 노동에 대해 말한다. “엄마의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엄마가 평생 나를 돌봐준 덕분에 내가 있고 이제는 내 아이들까지 엄마의 돌봄을 받고 있다”고. 또 “내 바이라인은 사실 임아영·두효순 기자라 써야 맞다”고.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일터에서 만든 임금노동의 성취는 온전히 내 것일 수가 없다고 말이다.


 

사적 공간의 일을 귀하게 생각않는 사회
종일 우선순위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하는
엄마의 반찬·집안일은 왜 성취가 아닌가

 

이제 결혼한 지 7년이 됐다. 지난 7년간 남편과 가사노동을 분배하면서 갈등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더 바쁠 때는 내가 남편을 ‘백업’하는 존재가 될까 겁을 먹고 더 악을 쓰고 집안일을 분배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우리 둘 다 ‘소진’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이제야 내가 결혼 전 집안일에 대해 ‘1’도 모르던 ‘반쪽 인간’에서 나아지는 것 같다. 꼭 임금노동을 하는 것만 성취인가? 엄마의 반찬, 엄마의 집안일 스킬은 왜 성취가 아닌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직접 해보고 알게 된 게 또 있다. 흔히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하루 종일 우선순위를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 말이다. 엄마가 음식 만드는 과정을 엿보면 굉장히 정교하다. 국을 끓이면서 샐러드 소스를 만들고 고기를 볶으면서 전을 부치는 과정을 동시에 해내는 일. 맛있게 상을 내려면 완성된 음식을 담는 순서도 중요하다. 엄마는 뭐 하나 대충하지 않는다. 차가운 반찬부터 접시에 담고 메인 반찬을 담은 뒤 밥과 국을 퍼서 먹는다. 그래야 음식이 덜 식기 때문이라는 것을 난 이제야 알게 됐다. 엄마밥을 먹은 지 이제 37년이나 됐는데.


 

주부의 삶은 하루 종일 표가 안 나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수행하는 삶이다. 일평생 그 일을 한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매기고 순서대로 수행하는 작업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아이들을 기르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됐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금노동을 동시에 하면 일의 총량이 늘어나는데 우선순위를 고려해 일의 순서를 배열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집에서는 빠른 일처리가 필요한 것은 내가 맡고 꾸준한 작업이 필요한 것은 남편이 맡는다. 성격이 급한 대신 손이 빠른 나와 성격이 느린 대신 꼼꼼한 남편의 성격대로 자연스럽게 배분됐다. 지난해까지 아이들 기관에 관한 행정 업무를 내가 처리하다가 올해부터는 둘 다 어린이집, 유치원 알리미를 받기 시작했다.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기관에 연락하는 일을 남편과 공유하니 빼먹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남편과 ‘함께’ 육아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의 숙련노동 기록 ‘장모님 레시피’

최근 통계청이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2014년 명목 국내총생산의 24.3%를 차지한다고 평가했다. 시간당 가사노동의 가치는 1만569원으로 3인 가족 기준으로는 연간 2132만원으로 계산됐다. 성별로 보면 1인당 기준 남자는 346만원, 여자는 1076만원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세 배 이상 높았는데 여자가 3배 더 가사노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여자가 가사노동을 3배 더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대가는 지급되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가사노동 평가액 비중이 1999년 20.1%에서 2014년 24.5%로 증가하고, 여자는 같은 기간 79.9%에서 75.5%로 줄었다. 집 안에서 남자들의 노동이 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려 한다. 속도는 너무 느리지만 여성들이 집 밖에 나와 임금노동을 하는 만큼 남성들이 집 안으로 들어와 가정 안의 노동을 분배해야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야 깨달은 엄마의 숙련 노동의 가치
그것이 궁금하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태어난 결과물 ‘장모님 레시피’

 

아이를 낳기 전 난 엄마표 반찬의 비법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야 엄마의 숙련노동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된 나는 ‘엄마의 레시피’가 궁금해졌다. 엄마의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누군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둘이서 엄마의 레시피를 기록하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유튜브 계정 이름은 ‘장모님 레시피’라고 붙였다. 동영상을 뒤져보니 지난해 12월에 미역국 레시피를 올린 게 마지막이다. 호박전과 굴전 요리 과정도 찍어놨는데 아직 올리지 못했다. 게으름을 만회하기 위해 올해 김장 때는 꼭 레시피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동영상을 만들면서 알게 됐다. 엄마는 미역국을 끓일 때 덩어리로 된 소고기를 산다. 보통 잘라진 소고기를 사서 참기름에 볶다가 미역도 볶은 뒤 물을 붓고 끓이지만 엄마는 국물 맛을 깊게 내기 위해 덩어리 고기를 산다고 했다. 푹 삶아서 고기 국물을 우려낸 다음 고기는 식혀서 일일이 찢어 넣는다. 처음부터 엄마가 이렇게 미역국을 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다 제일 맛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 테지. 오늘은 김장할 때 쓸 새우를 사러 강화도에 가셨다. 지난해에는 홍시를 넣었는데 올해는 어떤 실험을 하실지 궁금하다. 언젠가는 꼭 엄마의 레시피 북을 만들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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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어느 토요일 저녁. 20개월이던 둘째와 나 단둘이 집에 있었다. 남편이 방학을 맞은 첫째를 경북 구미 시댁에 맡기러 갔을 때였다. 빨래를 널어야 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둘째가 베란다 문 앞에 와서 문을 닫고 바로 잠갔다. ‘찰칵’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우리집 베란다는 베란다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돼 있다. 겨우 20개월이던 둘째는 문이 잠긴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 앞에 서서 엄마 얼굴을 들여다보겠다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준아, 문 열어야지. 잠그면 어떡해!” 내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지 마는지 아이는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알고보니 며칠 전 형아가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을 때 문을 잠그는 걸 본 것이었다. 일곱 살인 형아는 문을 잠그고 여는 게 능숙하니까 할머니를 가둬놓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20개월 둘째 장난에 베란다에 갇힌 나

