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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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잡자 2021.04.06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식 리딩방 기사 잘 봤습니다 대형 증권회사(ㅋㅇ)의 문어발식 리딩방에 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가 2007년도 부터인것 같아요 정부는 손놓고 있어요 후속기사 꼭 부탁드립니다 불법 사기는 가정을 풍비박산 냅니다

 

 

남편이 복직했다,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됐다

임아영

9월 1일 일요일 밤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다음날은 월요일이기도 했지만 남편의 복직일, 첫째의 2학기 #개학일, 할아버지 육아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자기 직전까지 남편과 아이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첫째의 2학기 #방과후수업 시간, #돌봄교실 시간, #피아노학원 시간을 표로 정리했고 중간에 둘째 어린이집 하원 시간까지 정리했다. 할아버지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아이들의 활동과 휴식 시간도 고려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묘하게 불안했다.

월요일 오전 7시 남편은 아이들과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또 나는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준비물을 점검했다. 돌봄교실에 가져 갈 색연필과 사인펜은 사지 못해 내일 가져가기로 하고 둘째 #어린이집 이불까지 개켰다. 오전 8시20분이 되자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기 위해 집에 오셨다. 10분 후 다같이 집을 나왔다. 남편과 나는 회사로, 첫째와 둘째는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려다주러.

아이들과 빠빠이를 하며 헤어지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의 바지를 보고서다. 8월 30일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시면서 9월 2일부터 아이들의 등하교(원)를 책임지시기로 했다. 아버지는 첫날 검정색 긴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장은 아닌 것 같은데 정장 디자인으로 나온 등산 바지인가.’ 할아버지가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하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학교, 어린이집에 와서 손주들이 속상해하면 어쩌나’를 걱정하셨다. 여전히 엄마가 데리러오는 아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아빠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라는 게 걱정되셨을 터이다. 하얀색 티셔츠에 정갈한 검정색 바지를 갖춰(?) 입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 걱정 때문인가 싶었다.

첫째에게는 한 번 물어봤다. “2학기가 되면 아빠가 회사를 다시 가고 할아버지가 학교를 데려다주실 텐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싫을 것 같아?” 첫째는 “왜?”라고 오히려 물었다. “다들 엄마가 오는데 할아버지가 오시면 속상할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에 첫째는 “괜찮은데?”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이에게 웃으며 협박(?)했다.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속상해하면 나쁜 거야.” 늘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엄마, 아빠가 할 일을 대신 해주시는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나 다름 없어.”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이가 ‘엄마의 부재’를 속상해할까봐 전전긍긍한다.

하필이라 말하면 안 되지만 하필... 남편 복직 다음날에는 둘째 #어린이집 #참관수업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둘다 참여하기 어려워서 할아버지가 나서시기로 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이집 알림장에 사진이 올라왔다.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웃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보니 뭉클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어색하실까봐 같이 나서신 듯했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얼마나 복 받은 상황이야.” 그래, 맞다. 복받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항상 나는 고맙지만도 않고 미안하지만도 않은, 고마움, 미안함, 죄책감, 사회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맞댄다. 퇴근하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고생하셨지. 안 오던 할아버지까지 오니 엄마, 아빠, 할머니에 할아버지까지 부르셔야 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참관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참여한 부모들을 부를 때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만 불러도 됐을텐데 ‘할아버지’까지 와서 한 사람 더 불러야 했다는 얘기였다.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의 절대적 도움으로 아이를 키우는 ‘복받은 우리 부부’는 다시 #맞벌이 부부로 돌아왔다. 남편은 복직해 정신이 없고 나도 남편이 복직하니 정신이 없다. 남편이야 6개월간 쉬던 회사를 나오니 정신이 없지만 나는 다니던 회사를 다니는데 너무 피곤해 밤마다 뻗었다. 양육 구조를 다시 맞벌이 부부 구조로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헷갈리실까봐 매일 아침 ‘오늘 동선’을 메시지로 전달하면서 깨달았다. ‘다시 외줄에 올라왔구나. 조금만 삐끗하면 떨어지는 외줄에.’ 아무리 친정부모님이 계셔도 남편이 아이들을 돌봤던 육아휴직 시절의 ‘안도’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육아는 우리 부부의 일이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이 아니니까. 묘하게 계속 울적했다. 둘째를 낳고 회사로 돌아온 후 나는 자주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우울감이 또 휘감을까 두려웠다.

내가 꿈꾸는 육아는 내가 출근하며 아이를 어린이집·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퇴근하며 아이를 데려와 저녁을 먹이는 풍경이다. 조부모가 ‘독박 육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조부모가 도와줄 수 없어서 역차별을 받는 가정이 없는 그런 풍경 말이다. 늘 마음 한켠엔 언젠가 어떤 고리 하나라도 문제가 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 생계부양자는 아빠고 돌봄을 담당하는 건 엄마니까. 우리 부부가 서로를 그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우리도 사회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남편과 함께 출근하는 길 짧았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을 오래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과 복직 전날 밤 첫째 방과후수업에 대해 논의할 때였다. 2학기부터 돌봄교실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 돌봄교실 시간과 방과후수업 시간이 겹쳐서 1학기에 하던 방과후수업 중 2개를 빼려고 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보드게임 수업은 두자. 쑥스러움 많은 아이가 친구들과 같이 보드게임 하면서 사회성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더라.” 남편은 1학기 방과후수업 참관을 도맡았다. ‘남편이 내가 보지 못했던 아이의 표정을 다 보고 있었구나.’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이 오래 그리울 것 같다. 다행히 아빠가 회사에 다시 가고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 남편과 내가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육아를 할 순 없지만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어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시대에는 ‘외줄’을 떠올리지 않는 환경이 되길 바라면서.

 

할아버지가 첫째는 학교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황경상

 

“아빠 오늘부터 회사 가는 거야?”

“응~”

“아쉽다.”

거의 반년에 걸친 육아휴직을 끝내고 출근하는 첫날, 학교에 가려고 함께 현관을 나서던 첫째가 말했다.

“회사 가서 잘 하고 와~”

녀석, 훌쩍 컸구나. 괜히 미안했다. 이제부터 데려다줄 수 없다는 사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잘 보살펴 줄 테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이 나도 마음 속 한구석에서 솟구쳤다.

복직하기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 시간들을 나는 잘 보낸 것일까. 아이들에게 나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을까. 휴직을 하면서 결심했던 수많은 다짐들을 나는 잘 실천했나. 자신이 서질 않았다.

첫째와는 함께 만들기도 더 많이 하고 컴퓨터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둘째와는 밖에서 더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렇지만 늘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느라, 빨리 밥을 먹고 씻고 자야 한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목표했던 것에 반에 반도 채우지 못했다. 생활습관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차근차근 설명해서 납득시키기보다는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일이 더 많았다. 나 스스로도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에 조금 남는 시간에는 운동도 하고 책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애당초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렇게 시간이 남을 정도로 녹록지가 않았다.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던 복직의 순간도 닥쳤다.

복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 자리에서 첫째에게 아빠가 육아휴직하고 나서 뭐가 기억에 가장 남았느냐고 물어봤다. 어떤 대답을 할까. 막상 돌아온 대답은 싱거웠다. “양천탐험하고 떡볶이!”

‘양천탐험’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별 것 아니었다. 구청에서 주민들에게 건강을 위한 산책로를 만들었는데, 그걸 알려주기 위해 보도블록에 박아 놓은 표지판을 찾으러 다니는 일이었다. 첫째는 유난히도 그 표지판을 신기해했다. 새롭게 하나를 찾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다.

방학을 한 뒤에는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 하나를 듣고 하굣길에 나와 함께 그걸 찾으러 다녔다.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하나하나 더 찾을 때마다 첫째는 신나서 뛰어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 때로는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걸어야 했지만 첫째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녀석과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 먹었다. 밥 차려 먹기 귀찮아서 먹자고 한 것인데, 첫째는 그것도 몹시 좋아했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는 녀석이 ‘헥헥’하면서 물을 마셔가며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그런 별 거 아닌 일이 녀석에게는 너무나 기억에 남았나보다.

둘째 녀석은 여행 중 머물던 숙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고 나오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수건을 여기에 좀 걸어 놔라~” 아마도 손을 닦을 수건이 없었나보다. 잔망스런 말투에 아연실색했다가 한편으론 흐뭇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당연히 집안일은 아빠가 하는 것이고, 수건도 아빠가 걸어놔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나보다. 헛물켠 셈은 아닌 것이다.

첫째가 인형들 사이에 노트북(?)을 놓고 회사놀이를 하고 있다.

 

두 녀석은 숙소에서 ‘회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숙소 밖 마당에 앉아 있던 나에게는 ‘부장님’의 역할을 맡겼다. 첫째 녀석은 회사에 가는 아빠, 혹은 엄마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둘째 녀석은 집에 있는 아이 역할이다. 둘이서 현관문을 드나들며 열심히 논다. 첫째는 테이블에 장난감으로 노트북 컴퓨터도 만들어놓고 뭔가를 심각하게 두들긴다. “이거 어떻게 하는 놀이야?”라고 묻자 첫째가 답한다.

 “응, 내가 동생한테 회사에 가면서 자고 있으면 들어온다고 하고 회사에 갔다가 그 다음에 동생이 자고 있으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놀이야.”

살짝 말문이 막혔다. 우리 부부가 매일 같이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오늘은 늦게 오는 날이라 자고 있으면 들어올 거야” 하는 말을 녀석들은 잊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와의 시간을 그렇게나 갈구하는 녀석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우리 때는 그런 것을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며 부러워하는 선배들도 계신다. 여건이 안 되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행운이지만, 이대로 육아휴직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뭔가 찜찜하고 아쉽다.

