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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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잡자 2021.04.06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식 리딩방 기사 잘 봤습니다 대형 증권회사(ㅋㅇ)의 문어발식 리딩방에 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가 2007년도 부터인것 같아요 정부는 손놓고 있어요 후속기사 꼭 부탁드립니다 불법 사기는 가정을 풍비박산 냅니다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하고 싶다

임아영

토요일 수영 강습에 가는 날이었다. 8세 첫째가 수영을 시작하고 두번째 강습을 가는 날. 원래도 겁이 많은 녀석이라 겨우겨우 설득을 해서 수업을 받기로 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갔던 남편이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데리고서였다. “왜 다시 왔어? 수영 안 갔어?”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영장 앞에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했다. 겁에 질린 아이를 우선 안고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 “괜찮아, 수영 오늘 안 가도 돼.” 그러나 속에서는 ‘왜 이렇게 작은 일에 겁을 내는 거야’ 답답했다. 표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이를 다독였다. 5분쯤 지났을까. 다시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친구가 와 있을테니 한번 다시 가보자. 친구 수영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수영장에 도착해 친구가 수영하는 모습을 봤지만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이가 물을 겁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로 ‘나쁜 생각’도 올라왔다. ‘친구는 가서 잘 하는데 너는 도대체 왜 못하는거야? 그래서 도대체 어떡하려고?’ 어릴 적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이 제일 싫었는데 말이다. 폭발한 건 수학을 가르치면서다. 집중 못하는 게 당연한 8세인데 내 기준은 한없이 높다. “왜 자꾸 딴 곳을 보는거야. 문제를 푸는데 집중하라고.” 내 말이 반복되자 아이는 풀이 죽는다. 풀이 죽은 눈을 보고 있으면 괴롭다. 그러나 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을 한다. 그러다 내 말에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제발 엄마 말에 대답을 똑바로 하라고!” 화를 내고 나면 자괴감이 피어오른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누웠다. “아까 엄마가 화냈을 때 무서웠어?” 아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팔에 기댄 아이의 고개가 움직이자 마음이 아프다.

‘이제 시작인가. 보육의 단계가 끝나고 이제 교육의 단계가 되어서 그런가.’ 사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어른’이 된 나는 아이에게 다칠 어려움을 ‘막고 싶은’ 존재가 됐다. 물론 부모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세상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지만. 어릴 때 엄마는 말했다. “네가 잘 된다면 엄마는 바랄 것이 없어.” 고3 때 독서실에서 밤늦게 오는 나를 보는 아빠는 늘 미안해했다. “힘들어서 어쩌나. 참으란 말 밖에 할 수 없구나.” 그 말들을 듣는 어렸던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자식을 키우며 어떤 불안과 어떤 괴로움을 맞닦뜨렸을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 힘만으로 키우지 못하는 구조에서 남편과 나는 #부모님의도움 을 받아 #양육 을 유지하고 있다. 첫째, 둘째를 #어린이집 에 등원시키고 또 하원시켜 우리 부부의 퇴근까지 아이들을 봐주신 건 ‘내 엄마’였다. 서른이 넘어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유지하기 어려운 생활. 나는 이 구조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부모님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상이 #조부모 도움 없으면 아이를 키우기 힘든데 ‘정말 복 받은 상황’이라 말하기에 그렇다고 체념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는, 여전히 아이와 다름 없이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불쾌하다.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양육을 부부의 힘만으로 할 수 없기에 수반되는 갈등들이 몰아치면 ‘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면 모든게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도 올라온다. 그럴 때 생각한다. ‘서른여덟인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부모님에게 독립하지 못했구나.’ 딸이 위험할까봐 독서실에 데리러오던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열아홉살이었지만 남편이 복직하면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나는 서른여덟이다. 서른여덟인 내가 부모님에게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지원을 받지 않고 버티면 결국 노동시장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은 나이기에 ‘부모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에 이른다.

한국은 ‘가족 자원’으로 버티는 구조다. #가족자원 이 있는 사람은 복받은 자고 가족 자원이 없는 사람은 차별적 상황에 몰린다. 청년이 취업이 어렵고 결혼도 혼자 힘으로 하기 힘든 구조에서 부모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부모는 도대체 아이를 몇 살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내 불안은 거기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면 독립할 수 있는 사회 구조라면 양육이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을텐데. 아이가 수영하는 게 무섭다고 겁을 내는 것이, 아이가 빼기를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이 아이가 혼자 서지 못할까봐 지레 겁 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믿어줘야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다시 사회를 들여다보면 또 두려워진다.

내 부모는 내게 헌신했고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다들 헌신하고 싶어서 헌신하는 것일까. 사회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가족 자원에 의지하는 풍경을 볼 때 두렵다. 그러나 가족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구조가 유지된다면 아마 나도 아이들에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가족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회를 믿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자식과 부모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당위의 문장들로 세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려 한다. ‘아이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안을 동력 삼아 아이에게 헌신하지 않도록 양육의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문장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게 두렵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말해본다.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

황경상

 

“우리를 키우기 싫어서 그런 거지?”

 원래는 요즘 들어 죽어라고 말 안 듣는 녀석들을 곯려주려고 했다. 아내가 진짜 엄마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현관문을 나서면서 “진짜 엄마는 곧 올 거야”라고 거짓 연기를 했다. 잠시 있다가 다시 집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은 안도 반, 야유 반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첫째 녀석이 뱉은 말이 그랬다. ‘요 녀석, 많이 컸네’ 싶다가 뭔가 마음이 찌릿하다.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냐? 키우기 싫어서 그랬다니.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른이 다 돼 가지고도 가끔 아이한테 이렇게 서운하다. “야, 우리가 정말 얼마나 힘들게 너희를 키우는지 아냐”라는 ‘치사빤스’ 같은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한 번은 또 이랬다. 책을 읽어달라고 해서 나름대로 등장인물 각각의 목소리를 살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아이가 그런다. “연기하지 말고 그냥 읽어~” 갑자기 마음이 팍 상했다. 완전히 삐쳐 버렸다. 책 읽는 것도 그만뒀다. “아빠가 나름대로 얼마나 정성들여 읽어주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아이한테 심통을 부렸다. 나는 왜 싸우려고 하는 걸까, 저 꼬맹이들이랑. 다 큰 어른이.

아이들에게 해 주는 것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나는 보상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너희들도 이렇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자꾸만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생각하려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란다. 희생이나 헌신에 보답을 바라는 모습에 더욱 입맛이 아리다. 내가 좋아서, 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아이들인데.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부모님에게 얼마나 서운한 말들을 많이 던졌을까. 고교시절 한 번은 내가 꼭 갖고 싶었던 것(아마 좀 더 나은 성능의 컴퓨터였던 것 같다)을 사 주시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같은 책을 사 모으며 부모님에 이렇게 말했다. “돈 한 번 원 없이 벌어봤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을까.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하루 종일 두 녀석과 함께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막 뽀얗게 씻긴 녀석들과 모기장을 친 침대 위에 누웠다. 마침 점점 저물어가는 여름의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온전히 나에게 기댄 작은 머리통 두 개와 들척지근한 옅은 땀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말 그대로 행복했다. 요 녀석들과 함께 보낸 이 시간이 언제고 그리울 것 같다. 이 달콤함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일을 그저 헌신이나 희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얻는 것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 이야기책을 읽어주면서 농담 삼아 말했다. “아빠는 벵에돔 좋아해, 커서 이거 사줘야 해~” 그러니까 아이가 말한다. “아빠, 아빠는 초코를 좋아하니까 초코 벵에돔 사줄게.” 웃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더 보탤 말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껴안고 한 번 입을 맞춰볼 뿐이다.

조해진의 소설 『단순한 진심』은 어릴 때 철길에서 기관사에게 발견된 뒤 그 집에서 1년 정도를 보내다가 프랑스로 입양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얼핏 보면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 타인일지라도 아주 잠깐이나마 곁을 내어줬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포옹은 누군가를 안으며 동시에 나를 안는 것”이라고 썼다.

물론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일과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일은 다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역시 아이라는 타인에게 곁을 내 주는 일이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오히려 자신의 울타리만 더 크고 공고하게 만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아이를 통해 난생처음 온전히 내 곁을 내 주는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이 세상으로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아이를 낳은 뒤 나와 전의 나를 비교하면, 더 젊었을 때의 나는 더 건조하게 세상을 바라봤고 나를 둘러싼 껍데기는 더 단단했다. 지금은 적어도 아이를 통해서 좀 더 생각한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줬던 사람들, 웃으며 자신의 넉넉한 곁을 내어줬던 사람들의 고마움을. 아이와 함께 살아갈 다른 아이들을, 그리고 나와 함께 늙어갈 그 부모들을.

아마도 부모님은 이미 아셨던 것 같다. 아이를 안고 보듬는 일은 나를 안고 보듬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나아가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곁을 주고 보듬는 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라고.

 

[출처] 부모는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부부 육아 일기] 12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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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보며 웃고 울었던 시간과 바꾸고 싶지 않다

임아영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디나 그렇듯 가끔은 굉장히 지치고 고단하다. 날씨마저 푹푹 쪄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순간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아이들이 나를 맞았다. 그리고 첫째가 내게 묻는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좀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 기분 안 좋은 거 어떻게 알았어?” 어려운 질문인지 대답은 안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아들이라니, 그저 감동할 뿐이다.

끝이 아니다. 씻고나서 소파에 기대서 좀 쉬고 있는데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린다. “뭐해?”라고 물으니 “편지 써”라는 답이 돌아왔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엄마한테 편지 쓴거야?” 아이를 끌어안았다. 기특한 아이야, 기특한 우리 아이야.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엄마 회사는 어때? 회사는 잘 하고 있어?” 아이의 성격대로 공들여 쓴 흔적을 엿보면서 농담으로 답했다. “엄마, 회사에서 별로 잘 못하고 있어.” 어쩌면 솔직한 대답이었다. 오늘의 회사는 내게 힘든 곳이었으니까. 아이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엄마.” 오늘은 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갑자기 명치 끝이 싸해졌다.

첫째 아이가 써준 편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첫째가 좀 늦게 퇴근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고생했어.” 고생했다니. 이제 남편과 나도 서로 쑥스러워서 하지 않는 말을 아이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고마워 고마워 아이야. 이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구나.

 

#육아에 관한 글을 쓰면 가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힘들고 괴롭기만 육아, 왜 하느냐, 절대 안 하겠다”고. 남녀가 불균등하게 #돌봄노동을 하게 되는 구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장시간 노동 문제와 엄마에게 양육 부담을 더 지우는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인데 육아란 곧 괴로움이라 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듯이 육아도 마찬가지다. 괴로움과 환희가 뒤섞여 있다.