아이는 울다가 집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나에겐 온갖 나쁜 상상들이 쏟아졌다

 

유리문 바깥에 아이 혼자 있다는 사실에 나는 ‘패닉’이었다. “이준아, 다시 돌려봐, 문을 다시 돌려봐!” 베란다에서 있는 힘껏 소리치니 아이가 잠금장치를 다시 돌려봤지만 아이 손가락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나중에 돌려보니 잠그는 건 쉽고 여는 건 어렵게 돼 있는 잠금장치였다. “이준아, 손에 힘을 꽉 주고 다시 돌려봐!”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이는 내 표정이 이상한 걸 느꼈는지 ‘잉~’ 하며 울려고 했다. “아냐, 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 침착하게 아이를 다독여야 했다. 그러다 잠시 후 아이가 문 앞에서 사라졌다. 엄마가 나오지 않으니 지쳤는지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 부모는 어떤 존재인가

그때부터였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 밖에다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요! 사람이 갇혔어요!” 어디에 갇히는 일은 나도 처음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아이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는 생각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준아, 이리와, 아가, 이쪽으로 와봐!” 보이지도 않는 아이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겁이 없는 둘째가 식탁 위에 한창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의자를 밟고 식탁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변기 물 가지고 장난 치다가 변기 속에 빠지면 어떡하지.’ 평소라면 하지 않던 상상이 쏟아졌다. 안방 창문을 깨볼까, 창문 밖에 매달려 거실 창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까 별의별 수를 고민했지만 창문을 깰 도구가 없었고 거실 창문으로 넘어가다 내가 1층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요즘 창은 방음이 잘되어서인지 아래층, 위층에서도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겨울이었고 저녁 때라 사람들이 밖에 아예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집은 14층. 단지를 걸어가는 두 사람은 내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냥 지나갔다. 속이 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아이가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셨다. “여기 좀 봐주세요. 사람이 갇혔어요. 아이가 혼자 있어요. 좀 구해주세요!” 나와 겨우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다시 외쳤다. “저희 집 비밀번호가 ****인데요. 좀 열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약 40분 만이었다. 아주머니 덕분에 나는 겨우 베란다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아이고, 아기 엄마가 얼마나 놀랐을꼬”라는 아주머니 말에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힘이 빠져버린 탓이었다. 다행히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는 40분 동안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놀았던 모양이다. 두려움인지, 안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아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무겁고 두려웠다. 엄마라는 자리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가 엄마가 될 깜냥이 되는가 자주 생각한다.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는 인형처럼 예뻐만 해주면 되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아이가 위험해질 때 끔찍한 불안감을 맞대면 ‘이렇게 큰 부담이라면, 부모가 되는 일이 이렇게 무거운 일인지 알았다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고나면 죄책감이 따라온다.

 

무작정 외쳤다 “여기, 사람이 갇혔어요”

다행히 이웃 덕에 나와 아이 안고 펑펑

엄마란 자리,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도토리 줍는 형제들.

 

■ 내게 아이의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다

최근 둘째가 수술을 했다. 간단한 탈장 수술이었지만 진단받고 검사받고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 한 달 넘게 ‘걱정과 조율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 수술의 위험 요인 등을 판단하는 동안 생기는 걱정과 수술로 생겨나는 수많은 ‘가정 행정 업무’를 조율하는 시간. 남자아이들의 경우 100명 중 1명에게 생긴다는 서혜부 탈장 진단을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100명 중 1명이 많긴 하지만 왜 하필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였지만 그다음에 따라온 생각은 ‘아, 할 일도 많은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난 어쩜 이렇게 불경한 엄마인지. 병원을 알아보고 검진을 예약하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피 검사를 하고 소변 검사를 하고 심전도 검사를 하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걱정을 늘어놓자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일을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자. 남편 걱정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다고.”

 

‘나는 어떤 엄마인가.’ 자주 나의 ‘엄마됨’에 대해 생각한다. 엄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고 기질적으로 강한 편이다. 엄살 피우는 것도, 엄살 피우는 것을 보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도 난 엄한 엄마다. 감정을 읽어주는 자상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늘 마음이 급하다. 잘못한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데에도 내가 가진 시간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아이가 수술을 한다는 소식에도 ‘해야 할 일’을 목록화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또 생각했다. ‘나는 어떤 엄마인가.’