복직 둘째 날, 회식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 녀석들을 보니 왠지 인상이 달라 보인다. 그새 부쩍 큰 느낌이다. 겨우 하루 안 봤는데. 괜히 녀석들의 머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었다.

 

아빠의 복직 직전 휴가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바다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출처] 아빠의 육아휴직이 끝났다 [부부 육아 일기] 1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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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

임아영

아이들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 보고 있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사회가 여전히 여자인 나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건 10년 전 취업 때였다. 졸업반이던 시절 원서를 많이도 썼다. 50번까지 세고 더 세지 않았던 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들의 취업이 힘들다는데 민간 기업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서류 합격도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불합격 문자를, 불합격 메일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두려웠다.

 

밥 사주겠다는 동기를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앉아있었던 날이었다. 양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 동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가 명함을 주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울컥해서였다. 앞이 캄캄한 ‘두려움’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남자 동기들, 후배들의 ‘취직’이었다. 남자 동기, 후배들이 취직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민간 기업에서는 여자들을 원하지 않는구나. 뽑는다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양 자체가 적구나.’ 그러면서도 지금 어느 시대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자책했다.

 

 3년이 걸려 어렵게 취직했다. 회사에는 여자 선배보다 남자 선배가 항상 많았다. 딱히 #남녀차별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도, 사회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막은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여성들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서 깨달았다. 세상은 여자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한 뒤 일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이는 엄마가 봐야 잘 크지”라는 말을 다들 너무 당연하게 할 때 무력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키울 시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사회는 남편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이 둘을 낳으며 #육아휴직 을 2번 하면서 내가 시간을 쓰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성 외교부장관, #여성대통령 이 나온 사회에서 뭐가 불만이냐는 시각을 적지 않게 만난다. 아니다. ‘논쟁의 초점이 잘못돼서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곳들에 여성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됐지만 여전히 #절반 은 되지 못했으며 이 속도가 더딘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큼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이다. 여성들이 #임금노동#돌봄노동#이중 으로 떠안게 되면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남성들은 방관자가 된다.

 

회사 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 해야 하는 여성을 회사에서 덜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입사 12년차가 되니 이해가 된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다. 수익을 목표로 하는 회사에서 여성은 언젠가 회사 일을 딱 8시간만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니(8시간도 겨우 해낼 수 있는 인력이 되니) 8시간 이상 뽑아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갑지 않은 노동력이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남성은 #생계부양자 역할이, 여성은 #돌봄노동자 의 역할이 강화되며 불평등은 심화된다. 여성들이 20대 후반에는 고용률 83%대까지 오르다가 30대 후반에는 57%까지 떨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20대에도 30대, 50대 초반까지 남성의 고용률은 90%대로 비슷하게 유지되지만 여성들은 직장에서 살아남는 자와 살아남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사회는 이 여성들을 이렇게 분리한다. ‘워킹맘’과 ‘전업맘’이라면서.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보고 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앞서 말한 ‘억울함’들이 조금은 해소됐다. 남편이 여성들의 영역에 들어와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내가 임금노동을 하는 구조가 되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됐다. 입사 동기인 우리는 남성의 육아휴직도 수용하는 좋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안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커녕 여성의 육아휴직도 꺼린다. 그런 사업장에서 여성을 채용하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하다. 야근이든 주말 근무든 해낼 수 있는 노동력을 원해서 아닌가? 도대체 지금은 몇 년인지, 2019년 아니었던가.

 

우리 부부는 동기이기 때문에 월급이 거의 같다. 군대를 다녀온 호봉 차가 있지만 크지 않다. 누가 육아휴직을 해도 사실상 한쪽의 월급에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보통 아내의 임금이 적다. 급여가 적은 쪽이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가정 경제로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다보니 쳇바퀴 돌듯 여성들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진다. ‘#성별임금격차 ’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OECD가 발표한 성별 남녀 임금 격차를 보면 한국이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컸다. OECD 평균이 13.8%였지만 한국은 36.7%나 됐다. 평균보다도 2배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는 거다. 성별 임금 격차가 30%를 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여성의 월평균 임금은 244만9000원으로 남성 평균 임금은 356만2000원의 68% 수준으로 고용률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시간제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주로 여성이 일하면서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도 OECD 국가 가운데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여성 시간제 근로자는 197만1000명으로 전체 비정규직 근로자의 53.6%를 차지했다.

 

 #경력단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출산과 양육으로 회사를 그만뒀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재취업을 하는데 대부분 이전 직장보다 임금이 낮아지거나 비정규직이 된다. 2018년 기준 여성노동자 중 50.7%가 비정규직인 반면, 남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33.2%다. 아이 낳은 친구들은 가끔 자조한다. “왜 이렇게 버텨야 하나 싶지만 지금 그만두면 이만한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임신, 출산 등으로 일자리를 놓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답은 ‘성평등한 노동 시장’이다. 남성도 집 안으로 들어와 돌봄을 담당하고 사업장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시장이다. 임금 격차로 벌어지는 비자발적 퇴사들, 결국 여성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지게 되는 악순환을 바꾸지 못한다면 취업 시장에서부터 여성이 더 불리한 상황을 바꿔낼 수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대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원치 않게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여성만 괴로운 게 아니다. 그 괴로움은 남성에게도 전이된다. 가부장의 짐을 짊어지고 팍팍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아들들은 팍팍한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아이들을 돌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기쁨을 일부가 독점하지 않는 사회, 엄마 아빠 모두가 시민-노동자-부모-개인의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그런 사회 말이다.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

황경상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언젠가 문득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런 거 없어.”

 “그래도 아버지가 했던 뭐 기억나는 말 같은 건 있을 거 아녜요.”

  “촌 사람들이 뭘, 임시 풀칠하기 바쁜데, 누가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살아라 그런 말을 해.”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한 분만은 아니셨다. 늘 시골집에 가면 “우리 깅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동네 슈퍼에 가서 빠다코코낫 과자와 콜라를 사 주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더 젊은 시절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일하러 나간다, 일어나라’ 그러셨지.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어. 똥장군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서 밭에 뿌려놓고 학교에 갔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집안 농사일과 군대 36개월, 그리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구하기 위한 분투였던 것 같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직업 구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아버지 시대라고 일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기사를 해 보겠다고 대형 면허를 따기도 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달랐을까.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할아버지가 일하는 논이 전부 우리 것인 줄 아셨다고 했다. 실제로는 다 남의 논을 부치는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오직 일밖에 모르셔야 했을 것이다. 장인어른도 비슷하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장인어른이 한창 일했던 1980년대, 1990년대는 #주5일 근무 시대도 아니었다. 주6일, 때로는 일요일까지 일하셨던 장인어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으면 ‘아버지들의 삶이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 장인어른도 IMF의 화살을 비껴가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회사에 인생을 바쳤지만 그 회사는 노후도 보장하지 못했고 안전한 삶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장인어른은 끊임없이 일하셨다.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던 40대부터 6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말이다. 그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랫동안 한국의 남자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오랫동안 생계부양자로서 주어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를 쓰셨다. 1981년생 나라고 그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신혼 초, 갑자기 집주인이 전세 대신 월세를 달라고 했을 때 대신 전세금을 더 올려주겠다며 한참을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탓만도 아닌데 그때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걸 느꼈다. 내가 좀 더 수입이 많았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그러나 그건 괜한 혼자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한 섀도복싱이었다. 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 탓이 아니야, 함께 해결하자”고 했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혹시 남편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 년 동안 내가 대신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테니 한 번 해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편도 그렇게 해 줘야 해.” 물론 능력도 취향도 없는 내가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공상과학소설에 가깝지만, 그 마음만큼은 너무나 고마워서 마음속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부양자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나눠지겠다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상황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친구들 중에는 #맞벌이 도 있지만 온전히 생계를 남자인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도 있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야, 그런 게 되냐?”라며 신기해하면서 부러워한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킬 때면 요즈음엔 자주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는 아빠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데리러 오는 사람 중에 남자는 거의 없다. 모든 남성들이 육아를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남성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여전히 남성의 육아휴직이 희귀한 문화에서 ‘아빠 육아휴직’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 생각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회사를 안 가게 되니 “회사 나오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는 “아직은 괜찮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회사 일보다 덜 힘들어서는 아니다. 두 가지 일은 너무 다른 종류의 일이라 비교하기 힘들다. 다만 만 10년이 넘게 회사를 다니며 이렇게 회사와 거리를 두게 된 지금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은 매우 소중하고 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며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지만 또 한편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늘 유쾌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시대, ‘이 일을 조금씩 모두가 나눠서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아내와 내가, 아이가 있는 다른 동료와 내가 일을 나눠서 한다면 우리는 훨씬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돌보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시간 말이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회사에 알렸을 때 한 여자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맙다”고 했다. 쑥스럽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말했다. “자신이 돌봄노동자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여자 후배에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맙겠어. 나에게 그런 남자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정말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을 거야.” 기껏 6개월 육아휴직으로 그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면구스러웠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여성들이 얼마나 일터에서 고민이 많을지 이해가 됐다.

 

 아버지의 시대는 남성이 생계부양을 하는 #가부장적모델 의 사회였다. “아버지도 고생만 많이 하다가 갔지.” 아버지는 대화 끝에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말씀 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아마도 자전거를 타고 쓰러지지 않도록 무작정 페달을 계속 굴려야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많이 부빌 수 있는,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꿔본다. 우리 아들들의 시대에는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이 더 조화롭게 균형을 잡기를

 

[출처] 왜 남성에게 생계부양,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강요할까요? [부부 육아 일기] 11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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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보며 웃고 울었던 시간과 바꾸고 싶지 않다

임아영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디나 그렇듯 가끔은 굉장히 지치고 고단하다. 날씨마저 푹푹 쪄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순간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아이들이 나를 맞았다. 그리고 첫째가 내게 묻는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좀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 기분 안 좋은 거 어떻게 알았어?” 어려운 질문인지 대답은 안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아들이라니, 그저 감동할 뿐이다.