 

우리 부부는 첫째를 좀 어렵게 키웠다.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돌 전 첫째는 잠을 한 시간 이상 혼자 자지 못하는 예민한 아기였다. 둘째를 낳고 세상 모든 아기가 첫째처럼 잠을 못 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지 않고) 앉아 있던 둘째가 우리 부부에겐 너무 신기한 존재였다. 첫째가 8세가 된 지금에서야 겁이 많은 아이라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첫째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둘째를 낳았다.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첫째가 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첫째가 어린이가 되어가는 속도를 내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둘째를 낳으면 다시 아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30대 후반이 되면서 가끔은 ‘내 30대는 육아를 하느라 지나간 것 아닌가’라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그럼 아이들이 없던 시절이 그립느냐고 하면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서른에 결혼해 서른하나에 첫째를 낳았는데 돌아보면 아이들을 낳고 난 뒤의 나는 훨씬 편안해졌다. 엄마가 된 이후의 내가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보다 좋다. 물론 육아의 구조에 분노할 때는 많았지만. 그것은 구조에 대한 분노지 아이들에 대한,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이제 첫째가 8세, 둘째가 4세. 아이들을 몸으로 부대껴 키워야 하는 시기가 열 살까지라 본다면 내게 이제 6년이 남은 셈이다. 육아가 끝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그 이후에는 다른 고민들이 커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이렇게 힘든데도 아이들을 낳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가끔 후배들이 #육아에 대해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연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교류”라고. 20대의 연애와도 서른이 되어서 한 결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설명하자는 게 아니다. 다르다는 것. 연애가 달콤쌉싸름한 것이라면 육아는 그보다 훨씬 깊다고 느낀다. 깊게 아름다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고 무얼까.’ 아이들을 길렀던 30대는 내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될 것이다.

 

유전자의 신비일지도 모른다. 내 배에서 나온 나를 닮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란. 어떤 면에선 맹목적이라 헌신적일 수 있고 또 맹목적이라 무모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어떤 존재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했나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존재가 온전하길 기도하게 되는 경험.’ 내게 육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아서 묘하게 서운하지만 그게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지. 자기 위해서 불을 끄고 다같이 누우면 내 오른쪽에 누워 있는 둘째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엄마 어디에 뽀뽀할까? 입술에 해야겠다.” 그리고나서는 입술에 뽀뽀했다가 또 볼에 뽀뽀하고 또 이마에.

 

이렇게 작은 존재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면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뭉클하다. ‘고마워, 두진아 이준아. 언젠가 엄마는 너희들이 엄마에게 사랑을 퍼부어줬던 지금의 기억을 돌려보며 괴로운 한 순간을 나고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엄마에게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줘서. 또 고마워. 많이 웃게 해줘서. 그저 고마워.’ 그러니까 육아가 괴로울 것이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괴로운 것은 사회 구조고 돌봄노동은 고되지만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웃고 울었던 시간과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이 같은 양말을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해

황경상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2049년. 내 나이가 칠십에 가까워진다. 우연히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의 통로를 알게 됐다면 무얼 하고 싶을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사건이 내 삶 속에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 의지대로 바꿀 수도 없고 나처럼 무지한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볼 수 있는 순간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을 것 같다.

하교를 하면서 가방을 들어줬더니 ‘아빠 힘들지 않아?’ 라고 물으며 다시 자기가 들겠다고 나서는 첫째 녀석의 살짝 찌푸린 툼벙한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림책을 읽어주면 책 속의 강아지가 귀엽다며 책에다 얼굴을 비비대는 둘째 녀석의 애교를 보고 싶을 것 같다. 단 10초만의 시간이라도 좋다. 금방 다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요 놈들!’ 하고 볼 한 번 꼬집어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 만약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추억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대답하기 어려웠을 거다.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은 정말 짧다. 담으려고 하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진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나 학교 다닐 때 뭐 기억나시는 것 없어요?” 물으니 이렇게 말하신다. “니 어렸을 적 대구 달성공원에 갔던 거는 기억나는데… 내가 일만 했지, 뭐 했나?”

 

늘 “니가 알아서 다 했지 뭐”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중학교 때는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매일 아침 나를 학교 앞까지 태워 주시고 출근을 하셨다. 추운 겨울, 차에서 나오는 따스한 히터 바람을 쐬며 달콤한 쪽잠을 잤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워낙에 표현이 서툴기도 하시지만, 그때 만약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고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분명 더 풍성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힘은 든다. 아이들은 수시로 변한다. 식탁에 겨우 앉혀서 밥을 먹이려는데 갑자기 ‘똥꼬’가 아프다고 약을 발라달라고 한다. 아침에 웬일로 멀쩡히 혼자서 준비를 잘 하더니, 학교가려고 막 나서는데 갑자기 숙제를 안 했다며 꺼내들어 화를 돋우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제 집 앞 놀이터에서 봤던 지렁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든다. #배변훈련을 하는 둘째는 씻으러 들어갔다가 대변을 다섯 번이나 바닥에 봤다. 닦고 또 닦느라 지치게 만들고 놓고도 낄낄 대며 웃는다.

 

이 변화무쌍한 아이들 앞에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러다가도 “아빠 사랑해~ 아빠 더위?”하면서 잘 맞지도 않는 선풍기 리모컨을 들고 와서 에어컨에다 대고 막 눌러대는 아이를 보면서 뭉클해진다.

 

아이들이 판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빠 판다가 형제 판다를 돌보고 있다.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안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갑작스레 불러오는 한 줄기 바람에, 어쩌다 귀에 들어온 익숙한 멜로디에, 오랜만에 맡은 익숙한 향내에 과거로 순간 이동한다. 나도 가끔 라면을 끓일 때 희게 부풀어 오른 면을 보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괴식’ 말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라면을 면만 따로 끓인 다음에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스프를 뿌려서 주셨다. 의외로 꽤 맛있었다. 지금 다시 해 볼 자신은 없지만. 아버지는 군대에서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세대니, 그런 ‘괴식’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도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준다. 스마트폰에 음식 조리법을 틀어놓고 들여다보면서 주방을 동분서주해 보지만 사실 내가 봐도 맛은 없다. 궁중떡볶이를 했는데 떡이 다 뭉그러져서 첫째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둘째는 기껏 만들어놓은 카레가 맵다며 먹지 않는다. 대충 있는 걸로 먹일까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었더니……. 몹시 속상하다. 그러다 녀석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 너희들도 뭉개진 떡국 떡을 보면서, 카레의 알싸한 후추 맛을 새삼 느끼면서 아빠가 해 준 ‘괴식’을 생각하겠지. 아니, 내가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인지,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시간여행은 보통 시간을 마음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의 시간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내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어쩌면 ‘시간여행’이다.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여행 속에서 아이들의 뺨을 부비며 “뭐 먹고 싶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을 수 있는 이 시간으로 언제 건 다시 돌아오고 싶을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서 종종대고 돌아다니는 녀석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에 담는 것뿐이다. 돌아오지 못할 걸 알기에, 언젠가는 이 모습이 그리워 찾아 헤맬 걸 알기에.

 

[출처] 육아가 괴롭고 힘들기만 한 건 아녜요. [부부 육아일기 10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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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중할 것은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임아영

“그래도 해야지. 안 할거야?”

저녁마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첫째 수학 문제집 때문이다. 8세 첫째는 몸을 베베 꼰다. 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다. 수업 시간에 다하지 못한 숙제를 들고오는데다 담임선생님이 집에서 문제를 매일 풀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기싸움이 시작된다. “할 거야, 안 할 거야?”라는 딱딱한 말에 “할 거야”라는 하기 싫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힘겹게 2~3쪽을 푸는 동안 수 번을 한숨을 참고 나면 아이가 다 푼다. ‘아이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구나.’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풀었다니 정말 잘했다! 우리 아들 최고!” 칭찬을 퍼부어주고 끝난다.

학교를 보내기 직전 나는 아이가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셀 수 있는 것도 기특했는데 막상 초등 1학년이 되니 아이 반에 빼기를 못하는 아이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걱정이 돼서 주변 엄마한테 물었더니 “선행을 하나도 안 해서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초등학생 입학 전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고요?” 거창한 #선행학습이 아니다. 숫자를 세게 하고 한 자리수 덧셈, 뺄셈을 무난하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놓는다는 뜻이다. ‘엄마표 수학’이다. “벌써 보수를 아는 아이들도 있어요.” 담임선생님은 선행을 하는 아이가 많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셨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아이가 처음 #수학익힘책을 숙제로 들고 왔을 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횟수가 늘자 예민해졌다. “왜 수업 시간에 다 못하는 거야?” 아이를 다그치게 됐다. 엄마의 무서운 표정에 아이는 더 긴장했다. 결국 아이는 평소보다 더 답을 찾기 힘들어했다. 대충 풀고 함께 누워서 아이를 재우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다 배우고 와서 쉽게 하는 일을 너는 하나도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구나. 엄마가 무심하게 학교를 보내서 미안하다.’

#유아사교육 시장은 계속 확장 중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동네를 걸으면 판촉 전단지 수 장을 받았다. 뇌를 발달시키는 수학, 골라 읽게 해주는 독서교육, 무슨무슨 한자, 중국어 등등. 무슨 자신감인지, 아이에게 수학, 영어 관련 지식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초등학교 시기로 진입하면 뛰기 싫어도 숨이 가쁘게 뛰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인데 엄마가 너를 ‘학생’이 되기 전부터 괴롭히고 싶지 않다. 놀아라, 맘껏 놀아라. 7세가 마지노선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엄마표 수학을 할 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연습하고 온 것을 우리 아이는 연습하고 가지 않아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 부부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은데 세상이 미취학 아동에게 ‘놀이’를 권하지 않고 ‘학습’을 권하는 게 싫다고 해서 학습을 피하면 결국 힘든 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들 아닐까.

좋은 영어 학원 #레벨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영어과외를 하는 건 꽤 지난 문화(?)라 했다.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만드는 한 어린이집 선생님은 말했다. 오래 사교육에 노출된 6세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겨 왔는데 계속 자유롭게 놀게 해주자 물었단다. “선생님, 공부 언제 해요?” 그 아이는 친구와 장난하다 갈등(?)이 생기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했다. “너 수학 지옥에 빠지고 싶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과연 어떤 어른들인가. 다들 유아 사교육을 하니 어린이집, 유치원도 자유롭기 힘들다 한다. 아무리 놀이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짜려고 해도 부모들이 ‘학습’을 시켜달라고 해서다. 첫째는 #병설유치원을 다녔는데 병설유치원은 #공립유치원이기 때문에 #누리과정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런 교육과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방과후수업을 듣는 아이들 중 영어학원에 가기 위해 2~3시에 학원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취재를 하다 만난 어린이집 원장님, 유치원 원장님들은 ‘도대체 엄마들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시장의 문제일까. 사교육 업체들은 부모들의 불안을 집요하게도 부추긴다. 청년 취업률이 사상 최저인 세상에서,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부모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임금 격차가 큰 사회에서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보통 사람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힘든 구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내 아이만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밀어붙이는 것을 어디까지 나무랄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20년 뒤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부모들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눈 오는 날 자식이 가는 길은 싹싹 쓸어놔야 안심이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부모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교육 업체들을 규제(?)하면 좀 나아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첫째가 5세가 됐을 때 둘째를 낳았다. 조리원 친구에게서 ‘#가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가 다양한 도형을 가지고 놀면서 수 감각을 갖추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6세 아들에게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수업을 해주고 간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내가 묘하게 창피했고 창의력, 수리력 등등 좋은 말로 무장되어 있는 교구 광고를 보면서 너무 사고 싶어졌다. 첫째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며 너무 아이에 대해 무심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죄책감도 올라왔다. 광고에 취하고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자 교구를 구매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몇 달간 선생님이 아이를 가르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어느 날 이 수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5세 아이한테 ‘이등변삼각형’을 가르쳐서였다. 지나가듯 말하는 용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나 어릴 땐 초등학교 때는 선행학습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쯤 이미 중학교 과정을 마친다 한다. 물론 일부 이야기일 테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겁에 질린다.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로 선행을 해야 아이가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우선 이번 여름방학 때는 빼기 연습을 매일매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교육 기관을 다니는 동안 모든 아이들이 선행을 해서 우리 아이가 뒤처지면 어떻게 해야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날 수업을 미리 예습하고 가게 하면 될까. 그정도는 #선행이 아니고 ‘예습’이니 좋은 교육 방법이니까.