 

가끔은, 정말 가끔은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무게가 버겁다. 어쩜 이렇게 여전히 이기적일까. 그러다 천성이 걱정 많은 아이인 첫째에게서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볼 때면 나를 다시 다독인다. ‘아이들을 낳은 건 내 선택이야. 이 아이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야.’ 성스러운 모성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아이를 낳은 이후 계속해서 ‘나’와 ‘엄마가 된 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단숨에 나보다 아이들을 중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냉정한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이들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봐주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이런 나지만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내가 ‘엄마는 맞구나’ 생각이 든다. 아이 수술 과정에서 눈물이 난 건 딱 한 번이었다. 둘째가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작은 오른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을 때까지도 괜찮았다. 수술대에 앉은 아이가 바늘을 빼고 싶다며 칭얼댔지만 칭얼대는 아이 앞에서도 침착했다. “이준아, 수술하고 나면 이제 다시 병원 올 일이 없을 거야.” 수술센터에서는 아이 수술 부위를 표시하고 이름, 생년월일을 확인한 뒤 바로 마취를 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마취약이 들어가면 바로 정신을 잃어서 고개가 꺾이니 엄마가 등을 안아주라고 했다.

 

아이 탈장 수술에도 ‘할 일’ 목록화하며

냉정한 엄마 같다는 생각에 미안하지만

아이가 위급 상황 처하는 건 견딜 수 없어

 

마취약이 들어가던 10여초. 정말 신기하게 아이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이 꼭 감기지 않았다. 실눈을 뜬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언젠가 내 배안에 살던 아이, 왠지 계속 이어져 있던 끈이 잠시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고 나왔는데 자꾸 혼잣말이 나왔다. “눈을 완전히 감겨줬어야 했는데.” 이제 내게 아이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두 시간여의 수술 시간 동안, 베란다에서 나와 아이를 다시 안아보던 순간처럼 다시 아이를 안아보기만을 기도했다. 그저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 엄마도 엄마가 되어간다

이제 엄마가 된 지 만 5년9개월이 지났다. 딱 그 정도만큼 나도 엄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게 될 때, 이제 내 인생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여전히 나는 성격 급한 엄마지만, 가끔은 아이의 일보다 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이제 내 양 어깨에 아이들을 메고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아득할 때도 많다. 아이들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을, 빛나는 순간부터 주저앉는 순간까지 다 지켜봐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겁게 다가올 때면.

 

어깨 위의 아이들 무게 버겁다 느끼지만

어느새 아이의 ‘안녕’만을 바라게 되는

딱 만5년9개월 만큼의 엄마가 되어간다

 

빠른 일처리를 지향하는 나라는 인간에게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육아’라는 일이 찾아왔을 때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정해진 순서대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겨우 50여㎝의 키로 태어난 작은 아기가 온 힘을 다해 내게 의지할 때, 내 24시간을 저당잡히는 것이 괴로웠지만 아이의 웃음 한 번에 괴로움을 날려버릴 때,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가지 않고 엄마인 나에게 매달릴 때, 아프거나 힘들 때면 더더구나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내 몸에 의지하는 어린 것을 보면서 열달간 한 몸이었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내 품은 아이들을 품어안기에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이들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나를 볼 때 딱 5년9개월만큼 내가 나아지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세상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엄마는 언제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편지를 내게 전해줬다. 아이들을 지켜봐주는, 넓은 품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그때의 엄마 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딱 그만큼만 아이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엄마가 항상 뒤에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도 엄마가 된 지 10년이 지나면, 20년이 지나면 조금씩 더 넓어지겠지, 아이들도 그런 엄마에게 조금 더 기댈 수 있겠지, 라고 믿어보면서. ‘전적으로 네 편인 사람.’ 엄마가 되고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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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초 여자 선배들이 농반 진반으로 명절 당직을 서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냥 웃었다. 그때는 결혼하지 않았을 때라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냥 시댁에 가기 싫은가보다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내가 결혼을 했고 처음 명절을 보내기 위해 구미인 시댁에 내려갔다. 시댁이 아직 불편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도 구경하고 즐겁게 보냈다. 남편의 이모님들이 놀러오셨지만 잘해주셔서 어렵지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결혼을 실감한 건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내가 서울로 가려는 시간 동생은 늘 그랬듯 서울에서 차례를 지내고 사촌동생들을 만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 내 생각이 났는지 전화를 걸어 사촌동생들을 바꿔줬다. “언니, 보고싶어라는 사촌동생 말에 실감했다. ‘내가 결혼이란 걸 했구나. 이제 사촌동생들을 명절 때 볼 수 없구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명절에 이제 내 친척들을 만나지 못하고 남편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물론 난 시댁이 멀어서 더 그렇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아직도 가부장제가 강하게 작동하는 제도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엔 순진하게 생각했다. ‘나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되겠지.’ 아니었다. 관습이, 인식이, 문화가 그렇게 짜여있는 구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이제 그 가부장제의 틀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만 6년이 된다.

 

결혼 초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남편은 보수적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편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도 농반 진반. “며느리는 새벽 같이 일어나서 시부모님 봉양할 밥을 차려야죠~”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싶어 머리가 띵했는데 남편이 막아줬다. “요즘엔 그런 말하면 장가 못 간다.” 남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어머니는 늘 쉬라고 하셨고 늦잠 자는 습관은 못 바꿔서 시댁에서도 늦게까지 자고 집에서 하던 대로 했다. 시댁에서는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아 그것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설거지는 열심히 했다. 남편은 설거지도 하지 않았지만 설거지 정도야하면서. 그 대신 음식을 하고 챙기는 모든 일은 시어머니 몫이 됐다. 결국 여자 몫이 되는 신기한 구조.