끝이 아니다. 씻고나서 소파에 기대서 좀 쉬고 있는데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린다. “뭐해?”라고 물으니 “편지 써”라는 답이 돌아왔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엄마한테 편지 쓴거야?” 아이를 끌어안았다. 기특한 아이야, 기특한 우리 아이야.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엄마 회사는 어때? 회사는 잘 하고 있어?” 아이의 성격대로 공들여 쓴 흔적을 엿보면서 농담으로 답했다. “엄마, 회사에서 별로 잘 못하고 있어.” 어쩌면 솔직한 대답이었다. 오늘의 회사는 내게 힘든 곳이었으니까. 아이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엄마.” 오늘은 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갑자기 명치 끝이 싸해졌다.

첫째 아이가 써준 편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첫째가 좀 늦게 퇴근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고생했어.” 고생했다니. 이제 남편과 나도 서로 쑥스러워서 하지 않는 말을 아이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고마워 고마워 아이야. 이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구나.

 

#육아에 관한 글을 쓰면 가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힘들고 괴롭기만 육아, 왜 하느냐, 절대 안 하겠다”고. 남녀가 불균등하게 #돌봄노동을 하게 되는 구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장시간 노동 문제와 엄마에게 양육 부담을 더 지우는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하는 글인데 육아란 곧 괴로움이라 해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듯이 육아도 마찬가지다. 괴로움과 환희가 뒤섞여 있다.

 

우리 부부는 첫째를 좀 어렵게 키웠다.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돌 전 첫째는 잠을 한 시간 이상 혼자 자지 못하는 예민한 아기였다. 둘째를 낳고 세상 모든 아기가 첫째처럼 잠을 못 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바운서에 앉혀 놓으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울지 않고) 앉아 있던 둘째가 우리 부부에겐 너무 신기한 존재였다. 첫째가 8세가 된 지금에서야 겁이 많은 아이라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첫째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둘째를 낳았다.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첫째가 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첫째가 어린이가 되어가는 속도를 내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둘째를 낳으면 다시 아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30대 후반이 되면서 가끔은 ‘내 30대는 육아를 하느라 지나간 것 아닌가’라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그럼 아이들이 없던 시절이 그립느냐고 하면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서른에 결혼해 서른하나에 첫째를 낳았는데 돌아보면 아이들을 낳고 난 뒤의 나는 훨씬 편안해졌다. 엄마가 된 이후의 내가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보다 좋다. 물론 육아의 구조에 분노할 때는 많았지만. 그것은 구조에 대한 분노지 아이들에 대한,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이제 첫째가 8세, 둘째가 4세. 아이들을 몸으로 부대껴 키워야 하는 시기가 열 살까지라 본다면 내게 이제 6년이 남은 셈이다. 육아가 끝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그 이후에는 다른 고민들이 커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이렇게 힘든데도 아이들을 낳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가끔 후배들이 #육아에 대해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연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교류”라고. 20대의 연애와도 서른이 되어서 한 결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설명하자는 게 아니다. 다르다는 것. 연애가 달콤쌉싸름한 것이라면 육아는 그보다 훨씬 깊다고 느낀다. 깊게 아름다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고 무얼까.’ 아이들을 길렀던 30대는 내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될 것이다.

 

유전자의 신비일지도 모른다. 내 배에서 나온 나를 닮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란. 어떤 면에선 맹목적이라 헌신적일 수 있고 또 맹목적이라 무모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어떤 존재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했나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존재가 온전하길 기도하게 되는 경험.’ 내게 육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아서 묘하게 서운하지만 그게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지. 자기 위해서 불을 끄고 다같이 누우면 내 오른쪽에 누워 있는 둘째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엄마 어디에 뽀뽀할까? 입술에 해야겠다.” 그리고나서는 입술에 뽀뽀했다가 또 볼에 뽀뽀하고 또 이마에.

 

이렇게 작은 존재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면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뭉클하다. ‘고마워, 두진아 이준아. 언젠가 엄마는 너희들이 엄마에게 사랑을 퍼부어줬던 지금의 기억을 돌려보며 괴로운 한 순간을 나고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엄마에게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줘서. 또 고마워. 많이 웃게 해줘서. 그저 고마워.’ 그러니까 육아가 괴로울 것이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괴로운 것은 사회 구조고 돌봄노동은 고되지만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웃고 울었던 시간과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아이들이 같은 양말을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해

황경상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2049년. 내 나이가 칠십에 가까워진다. 우연히 내가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만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의 통로를 알게 됐다면 무얼 하고 싶을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사건이 내 삶 속에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 의지대로 바꿀 수도 없고 나처럼 무지한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볼 수 있는 순간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을 것 같다.

하교를 하면서 가방을 들어줬더니 ‘아빠 힘들지 않아?’ 라고 물으며 다시 자기가 들겠다고 나서는 첫째 녀석의 살짝 찌푸린 툼벙한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림책을 읽어주면 책 속의 강아지가 귀엽다며 책에다 얼굴을 비비대는 둘째 녀석의 애교를 보고 싶을 것 같다. 단 10초만의 시간이라도 좋다. 금방 다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요 놈들!’ 하고 볼 한 번 꼬집어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 만약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추억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대답하기 어려웠을 거다.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은 정말 짧다. 담으려고 하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진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나 학교 다닐 때 뭐 기억나시는 것 없어요?” 물으니 이렇게 말하신다. “니 어렸을 적 대구 달성공원에 갔던 거는 기억나는데… 내가 일만 했지, 뭐 했나?”

 

늘 “니가 알아서 다 했지 뭐”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중학교 때는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매일 아침 나를 학교 앞까지 태워 주시고 출근을 하셨다. 추운 겨울, 차에서 나오는 따스한 히터 바람을 쐬며 달콤한 쪽잠을 잤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워낙에 표현이 서툴기도 하시지만, 그때 만약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고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분명 더 풍성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힘은 든다. 아이들은 수시로 변한다. 식탁에 겨우 앉혀서 밥을 먹이려는데 갑자기 ‘똥꼬’가 아프다고 약을 발라달라고 한다. 아침에 웬일로 멀쩡히 혼자서 준비를 잘 하더니, 학교가려고 막 나서는데 갑자기 숙제를 안 했다며 꺼내들어 화를 돋우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제 집 앞 놀이터에서 봤던 지렁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게 만든다. #배변훈련을 하는 둘째는 씻으러 들어갔다가 대변을 다섯 번이나 바닥에 봤다. 닦고 또 닦느라 지치게 만들고 놓고도 낄낄 대며 웃는다.

 

이 변화무쌍한 아이들 앞에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러다가도 “아빠 사랑해~ 아빠 더위?”하면서 잘 맞지도 않는 선풍기 리모컨을 들고 와서 에어컨에다 대고 막 눌러대는 아이를 보면서 뭉클해진다.

 

아이들이 판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빠 판다가 형제 판다를 돌보고 있다.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안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갑작스레 불러오는 한 줄기 바람에, 어쩌다 귀에 들어온 익숙한 멜로디에, 오랜만에 맡은 익숙한 향내에 과거로 순간 이동한다. 나도 가끔 라면을 끓일 때 희게 부풀어 오른 면을 보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괴식’ 말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라면을 면만 따로 끓인 다음에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스프를 뿌려서 주셨다. 의외로 꽤 맛있었다. 지금 다시 해 볼 자신은 없지만. 아버지는 군대에서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세대니, 그런 ‘괴식’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도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준다. 스마트폰에 음식 조리법을 틀어놓고 들여다보면서 주방을 동분서주해 보지만 사실 내가 봐도 맛은 없다. 궁중떡볶이를 했는데 떡이 다 뭉그러져서 첫째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둘째는 기껏 만들어놓은 카레가 맵다며 먹지 않는다. 대충 있는 걸로 먹일까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었더니……. 몹시 속상하다. 그러다 녀석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 너희들도 뭉개진 떡국 떡을 보면서, 카레의 알싸한 후추 맛을 새삼 느끼면서 아빠가 해 준 ‘괴식’을 생각하겠지. 아니, 내가 너희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인지,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시간여행은 보통 시간을 마음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의 시간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내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어쩌면 ‘시간여행’이다.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여행 속에서 아이들의 뺨을 부비며 “뭐 먹고 싶어?” “뭐 하고 싶어?”라고 물을 수 있는 이 시간으로 언제 건 다시 돌아오고 싶을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서 종종대고 돌아다니는 녀석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에 담는 것뿐이다. 돌아오지 못할 걸 알기에, 언젠가는 이 모습이 그리워 찾아 헤맬 걸 알기에.

 

[출처] 육아가 괴롭고 힘들기만 한 건 아녜요. [부부 육아일기 10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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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많은 시간 함께 한 둘째아이의 성장은 '할마할빠' 육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던 육아 시스템은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잠시 정상궤도를 찾았으나 오는 9월 남편이 복직하면 '할아버지 육아'로 이어질 예정이다.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라고?
아이들과 함께한 1년은 소중하다

 

첫아이를 낳고 복직한 2014년부터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다. 딸과 사위가 회사에 가면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 3~4시쯤 데려와 저녁밥을 먹이고 딸과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것은 친정엄마였다. 만 6년 반 아이를 기르는 동안 사회는 나를 ‘주양육자’라 불렀지만 아이의 ‘진짜 양육자’는 외할머니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양육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그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부랴부랴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지만 훌륭한 아빠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였다. 아이들을 낳고 1년씩 육아휴직할 수 있는 고마운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정작 내가 키운 기간은 겨우 2년4개월뿐이었다. 첫째가 14개월 때부터 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옆에 있었던 것은 나도, 남편도 아닌 ‘외할머니’였다.