이렇게 답이 없는 불안이 올라올 때면 중요한 질문을 떠올린다.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그런 적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나갈 수 있는 아이, 괴롭고 힘든 날이 있어도 따뜻하고 좋은 날의 기억으로 견뎌낼 수 있는 아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에 투항하지 않고 스스로 사고해 세상이 나아지는 방향을 고민하는 아이.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늘어놓고 나면 ‘모두들 #선행학습하는 사회’에 대한 부모로서의 불안은 좀 가라앉는다. 선행을 한다고 저 거창한 단어들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남는 답은 다시 ‘나’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엄마는 둘째를 업고 대관령 목장길을 걷고 있다.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줄 수 있어"

황경상

창문 밖에는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렌지 빛 뿌연 불빛이 듬성듬성 내비치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첫째 아이와 나란히 앉았다. 왠지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앞에는 녀석이 학교에서 가져온 ‘빼기’ 숙제가 있었다. 시계바늘은 벌써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녀석이 안쓰러워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이 있어.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아빠도 어른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늘 공부하는 거 봤지? 공부가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어. 잘 할 수 있지?”

고개는 끄덕였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면서 졸려하는 모양새다. 밤 11시에 우리는 왜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나. 자려고 막 침대에 누웠더니 첫째 아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맞다. 빼기 숙제 있는데…”

그때부터 전쟁이었다. 하기는 싫은데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녀석은 어째야 좋을지 몰라 몸을 비비 꼬았다. 책상에 앉혀서 몇 문제를 풀었는데 계속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 짓을 했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마, 아빠는 숙제 안 해 가도 상관없어.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아빠는 도와주는 거고.” 다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더니 녀석은 눈물을 흘리는지 코를 계속 훌쩍인다. 다시 녀석의 손을 잡고 스탠드 불빛을 켜 주고 앉혔다. “동생 재우고 갈 테니까 하고 있어.”

둘째를 재우고 가보니 의외로 문제를 다 풀어 놓았다. ‘역시, 안 해서 그렇지. 할 수 있어.’ 아뿔싸, 답을 확인해 보니 다 틀렸다. 녀석은 어쨌건 빨리 답을 채우기 위해서 위에 1을 쓰면 밑에 2를 쓰고 하는 식으로 칸을 채워놓은 것이다. 다시 지우고 하나하나 문제를 풀게 했다. 녀석은 졸음이 쏟아지는지 하품을 했다. 윽박질렀다가 달랬다가를 반복했다. 녀석은 겨우 바둑돌을 이용해 이리저리 세어 보더니 칸을 채웠다. “고생했어, 아들~ 얼른 들어가 자!”

처음부터 이렇게 공부하라고 다그쳤던 건 아니다. 이제껏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잘 하지 못한다고 뭐라 한 적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언젠가 첫째는 #한글 쓰기책에다 ‘바 버 보 부 브 비’를 열심히 따라 쓰고 난 뒤 페이지 위에다 ‘80점’이라고 적었다. 왜 80점이라고 적었느냐고 물으니 잘못 쓴 글자들을 가리켰다. 그때 둘째가 바닥에 대소변을 흘려서 정신없었던 나는 “왜 80점이야? 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100점이야”라고 무심결에 말해 주었다. 전쟁 끝에 애들을 재우고 책상 위에 앉아 무심히 첫째가 남긴 책을 보니 ‘80점’에 줄이 쓱쓱 그어져 있고 그 옆에 ‘100점’이라고 다시 쓰여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아이들이란 이렇게 작은 말에도 힘을 얻는구나. 결과보다는 언제나 과정을 칭찬해주자고 결심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저렇게 수학을 어려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자꾸만 소리가 커지고 아이를 다그치게 된다. 육아휴직을 한 목적 중에는 첫째의 1학년 적응을 잘 돌봐주기 위한 것도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교육청에서 1학년 부모 준비를 위한 간담회 행사를 열어서 가 본 적이 있다. 실제 교육현장에 계시는 1학년 선생님과 부모 몇 명이 원탁에 앉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글은 어느 정도 써야 하나, 숫자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나 걱정이 돼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글자는 읽을 수 있을 정도면 되고, 숫자는 10까지 셀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하셨다. 가끔 덧셈, 뺄셈을 어려워해서 1학기가 지나도록 못 따라가는 아이가 있기도 하는데 방학 때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글자도 제법 읽고 숫자도 100까지는 셀 줄 아는 첫째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덧셈, 뺄셈을 어려워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또 그렇게 잘 할 줄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며 학교 운동장에 서 있으면 꼭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이런저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고, 어떤 수업을 듣게 하고 이런 말들이다. 이런 걸 안 시키면 안 되는 걸까, 너무 손 놓고 있는 건 아닌가. 공부 뿐만 아니라 음악은, 미술은, 수영은… 또 어떻게 시켜야 하나. 잠시 아이를 떠올리며 불안해진다. 그 모든 걸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다들 하는데 우리 아이만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 나중에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돼서다.

그러다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너무 못 믿는 게 아닐까. 너무 조바심을 내느라 아이의 잠재력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건 아닐까. 아이의 자신감을 걱정하기에 앞서 나부터 자신감이 없어진 건 아닌지. 곧 방학에 들어가는 아이와 함께 하루 계획을 세웠다. 방학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아빠와 함께 있어야 한다. 수학 연습을 하고 책을 읽고, #그림일기를 쓰고 컴퓨터도 배워 보기로 했다. “아빠는 너를 끌고 밀어줄 수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는 되어 줄 수 있어.” 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아이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둘쨰가 집에서 형이 만든 종이접기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출처]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부부 육아일기 9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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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육아휴직한 뒤 진짜 동지가 됐다

임아영

아이를 낳고서는 주말에도 쉴 수 없다. 늘상 수면 부족이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게는 아이를 돌보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남편과 나는 늘 지친 표정으로 “쉬고 싶다”고 외친다. 물론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엄마, 여기는 도깨비 집이야.” 그림책을 본 뒤 둘째가 스케치북에 알 수 없는 형상(?)을 그려놓고 말했다. “엄마는 무서워”라며 과장되게 말하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엄마,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아이를 낳고 느꼈던 평온함과 환희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물론 아무리 예뻐도 나도 사람이니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예쁘지만, 기쁘지만 엄마도 쉬고 싶어.’ 어떤 무한루프 같은 것일까. #양육의 환희와 양육의 고통은 이어져 있다.

증조할아버지댁에 갔다가 거위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주말 두 아이는 공원에서 킥보드를 탔다. 그냥 유유히 앉아서 킥보드를 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작 36개월인 둘째는 헬맷을 씌우고 무릎, 팔꿈치에 보호대를 해줘도 불안하다. ‘아, 킥보드를 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이가 너무 타고 싶어했다. 킥보드를 타는 둘째를 남편이 따라다녔다. 3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힘들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다. 남편이 힘들어 보이면 양가적 감정이 든다. ‘어쩌나’ 하는 애잔한 감정도 들지만 ‘너도 더 힘들어봐라’라는 못된 생각도 올라온다. 남편의 잘못은 아니다. 세상이 내게 양육의 의무를 더 지라고 말할 때 나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그 화살은 종종 남편에게 간다. ‘남편, 미안해. 그런데 구조에 화를 낼 순 없잖아.’

남편이 둘째를 돌보는 동안 나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첫째를 돌봤다. #초등 1학년인 첫째는 혼자서도 킥보드를 잘 탄다. 문제는 킥보드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 첫째가 공원에서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도 아니고 두발 자전거! 아이는 삼촌이 선물로 사준 자전거에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가 타니 관심이 생겼다.

‘아이의 첫 자전거’는 드라마 속 묘사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어른 남자가 8세 아이 자전거 높이에 맞춰 허리를 구부려 계속 잡아줘야 하는 일.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부모의 체력을 고려해주지 않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보채기 시작했다. 첫째는 집에 있는 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며 씻었으면 좋겠건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접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돌아왔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나도 힘들어.”

남편이 휴직하고 곧잘 하는 말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지러져 있는 거실을 훑어보고 “좀 치우지” 말하게 될 때, 첫째의 #주간학습계획표에 뭔가 빼먹은 게 있을 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 때 남편은 말한다. “나도 힘들어.” 8세, 4세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먹을 것을 흩뿌리며(?) 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올까. 어린이집 준비물을 빼먹고 회사에서 후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왜 남편에게 왜 빼먹었느냐고 되묻게 될까.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이미 소진된 표정이다. “어때? 회사 일이 나아, 육아가 나아?” “회사 일이 낫지”라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올 때 남편과 역할을 바꿔서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남편이 짠해질 때 이상하게도 ‘동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얼마 전 첫째 숙제에 대해 남편과 논의하다가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남편이 다른 것 다 해놔야지. 첫째 초등학교 적응 때문에 육아휴직한 이유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 남편에게 사과해! 애들 때문에 정신 없는 것 알면서.” 그 친구는 전업주부였다. 돌봄을 전담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도 역할을 바꾸고 보니 남편의 상황보다는 나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아, 이런 건 내가 오기 전에 다 해놓지.’ 얼마나 싫어하던 말이던가.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것을 보면서 주변에서 다들 말한다. “경상씨가 참 대단해요.” 그럼 나도 모르게 욱한다. “저는 #육아휴직 두 번이나 했고요. #신생아를 키웠어요.” 그 뒤에는 ‘다 큰 애들 보는 게 뭐가 힘들어요?’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나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신생아든, 미운 네 살이든, 초등학교에 간 아동이든 육아는 고된 일이다. 남편이 육아휴직 하기 전까지 항상 조정하는 것은 나였다. “남편 내가 힘들어, 일을 더 나눠서 해줘.” 울며 사정한 날들도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돌봄노동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안사람’을 위해 회사에서 뛰어와야 한다. 처음에는 ‘그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어?’라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들었지만 퇴근 후 지친 남편의 표정을 보면 ‘서로의 상황을 비교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울던 첫째. 첫째가 덜 울었다면 육아는 덜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서야 남편이 진짜 내 편 같다. 몸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이제 정말 함께 하며 서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햇볕이 뜨거운 날 남편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오래 서 있으면 힘들텐데.’ 둘째는 이제 장난감을 찾을 때도 아빠를 부른다. “엄마가 찾아줄게”라고 하면 “엄마 말고 아빠”라고 말한다. 아빠와의 시간이 쌓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라며 아이들이 매달릴 때 후련하다가도 남편이 짠해진다.