 

이번 추석엔 시부모님이 역귀성하셔서 서울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같이 과천 서울대공원 가서 추억을.

 

 

아니 왜들 그렇게 명절에 시댁 가는 걸 싫어해?” 얼마 전 한 남자 선배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하다가 번뜩 든 생각. “며느리들은 시댁에 가면 이 되지만 사위는 처가에 가도 이 되지 않잖아요.” 선배는 100프로 이해 못 하신 것 같았다. “요즘은 사위도 아니야?” 거기에 덧붙였어야 했다. “며느리들은 시댁에 가면 안 하던 집안일을 더 해야 하니까 싫은 거예요. 요즘은 다들 일하니 집안일은 다 기계에 의존하고 밥도 사 먹는데 명절이라고 전 부치고 설거지하고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남자들은 안 하고 누워있고 쉬어도 되니 역차별로 느껴지는 거죠.”

 

며느리들은 왜 명절을 싫어할까. 시댁에서 이고 발언권이 최하위권이거나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야 할 집안일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연휴면 뭐하나. 쉴 수가 없는데. 시부모님이 아무리 좋아도 이 구조는 바꿀 수 없다.

 

결혼 후 내가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니 친정에 와서 남편도 설거지를 했으면 했다. 사실 어머님이 밥을 다 해주시는데 젊은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게 별것인가 싶기도 했다. 다만 남편도 친정에 와서 집안일을 했으면 했다. 젊은 우리가 부모님을 돕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여자만 돕고 남자는 손님처럼 쉰다는 게 문제니까 함께 하면 간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장벽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사위가 설거지를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다. 사위한테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것. 화가 났다. 가부장제의 화신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바로 우리 엄마 아빠가 사위는 집안일을 하면 안 되고 나는 시댁에 가서 어머님 일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왜 나만. 왜 남편은 아니고.’ 아빠는 계속 사위를 시키느니 본인이 하는 게 편하다고 하셨다. ‘아니 아빠가 엄마와 합동해 집안일을 하는 건 좋게 생각해야 하는 건가싶다가도 왜 남편만 특별대우냐고 계속 얘기했다. 그 생각을 바꾸는데 3년이 넘게 걸렸다. 아빠와 엄마는 동생이 결혼하면 사위와 아들을 같이 설거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유난스러운가. 설거지 하나가 별 거라고. 그러나 관습은 태초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것일 뿐이다. 누군가 괴로운 관습은 바꾸는 게 마땅하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관습도 바뀌어야 한다. 그 관습을 바꾸는 것은 결국 관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드디어 9월 동생이 결혼을 했다. 이제는 남편과 동생이 설거지를 공식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써놓으면 남편이 참 억울할 것 같아서 한 마디. 남편은 집안일 지능이 높아 나보다 뭐든 잘 한다. 참고. ‘왜 가사노동을 폄하하는가’ http://ilovepig.khan.kr/264)

 

동생이 결혼하니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내가 시누이가 된 것.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형님이라니. 동생의 여자친구 입에서 형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놀랐다. ‘언니가 아니고 형님이지.‘

 

호칭도 문제다. 도련님, 형님 같이 시댁에서는 이 왜 붙을까. 이 불균형한 권력이 일상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그것을 극대화해서 체험하게 되는 명절을 싫어하는 것이다.

 

조금더 친해지면 올케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서로 올케,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자.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언니라고 했으면 좋겠다. 불합리한 호칭과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호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의. 며느리는 딸이 아니다. 그냥 며느리는 며느리다. 며느리를 딸처럼 대한다면서 아들한테 시키지 않는 집안일을 시키는 것보다 며느리는 며느리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로 서로 예의를 지키면 된다. 나도 올케에게 그러고 싶다. 서로 예의를 지키고 시간이 지나는 만큼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친해지면 좋겠다. 가족이 되었다고 급히 친해질 수도 없을 뿐더러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편하게 지내도 된다고(주로 위에서 아랫사람에게만 편히 대할텐데) 하는 것은 허구다. 사람이 친해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조금씩 친해지는 만큼 서로 평등했으면 좋겠다. 거창한 평등은 아니고 내 발언권만큼 올케의 발언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올케의 발언권이 집에서 꼴찌가 되지 않게 챙겨주고 싶다. 물론 이런 마음만큼 잘 될지는 내 스스로를 지켜봐야겠지만. 하하.

 

시댁에서 내가 정말 가족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도 이 발언권이었다. 내가 내 생각을 자유롭게까지는 아니어도 많이 말할 수 있게 됐다고 느꼈을 때. 지난 촛불 정국 때 아버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아버님, 종편 너무 많이 보지 마세요했을 때. 아버님이 다행히 하하 웃으면서 "투표권은 나한테 있다" 하셨는데 나도 그 순간 가족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정치와 종교 얘기는 가족 간에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다. 어찌됐든. ㅎㅎ

 