 

저녁 약속을 안 잡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다
그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 였다

 

지난해 12월 그런 엄마가 병원을 세 곳씩 다니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무릎이, 이가, 어깨가 탈이 났다고 했다. 원래도 무릎이 약한 편이었는데 내 아들들을 돌보다 무릎이 더 나빠져 ‘어느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으냐’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엄마는 “원래 무릎이 안 좋았다. 네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늙으면 원래 무릎이 나빠진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돌보다 나빠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딱히 뭘 잘못한 것은 없지만 이 구조에서 비켜나 있는 그가 미웠다.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그러다 내가 많이 아팠다. 근무 중 열이 나기 시작했고 몸이 노곤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데 계속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겨우 마감하고 보고한 뒤 집에 가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폐렴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 하나만 회사를 그만두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많은 여성들이 결국 가는 길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내 손으로 돌보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만두지 마라, 아영아. 네가 열심히 해온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기의 순간에도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돌봄 노동으로 엄마의 몸 곳곳이 상하자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남편이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남편의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는 구조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서 점심만 먹고 하교할 것이었고 내 퇴근까지 7시간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마운 회사는 다시 남편의 6개월 육아휴직을 결정했고 남편이 휴직하자 집안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야 남편은 양육자의 위치에 겨우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도 지속 가능하진 않다. 9월에 남편이 복직하면 친정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고마운 일이다. 또다시 나는 친정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것은 ‘행운’이다.

 

가끔 주변에서 “친정부모님께 감사해야겠다”는 말을 듣는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선의다. 그러나 듣는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고맙지 않다. ‘고맙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서다. 내 미안함, 내 죄책감을 ‘고맙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 일이지 내 부모님 일이 아니다. 나는 딸이 일을 유지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역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살기 힘든 서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의 호의를 역이용하는 것뿐이다. ‘미안하면 용돈을 많이 드리라’는 말도 유쾌하지 않다. 에너지를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젊은 우리가 할 일이다. 퇴근 후 지쳐 있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 ‘용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육아휴직한 후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생 나와 동생을 돌보고 손주들까지 돌본 엄마에게 찾아온 자유. 목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엄마 너무 즐거운 거 아녜요?”라고 놀리면 엄마는 대답한다. “얼마나 좋은지 아니.”

 

그러나 별수 없다. 이렇게 잘난 척 말해도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다. 주변에서는 그럼에도 그게 얼마나 행운이냐고 다들 거든다. 안다. 양가가 다 지방이어서 아이를 물리적으로 돌봐줄 수 없는 집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그러나 잊지 말자.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양육의 의무가 없다. 양육의 의무는 나와 남편에게 있다. 온 동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돌보느라 허리를 펼 수 없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할아버지·할머니 육아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결국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지만…
이런 ‘행운’에 기대서야 돌아가는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그런 가정에 대해서도 다들 손쉽게 말한다. “사람을 쓰라”고. 그러나 돌봄을 자기 일로 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 대학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를 돌봐주시던 장모님이 수술해야 하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다 썼고 육아휴직 기회가 남은 건 자신뿐인데 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어차피 1년 쉬어도 해결 안되니까 이모님을 고용해야지.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야.”

 

그 회사 상사에게 묻고 싶다. 그건 아이를 돌봐본 적 없는 당신의 답 아니냐고. 아이의 1년, 아빠의 1년은 길다. 1년이라도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아빠의 양육 기회를 당신은 빼앗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정녕 당신이 좋은 상사이자 선배라면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아빠들도 자기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그렇게 변하는 속도가 더뎌서 미안하다”고.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육아휴직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슈퍼맨’이 돼볼 수 없었을 것

 

요즘 둘째는 배변훈련 중이다. 기저귀를 차고 있으면 편한 마음에 계속 대소변을 거기다 볼까봐 아예 아랫도리를 벗겨놓거나 배변팬티를 입혀놓았다. 몇 번은 ‘쉬 마려워요’ ‘똥 마려워요’ 하면서 변기를 찾는 듯해 금방 하겠다 싶었다. 착각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발목과 손에 변을 묻힌 상태로 돌아다니는데 정작 ‘큰 덩어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잠시 동안 세 장의 배변팬티를 적셨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좀 되는가 싶다가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리셋이다.

 

생각해보면 첫째의 배변훈련은 장모님이 시작하셨다. 배변훈련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둘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첫째는 12월생이라 배변훈련이 더 어려웠다. 한두 달 뒤면 유치원에 가는지라 더 초조했다. 유치원에 가면 대소변을 가려야 한다는데…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장모님은 첫째를 어르고 달래셨다. 그때는 이 훈련이 이렇게 힘든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막상 육아휴직을 하고 내가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기저귀를 더 채워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처음 태어난 첫째를 받아 안았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뭔가 잘못 만져서 아픈 건 아닌지. 얼른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아이를 안겨드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게 된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때 갓 태어난 첫째를 안고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물론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더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갓 태어난 첫째를 안는 순간 겁이 나서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안겨드렸다
장차 육아를 맡기게 될 것이란 상징처럼

 

아이를 키우는 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물심양면으로 무한대의 도움을 주셨다. 공치사 한 번 하신 적이 없지만 늘 송구스러웠다.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을 보내지 못할 때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실 장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지저분한 집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갔는데 온통 어질러진 좁은 집에서 피란민처럼 앉아 계시는 모습을 봤을 때도 송구했다. 우리 부부가 둘 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재우고 계실 때도 있었다. 쉬시는 것도 아니고 안 쉬시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계시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실 때 몹시 죄송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이 예전에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침도 잘 안 먹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시간 맞춰 데려가는 것은 젊은 나도 지치는 일이다. 데려다줬다 데려오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만보가 넘어가는 걸 보면서 왜 장모님이 짧은 거리임에도 차로 아이들을 등원시키셨는지 알게 됐다. 더구나 무릎까지 안 좋으신데.

 

육아휴직을 하고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의 노고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할머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잘 돌봐주셨는지 생각한다. 심지어 가끔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야단쳤다 싶을 때는 내가 돌보는 게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잘못하는 일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순간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기꺼이 맡아주신다고, 편하다고,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

 

일하는 시간과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삶을 지탱하는 축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다. 첫째가 네 살 때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우는 녀석을 두고 애써 뒤돌아서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시큰한 콧잔등을 만지며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지구를 구하러 간다고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할 만큼 내 일이 급하고 중요한 일인가. 아이가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만화 <미생>에는 ‘워킹맘’ 선 차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두고 정신없이 통화하며 출근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아이가 엄마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선 차장은 다시 뒤돌아와서 아이를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생활 때문에… 널 미루지 않을게!’ 이 부분은 왜 몇 번이나 봐도 가슴이 찌릿한지. 많은 부모들도 그랬을 터다.

 

품 속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랐다
부모의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게 지원하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다. 첫째는 어느덧 양치질을, 세수를 혼자 하더니 이제는 샤워도 조금씩 혼자 하고 몸을 닦고 나오는 일도 스스로하기 시작했다. 머리감기도 조금만 연습하면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작은 아기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욕조에서 씻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에게 온몸을 맡기고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보며 무한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아마도 아주아주 잠시 동안 아이는 내 품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부모와 보낼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부쩍 더워진 날씨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둘째에게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쳐주었더니 말한다. “아빠 손에서는 바람이 나와?” 둘째에게 아빠는 손에서 장풍이 쉭쉭 나오는 슈퍼맨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슈퍼맨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나는 행운아지만, 많은 아빠들도 이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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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아영 황경상 기자의 폭풍육아 시즌2

임아영·황경상 기자는 11년차 입사 동기입니다. 두 아들을 낳으면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양육은 엄마가 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왜 ‘반반 육아’가 중요한지 말하려 합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자…아이에게도,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초등학교 1학년 첫째와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까지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한편으로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남편이 육아휴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2주쯤 지났을 때 어느 퇴근길 집 근처에 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만 하고 갈게.” 대뜸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왜.” 얼른 저녁 시간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미 집 앞이던 나는 더 신나서 말했다. “아니, 맥주 한잔하면서 잠깐만 친구랑 이야기만 하고 갈게.”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따다다다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나 벌써 1층이야.” 나는 가부장 흉내를 내서 신이 났고 남편은 내가 무사히 육아를 하러 돌아온 것에 대해 안심했다.

 

“남편, 나 맥주 한잔 하고 갈게” “왜?”
나는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던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내며 신이 났다

 

통쾌했다. 언젠가 한 번 꼭 내보고 싶었다. 한국 사회 가부장 흉내를. 한 여성 개그맨의 ‘가모장 개그’를 좋아했다.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를 원한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등.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비튼 말 속에서 가부장 언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었으니까. 평등한 삶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깔아뭉개지 않는 삶, 우리의 임금노동이 누군가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삶, 임금노동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돌봄노동을 인정하는 삶 아닐까.

 

아이를 낳고 퇴근 후 회식이 자연스러운 아빠와 퇴근 후 회식할 수 없는 엄마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왔다. 육아는 금을 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내 어깨가 무거워지면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때로는 사정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 기준에서 ‘착한 남편’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 주로 싸움을 걸고 사정하는 쪽은 나였지만 흔쾌히 싸움을 받아주거나 사정을 받아주는 것조차 고마웠다. 그래서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육아 경력은 내 육아 경력과 같다.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다. 길지 않은 육아휴직 기간 원래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인데 뭐가 크게 달라지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상의 결은 달라졌다.