가끔 궁금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함께 회사를 다니고 함께 돌봄노동을 나누게 되면 나는 이전보다 덜 화가 나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내가 힘든 것은 ‘구조’니까. 그러나 남편이 육아휴직하기 이전의 남편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시간이 매우 귀하다고 느낀다.

 

 

매일의 지난함을 함께 통과하는 '동지'

황경상

첫째가 태어나고 한 달 즈음 되었을 때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아내는 아침에 출근한 나에게 방긋방긋 웃는 첫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혼자 갓난쟁이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 좀 나아지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또 왔다. 정말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울기도 했다. 아침에 방긋댄 건 잠깐이고 그 이후로는 내내 칭얼거렸던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가 보니 아내의 안경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행여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홀로 집에 남아있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립감이었을 터다. 육아휴직 시절 아내는 퇴근하는 나를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오는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터다.

처음 첫째를 낳고 나서 아내는 젖 먹이는 것조차 힘들어 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간호사에게 하소연을 하자 간호사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는 원래 그래야 해요.”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는데, 어쨌든 엄마는 그 모든 걸 버텨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어머니에게 나를 처음 낳았을 때도 그렇게 힘드셨냐고 물었다.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애는 하루 종일 울어대는데 젖은 잘 안 나오고 해서 몹시 힘들었고, 울기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산후조리를 돕던 할머니가 산후에 울면 눈이 나빠진다고 해서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지금은 아이들도 많이 컸다. 둘이 놀면 그냥 놔두고 다른 일을 해도 될 정도다. ‘그래, 예전 이 녀석들 어렸을 때보다 지금은 많이 편하지.’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간에 가다가 쉴 수는 없다는 것, 귀찮거나 힘들다고 열 번 중 한 번쯤은 놓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열 번 잘 해도 한 번 못하면 못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언젠가 들었던 잠수함사령부의 모토는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한다”라고 한다. 잠수함은 바다 속에서 아무리 작전을 잘 수행하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바다 위로 나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육아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친다. 매일 해도 한 번을 잘 못하면 인정을 못 받는다. 늘 전쟁하듯이 최선을 다하지만 한 번 삐끗하면 개념 없고 무관심한 부모가 되기 십상이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 등원을 시키면서 감기약을 유치원가방에 넣어두고 깜박 잊은 채 투약지시서를 쓰지 못했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왜 약만 넣어뒀냐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단다. 나는 졸지에 투약지시서도 쓸 줄 모르고 약만 넣어둔 개념 없는 아빠가 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런데 지시서를 안 썼는데 약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지? 첫째가 다른 친구가 약 먹는 걸 보더니 자기도 달라고 했단다. 눈치 없는 녀석.

얼마 전 새벽녘에 빗소리에 깼다가 다시 겨우 잠을 청했는데 아이가 일어난다. ‘아빠 나가자, 나가 놀자’ 아휴, 정말. 죽겠다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아내가 데리고 나간다. 30분인가 눈을 더 붙였을까. 어렴풋하게 아이들과 엄마의 재잘거리는 희미한 소리에 선잠을 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에 몸을 묻고 안락하게 누워있으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잠이 덜 깬 채로 내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대는데 부엌에서는 엄마가 뭔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희미하게 음식 냄새도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면 괜히 안심이 됐다.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그 투닥거리는 소리는 바로 매일 다가오는 일상에 맞서 ‘100번 잠항하면 100번 부상하는’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소리였다는 것을. 귀찮다고, 힘들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내는 소리였다는 것을. 매일 아침 엄마도 얼마나 일어나느라 힘들었을까. 엄마도 이불에 몸을 더 파묻고 누워있고 싶었을 텐데. 엄마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아내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신 장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육아가 온전히 내 영역에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한 번 그 지난함을 생각하게 된다. 잘 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오직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그 일.

아내가 육아휴직을 하던 시절, 불가피하게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고 하면 아내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풀 죽은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 정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데... 놀려고 일부러 늦게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 역시 서운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일 때문에 늦어’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머릿속으로는 다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야속하다. 일을 마친 아내는 집에 와도 파김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어떤 때는 그게 더 낫다는 걸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알게 됐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곁에만 있어도 동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재우고 맥주 한잔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으로 우리는 드디어 동지가 됐다 [부부 육아일기 8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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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풍경들

임아영

엄마와 둘쨰가 함께 걷고 있다.

 

결혼 전 경북 구미에 사시는 시부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러 갔다 돌아오던 길이었다. 6월 초였는데 꽤 더운 날씨였고 기차의 에어컨은 고장나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 준비 과정의 첫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는데 안도했고 편히 쉬고 싶었다. 그때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세 살이나 네 살 정도 됐을까. 아마 그 아이도 더워서 그 괴로움을 울음으로 표현했던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났다. 조그맣게 남편에게 말도 했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단호하고 냉정했던 말투가 기억난다. 연애 중이던 남편은 그 아이의 괴로움보다 내가 더워하는 것을 더 신경쓰던 때였다. 남편도 내 말에 호응하며 우리는 그 아이 부모를 원망했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이 울음에 괴로웠다.

아이를 낳고서 그 장면이 꽤 자주 떠오른다.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 #노키즈존 이라며 급기야 어떤 공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우리 아이들을 거부할 때 그때의 내 냉정했던 말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아이 울음을 못 그치게 하는 거야.” 그 부부는 내 말을 들었을까. 작게 말한다고 했겠지만 아마 마음 졸였을 그 부부에게 이 말이 화살이 되지는 않았을까.

 

아이 울음을 부모가 그치게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마트에서 주저앉아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부모가 훈육할 순 있지만 그 행동을 단숨에 그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들을 낳고서야 알게 됐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귀여운 얼굴에 떼쟁이가 나타났다가 천진함이 나타났다가 다시 떼쟁이가 나타난다. 울음으로밖에 의사를 표현할 줄 모르는 돌 전 아기들, 말을 배워도 아직 표현이 능숙하지 못해 어른들과 소통이 안 되면 떼부터 쓰고보는 세 살 네 살 아이들.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이해하게 됐다. 동물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자기 먹이도 찾아다니던데 인간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모든게 늦는 걸까. 이유를 안다 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물음을 안고 온몸으로 아기를 기르던 #육아휴직 시절 나는 자주 외로웠다. 늘 당당하게 살려고 했지만 아이를 안고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내 자세는 묘하게 수세적이었다.

#임신 했을 때였다. #노약자석 에 앉았다가 한 할아버지에게 대놓고 핀잔을 들었다. “임신했어요”라고 작게 말했지만 억울했다. #임산부#교통약자인데 왜 내가 눈치를 보는가. 그러다 문득 교통약자석 표시를 보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 표지가 보였다. 아, 한 번도 장애인의 #이동권 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었구나. 배가 점점 더 부르면서 뛸 수 없게 되고 뒷짐을 져야할 만큼 허리가 아팠다. 뛸 수 없게 되자 문득 거리에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으로 젠더적 #소수자성 에 몰입했지만 과연 난 얼마나 다른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이 있었던가.

혼자 걸어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쉽지 않다. 언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무법자’들이라 달리는 차가 공포스럽다. 아, 이 도시엔 왜 이렇게 차가 많은 걸까. 미세먼지가 심해질 때 아이들이 기관지염에 걸려 소아과에 가면 평소보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소아과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이 작은 아이들이 도시의 삶이 지속가능한지 묻는 것만 같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의 힘만으로 키울 수가 없어 돌만 지나도 #어린이집 을 다닌다. 면역력이 아직 약한 아이들끼리 감기를 옮기고 또 옮겨 항생제를 계속 먹여야할 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보육의 시기를 거쳐 경쟁이 점점 극심해진다는 교육의 시기로 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줄 알고서도 둘째까지 낳은 나의 배짱은 어디에서 왔는가.

엄마가 되면서 작은 아이의 삶을 다시 살게 된 기분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탐험하며 모든 걸 신기해 하지만 어른이 된 내 눈엔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인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아이가 좀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보통 사람이 안전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에 목소리를 낸다. 물론 뭐 대단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항상 내 어깨 위에 시선을 두고 살았다면 어린 아이들의 시선으로 내려왔다 정도는 말할 수 있을까. 다짐을 해본다. 작은 존재들, 사회가 애써 권리를 모른 척하는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다짐이 발걸음이 되기를.

벤치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들

황경상

10년 넘게 쉬지 않고 회사에 다녔다.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가 있는 서대문, 광화문에서 보냈다. 낮 시간 동안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가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다. 집안일을 책임지는 주부가 됐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취직하기 전 백수 시절의 기운이 잠깐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갔다하다보면 금세 1만 보가 넘어버리는 스마트폰의 만보계를 보면서 ‘아이는 편도지만 어른은 왕복’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 전에 아이를 돌보셨던 장모님께서 정말 힘드셨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보지 못했던 것들도 많이 보인다. 동네 가게 하나하나를 유심히 본다. 어떤 가게가 사라지고 어떤 가게가 생기는지 알게 된다. 이 동네에 산 지 몇 년 만에 이비인후과가 이렇게 가까운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등어 조림 재료를 사려고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여기서는 생고등어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생선을 사기 위해서는 가까운 시장에 가야 했다. 구경꾼이나 들러리가 아니라 직접 물건을 사러 가 본 시장에는 싸고 좋은 물건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살면서 크게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경제적 여건이나 지방 출신이라는 점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랬다. 스스로는 대단치 않다고 여기지만 어쩌다 보니 남성이자 #정규직 직장인, 비장애인이라는 것만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큰 #기득권 처럼 되어 버렸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입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광화문이나 서대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동네에 머물러 있다 보면 한 번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왜 그렇게 길거리에 턱이 많은지. 보도블럭은 왜 그렇게 깨진 것들이 많고 길은 울퉁불퉁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곳이 많은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원망한다. 킥보드, 유모차(자전거) 등 바퀴 있는 탈 것들이 없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한 번씩 그 탈 것들의 바퀴가 턱에 탁 걸려서 아이가 휘청하거나 자빠지고, 내가 밀던 유모차가 꼼짝도 못하고 처박히면 몹시 화가 난다. 도무지 우리 사회의 거리란 곳은 두 발로 걷을 수 있는 성인이 아니면 이동하기조차 어렵게 돼 있다. 또 자전거는 왜 이리 인도에서 레이싱을 하는지.