시대가 달라졌고 겉으로는 여자들이 장관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데 왜 아직도 불평등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깨알같이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가 남아 있다. 어떤 가부장들은 착하고 따뜻해 가부장인지도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착한 가부장들의 관습을 바꿔야 모두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착한 가부장의 전형인 우리 아버지가 올해 명절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고 산소에 다녀오시기로 했다. 늦었지만 아빠의 결정을 응원해주고 싶다. 어제 엄마와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갔다가 오늘 외할아버지 요양병원에 가셨다. 엄마가 명절에 귀향한 첫 번째 명절이다. 내년에 엄마가 환갑인데 말이다. 그게 참 마음이 아프다. 일평생 차례를 지내느라 명절에 친정에 가지 못한 우리 엄마. 이제야 친정에 갈 수 있게 됐는데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나는 우리 엄마의 인생을 닮고 싶지 않다. 내 아들들은 이런 틀에 매이지 말고 나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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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혼2년차 2017.10.13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한지 얼마 안됐지만 정말 공감되는 글입니다.
    큰 행운으로 가사일 시키지 않고 차례 지내지 않는 시댁 만나 명절이 괴롭지는 않지만.. 혼자서 다 해나가셨던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친정 어머니도 마찬가지구요..종갓집 시집오셔서 2달에 1번꼴로 제사 지냈던 어린날이 있었네요.) 시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시는 편인데도, 명절 풍경은 여자들만 일을 하고 있는건 여전하네요. 우리 세대부터는 꼭 바뀌어야 할 문화라고 생각해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11.09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꼭 바꿔야 할 문화죠.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제사를 지낸 엄마가 너무 대단해보이고 안쓰러워요. 우리 세대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감, 감사해요.

  2. 현이엄마 2018.05.16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복직 검색하다가 우연히 쓰신 글을 읽게 되었어요.. 어쩜 생각하고 계시는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거와 너무 똑같아요! 저도 왜 시댁에 신랑 남동생은 도련님이고 제 여동생은 처제인건지? 부터해서 ㅎㅎ 뭔가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할때가 많았는데.. 그리고 본인은 돌직구로 말하니까 내가 말하는거에 상처받지 말라고 미리 얘기하시고선 정말로 가끔 말하실때 돌직구 날리실때;가 있으신대 (예를 들면, 제가 싼 꼬마김밥 보고 맛없게 생겼다.그러니 애가 안먹지. 또 고기를 구워줬니? 삶아서주지. 너보난 니 동생이 인상이 더 좋게생기지 않았니 니가생각해도? 등..) 물론 저희 어머님이 저한테 나쁜마음으로 말씀하신건 아니세요 그냥 생각나시는데로 말을 막 하실때가 있는데 듣는 저는 기분이 나쁜거죠..ㅎㅎ 그냥 무튼 글을 읽다보니 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거랑 너무 다 똑같아서 제가 쓴글 같았어요^^ 정말 저도 아들 키우지만 제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해도 큰 관섭없이 살게 하고 싶습니다.

<복직 후 한 달 소진증후군’, 그리고 아빠>

 

어느 새 복직 후 한 달이 됐다. 816일에 복직했으니 정말 한 달. 출근하고 하루만에 감기에 걸려 복직을 실감했다. 심한 감기는 아니었는데 코가 막히고 목이 붓기 시작해 바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실감이 났다. '회사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4주가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평일에는 출근하고 퇴근하고 아이들 재우다 뻗었고 주말에는 각종 집안일을 챙기고 아이들과 놀다가 뻗었다. 한 달이 지나고서야 이렇게 끄적일 시간이 난다. 어제도 애들 재우다 뻗었는데 웬일인지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체력이 관건이다. 출근길 열심히 타지를 체크하고 출근하자마자 아침 보고를 하고 하루종일 보고를 하고 기사를 쓰다 보면 퇴근 시간이 넘어간다. 사실 이 일이 퇴근 시간이라는 게 명확하게 없어서 집에 와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기사를 살펴보고 메일을 체크하다보면 아 내가 복직했구나를 실감하곤 했다. 물론 아직 새로운 담당에 적응을 완전히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한 달 동안 오랜만에 일터로 나와서인지 계속 배가 고팠다. 한 번은 선배랑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고 났는데 양이 부족했는지 혼자 회사 아래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도 빵을 먹는 스스로를 보며 휴직 때보다 체력 소모가 커지긴 했구나싶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니 많이 적응했다. 이제 배가 많이 고프진 않다. ㅎㅎ

 

 

아이들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고 있다. 둘째 이준이는 무던해서인지 엄마가 출근할 때 곧잘 손도 흔들어준다. 복직 첫날 뭔가를 알았는지 서글프게 울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크게 울지 않았다. 자신의 분리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겠지 싶으면 너무 짠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적응을 해야 하니까 이준이도 나도. 그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종종거릴까봐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아직까진 수월하다. 종알종알 말이 많은 첫째 두진이도 잘 적응하고 있다. 물론 엄마 야근하는 거 싫어. 엄마 오늘도 회사 가?” 물어보긴 하지만... 뭐 울고불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걱정은 덜었다.

 

남편의 육아 부담은 늘었다. 아침에 친정엄마가 두 명을 다 등원시키긴 쉽지 않고 해서(첫째 유치원과 둘째 어린이집은 반대 방향에 있다) 남편이 두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한다. 내가 먼저 출근하고 나면 애들 밥을 먹이고 씻겨 옷을 입혀놓고 두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매일 두진이가 유치원에 일찍 안 들어가려고 해서 지각할까봐 뛰어다니느라 전쟁이다. 두진이는 친구들이 없는 유치원 교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매일 유치원 현관 앞에서 늑장을 부린다고 한다. 일찍 들어가게 하는 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데 아침마다 빨리 밥 먹어라, 빨리 들어가라 전쟁 전쟁.