 

남편이 만든 밥을 먹는데 기분이 묘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개운치 않았던 건
숨겨진 돌봄노동의 실체 때문이었다

 

남편이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기분이 묘했다. 시간거지인 맞벌이 부부라 평소 자주 음식을 사 먹었지만 가끔 요리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남편이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휴직 후 먹는 밥은 달랐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남편이 마파두부밥과 참치전을 해놨다. 원래 손으로 뭔가를 빚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요리를 즐거워했지만 아침을 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엄마 반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해준 고등어조림이 정말 맛있었는데.” 며칠 후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등어 샀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라고 남편의 육아휴직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내게도 엄마가 생겼다. 늘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우선 남편은 젊고 힘이 세니 아직 천둥벌거숭이인 35개월 둘째를 맡기기도 미안하지 않았고 사실 육아는 우리 둘의 일이라 미안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생겼다’고 느낀 지점은 아마 ‘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니 ‘밥을 해주는 엄마’가 생겼다. 결혼 후 늘 그리워하던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 따뜻한 엄마 밥.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서 든 생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삶 말고
서로서로 챙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며칠간 밥을 얻어먹고(?) 출근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운치 않았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가 왜 개운치 않을까. 답은 쉽게 찾았다. ‘여전히 나도 누군가 돌봐주는 삶, 누군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는 삶, 자고 일어나 누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오는 삶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구나.’ 결혼하고 나서야 가사노동이 무엇인지 배웠고 아이를 낳고서야 돌봄노동의 실체를 알게 됐다. 이전의 나는 1인분의 삶을 살지 못했구나 하는 깨달음. 남편이 다시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니 안온해졌다. ‘임금노동에만 신경쓰면 되는 삶이 이랬었지.’

 

언젠가 동네 친구가 말했다. “가끔 자신은 집에서 노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다른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삶과 사회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밥을 차려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끔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자들의 칼럼을 읽다 보면 묘하게 우울해졌다. ‘이런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

 

나만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면 될까. 우리 모두 노예가 되지 않게 서로의 돌봄을 나누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돌봄의 영역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 남편과 역할을 바꾸면 신이 나기만 할 줄 알았다. “남편 좀 풀어주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남편 앞에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할을 바꿨으니 너도 고생해봐라’라는 독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는 답은 거기다.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 귀찮은 일들은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누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고고한 말을 하는 삶 말고 서로서로 밥을 챙겨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지루한 육체노동이지만…이 뭉클함 없인 인간은 반쪽 아닐까

“아빠 무서워~ 저기서 안 잘 거야.”

둘째가 매일 자던 창가 쪽 침대에서 건너와 내 옆에서 잔다고 한다. 좁은 자리에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모로 누웠다. 따뜻하고 달큼했다.

 

이러다 내 삶이 사라질까 조바심 들지만
작은 일에도 손뼉을 치는 첫째의 표정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일 없이 허무했다. 뭔가 그리우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누군가 만나고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고 싶진 않았다. 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열망했고, 헛헛한 속을 술로 달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갈 틈조차 없다. 첫째와 둘째, 늘 이 녀석들이 내 삶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인지라 이기적인 생각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 자신의 삶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다가도 처음으로 아주 간단한 컴퓨터를 가르쳐줬더니 손뼉을 치며 깜짝 놀라는 첫째의 표정을 보며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저 아무렇게나 볶아서 만든 스파게티를 싹 비워버리는 둘째의 입을 바라보며 이것 외에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아침밥을 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반복되는 일상, 생사 다투는 큰일은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워 갈 뿐이다

 

녀석들을 돌보는 일은 지루한 육체노동이다. 누군가 내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농담 삼아 ‘물병 씻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 물병에는 보통 빨대가 달려 있어 물을 먹이기에 편리하지만 매일 씻어야 한다. 하루라도 안 씻으면 물때가 뿌옇게 낀다. 시커먼 곰팡이까지 생긴다. 씻기는 번거롭다. 빨대와 물통 뚜껑을 일일이 분해해야 한다. 빨대 속은 솔질도 해 줘야 한다. 그러나 씻은 물병에는 머지않아 다시 물을 담아야 한다. 빨대 물병 시기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두 개의 물병을 씻는 일은 주요 일과다.

 

반복되는 일은 많다. 매일 아침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씻기고, 가습기 물을 갈아주고 빨래도 해야 하고… 별것 아닌 일인데 매일 같은 반복에 지치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창궐하는 물때와 곰팡이야말로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사를 다투는 큰일은 없다. 찬란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견디지 못할 분노와 한숨도 없다. 그저 작은 틈을 매일 메울 뿐이다.

 

그것도 엄살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한 달에 한 번 현장학습을 나가면 김밥을 싸 주었다. 아침에 김밥을 싸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 적이 있다. 급식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같이 점심·저녁 도시락을 챙겨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나서다. 나는 겨우 하루치 도시락만 준비해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오셨던 걸까. 일까지 하시면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네가 인제 그걸 알았냐”며 눈물을 살짝 글썽이기도 하셨다.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찰나인 이 때를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

 

육아는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뭉근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녀석들은 내 아이들이지만 엄연한 타인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데 때로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소리도 지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늘 내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이 타인을(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돌봄으로써, 혹은 돌봄을 받으면서 느끼는 어떤 뭉클한 감정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인간은 여전히 반쪽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한다.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몸이 아닌 타인을 챙겨주고 닦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는 그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을 씻어주는 종교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예쁘게 핀 길가의 꽃잎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고, 빈 담뱃갑을 구기지도 않고 땅바닥에 떨궈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한 번도 타인을 돌봐준 적도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일 테다.

 

녀석들은 되레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내일 가져갈 준비물을 밤에 정리해 두겠다고 하자 첫째가 말한다. “아빠, 그러면 잠 오지 않겠어?” 아이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꼭 껴안는다. 신현림 시인은 <침대를 타고 달렸어>라는 시집에서 딸의 일기 중 이런 구절을 인용한다.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시인은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썼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면서 옥수수에 대한 설명을 봤다. 보통 우리는 옥수수 수염을 그저 쓸모없는 털이라고 생각하거나 ‘옥수수 수염차’ 정도만 떠올린다. 그 수염은 사실 한 올 한 올이 다 꽃이다. 그 한 올 한 올 수염마다 옥수수 알이 하나씩 맺힌다고 한다. 생각 없이 씹었던 옥수수 알 하나도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늘 옥수수 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수염이, 아니 꽃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품어내는 시간을 겪고 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삶의 끝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녀석들을 보듬어 안는다. 이렇게 안고 있을 수 있는 순간, 아주 짧은 이 순간을 내 삶에 흠뻑 적시기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이 모두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 헛헛해지더라도 그 얼룩이라도 얼굴에 대고 비볐으면 하는 바람에서.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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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디 2019.05.02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뜻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전 임아영 기자님이 블로그로 글을 쓰신 초반부터 열심히 읽었던 초기 독자고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를 주변 지인에게 널리 추천하는 25살 여성이기도 합니다.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돌봄노동이 얼마나 공적 논의에서 배제되어왔나 크게 깨달았어요. 폭풍육아라고 할 만큼 고된 노동을 이렇게나 내가 몰랐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돌봄노동을 비가시화했던 걸까 깨달을 수 있었어요. 기자님과 동갑이신 고등학교 은사님이랑 대화했었는데 육아를 사회적 문제로 의제화한 책이 나왔다는 것에 매우 반가워하시더라구요.
    댓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자의 날입니다. 한국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가 바뀌길, 돌봄노동이 사회화되길 고대하며 함께 참여할게요. 늘 건강하시길!

    • 임아영 2019.05.10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초반부터 열심히 읽으셨다니 감동 ㅠㅠ

      여성들이 주로 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돼 온 거라는 생각을 저도 아이를 낳고서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돌봄노동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도 의문스러웠고요. 아이를 낳고서는 어떤 '균형'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됐는데... 아이와 나, 또 나와 남편, 또 일하는 나와 돌보는 나, 또 엄마인 나와 기자인 나와 또 시민인 나 등등등.

      맞벌이 부부가 문제이니 다시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답이 될 수 없고... 결국 남성, 여성 모두 균형을 이루는 삶을 우리 모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장시간 노동체제를 바꾸고 가부장적인 노동 구조를 바꾸고 또 돌봄노동을 모두가 나누는 평화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ㅎ 감사해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

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키우는 것

임아영

벚꽃이 흩날리는 하원길에서 둘째.

남편과 나는 2008년 함께 회사에 입사했다. 흔한 연애 레퍼토리처럼 입사 동기가 친구가 되었고, 친구가 연인이 되어 부부가 됐다. 일한 지 만 10년, 결혼한 지 만 7년. #사내커플 이니 “남편이랑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 불편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답은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이어폰 같은 것들을 집에 놓고 오면 급히 빌릴 수도 있고 편한 점도 많다. 출퇴근길 회사 일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는 것도 좋다. 우리는 밤에도 맥주 한 잔 하며 ‘회사 얘기’를 한다. 늘 “이제는 회사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면서도. 남편과 회사 얘기를 나누는 것은 즐겁다. 내 일, 내 동료에 대해 온전히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괴로울 때는 서로의 성별로 사회적 역할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사 엘리베이터에 남편과 함께 탔는데 한 선배가 나를 보며 물었다. “밥은 해주냐?” 나는 당황했다. 신혼 초 우리는 번갈아 아침밥을 했다. 내가 하는 날도 남편이 하는 날도 있었다. 결혼 전 약속도 했다. 서로를 사회적 성별의 틀로 가두지 말자고. “나는 당신에게 #생계부양자 의 역할을 강요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도 내게 가사노동과 육아를 더 많이 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선배의 별뜻 없는(?) 질문에 내 표정은 이미 나빠졌을 것이다. “제가 왜 밥을 해줘야 되죠?” 말투도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부터 그 선배는 우리를 보면 남편을 향해 묻는다. “밥은 해줬어?”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다.