육아휴직을 하고 보통의 ‘아빠’가 아닌 보통의 ‘엄마’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아마 생에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일도 하게 된다. #육아휴직급여 신청을 하면서 헤매다가 센터에 전화를 해 보고서야 휴직 한 달 뒤부터 가능하고 한 달 단위로 계속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휴직 급여인데, 미리 신청해서 원래 급여가 나올 날짜에 받을 수는 없는 것인지. 또 6개월에서 1년을 휴직하는데 매달 나오는 거라면 왜 그걸 매달 신청하게 만들어놨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휴직을 하면서 둘째 어린이집도 종일반이 아니라 맞춤반으로 바뀌면서 시간제한이 생겼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만 아이를 맡기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그보다 일찍 가거나 늦게 데려오면 추가로 #긴급보육서비스 를 사용해야 하는데 한 달에 15시간만 가능하다. 그래서 아침에는 첫째를 초등학교에 8시55분까지 데려다 주고 난 뒤 9시30분까지 주변을 떠돌면서 시간을 번다. 물론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하면 적절히 긴급보육을 사용한다. 오후에도 첫째 하교 시간과 잘 맞지 않으면 그보다 늦게 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비상시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늘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야 하고 부담이 된다.

 

그런데 주변을 산책하다가 첫째 친구 엄마를 만났다. 그 분도 첫째를 등교시킨 뒤 둘째를 데리고 주변을 배회하고 계셨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가 유치원에서 #방과후과정 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9시 반 전에는 등원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상황인지. 나라에서도 기관에서도 정말 열심히 애쓰고 계시지만 정작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누굴 탓해야 할지 모르는 구멍이 생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뭔지 모를 씁쓸한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내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다. 과연 둘을 데리고 제대로 음식이나 입에 넣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됐지만 다행히 #놀이방 이 있는 식당이었다. 아이들을 놀이방에 들여보내고 음식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한데 뭔가 좌불안석이다. 네 살배기 둘째가 혹시나 놀이방에서 심하게 놀다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여다봤다. 오락기에 빠진 첫째를 보고 있자니 가만히 방치하는 게 죄책감이 든다. 옆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혹시 이렇게 흉이나 보지 않는지 걱정된다. ‘저 봐, 아빠가 아이들을 보니까 저렇게 방치하는구만.’ 어쨌든 식사는 훌륭했고 아이들도 잘 먹어줬지만 아내가 퇴근해서 식당에 데리러 올 때까지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고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렀다.

 

식당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환영받을 때도 많지만 주변의 시선을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다. 괜히 아이들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밥알이라도 바닥에 흘리면 물티슈로 치우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이렇게 #눈칫밥 을 먹으며 아이들을 키워 왔을까. 한 번이라도 이렇게 식당에서 온전히 혼자 스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노 키즈 존’을 쉽게 써 붙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애 데리고 왜 나왔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마도 나 역시도 육아휴직을 해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없던 젊은 시절 내가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우는 아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것처럼.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고, 또 해 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육아는 적어도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 ‘넌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를 걸’이라고 야유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 키우는 게 무슨 벼슬이나 특권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를 키우면서 집에 머물러 있는 일이 결코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거나 주류적인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부분에서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을, 육아휴직을 하면서 정말 몸으로 느낀다.

텃밭에 물 주는 아이들.

 

[출처]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일들 -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7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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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임아영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어젯밤 세 돌이 지난 이준이를 업고 <섬집 아기>를 불러줬다. 여덟살 두진이가 돌 전 아기였을 때 정말 많이 불러줬던 노래였는데. 이준이가 가사를 따라 불렀다. 내 목소리와 이준이의 목소리가 겹쳐지자 문득 두 아이를 업어줬던 날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엄마가 울자 등에 업혀 있던 이준이가 말했다. “엄마 울어? 왜그래?” 그러게. 엄마는 왜 울까. “이준이가 크는 게 아까워서.”

 

이준이가 짐짓 어른스럽게(?)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을 몇 번 해줬던가. 아이의 위로에 이상하게도 더 눈물이 났다.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를 위로해주는 아들이 됐을까? 너무 기특해서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고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준아, 엄마 눈 봐봐.” 어쩌면 이렇게 눈빛이 맑을까. “엄마가 이준이를 정말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섬집 아기>는 이준이보다 두진이에게 많이 불러줬던 동요였다. 돌 전 아기였던 두진이를 키울 때 나는 너무 ‘초보’였다. 아이와 둘이 있는 게 두려웠다. 울어버리는 두진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스스로가 두려웠다. 아기띠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던 두진이는 포대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나를 키울 때 쓰던 포대기. 물론 엄마가 아이를 업듯 아이를 등에 손쉽게 얹은 뒤 포대기로 감지는 못했다. 아이가 졸려 하면 침대에 포대기를 펼쳐놓고 두진이를 포대기 가운데에 눕힌 뒤 침대에 등을 밀착하는 자세로 몸을 뒤로 구부려 아이를 겨우 업었다. 두진이를 키울 땐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이를 업고서 불러주던 노래가 <섬집 아기>였다. 두진이는 이 노래를 불러주면 잠을 잘 잤다. 물론 금세 다시 일어났지만.

 

<섬집 아기>를 부르고 있으면 엄마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했던 초보 엄마 마음이 떠오른다. 요즘 두진이를 몇 번 다그쳤다. “두진아 모르겠어? 두진아 어딜 보는 거야. 두진아 두진아!”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는 빼기를 어려워한다. “두진아 세 개에서 두 개를 빼면 몇 개야?” “한 개!” “그럼 3-2는 뭘까?” “2!”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올라온다. 이래서 자기 자식은 가르칠 수 없는 거라고들 한 건가. 가장 답답할 때는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볼 때다. 아이는 뭐든지 늦다. 느리지만 꼼꼼한 아이라서다.

 

얼마 전에는 ‘ㅏ ㅑ ㅓ ㅕ’를 배우는데 수업 시간에 다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집에서 좀 같이 해보라고까지 했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어 교과서를 보니 사자 그림에 ‘ㅏ’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고 ‘ㅑ’ 부분에 같은 색을 칠하는 거였다. “두진아 왜 색칠 못했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원래도 자기 표현을 많이 하는 아이가 아니다. “두진아 왜 못했느냐고.” 다시 물어도 묵묵부답. 다시 속이 부글부글한다. 한 번 더 참고 물었다. “두진아 대답해야지. 엄마가 물어보잖아.” 겨우 답이 나온다. “다 할 수가 없었어.” “왜?” 바로 다다다 소리가 나올까봐 꾹 참고 다시 물었다. “두진아 그럼 친구들이 색칠하고 있을 때 두진이는 뭐했어?” 두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왜?” 이해가 잘 안됐지만 다시 물었다. “왜 색연필을 보고 있었어?” 두진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떤 색을 칠하면 예쁜지 생각했어.” 아... 그랬구나.

 

아이와 함께 색칠을 다시 했다. 아이는 수업 시간에 못한 사자 그림을 다시 칠했고 나는 그 옆 페이지의 여우 그림을 칠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는 말했다. “아, 힘들어.” 아니 칠하기 시작도 안했는데 왜 힘들다는 거야. “엄마, 다 칠하려면 힘들어.” 같이 색칠을 하면서 알게 됐다. 뭐 하나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색연필을 꾹꾹 눌러 빈틈없이 색칠할 생각하니 손도 아프고 걱정되었던 것. 옆에서 내가 색연필을 뉘여 살살 색칠하자 두진이가 계속 참견했다. “엄마, 그렇게 하면 하얀색이 다 보이잖아.” 아... “두진아 이렇게 칠해도 돼. 그렇게 다 하려면 힘들잖아.” 말하고나서도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해야 하는 아이다. 남편을 닮았다.

 

첫째가 골똘히 글씨쓰기 숙제를 하고 있다.

 

하루는 더하기 빼기를 하다가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너무 화가 났다. “두진아 하지마. 집중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수학도 국어도 안해도 돼!”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고 집중을 오래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다그치고 말았다. 겨우겨우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났다. 이렇게 다그치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나는 효율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군더더기가 있는 것을 참기 힘들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아이다. 수줍음이 많고 느리다. 말이 많지도 않다. 남편을 닮았다는 생각에 가끔은 남편의 답답한 모습과 연결되며 답답하다. 나를 닮은 둘째가 종알종알 떠들고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된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싫었다. 아이에게는 절대 ‘욱’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부모 자식과도 ‘케미’가 있다던데 내가 두진이의 성정을 이해 못하는 엄마인 걸까. 선풍기가 돌아가면 어떤 원리로 선풍기가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아이, 우유를 안 먹으려고 해서 선생님이 “우유를 버리면 물고기가 아파”라고 한 말을 듣고 우유가 어느 관을 타고 버려지는지 생각하는 아이다. 집에서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아이는 3+2를 계산할 때 동그라미 3개를 그리고 2개를 그린 뒤 더했다. “두진아 이렇게 하는 거 누가 알려줬어?” “그냥 내가 했어.” 아이를 믿어줘야 좋은 부모라고 했다. 기특한 아이를 나만 못 믿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급한 게 문제일 수도 있다. 남편이 아이를 자꾸 자기를 닮았다고 규정하지 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이는 그냥 아이다. 첫째는 남편, 둘째를 나를 닮았다며 이미 아이들을 어떤 틀로 규정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식이란 존재는 너무 어렵다. 내가 아닌데 나를 닮은 작은 존재.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존재인데 보살피고 등을 토닥여줘야 하는 존재.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고 세상의 풍파를 잘 헤쳐가는지 뒤에서 바라봐줘야 하는 존재.

 

자책하고 있으니 친구가 말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 하더라고. 그냥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거라고 했어.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아이들이 잘 크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힘내.”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계속 배우는 것은 아마 뒤에서 바라봐주는 존재가 되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법. ‘엄마도 계속 더 엄마가 되어가고 있어. 두진아 이준아, 엄마가 헤매서 미안해. 그래도 조금씩 더 나아질거야. 엄마도 시간이 지나면 더 배울 테니까.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둘쨰가 인형을 안고 잘 보살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황경상

“선생님, 아빠는 맨날 잠만 자요.”

어느 날 큰애가 담임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아마 피곤해서 잠깐 누워있었던 것을 그리 말했나 보다. 육아휴직도 이제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아빠인가보다.

 

가끔은 깜짝 놀라는 일도 있다. 여전히 학교 가는 일에 적응 중인 1학년 첫째는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녀석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있는 모양이다. 지난 번에는 꾸역꾸역 배 아픈 걸 참다가 함께 있던 친구의 엄마가 나한테 전화를 해 줘서 뒤늦게 알게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타일렀다. “아프면 참지 말고 선생님께 얘기하고, 아빠한테 전화를 해 달라고 말씀드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 전화번호는 몰라.” “엄마 전화번호는?” “알아. XXXX에 XXXX” 헉... 아직 아빠 전화번호는 몰랐단 말인가.