 

제일 고생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리 엄마.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나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신다. 한두 줄 묘사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고생하고 계시겠지. 고등학생인 아들을 친정엄마가 다 키워주셨다는 홍보팀 차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말했다. “제 바이라인에는 언제나 엄마 이름이 숨어있죠.” 더 말하면 울적해지기만 하니까 여기까지.

 

그러다 이준이가 주초부터 장염에 걸렸다. 심하진 않은데 먹을 것을 가려야하다 보니 어린이집에 가기 어려워졌고 다시 아이는 할머니 차지. 엄마가 힘들지 않게 조율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잠시 짜증이 났다. 화가 나는 대상은 없는데 상황에 화가 나는 이상한(?) 상황. 두진이를 낳고 돌아왔던 회사 생활에서도 늘 겪던 일이다. 다행인 건 그때만큼 심하게 화가 나지 않는 것.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회사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다행히 감정 조절은 잘 되고 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슬슬 소진증후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피곤함이 잘 해소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한 달인데.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친정엄마의 헌신 덕분에 일을 하는 고마운 팔자에 일을 제법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긴 노동시간을 당해낼 재간은 없는 건지. 출퇴근 시간 포함해 하루의 절반을 회사를 위해 보내야 하는 일상. 화요일에는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잠시 아득해졌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자꾸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을까. 야근이 끝나고 지하철역을 나와 집으로 걷는 길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가는 수많은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퇴근했을까.’

 

어릴 때 아빠는 평일에 볼 수 없었다. 거의 내가 잠든 뒤에 아빠는 퇴근했고 주말에만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많다. 주말에는 가족이 같이 등산도 했고 점심에 라면도 끓여 나눠 먹었고 목욕탕에 넷이 가서 두 명씩 남탕, 여탕에 들어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래도 주로 남아있는 기억은 방학 때 엄마와 동생과 지내던 기억이다. 아빠는 늘 회사에 있었으니까.

 

그걸 원망했던 적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삶이었으니까. 6일 회사에 투신하고 토요일 오후 늦게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삶.

 

내가 회사원이 되고 나서야 아빠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사회부 경찰팀에서 일할 때 당시 팀 분위기 때문에 징그러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회식 자리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경찰 아저씨(?)를 보며 경찰 아저씨는 이 자리가 즐거울까생각하다가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도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것은 아니었구만요? 고생하셨네요...” 회식 자리에 앉아 있으며 계속 생각했다. 회사 일이라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며 영업도 하고 인간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고민했을 아빠의 삶에 대해.

 

아빠는 은행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다. 그날도 역시 내가 잠든 뒤 퇴근한 아빠가 화장실에서 피를 토했다. 그 소란에 깨서 화장실 타일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놀랐던 어린 나. 과도한 노동, 과한 회식 문화, 과로가 겹친 일이었을 게다. 그 장면은 너무 생생해서 내가 회사원이 된 뒤 소진된다고 느낄 때마다 떠올랐다. 더 슬픈 건 그렇게 소진되도록 부려먹었던 회사가 아빠를 버린 건 40대 중반이었다. IMF 때 명예퇴직한 아빠는 그 후로 20년을 계약직으로 사셨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일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 몰려온다.

 

애써 일이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나는 크게 다른 걸까. 복직 전 이게 제일 두려웠다. 회사 일 때문에 절반이 넘는 시간을 써야하고 주말에만 겨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삶. 그리고 그동안에 소진되어야 하는 쳇바퀴. 나는 엄마와도, 아빠와도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힘들어보였던 엄마, 아빠의 삶을 넘어서기는커녕 어떤 면에서는 더 나빠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한 취재원은 아이가 5살, 2살이라고 했다. 토요일에 아내 생일이었는데 금요일 저녁 약속이 생겨 갈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이 자리를 가지 않으면 멋훗날 내가 그 자리를 갔어야 했는데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이 자리를 나가면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내 생일인데도 새벽에 들어가면서 '이게 뭔가' 싶었다고. 후배는 말했다. "선배 전 일-가정 양립이라는 말도 이상해요. 가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요?" 아... 그러게 말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일 때문에 소진된다는 생각. 소진될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밀려날 수 있다는 생각. 늦게 퇴근하는 축 처진 어깨들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노동시간 단축을 말하는 게 뻔한 답인지 알면서도 멀고 먼 길이라는 게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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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체아 2017.09.16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복직, 아이의 적응, 답없는 상황에 대한 화, 감정 조절, 풀리지 않는 피로, 취직하고 나서 이해할 수 있게 된 아빠, 일을 히는 이유에 대한 끝없는 고민, 일과 가정의 양립, 너무도 분명한 우선순위... 많은 것들이 제가 겪고 느껴왔던 것들과 닮아있어서 마치 제 일기를 보는 것도 같아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과정일거라고 믿고, 첫째때보다는 둘째때가 조금은 더 낫기를 바라고, 나때보다는 내 여동생때가 조금 더 나은 상황이길 바랍니다. 많은 공감을 하고 가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09.28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저도 제 아이들의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요. 어떤 거창한 생각보다 이런 마음들이 모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요. 힘내시고... 연휴 잘 보내시길요.^^

둘째가 돌이 되었다. 형은 돌잔치를 했는데 동생은 지나칠 수가 없어서 돌상을 차리고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그것만 해도 할 일이 넘쳐나 너무 바빴다. ‘... 난 이 집의 집사인가, 매니저인가싶을 때 우울하다. 아이들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니 뭐든지 엄마 손이 필요하다. 밥을 먹어도, 옷을 입어도,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일도. 기저귀를 차는 둘째는 말할 것도 없고 첫째도. 아 왜 이렇게 인간은 무력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인가.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 조금 있으면 걸어(?)다니고 혼자 밥 먹고 자립하던데 왜 이렇게 인간은 모든게 오래 걸리는가. 첫째를 낳았을 때 했던 쓸데없는(?) 의문은 여전히 똑같다.