사람들은 장난을 섞어 집요하게 물었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을 하느냐고. 우리는 서로를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로 국한시키고 있지 않은데도. 남편은 적극적으로 육아를 하고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됐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후 친정아버지도 말씀하셨다. “황서방이 고생하네.” 나는 두 아이들 모두 돌 지날 때까지 키웠다. 몸으로 낳고 몸으로 키웠던 2년을 떠올리면 가끔 아득하다. 혼자 잠들지도, 혼자 먹지도, 혼자 씻지도 못하는 존재들 앞에서 무력했던 마음들이 떠올라서. 엄마는 그 정도는 당연하게 해내야 ‘엄마’가 되지만 아빠는 엄마가 하는 일의 일부만 해내고 ‘훌륭한 아빠’가 된다.

나를 낳은 아빠에게 투덜거렸다. “아빠, 이거 원래 내가 하던 일이야. 심지어 황서방은 겨우 6개월밖에 안 해. 6개월이라고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다른 남자들이랑 비교해봐라.”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왜 남자들하고 비교해요? 이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엄마들하고 비교해야지.” 회사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경상이는 술을 못 마셔서 답답하겠다”고. 처음에는 “집에서 많이 마셔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다가 이제는 나도 다른 답변 기술이 생겼다. “선배는 제가 술을 못 마시고 있는 것은 안 보여요?” 더 하고 싶은 말은 참는다. ‘우리는 열심히 부부가 함께 육아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별뜻 없이 던지는 그 말들이 노력하는 우리에게 상처가 돼요.’

같은 회사의 같은 연차의 남편. 남편은 항상 노력했지만 남편의 노력과 별개로 이 구조는 때로 내게 상처가 됐다. 모두들 엄마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니까. 남편이 하는 것은 늘 칭찬받으니까. 나는 가끔 칭찬받는 남편을 질투했다.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제일 가지고 싶었던 것은 #명함 이었다. 먼저 취직한 친구들이 명함을 주고받을 때 숨고 싶었다. 깨달았다. ‘한국은 명함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사회구나.’ 명함을 획득하기 위해 울고 버텼던 20대를 기억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엄마가 되니 주변 엄마들이 다들 명함을 스스로 놓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은 전쟁이니까. 나 또한 갈팡질팡했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명함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렇게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기분으로 살 바에는 명함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매번 부딪혔다.

누가 물었다. “엄마가 된 이후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이냐”고. 쌩뚱맞게 #시민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대답은 이랬다. “좋은 기사를 썼을 때, 아니면 동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요. 엄마로서의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나, 동료로서의 나도 있어요. 사회에 좋은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각자 자신의 기능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데 직장에서의 성취감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대단한 기자는 아닐지라도 제가 일해서 제가 번 돈으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게 소중한 것 같아요.”

 

이제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명함 같은 것은 상관없이 모두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많은 선배 여성들이 버텨냈다. 그런데 버텨내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참고 남자 직원과 비교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 명함을 얻고 전투적으로 일하는 모습 외에 아이를 돌보고 함께 성장하는 삶도 시민의 삶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주저앉는 삶이 아니라는 것.

나는 이제 무난하게 있지 않는다. 남편과 나를 성별의 틀로 가두는 말 속에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는 ‘쫄보’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말하지는 못하도록 하는 ‘기운’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여성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남편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해서 칭찬받지만 나는 당연한 것을 하면서도 투덜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그게 너무 불공평해서 억울하지만 나는 남편과 최대한 #돌봄노동 을 나누고 함께 하고 싶다. ‘훌륭한 아빠, 당연한 엄마’가 아니라 ‘모두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큰애 머리 위의 벚꽃.

 

아빠도 육아의 절반 몫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회

황경상

둘째 #어린이집 에서 동네 치안센터를 방문하는 작은 행사를 열었다. 참여할 부모를 모집한다고 해서 나도 신청했다. 아내와 내가 둘 다 일할 때였으면 하기 어려웠을 텐데 육아휴직을 하니 이런 행사도 참여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으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와 치안센터로 향했다. 한 손에는 둘째의 손을, 다른 손에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평화로웠다. 5분 정도의 짧은 거리였지만 아이들과 함께여서 조심조심 천천히 걸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행렬을 지어 나름대로 질서 있게 인도를 가득 메웠다.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둘러보니 어른 남자는 선생님까지 다 포함해도 나 혼자였다. 다른 집은 모두 엄마가 참석했다. 그걸 의식하고 나니 길을 지나가면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저 무심결에 나를 바라본 거였을 텐데도 뭔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괜히 움츠러들었다. 느린 이동속도 탓에 빨리 벗어나지도 못해서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출산 이 문제가 되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 그리고 남성 육아휴직에 대해서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아주 오래 전에 육아를 위해 휴직을 했던 선배는 회사 상사에게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집이 자네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 집사람이 자네 아이를 함께 돌봐줄 수 있다고 하니 휴직은 하지 말게.”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일하는 남자가 육아를 위해 시간을 쏟으면 무조건 쓸데없고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그 상사 역시 몹시 #가부장적 인 사고에 머물러 있었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능력 있는 후배가 일하지 않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굉장한 배려를 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셈이다. 선배는 정말 진지한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하고 휴직을 했다. 막상 휴직에 들어가서도 무춤한 순간이 많았다고 했다. 아빠가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아이들이나 엄마들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해서 ‘학생’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물론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 아이들을 등교·등원시키다 보면 심심찮게 아이들의 손을 잡은 아빠들과 마주친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남성 육아휴직이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 육아휴직을 한 선배 역시 아이들과 놀이터에 있다가 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저씨는 뭐 하는 분이기에 이렇게 낮에 일을 안 해요?”

내가 육아휴직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 고교 친구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회사는 남자 비율이 낮긴 하지만, 몇 년 전에 전 직군에서 1명만 남자 육아휴직을 썼어. 아직은 한국 직장에서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인데 멋지다. 아들 녀석들한테 의미 있고 기억되는 시간되길 바란다.” 무척 고맙고도 힘이 됐다. 한편으론 그 친구 역시 육아휴직을 한 번쯤 쓰고 싶었다는 아쉬움이 행간에 묻어나기도 했다. 무탈하게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남성육아휴직자수 는 2017년 1만2000여명에 달한다. 2010년 800여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10년이 안 된 사이에 15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간을 쏟는 일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별스런’ 일이다.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들은 주변에서 과도한 상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많은 분들에게 분에 넘칠 만큼 많은 격려를 받았다. 아이의 친구 엄마들도 부끄럽고 쑥스럽게도 나에게 “대단하시다”라는 말을 자주 해주신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건 남성 육아휴직이 ‘대단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아이를 내가 키우는 일이고, 당연히 참여해야 할 육아의 몫을 나누어 지는 것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아내가 인정해 주겠지?”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나만큼 하는 남자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내의 ‘당연한 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또 어느새 금방 알게 된다. 나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얼마 전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반 단체 생일파티가 있었다. 아내가 일이 있어 내가 참석하게 됐다. 그 자리에도 남자는 나 한 명뿐이었다. 어쩌면 불편했을지도 모를 자리에 온 불청객(?) 아빠를 엄마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휴, 정말 일하는 게 낫지… 애들 키우는 거 진짜 힘들어요.” 엄마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맞장구칠 일도 많았다. “애들 보면 얼마나 화를 낼 일이 많은지… 근데 그럴 일은 없으시죠?”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저도 얼마나 화를 많이 내고 소리를 많이 지르는데요.”

늘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화를 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는데, 엄마들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위로가 됐다. 그저 우리는 엄마, 아빠를 넘어서 아이를 키우는 #동지 일 뿐이었다. 엄마들의 말을 들어보면, 엄마들이 느끼는 힘든 점도 육아를 오로지 본인만 짊어지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것 같았다.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쓰는 게 보편화되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반의 몫으로 참여하는 사회 분위기가 된다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두렵고 힘든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치안센터 방문 행사 후 아이의 알림장에 이렇게 글을 남겨 주셨다. “등원하고서 ‘아빠랑 경찰관 보러 가요’라고 말하면서 즐거워했어요.”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칭찬받을 일을 하면 곧잘 “아빠가 집에서 가르쳐 줬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여태껏 이룬 성취 중 그 어떤 것 이상으로 감격스러웠다. 앞서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했던 선배는 그때 아이들에게 간식을 만들어주고 함께 보냈던 시간이 지금 와서 몹시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더 많은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통해, 혹은 육아에 쏟는 시간에서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

 

[출처] 아빠육아는 훌륭하고, 엄마육아는 당연하다? [부부 육아일기 3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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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집밥’이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재료를 사와서 만들면 되지만 내가 만들어도, 남편이 만들어도 ‘집밥’ 맛이 안 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엄마밥’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옆동에 사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세요? 집에 밥 있어요?”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신 지도 만 6년. 뻔뻔해진 것도 딱 6년만큼이다. 엄마는 집에 안 계시지만 집에 가 밥을 차려 먹어도 된다고 해서 남편과 나 둘이 가서 호박 된장찌개와 오징어볶음, 고춧잎나물을 와구와구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전기밥솥에 있던 밥과 냉동실에 얼린 밥을 우리 둘이서 다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결혼 후 집안일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반쪽 인간’이었구나
작은 일 하나까지 엄마가 해주셨구나

 

나는 결혼을 하면서 엄마, 아빠로부터 독립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안일도 별로 안 해봤고 엄마, 아빠 등에 얹혀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쪽 인간’이었다. 내가 반쪽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신혼집에서 나는 수건을 접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며 울었다. ‘엄마가 이런 작은 일까지 다 해줬구나.’ 수건 접기는 그나마 쉬운 쪽이었다. 신혼이어서 찌개도 해먹고 반찬도 해먹었지만 엄마가 해준 집밥 흉내를 내기는 어려웠다. 30년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흉내 내려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지만.