 

아빠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에게 ‘만족’이란 없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억울할 때가 있다. 지난번에는 방과후 수업을 내내 서서 참관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실컷 놀려준 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메시지를 보낼 것이 있어 2~3시간 만에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때 첫째가 ‘아빠! 아빠!’ 하는 걸 못 들었나보다. 내가 대답을 안 했더니 녀석이 말한다. “아빠는 맨날 휴대폰만 보고 있어!” “야, 아빠도 뭐 보낼 게 있어 그래!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왜 아빠한테 그래!”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대충 때우려는 것도 아이들은 귀신처럼 눈치 챈다. 언젠가 첫째가 레고로 조립한 장난감 프로펠러를 돌리면서 “이것 봐 잘 돌아가지?” 하고 내게 자랑을 했다. 아마 그때 몹시 피곤했던 나는 아이에게 눈도 안 돌리고 “응, 잘 돌아가네” 그랬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첫째가 말한다. “아빠는 옆에 눈이 달려있어?” 급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 녀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야, 이렇게 아빠가 곁눈으로 봤어, 안 보고 말하는 줄 알았어?” 녀석은 유심히 옆으로 흘기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믿어보겠다는 눈치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자꾸만 다른 아이들과 우리 아이를 비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이 김치나 나물에 밥을 쓱싹 비운다는 얘기를 듣고는 왜 우리 아이들은 손이 이렇게 많아 가는가 하며 한숨을 쉰다. 목이 쉬도록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불러도 밥을 안 먹는 녀석들, 겨우 한 숟갈 떴다가도 먹기 싫은 반찬이라고 게워내 버리는 녀석들. 그러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는다. ‘도대체 니들은 왜 그러는 거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빠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런 질문을 아이들이 할 법도 하다. “다른 아빠들은 말이지, 몸으로 잘 놀아주는데 아빠 너는 왜 그렇게 늘 퍼져 있니? 또 다른 아빠들은 물어보면 차근차근 설명도 잘 해주고, 화도 안 내는데 아빠는 걸핏하면 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니?”

 그렇다. 요즘은 하도 불끈불끈 화를 내서 아이들이 나를 ‘화내는 인간’으로 기억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다. 언젠가는 갑자기 막 매달리는 첫째 때문에 목과 어깨 언저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하냐고 막 뭐라고 했더니 녀석의 입꼬리가 금세 실룩실룩해지면서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눈망울은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반짝거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빠도 아픈 걸 어째. 미안하다!

 

아빠가 왜 이렇게 화를 많이 내냐고? 아이들이 이해한다면, 좀 어렵더라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빠는 지금 너희들의 시간을 배우는 중이라고.

 

아이도 어른과 비슷하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자기의 스케쥴이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당황스러워한다. 뭘 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미리 말해주고 동의를 구한 뒤 움직여야 뒤탈이 적다. 늘 그걸 까맣게 잊는다. 노는 아이를 갑자기 데려와 씻기고, 집에 있는 아이를 갑자기 어린이집에 데려가 부려놓으려고 한다. 아이들이 울고 떼쓸 때면 ‘아차’ 싶지만 늦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날은 다르다. 서운해 하지만 떼쓰거나 울지는 않는다.

 

그것이 늘 어렵다. 머릿속에 아직도 아이들의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른들의 시간에만 맞춰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허겁지겁 윽박지르는 일이 반복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조금만 더 헤아려본다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늘부터 너희들의 시간에 맞춰볼게, 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거다. 또 나는 어른들의, 세상의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닦달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찬찬히, 너희들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을게.

 

어느 날 화장실에서 첫째를 씻기고 있었을 때였다. “아, 좀 크게 해 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안 벌리려는 녀석의 입을 억지로 벌려 칫솔질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아빠! 귀여워!”

 그래,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아주 실패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형제가 킥보드를 타고 있다. 밤이 됐는데도 지칠 줄을 모르는 형제들.

 

 

[출처] 좋은 부모, 그냥 부모 [부부 육아일기 6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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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샤인 2019.06.14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형제맘인데 애들 에너지 못쫒아가죠 ㅎㅎ이미 훌륭한 아빠이세요~ 아이도 어른도 노력하는 모습보다 더 훌륭하다는 의미는 이세상에 없는 것 같아요.

 

 

요리하는 아빠, 설거지하는 엄마

임아영

설거지를 좋아한다.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통 물에 불린 그릇을 수세미로 문지를 때 음식 찌꺼기가 없어지는 게 좋다. 그 다음에는 비누거품이 묻어있는 그릇을 물에 헹궈낼 때 그릇이 다시 빛을 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또 그릇을 말린 뒤에 정리할 때 가지런해지는 게 좋다. 설거지는 내가 집안일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가사노동 을 무척 즐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편이고, 아이 밥을 주로 먹이는 사람도 남편이고, 아이 목욕을 주로 시키는 사람도 남편이다. 참을성을 요하는 일에 나는 치명적이다. 뭐든지 빨리 해내는 것을 즐기는 성격인데다 어떤 일을 해도 들이는 노력 대비 효용을 고려하는 내게 요리, 밥 먹이기는 정말 안 맞는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꾸준하다.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남편은 빨리 시작하고 잘 지치는 내게 “괜찮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금방 지쳐 떨어지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다른 성격은 결혼 후 싸울 때마다 서로를 답답해하는 이유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모든 부부가 그렇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장점이 오래 지내고 나면 단점으로 비춰지는 것은 모든 관계가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밥솥 카스테라.' 힘들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기에 가끔 쿠키나 빵을 만든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한다면 남편은 요리를 좋아한다. 다섯살 때부터 병설유치원에 다닌 첫째는 매달 현장학습을 갔다. 거의 3년간 매달 김밥을 싸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지난 해 유치원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진이가 아빠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아빠가 싸시는 거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의 도시락을 만드는 일도 ‘엄마’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남편의 김밥을 자랑하는 것 같을까봐.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니, 어머님은 어떻게 남편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이 요리를 하고 아이들 밥도 주로 먹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굉장히 많이 하는 걸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몸이 바쁘지만 나는 머리가 바쁘다. 한 가정이 굴러가려면(?)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클 때마다 옷을 사고 매주 먹을 음식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대출 상환 계획을 수립하고 10년, 20년 단위의 재무 계획을 점검하는 것은 모두 ‘내 일’이다. 이제 아이들이 더 크면 아이들 관련 행정(?) 업무가 더 늘어날 것이다. 교육에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고 예산에 따라 학원을 어디에 보낼지 결정하고 실제 학원비를 결제하는 것도 내 일이 될 것이다. 지금도 첫째 피아노학원과 둘째 어린이집 특활비 결제는 내가 한다.

회사 점심 시간에 정신없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가끔 ‘왜 이 모든 일을 내가 다 맡고 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우선순위 에 따라 일의 순서를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획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집안일을 할 때도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한 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일부는 털어서 널고 일부는 건조기에 돌리고 가끔은 청소기도 살짝 돌리는 것처럼, 일을 가장 빨리 하는 법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가사노동의 기획’ 업무를 결혼 이후 계속 내가 맡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둘 다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신혼 때는 우리도 가사노동 배분 문제를 가지고 다퉜다. 그러나 돌아보면 각자 잘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남편은 참을성을 요하는 일로, 나는 기획하는 쪽으로. 이제 사실 누가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지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다만, #보이지않는노동 들이 많다는 것은 알리고 싶다.

 

  다들 가사노동이라 하면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중에서 설거지만 하는 내가 우리집에서는 가사노동을 더 적게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의 총무, 재무 기능을 내가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 가사노동에 이렇게 #비가시적분야 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잘한 노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도 가사노동을 전담했던 #친정엄마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 엄마가 어떤 보이지 않는 노동을 ‘그렇게 많이’ 해냈는지 결혼하기 전까지 잘 몰랐다. 신혼 초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수건을 접는 이런 작은(?) 일도 다 엄마가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아서였다. 어릴 때 남동생은 내 꽃무늬 청바지를 물려 입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아직도 한다. “엄마, 왜 누나 청바지를 입혔어요”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둘째를 낳고 보니 첫째 옷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새 옷을 사주는 게 정말 아깝다(물론 나는 성별이 같은 아들들이지만 남동생은 누나의 꽃무늬 바지가 부끄러웠을테다). 엄마가 집안의 총무부장이자 재무부장(?)으로 어떻게든 아끼려 노력했던 게 이해돼서 가끔은 코끝이 시큰하다.

  평생 제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엄마는 환갑이 된 해에야 명절 차례상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우리 가족은 엄마 환갑을 기념해 난생 처음 추석 때 해외여행을 떠났다. “명절에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니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하던 엄마. 그러나 설 연휴에는 아빠와 남동생 생일이 겹쳐 있어서 다시 요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다시 그리워했다. 싱가포르의 식사를. ‘누가 차려준 밥’을. 엄마는 늘 외식을 아까워한다. “바깥 음식은 비싸기만 하지”라면서. 밥을 차려본 사람이라 사 먹는 밥을 아까워하는 것이다. 재료의 원가가 금방 나오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아니예요 엄마. 엄마 밥이 외식보다 저렴한 건 #엄마의노동력#공짜 여서예요. 우리가 그동안 엄마 밥을 공짜로 먹어서예요. 이 사회가 엄마 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서예요.’

 

 가끔은 거창하게 다짐도 한다. 여전히 빚지고 있는 엄마 밥 뒤에 숨은 노동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싶다고. 우리 모두 비가시화된 노동의 값을 제대로 아는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오늘 저녁은 카레다! 아빠가 겨우 저녁밥을 차려주었지만, 거실에는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다.

 

 

죽지 않는 좀비 같은 너란 녀석, 가사노동!

황경상

육아휴직을 하기 전엔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현관 번호키란 정말 귀찮은 물건이었다. 집에 드나들 일이 정말 많은데 그때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야 하다니. 잠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거나 우유를 사러 갔다 올 때도 예외는 없었다.

 

잉여롭게 인터넷을 들여다보다가 스마트폰을 전자키로 등록할 수 있다는 글을 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스마트폰만 갖다 대면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도구적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현관 번호키가 내 ‘도구 중독증’에 걸려든 셈이다. 몇 번 등록을 시도해봤다. 잘 안 됐다. 우리집 키는 안 되나보다 하고 포기했다. 그 중간에 등록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현재 비밀번호를 몇 번 쯤 대충 눌렀던 것 같다.

 

낮에 일이 있어 아이들을 처가에 잠깐 맡겨두고 저녁 때 집에 들어가려는데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황 서방, 아까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문이 안 열리더라고. 번호가 바뀌었나?”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서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이 번호, 저 번호를 눌러봐도 번호키는 ‘번호가 틀렸습니다’를 내뱉을 뿐이다. 수 년 만에 안 하던 기도도 여러 번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뭘 잘못 만졌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건 분명했다. 결국 번호키를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열쇠수리공 아저씨는 나를 위로했다. “이런 분들 생각보다 많아요. 공부하시느라 정신 없으신 분들이 주로 그러더라고요.” 나는 공부도 안 하는데... 아무런 위로가 안 됐다. 경제적 손실에 정신적 타격까지 한동안 어질어질했다. 육아휴직을 한 뒤 몸을 좀 만들어보겠다고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좀 하다가 팔이 안 굽혀져서 사흘째 팔꿈치에 파스를 붙였을 때도 이런 참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옛날 옛적 컴퓨터 게임 중에 ‘너구리’ 게임이라는 게 있었다. 이 게임은 마지막 판이 끝없이 계속된다. 가사노동이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 판인 줄 알고 깼는데 또 똑같은 스테이지가 다시 나온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또 치울거리가 나오는 #뫼비우스 의 띠와 같다. 실컷 청소를 해 놓고 한숨 돌리면 갑자기 저기서 ‘촤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둘째가 뭘 쏟는 소리다. 그런 단순반복을 좀 줄여보겠다고 번호키를 만졌다가 오히려 된통 당했다.