 

둘째 기저귀를 갈다가 물 달라는 첫째에게 떠다 먹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참고 물을 따라준다. 그 사이 둘째는 안아주지 않는다고 칭얼대고. 내 팔이 여덟 개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내가 세 명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한 명씩 안아주고 한 명은 집안일 하고 책도 볼 텐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오래 한 육아휴직 기간이 끝나간다. 이제 두 달 반 남았다. 첫 번째 휴직 땐 하루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 못 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우울함이 몰려왔다. 동네에서 친구 한 명도 못 만들고 네트워크가 쪼그라들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하루하루 놀이터를 빙글빙글 돌면서 서글펐다. 왜 아무도 엄마 노릇이 이렇게 외롭다고 알려주지 않았나.

 

그런데 두 번째 휴직 땐 친구가 생겼다. 바로 우리 첫째. 6세가 된 우리 집 꼬마가 말을 하면서 하루종일 심심할 새가 없다. 이유식을 만들던 날이었다. 오후에 2시간 정도 싱크대 앞에 서 있느라 첫째가 놀자고 하는데 두 번인가 거절했던가. 밤에 재우려고 누웠는데 괜히 미안해서 두진아, 엄마가 오늘 이유식 만드느라고 레고 같이 못 만들어서 미안해.” 첫째가 대답했다. “괜찮아.” 너무 담담한 대답에 괜찮아?”라고 물으니 첫째는 말했다. “엄마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 말을 듣곤 눈물이 죽죽.

 

첫째는 로맨틱하기도 하다. “엄마 주머니에 하트가 있어.” “?” 내 주머니에서 첫째의 작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이 작은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아 남편보다 로맨틱한 아들. 이러니까 아들 키우면 연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는구나 싶다.

 

돌잔치 때 찍은 전문가 버전 형제 사진.

 

말하는 아이와의 상호작용이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다. 종알종알 떠드는 꼬마의 입술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갑자기 평화로워진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런 평화로움을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자주 우울했고 자주 불안했고 화를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아이는 그런 나를 조금 달라지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불안한 지지대가 되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이한테 제일 많이 해주는 말은 괜찮아. 두진아, 넘어져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조금 다친 건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등등. 그러다 보면 나도 괜찮아지는 기분.

 

어제 둘째가 내 팔을 물었다. 이가 여섯 개 난 둘째는 가끔 세게 문다. 악 소리가 나서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첫째에게 엄마 너무 아파엄살을 부리니 괜찮아, 엄마라면서 토닥토닥 해준다. “엄마 안아줘 두진아하니까 작은 팔로 엄마를 안아준다. 아이의 작은 팔에 안길 때면, 아이가 내 목을 끌어안을 때면 왜 그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뭉클해서일까. 이제 엄마를 위로할 수 있게 된 첫째, 그리고 돌 갓 지난 둘째. 아들들을 안고 있으면 그 품 안의 세상은 따뜻하다. 따뜻해서 눈물이 난다.

 

물론 이런 말도 한다. 요즘 복직 전 체력 단련으로 근력운동을 하는데 내가 근력운동을 할 때마다 옆에서 따라하는 첫째. 하도 귀찮게 해서 근력운동 동영상을 못 보게 하니까 ? 이유가 뭔데? 왜 못 보게 하는 건데?” 따박따박 따진다. 이제 54개월인데 이유가 뭔데라니... 엄마 말투 따라하지 마라. 매일 엄마 말투를 따라하며 하면 돼, 안돼?”라며 동생에게 훈계하기도... 나중엔 얼마나 따박따박 따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과 하루종일 있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복직이 코앞에 다가오자 걱정이 많이 된다. 난 일과 아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짧아지는 걸 메울 수 있을까. 아니 아이들과 하루종일 있었던 좋았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면 어쩌지...

 

어쩌면 내가 제일 걱정하는 건 마지막에 적은 문장이다. 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면 어쩌지. 이 작은 존재들이 내게 만들어줬던 행복한 순간들이 자꾸 그리워지면 어떡하지. 하루하루 커버리는 이 작은 존재들이 그리우면 어떡하지.