 

신혼 때는 밥을 해먹었지만, 아이를 낳고서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아이 돌보기에 24시간이 맞춰 돌아가던 돌 전, 아이 이유식은 열심히 만들어 먹였지만 내 밥은 대충 먹기 일쑤였다. 그나마 친정엄마가 가져다주시는 반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첫째를 낳고 복직한 나는 아이 반찬을 잘 못 만들어 쩔쩔맸고 둘째를 낳고 복직하면서 배달받는 반찬으로 바꿨다. 일하면서 두 아들을 기르는 우리집에서 아이들 반찬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찬 사먹기’도 금방 끝났다. 아이들이 ‘배달 반찬’을 잘 먹지 않았다. 결국 난 또 엄마에게 반찬을 얻어먹으며 기생 중이다. 여전히 내 임금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지고 있다.


 

■ 엄마의 노동, 엄마의 일생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손으로 아이를 기르면서 비로소 나는 엄마의 하루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청소·빨래를 하고 반찬을 만들던 엄마의 하루를. 외환위기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돈도 벌었다. 다만 풀타임 임금노동자로 일한 적이 없을 뿐이다. 엄마는 늘 자신을 ‘솥뚜껑 운전수’라고 말한다. 가끔 엄마가 학원문학상을 받았던 여고생 때, 가계부 일기로 은행에서 상을 받았던 젊은 시절에 대해 묘사할 때 나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우리 엄마가 임금노동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한다. 나처럼 글을 쓰는 일을 했다면, 아마 나보다 잘하지 않았을까?


 

주부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것
여전히 아이들과 나를 돌보는 엄마
나의 노동은 엄마의 무임금노동에 빚져

 

그 시절은 많이들 그랬다. 생계부양자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돌봤다. 엄마들은 늘 ‘백업’하는 존재였다. 그런 엄마들은 딸을 ‘커리어우먼’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아마 자신처럼 ‘백업’하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다행일까. 자라면서 남자와 다르지 않다고 교육받으며 대학을 갔고 겨우 취업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뒤늦게 워킹맘이 되는 것은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면서 뼈빠지게 착취당하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지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는 것이 좋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한번은 지나가듯 말했다. “아빠는 그런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친정부모님에게는 용돈을 드리는 게 그렇더라고.” 자신이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는 뜻이다. 마음이 아팠다. 일평생 아이들을 기르고 가정을 돌본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엄마의 노동을 귀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돌아보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이름 없는 자’가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평생 그림자노동을 하며 자기 자신을 귀하게 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 임금노동만 성취인가

아이를 낳고 자주 의심했다. 임금노동에 시간을 빼앗겨 막상 내 아이들에게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나의 삶이 과연 ‘진보’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수천번을 생각해봐도 나는 일도 하고 싶고 아이들도 잘 기르고 싶었다. 깨달았다. 이 사회가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문제지, 내가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엄마의 노동에 대해 말한다. “엄마의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엄마가 평생 나를 돌봐준 덕분에 내가 있고 이제는 내 아이들까지 엄마의 돌봄을 받고 있다”고. 또 “내 바이라인은 사실 임아영·두효순 기자라 써야 맞다”고.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일터에서 만든 임금노동의 성취는 온전히 내 것일 수가 없다고 말이다.


 

사적 공간의 일을 귀하게 생각않는 사회
종일 우선순위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하는
엄마의 반찬·집안일은 왜 성취가 아닌가

 

이제 결혼한 지 7년이 됐다. 지난 7년간 남편과 가사노동을 분배하면서 갈등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더 바쁠 때는 내가 남편을 ‘백업’하는 존재가 될까 겁을 먹고 더 악을 쓰고 집안일을 분배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우리 둘 다 ‘소진’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이제야 내가 결혼 전 집안일에 대해 ‘1’도 모르던 ‘반쪽 인간’에서 나아지는 것 같다. 꼭 임금노동을 하는 것만 성취인가? 엄마의 반찬, 엄마의 집안일 스킬은 왜 성취가 아닌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직접 해보고 알게 된 게 또 있다. 흔히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하루 종일 우선순위를 매기고 정밀하게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 말이다. 엄마가 음식 만드는 과정을 엿보면 굉장히 정교하다. 국을 끓이면서 샐러드 소스를 만들고 고기를 볶으면서 전을 부치는 과정을 동시에 해내는 일. 맛있게 상을 내려면 완성된 음식을 담는 순서도 중요하다. 엄마는 뭐 하나 대충하지 않는다. 차가운 반찬부터 접시에 담고 메인 반찬을 담은 뒤 밥과 국을 퍼서 먹는다. 그래야 음식이 덜 식기 때문이라는 것을 난 이제야 알게 됐다. 엄마밥을 먹은 지 이제 37년이나 됐는데.


 

주부의 삶은 하루 종일 표가 안 나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수행하는 삶이다. 일평생 그 일을 한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매기고 순서대로 수행하는 작업에 능숙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아이들을 기르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됐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금노동을 동시에 하면 일의 총량이 늘어나는데 우선순위를 고려해 일의 순서를 배열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집에서는 빠른 일처리가 필요한 것은 내가 맡고 꾸준한 작업이 필요한 것은 남편이 맡는다. 성격이 급한 대신 손이 빠른 나와 성격이 느린 대신 꼼꼼한 남편의 성격대로 자연스럽게 배분됐다. 지난해까지 아이들 기관에 관한 행정 업무를 내가 처리하다가 올해부터는 둘 다 어린이집, 유치원 알리미를 받기 시작했다.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기관에 연락하는 일을 남편과 공유하니 빼먹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남편과 ‘함께’ 육아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의 숙련노동 기록 ‘장모님 레시피’

최근 통계청이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2014년 명목 국내총생산의 24.3%를 차지한다고 평가했다. 시간당 가사노동의 가치는 1만569원으로 3인 가족 기준으로는 연간 2132만원으로 계산됐다. 성별로 보면 1인당 기준 남자는 346만원, 여자는 1076만원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세 배 이상 높았는데 여자가 3배 더 가사노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여자가 가사노동을 3배 더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한 대가는 지급되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가사노동 평가액 비중이 1999년 20.1%에서 2014년 24.5%로 증가하고, 여자는 같은 기간 79.9%에서 75.5%로 줄었다. 집 안에서 남자들의 노동이 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려 한다. 속도는 너무 느리지만 여성들이 집 밖에 나와 임금노동을 하는 만큼 남성들이 집 안으로 들어와 가정 안의 노동을 분배해야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야 깨달은 엄마의 숙련 노동의 가치
그것이 궁금하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태어난 결과물 ‘장모님 레시피’

 

아이를 낳기 전 난 엄마표 반찬의 비법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야 엄마의 숙련노동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된 나는 ‘엄마의 레시피’가 궁금해졌다. 엄마의 숙련노동의 결과물을 누군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둘이서 엄마의 레시피를 기록하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유튜브 계정 이름은 ‘장모님 레시피’라고 붙였다. 동영상을 뒤져보니 지난해 12월에 미역국 레시피를 올린 게 마지막이다. 호박전과 굴전 요리 과정도 찍어놨는데 아직 올리지 못했다. 게으름을 만회하기 위해 올해 김장 때는 꼭 레시피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동영상을 만들면서 알게 됐다. 엄마는 미역국을 끓일 때 덩어리로 된 소고기를 산다. 보통 잘라진 소고기를 사서 참기름에 볶다가 미역도 볶은 뒤 물을 붓고 끓이지만 엄마는 국물 맛을 깊게 내기 위해 덩어리 고기를 산다고 했다. 푹 삶아서 고기 국물을 우려낸 다음 고기는 식혀서 일일이 찢어 넣는다. 처음부터 엄마가 이렇게 미역국을 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다 제일 맛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일 테지. 오늘은 김장할 때 쓸 새우를 사러 강화도에 가셨다. 지난해에는 홍시를 넣었는데 올해는 어떤 실험을 하실지 궁금하다. 언젠가는 꼭 엄마의 레시피 북을 만들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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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된 두진이는 수요일에 미술학원에 다닌다. 이준이는 3시30분, 두진이는 5시 하원하는데 어린이집과 유치원 거리는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친정엄마가 26개월 된 둘째를 데리고 첫째 유치원에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시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26개월이 되면 차가 오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 손을 뿌리치고 달려나가려 해서 혼비백산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 등·하원은 커피 한잔 들고 유유하게 걸어오는 일이 아니다. 차가 쌩쌩 다니는 서울에서 아이 손을 꽉 잡고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일을 환갑이 된 친정엄마가 도맡는다는 게 늘 미안할 뿐이다.


 

환갑 된 엄마에게 등하원 맡기기 미안해
보육을 빙자한 ‘학원 뺑뺑이’ 시작됐다
학원 결정의 1순위 조건은 ‘픽업 여부’

 

학원 결정의 1순위 조건은 ‘픽업’이 되느냐였다. 선생님이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두진이가 학원에 얼마나 흥미 있어 하느냐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라도 어린이집, 유치원을 왔다 갔다 하며 엄마가 고생하시지 않길 바랐다. 픽업이 되면 두진이가 학원 끝나고 집 앞에서 내리게 되니 엄마가 집 앞까지만 나가시면 되니까. 이렇게 보육을 빙자한 ‘학원 뺑뺑이’가 시작됐다.