 

자취생활만 10년에 육박하는지라 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노동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먹은 그릇을 바로 설거지해 놓고, 방에 청소기를 한 번씩 돌리는 일이 당연하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가사노동이 가욋일이 아니라 주된 노동이 되니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사흘에 한 번 설거지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저 ‘어시스트’ 한다는 느낌으로 가끔 하는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매일매일 할 일들이 죽지도 않는 좀비처럼 다시 나타나 내게 손을 뻗는다.

육체노동이 끝이 아니다. 집안일은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다. 거기서도 나는 젬병이다. 학교에 큰애를 데리러 갔다가 시장에 들르자고 마음먹어 놓고는 지갑을 두고 간다. 코를 훌쩍이는 둘째를 데리러 갈 때 약을 꼭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을 타서 약병에 넣어두고는 식탁에 두고 간다. 학교 도서실에 반납기한이 다 된 책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에코백에 넣어뒀다가 현관에 그냥 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덕분에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책을 가져가야 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책을 빌리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비단 집안일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를 갈 일이 있어서 몇 년 만에 세차를 맡기고 보람차게 집에 돌아와 앉으면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전화가 온다. “차 키 안 꽂아두고 가셨어요?” “거기 꽂아놓고 왔는데요.” 당당하게 말하면서 탁자를 보니 차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른 차키를 들고 뛰었다.

 

왜 그럴까 생각도 많이 했다. 심각한 건망증인가? 그냥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걸까? 스마트폰 메모장에 메모도 해 두고 별 짓을 다해봤지만 안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떤 생각에 한 번 빠지면 그 생각만 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외출할 때면 현관을 나가자, 그 생각밖에 못한다. 결국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한 번 주변을 돌아보면서 빠진 것이 없나 상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또 까먹는다. 그래서 안 된다. #육아휴직 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요즘 아빠가 정리하는 걸 보면 옆에서 도와주곤 한다. 고맙다, 아들!

아내에게 타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난들 어쩌겠나. 결국은 아내가 챙겨야 할 일들을 도맡는다. 메모장에 할 일들을 잔뜩 적어놓고 수시로 내게 미션을 수행했느냐고 묻는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으면 아내도 참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힘쓰는# 집안일 은 가급적 내가 하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사노동 분담이 됐다.

 

아마 대부분의 가정에서 보자면 우리는 남녀의 역할이 조금은 바뀐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육아휴직 뒤에는 더 그렇다. 가끔은 약간 서럽다. 퇴근한 아내가 집에 와서 건조기를 열고 아직 꺼내지 않은 빨래를 꺼내서 접으려고 할 때, 마치 내가 할 일을 안 했다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아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나 정말, 하루 종일 논 거 아니라고!’ 아마 많은 #전업주부 들이 남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가사노동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 힘들기 때문에.

 

[출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 [부부 육아일기 5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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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 엄마

임아영


 

두진이를 낳고 #초보엄마 였을 때였다. 엄마 몸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잠을 깨 울어버리는 아기를 두고 집 밖을 나오는 상상을 한 번씩 했다. 그 상상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왔지만.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 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을. 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 주말이면 나도 조금쯤은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면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소리치게 된다.

어느 일요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내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책 읽어줘요.” 첫째는 왼쪽 어깨에 기대고 둘째는 등 뒤에 매달렸다. 24kg이 넘은 여덟살 첫째와 14kg이 넘은 만 35개월의 둘째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 아이들의 살이 무겁고 덥다. 점점 몸무게가 늘어나는 아이들의 몸에 눌리면 아이라도 매우 아프다. 나도 모르게 “그만 좀!”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엄마 갑자기 왜 그래’라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가도 후련하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마도 나 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 말은 삼키고 만다.

엄마가 되고서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엄마 몸에 발 하나라도 닿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는 나를 더듬어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도 푹 자지 못하는 #좀비 가 되어가자 깨달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존재를 달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는 것이구나.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도 했지만 자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아이들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내 안테나가 아이들의 안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 #안고부비고싶은존재들 이 무거웠다가 멀어질까 다시 두려워지는 이 마음. 이 마음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구나.

두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를 잠자리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두진이는 언제쯤 혼자 자고 싶어?” 아직 동생이 어려서 네 식구 모두 함께 자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두진이는 말했다. “엄마, 난 혼자 자기 싫어.” 의존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돼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혼자 잘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항상 같이 자줄 수는 없는 거야.” 두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고학년은 몇 학년인데?” “10학년!” 풋 웃음이 나왔다. “10학년은 없어(웃음).”

이 얘기를 동네 엄마에게 전해주니 그 엄마는 말했다. “고1 때까지 같이 자겠다는 얘기네요.” 순간 변성기의 수염 난 소년이 떠올라 또 풋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소년이 엄마와 함께 잠들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따로 재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 #시간거지 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나마 엄마아빠 품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내게 발차기를 하거나 등 밑에 발 집어넣기 기술(?)을 시전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버려 “제발!” 외친 적도 있지만 잠결에 아이들을 안아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운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깨서 새벽 혼자 운 날도 있었다. 커버리는 게 아까워서. 정말 이상하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버겁고 아깝고 부담스럽고 잃어버릴까 두려운 이 감정 말이다.

얼마 전부터 두진이가 잘 때 팔베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엄마, 불편해.” 팔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베개를 하면 불편하다고 했다. 늘 왼쪽 팔엔 두진, 오른쪽 팔엔 이준이를 장착(?)하고 자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는데. 방전되는 휴대폰이 충전되는 것처럼 90, 95, 99, 100%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내 팔에서 떨어져 혼자 베개를 베고 자기 시작하다니. 허전했다. 팔베개를 하면 불편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였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것이 언제였냐는듯이 나는 그 건강한 신호조차 아쉬워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킥보드를 수리하는(?) 둘째와 그를 코치해주는 첫째

 

그렇게 내 몸에서 분리되길 원했던 아이들은 이제 곧 자기 혼자 설 것이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했던 내 말들이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날들이 곧 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삶이 이런 것인지 잘 몰랐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결이 다른 이 마음. 아이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의 부드러운 볼에 뽀뽀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먼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 것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은 나를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이제야 나는 이 세상에 발딛게 된 기분이 든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연두색 새싹처럼 여리지만 어떤 색깔보다 예쁜 아이들의 유년, 그 #유년 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의 젊음.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인생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은 아빠

황경상

요즘 첫째는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다. <수박 수영장> <메리> 같은 책은 내가 봐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아이와 등교를 하면서 안녕달 작가의 책에 대해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학교 도서실에 보니까 안녕달 아저씨가 쓰신 다른 책도 있더라고~ 이따 빌리러 가자!”

“작가님이 책을 한 권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권도 쓴다고?”

“그럼 작가들은 여러 권을 쓰기도 하지. 안녕달 아저씨도 한 권만 쓰셨을 리가 없지.”

“근데, 아빠. 안녕달 작가님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잖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나는 그림책 작가님을 그냥 남자, 아저씨라고 생각했을까. 안녕달 작가님은 필명을 쓰시는데 책에도 간단한 소개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여성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고정관념 을 단숨에 깨 주었다.

 “아, 맞다. 그래, 그럼 우리 그냥 작가님이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중에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진짜 여성이셨다.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매일매일 배우고 깨닫는다.

집 주변 곳곳에는 형형색색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전에는 그 꽃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봄이 되면 그저 꽃이 피는가보다 싶었다. 아이들은 그런 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자 둘째가 말했다. “아빠, 꽃잎이 아프면 어쩌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들에게는 꽃잎 하나, 풀잎 한 줄기, 나무 한 그루도 다 소중하다. 소중한 것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이름을 알려줘야 하는데 나도 도리가 없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게 포털사이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렌즈 기능이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에 있는 꽃과 유사한 꽃을 백과사전에서 찾아서 보여주는데 제법 정확하다.

 

아이들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된 제비꽃

 

제비꽃, 꽃잔디, 데이지, #애기똥풀 … 나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면 아이들은 이름을 불러보며 즐거워한다. 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도 그저 다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중에 좀 생김새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달라 한다. 사진을 찍어보니 #쥐똥나무 라고 알려준다. 그때부터 이건 사철나무, 이건 쥐똥나무 하면서 구별하면서 다닌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는 작고 동그란 나무 열매를 모으면서 좋아하기에 확인해 보니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천지사방에 떨어져 있어도 이름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바짝 말라버린 나무열매를 땅 속에 심고 있기에 “그건 심어도 싹이 안 나, 이미 씨는 다 날아가 버린 거야”라고 말하자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영혼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만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다시 나는, 이 나이에 배운다.

아이들 덕분에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

 

나무열매를 모으고 만들고 하면서 신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서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또 함께 데리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많이 놀았잖아요. 우리한테는 왜 그래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정말 우리는 밖에서 많이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실내에서 놀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나 놀랍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리자 첫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수줍음이 많은가봐, 내 손으로 안 와.”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아이들의 말들은 정말 잊어버릴까봐 두려워 매일 메모장에 기록하지만 빠뜨린 게 구할이다. 육아를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 예쁜 말이 가슴에 꽂혀 다시 한 번 아이들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마음을 아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매일매일 풀어서 다듬는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배우고 얻는 게 더 많다.

“아들, 오늘도 잘 하고 와!”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첫째에게 소리치자 데리고 있던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들이 뭐야?”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이놈아!”

아직은 가르칠 것도 많지만 말이다.

 

[출처] 부모로 성장한다고 느낄 때 [부부 육아일기 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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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라서 괜찮아

임아영

 

첫 아이가 처음 하는 일은 내게도 보통 처음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에 간다면 초등학교 #학부모 는 처음이듯이. 둘째를 낳고서 알게 됐다. 두번째 경험하게 되면 훨씬 유연해지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둘째를 #어린이집 에 처음 보낼 때도 아이에게 미안하고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첫째 때만큼은 아니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던 날은 정말 펑펑 울었다. 어떤 연애의 끝보다 슬프게. 둘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안쓰러움’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보’라서 어려운 이유는 그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펼쳐진 일이 감당 가능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은 그나마 다행이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아이와 함께 겪어야 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부모가 되고보니 가장 힘든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지난 겨우내 첫째가 초등학생이 된다는 게 걱정스러웠다. 약간 내성적인 아이가 학교 생활을 즐거워할지 걱정됐고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아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3월 한 달을 보낸 결론은 ‘할 만 했다’이다. 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고 나도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들어간 첫 달을 잘 보냈다. 모두 남편 덕분이다. 우리 둘다 초보 부모지만 남편과 내가 일을 분담했기에 가능했다. #아빠육아휴직 을 허락한 회사 덕분이기도 하고 아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한 사회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3월 한 달 각종 학교 행사가 쏟아졌다. 말 그대로 ‘쏟아졌다.’ 3월 4일 입학식부터 학부모 #공개수업, #학부모총회, 1학기 상담, 반 모임까지. 보통 하듯 엄마가 다 소화해야 했다면 나는 3~4일을 휴가내야 했을 것이다. 입학식날부터 5일간 10년 근속휴가를 썼고 학부모 총회 때 반차를 썼다.