 

부모가 되면 사랑을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했던 부모님보다는 애정을 많이 표현하는 따뜻한 엄마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해줘야지, 자주 안아줘야지, 잘하는 일은 몇 배로 칭찬해줘야지. 그런데 막상 낳아보니 정작 사랑을 받는 건 나였다. 엄마를 향한 맹목적 애정.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따라갈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애정. 내 뱃속에 열 달을 살아서일까. 둘째 돌잔치날 원피스를 입은 내게 첫째가 말했다. “엄마, 너무 예쁘다. 공주님 같아.” 아 누가 날 이렇게 예쁘다고 해줬었나두진이는 엄마랑 결혼할 거야를 입에 달고 산다. “엄마는 아빠랑 이미 결혼했어라고 하면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하겠다고 우긴다. “나랑 다시 하면 되잖아~” 속으로는 나중에 여자친구 생겼다고 엄마는 신경도 안 쓸거 다 안다그러지만 내 입은 늘 웃고 있다.

 

엄마가 사랑을 많이 줘야 아이들이 쑥쑥 크는 줄 알았는데... 사랑을 받는 건 오히려 엄마인 나였다. 아이들에게 받았던 이 무한 애정을 잊을 수 있을까. 이 작은 존재들의 절대적인 애정과 지지, 아이들의 눈에서 발견했던 절대적 애정을 보고 느꼈던 감동과 행복을. 누가 날 이렇게 조건 없이 좋아해줬을까. 어린 시절 엄마? 아빠? 지금 이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날이 오겠지. 이 작은 존재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해줬던 순간 순간.

 

엄마는 항상 내 자신만 소중한 사람이었어. 연애를 해도 내 감정만 소중해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많았지. 그런데 너희들을 낳고 나서 정말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많이 생각했단다. 너희들이 충만한 일상을 누리길, 어려움이 닥쳐와도 굳건하게 맞서고 유연하게 힘들어하길. 일상의 순간순간 평온함이 깃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뭔지 찾을 수 있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다른 사람과 그 좋아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엄마는 그 과정에서 엄마가 실패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함께 할게. 뒤에 있을게.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게. 회사 가서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너희를 생각하고 있을 거야. 미안하고 고마워. 이렇게 부족한 엄마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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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바닥 2017.06.02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마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군요. 아이셋둔 아빠(저)는 아이들 행복하게 되길 희망하다보니 사람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살이를 이야기할때는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되고, 아이들이 좀더 살기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회 참여도 많아졌으니 말이죠~~^^ 이 시대 부모들 모두 화이팅~~

  2. Favicon of https://praguelove.tistory.com 프라하밀루유 2017.06.02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해외에서 18개월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요. 많은 부분 공감이 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었네요.

    외국에 있어서 저만 혼자 유모차 끌고 공원과 놀이터를 전전하는 줄 알았는데, 엄마들은 다 외롭나봐요 ㅠ.ㅠ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06.05 2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요. 엄마들은 외로운가봐요ㅠㅠ 그래도 아이가 크면 친구가 되어주더라고요. 그게 36개월 지나면 급속도로 친구가 되어준 느낌요~~ 18개월이면 한창 힘드실땐데... 기운내세요!!

  3. 조이 2017.06.02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라하님 힘내세요

  4. 도윤맘 2017.06.02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첫째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외롭다는 구절에 공감하며 아 내가 그렇구나 문득 깨달았어요.
    이 밤에 많은 위로를 받고 갑니다.

    글쓴이의 말데로 사랑 받고 있다는 거
    날이 갈수록 많이 느껴요.
    다시 오지 않은 이 타임을 토닥토닥 위로하며
    다시 시작 되는 내일도 힘내요 파이팅❤️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06.05 2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요. 아이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 둘째 보면... 우리 막내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 내가 키우는 마지막 아기...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여유가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

  5. 고마리 2017.06.03 1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너무 아름다우신 두 아드님의 엄마!!
    님처럼 이렇게 견고하고 성숙한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엄마의 아들들은 미래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훌륭한 이 나라의 역군이 되어줄 것입니다.

    저도 엄마가 되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되었지요. 그래서 겁도 없이 셋이나 낳았고 직장다니면서 키우느라 많이 힘들었지만 너무 예뻐서 행복했더랬습니다. 엄마가 자녀에 대한 사랑을 느껴 본 사람들은 최소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거라고...남은 시간들도 아낌없이 사랑하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한 가정 이루시길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06.05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셋을 직장 다니면서... 정말 멋지십니다!! 맞아요. 아이에 대한 사랑을 느껴본 사람들은 최소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거라는 말 공감 백개입니다. 아이의 눈을 보고 그러기는 정말 어려울텐데요.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늙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

  6. 박신혜 2017.06.03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기억하시나요? 서강대에서 같이 수업들었던 박신혜에요.
    저도 10살짜리 딸을 키웁니다.
    정말 와닿는 글이에요^^그래서 아는 척 하고 갑니다^^

  7. 유림아빠 2017.06.03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래요. 애들이 엄마 아빠 사랑을 받으면서 크기도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에게서 받는 사랑과 배움도 정말 많죠.
    좋은 글 감사드려요.

  8. 2017.06.05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재민재희맘 2017.06.09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읽으며 눈물이 죽죽 흐르네요
    공감 공감 대공감 ㅠㅠ
    힘들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육아의 행복과 감사의 에피소드도 있었구나 떠올리게 되네요
    우리 아들들 멋지게 키우자구요♡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7.07.30 14: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고마워요 지혜씨. 1년간 아들들한테 받은 사랑으로 복직 후에 버티게 될 것 같아요. 또 밤에 아들들 안고 자면서 힐링하고. 생각보다 육아가 체질?인가요?ㅋㅋㅋ 우리 아들들 멋지게, 예쁘게 키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