3월 둘째주부터 육아휴직한 남편은 입학식을 함께 했고 공개 수업, 상담을 맡았다. 엄마들이 주로 오는 반 모임은 다행히 밤에 잡혀 퇴근 후 갈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갈 수 없었던 어린이집 행사도 남편이 갔다. 지난해 내내 ‘열린 어린이집’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미안했던 둘째에게 어느 정도 만회를 할 수 있었다.

34개월 둘째는 치안센터에 가는 ‘열린 어린이집’ 행사에서 계속 아빠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했다. 회사에 있던 나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치안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둘째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초등학교 입학 때 #경단녀 가 가장 많이 생긴다더니 입학 후 첫 3주간은 학교에서 #단축수업 을 해서 만약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곤란했을 상황이었다. 오후 12시40분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남편은 퇴근 후 내게 말했다. “오늘 1만5000보를 걸었어.” 그 다음날은 “오늘은 2만보 가까이 걸었어.”

남편은 오전 8시40분 두 아이를 데리고 학교-어린이집 코스로 데려다주고 오후 12시40분 첫째 학교에 가서 방과후수업이 하는 시간까지 학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두고 기다리다가 다시 집에 가서 오후 3시쯤 첫째 방과후수업이 끝나면 데려오고 또 오후3시30분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잘 걷지도 못하는 둘째, 호기심 많은 첫째를 데리고 왕복하는 일은 고되다. “그래, OO엄마가 애들은 편도지만 부모는 왕복이라 하더라.”

초등학교를 왔다갔다, 어린이집을 왔다갔다 하는 남편의 모습을 회사에서 상상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아, 내가 육아휴직하는 동안 늘 했던 일인데 뭐 그렇게 힘들어’ 싶었다가 ‘그래도 그때 나도 너무 왔다갔다 힘들었지. 남편도 고생하네.’했다가.

 여러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남편의 눈으로 아이를 볼 수 있게 된 거다. 남편이 첫째 아이 공개수업이 간 것은 처음이었다. 유치원 3년 동안 공개수업은 내가 다 참여했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아이가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수업에 약간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

그러나 남편이 보내준 영상을 보고 거꾸로 나는 아이가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5세 때보다 7세 때보다 많이 자란 아이의 모습을 보고 뭉클했다. “아이는 잘 크고 있어. 유치원 때보다 훨씬 의젓해졌네.” 남편도 내 설명을 듣고 안심했다. 우리는 얼마나 각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가. 남편과 아내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우 뭉클했던 순간도 있었다. 남편이 첫째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돌아와서 상담 내용을 요약한 글을 보고서였다. “내가 간 것처럼 복기해 와야해”라는 말을 들어서였겠지만 남편은 정말 꼼꼼하게 상담 내용을 적어왔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했다.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대화를 잘 해 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남편과 육아를 함께 하려고 노력해왔다. 선생님은 그런 의도로 하신 말이 아니겠지만 그동안의 나와 남편의 노력을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건 해봐야 가늠할 수 있다. 초보 부모 3월 한 달 분투기, 할 만했다. 그러나 남편과 같이 할 수 없었다면 괴로웠을 것이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선생님이 이렇게 적으셨다. ‘우리 이준이가 양치질 시간에 “아빠가 사준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아빠가 준비해 준다고 말했다며 칫솔을 보고 좋아했어요. “엄마는 물통을 사줬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준이가 “아빠는 칫솔을 사줘서 멋져요”라고 하자 선생님이 “엄마는?”하고 묻자 “엄마도 멋져요”라고 말해주었어요.’ 아이의 말에 엄마, 아빠 모두 등장하는 것이 정말 나는 기쁘다. 요즘 퇴근하는 길 예전보다 더 발걸음이 빨라진다. 집에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으니까.

 

퇴근한 엄마 등 위에 올라탄 아이들

 

 

 

‘아빠’라는 작은 히어로

황경상

 

 

“뛰어! 뛰어!”

 아침부터 달린다. 아직 덜 풀린 다리가 진짜 풀려버릴 것 같다. 오늘도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옷도 안 입으려는 두 녀석을 데리고 실랑이를 벌이다 학교로 출발하는 시각이 늦어졌다. 마음이 급한데 터덜터덜 따라오던 첫째가 투정을 부린다.

“아빠, 힘들어~ 천천히 가!”, “네가 준비를 늦게 해서 그렇지! 벌써 50분이야~ 지각하겠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차마 남들 볼까봐 화도 못 낸다. 그저 애써 얼굴을 눌러 펴고 첫째의 등을 토닥인다.

그 와중에 둘째는 온갖 사물에 관심을 보인다. “아빠 저건 뭐야?”, “응, 강아지들을 맡겨두는 곳이야.” 첫째 역시 한몫 거든다. “우와~ 아빠! 여기 피자집이 맥주에 치킨집으로 바뀌었어!” 갑자기 이삿짐을 나르는 차가 눈앞에 보이자 둘째가 소리친다. “와, 사다리차다! 보고 싶어~ 멈춰! 멈춰!” 요즘 사다리차에 푹 빠져 있는 둘째가 가만 있질 못한다.

 처음에는 두 녀석의 손을 모두 잡고 걸어 다녔지만, 하도 내 손을 잡아끌고 제멋대로 다니려고 하는 둘째 녀석 때문에 등교 시간이 고무줄처럼 길어졌다. 뒤에서 미는 세발자전거에 둘째를 태웠더니 속도는 나는데 오르막이나 계단, 턱이 많아 휘청휘청한다. 첫째의 손을 잘 잡아주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허둥지둥 교문에 들어서서 첫째를 학교 현관에서 배웅한다. 내가 멀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하면서 손을 흔들다가 사라지는 녀석의 작은 등을 바라보면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콧날이 시큰해진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학교가 쉽지 않았는지 첫 주에는 열감기에 걸려 결석까지 했다.

두 녀석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오면 잠시의 여유가 생긴다. 많은 분들이 #육아휴직 에 응원을 보내주셨지만, 오전 시간은 잠시 쉴 수 있지 않느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왠지 마음이 더 급해진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눈에 밟히는 것도 많다. 이불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 바닥에 살짝 스쳤더니 시커먼 검댕이 묻어나온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탓이다. 대충 걸레로 닦으려다 잘 닦이지 않아 결국 물청소를 했다.

 

냉장고에는 2018년, 심지어 2016년에 유통기한이 끝난 냉동 생선과 언제 넣었는지 모를 누렇게 변색된 미역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곰팡이가 생긴 떡국 떡과 마늘도 꺼내 버렸다. 화장실 변기에는 솔질로도 잘 닦이지 않는 곰팡이가 석 달째 방치돼 있었다. 사 놓고 넉 달째 먹지 않았던 크림 스파게티 소스가 눈에 띈다. 다행히 냄새를 맡아보니 상하진 않았다. ‘그래, 오늘은 이걸 먹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을 데려와야 할 시간이 된다.

 

보통 아내가 가던 #학부모상담도 내가 가기로 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아내와 상의 끝에 몇 가지를 적어서 스마트폰에 저장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학교 운동장에 서서 몇 번이고 그걸 꺼내봤는데 도통 머리에 남질 않는다. 교실 앞으로 가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입사 면접 이후 이렇게 긴장된 건 처음이었다. 살짝 들여다보니 선생님은 계시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 방해해선 안 될 것 같고… 두어 차례 망설이다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먼발치에서 봤을 때는 다소 엄한 인상이셨는데 가까이서 뵈니 달랐다. 선생님은 따뜻한 눈빛으로 쭈뼛쭈뼛하는 아빠를 맞아주셨다. “나중에 크면 아빠랑 대화를 자주 나누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꼭 아빠랑 상의를 하는 아이들도 있더라고요.” 선생님은 육아휴직을 응원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저도 잘 될 진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아빠가 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쉽지만 쉽진 않다. 처음 3주간은 단축수업을 해서 #방과후 수업까지 중간에 1시간이 비었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1시간을 서 있어야 했는데 좀이 쑤셨다. “1시간 동안 벌 서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한 엄마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봄인데 날씨는 왜 이렇게 추운지, 얇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벌벌 떨었다. “아직까지 롱패딩은 필수라니까요.” 정말 그랬다.

 

첫째가 학교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만든 케이크(?)

 

 

그냥 있기 뭣해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놀이터에 섰다. 어색하게 발걸음을 이리저리 뗐더니 아이들은 나를 ‘적’이라고 부르면서 낄낄대며 도망친다. 아이들에게는 악당을 물리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이다.

좀 신나게 놀아주려는 찰나, 첫째 녀석이 나를 물리친다며 모래를 내 머리에 뿌렸다 흥이 식은 것은 물론 울화가 치밀었다. 온몸에 모래가 다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화도 못 냈다. ‘그러지 마, 인제 아빠 안 해’ 하면서 돌아와 바닥에 털퍼덕 앉았는데 뭔가 창피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훈련이 안 돼 있었던 셈이다. 신문에 나온 육아휴직 하는 아빠들 보면 정말 잘 놀아주던데…….

 기운이 빠지는 것도 오래갈 수는 없다. 아직까지 이 작은 녀석들의 우주에서 내 존재는 비중이 크다.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주면 신나 어쩔 줄 모른다. 둘째에게 아직까지 아빠는 ‘신’이다. 어느 흐린 날 둘째가 말했다. “아빠, 비 못 내리게 해 줘!” “아빠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할 수가 없어.” 녀석은 ‘힝!’ 하면서 발을 구른다.

 

첫째는 컴퓨터로 로봇을 조작하는 아주 기초적인 코딩을 알려줬더니 ‘우와’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두한다. 둘째는 막 피어오르는 새싹을 보여주고 만지게 해 줬더니, 어느 날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싹을 보고 “새싹 예쁘다!”라고 말한다. 장난감 지게차, 소방차를 만들어주면 “아빠 멋지다! 고마워!”를 연발한다.

 

아빠와 함께 로봇 만들기 삼매경에 빠진 첫째

 

그 새싹보다 예쁜 것들을 껴안으며 잠들면 달큰한 냄새가 난다.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잘못 대해 준 게 생각나 내가 아빠가 될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 괜히 감당하지도 못할 아이들을 낳은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작은 손을 잡고 누워있으면 마음이 다시 편안해진다. 손을 잡고 오래오래 걸을 시간이 아직은 많이 남았다.

 

 

[출처] 아빠가 간 학부모 상담! 초등학교 행사가 쏟아지는 3월-4월 처음 부모 분투기 [부부 육아일기 2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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