 

문제가 생긴 건 지난주 수요일이었다. 일하고 있는데 오후 5시30분쯤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 두진이가 할머니가 오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왜 할머니가 안 오실까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술학원에 가 있어야 할 시간인데 무슨 말이지. 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님, 아이들이 미술학원 휴가라고 하는데요.” “뭐라고요? 휴가라뇨. 말도 안돼요.” 미술학원에서 4박5일간 여름휴가라는 사실을 내게 알리는 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학원에 전화를 하니 이미 휴가를 갔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알아보니 같이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 몇 명도 휴가라는 공지를 듣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이렇게 두고 휴가를 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다.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지나 눈앞이 흐려졌다. 아이가 유치원에 있었기에 다행이지 혹시 이 폭염에 밖에 서 있었다면. 그럴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아이 혼자 학원 차를 기다리는 상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이 의사에 무관하게 학원을 보낸 내 잘못은 아니었을까.


 

■ 어린이집 차에 아이가 갇혀 죽었다


한 아이가 어린이집 차에 갇혀 죽었다. 고작 4세라고 했다. 48개월 안팎의 나이였을 것이다. 7시간이나 어린이집 차량에 갇혀 있었다니. 아이들에게 일어난 사고는 이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 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곳에 세워둔 차를 탔을 때 이준이는 외마디를 뱉었다. “엄마, 뜨거워!” 카시트가 달아올라 아이 몸에는 뜨거울 지경이었던 거다. 그런데 7시간을 갇혀 있었다니. 그 아이는 얼마나 뜨거웠을까. 마음이 아파서 더 상상할 수가 없다.

언론이 기사를 쏟아내고 정부가 사후약방문식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어린이집 차량을 타고 등·하원을 한다. 대책이 쏟아지고 정부는 31일 어린이집 차량 ‘잠자는 아이 확인 장치’ 시연회를 연다고 한다. 익숙한 풍경이다. 사고는 반복돼 벌어지고 그때마다 대책을 수립한다고 시끄럽지만 근본적인 처방에 손을 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두진이가 3세일 때 어린이집 학대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선생님이 한 아이 뺨을 때렸고 그를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었던 영상이 방송을 탔다. 불난 여론에 당정이 난리였지만 결론은 싱겁게도(?) ‘폐쇄회로(CC) TV’ 설치 의무화로 났다. 어린이집 CCTV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사고는 줄어들었을까. 선생님 1명당 원아가 너무 많은 현실은 그대로 둔 채 CCTV로 감시하면 아이들이 안전해질까.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어린이집에서의 사고는 반복되는데
그럴 때마다 사후약방문식 대책 뿐
어릴 때부터 보내야 하는 구조가 문제

 

너무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구조가 문제다. 그나마도 갈 만한 어린이집을 찾기 힘들어 차량을 타고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사회다. 그 어린아이들이 아침부터 차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 따라 출근(?)하느라 바쁘다. 부모 시간에 맞추느라 아침마다 전쟁이다. 그나마도 부모가 등·하원을 맡을 수 없으면 할머니에게 의지하거나 등·하원 이모님을 고용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스케줄에 맞추느라 고생해야 하는 구조에서 정작 책임져야 하는 어른들은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는가.


 

바쁜 아침 이준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베테랑(?)이 된 둘째 엄마인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준아, 엄마도 출근하는데 너도 출근해야지.” 아이 어린이집 등원이 어른들 출근처럼 느껴져서 하는 잔혹한 농담이다.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면서 ‘돌봄 공백’이 생길 때마다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텨왔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한편 합리화도 했다. ‘잘 돌봐주는 어린이집을 만나서 다행이야.’ 그런데 그건 운이 좋아서 아닌가? 내 아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히 어린이집 차량은 타지 않아도 되어서는 아닌가?

■ ‘아이 낳으면 행복해요’ 캠페인이 불쾌한 이유

아이를 낳으라는 온갖 캠페인을 곳곳에서 본다. “아이 낳으면 행복해요.” 그런 문구는 너무 불쾌하다. “행복한 거 누가 모르나요? 아이 키우는 행복을 몰라서 안 낳나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다. 아이 낳는 일이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육아가 아무리 벅차도 아이 웃음에 괴로움을 날려버리는 게 또 육아다. 낳아도 키울 수가 없는 상황을 맞댔는데, 낳아도 키울 수가 없다는 걸 주변을 보고 알고 있는데 아이를 낳으면 행복하다고?


 

부모가 돌볼 시간이 절대적 부족한데
아이 키우는 행복을 몰라서 안 낳을까
육아휴직 제도부터 제대로 굴러가야

 

왜 그렇게 키우기 힘드냐고들 묻는다. 부모가 아이를 직접 돌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다. 일하다 알게 된 방송작가가 내게 말했다. “그래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저는 어림도 없어요.”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의 육아휴직 제도는 고용보험 가입자만 쓸 수 있다. 육아휴직 급여도 노동자가 낸 고용보험에서 나온다. 부부가 육아휴직을 1년씩만 써도 신생아는 두 돌 아기로 큰다. 두 돌이 되면 말도 하고 돌보기도 수월해진다. 그러나 주변에서 부부가 1년씩 육아휴직을 사용한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돌도 안 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육아휴직을 1년 했던 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건 첫째가 14개월, 둘째가 10개월 때였다. 얼마 전 11개월짜리 아이가 서울 강서구 어린이집에서 죽었다. 부적격교사의 문제로 밝혀졌다.


 

그런데 내게는 ‘11개월’이라는 숫자가 더 먼저 들어왔다. 돌도 안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저 엄마의 심정을 누가 알까.


 

다행히 나는 1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직장을 다녔고 아이 둘을 그만큼씩 키웠다. 운 좋게 복직 즈음에 맞춰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고 친정엄마가 어린이집 하원 이후에는 아이들을 전면적으로 돌봐주신다. 내가 갑자기 야근해도, 남편이 갑자기 일이 생겨도 친정 부모님이 아이들을 맡아주시기 때문에 아이 둘을 낳는 게 가능했다.

하나씩 소거해보자. 첫 번째, 할머니가 양육을 도와줄 수 없는 집이라면. 12시간씩 돌봐주는 어린이집을 보낸다. 우리 아이만 꼴찌로 어린이집에 남아있는 모습을 봐야 한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집으로 갈 때 계속 엄마아빠를 기다린다. 부모가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정상적인 직장을 다녀도 아이들은 통근 시간 때문에 오전 8시에 맡겨져 오후 7시까지 기다리게 된다. ‘12시간 보육’을 해주겠다고? 정부 당국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12시간씩 있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보육교사들은 부모들의 노동 환경에 자신들의 노동 여건을 끼워 맞춰야 한다. 주로 여성인 그들도 누군가의 엄마일 텐데.


 

두 번째, 믿을 만한 어린이집을 보낼 수 없다면. 시터이모님을 고용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세 번째, 아예 육아휴직조차 안 되는 사업장에 다닌다면. 결국 부부 중 한쪽이 그만둬야 한다. 주로 임금이 적은 여자가 그만둔다. 이후 ‘독박육아’가 시작된다. 구조에 의해 그만두게 됐을 때 그건 자의에 의한 사직일까? 나는 권고사직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여성들을 권고사직하고 있다.


 

“아이 낳으면 행복해요” 같은 캠페인은 그만하라. 정부와 언론은 그런 캠페인을 기획할 시간에 돌봄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고민하라.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에 가는 구조가 문제다. 부부가 법으로 정한 육아휴직을 1년씩만 해도 신생아는 두 돌 아이로 자란다. 그 이후엔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노동시간을 줄여달라. 이미 제도는 다 있다. 핵심은 육아휴직제도, 육아기 단축근로, 시차출퇴근제 같은 제도가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 국가는 돌봄 공백을 메우라

세상 좋아졌다고들 한다. 임신하면 병원에서 검진할 수 있는 바우처가 나오고 출산하면 자치구에서 출산축하금도 준다. 양육수당도 주고 9월부터는 아동수당도 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찔끔찔끔 수당으로 아이 낳는 결심을 할 수는 없다. 아이는 바우처로 키우는 게 아니다. 부모의 시간으로 큰다.


 

둘째를 낳은 많은 이유가 있다. 원래 아이를 좋아했고 엄마가 되기 위해 결혼을 했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첫째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유는 사소하다. 나는 첫째 곁에 있고 싶었다. 자꾸 크는 아이가 아까웠다. 아이가 부모의 품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았다. 둘째를 낳아서 다시 육아휴직을 한다면 첫째 옆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회사를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1년이라도 벌고 싶었다. 둘째를 돌쟁이 아가로 키웠던 1년 동안 행복했다. 신생아를 키우는 것은 첫째를 키울 때처럼 힘들었지만 5세 꼬마가 된 첫째와의 수다는 순간순간을 다 기록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이는 수당 아닌 부모의 시간으로 큰다
육아기 단축근로·시차출퇴근 현실화 등
국가는 돌봄 공백을 메울 방법 고민해야

 

둘째가 클수록 크는 아이들이 아까워 나는 다시 아이들 옆에 있고 싶다는 꿈을 꾼다. 아이들 옆에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셋째를 낳거나. 둘 다 선택할 수 없다.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고 셋째까지 친정엄마한테 키워달라고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철면피 자식이 될 수는 없다. 셋째를 낳아도 셋 다 내가 양육해낼 경제적 자신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 옆에서 시간을 보내는 꿈을 접는다. 저출산이 심각해지니 선진국들의 육아 제도를 다루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라테파파’가 사는 사회에서는 셋째가 유행이라는 인터뷰도 봤다. 셋째는 무슨, 둘째를 낳은 것도 친정엄마 덕분인데.


 

국가는 정책을 분화시키지 말고 돌봄 공백을 메우는 데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다양한 수당도 좋지만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야 다른 정책도 빛이 난다.


 

육아휴직 소득대체율을 높이고 고용보험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면 먼저 그쪽에 하자. 육아기 단축근로와 시차출퇴근제를 현실화하는 방법을 고민하자.

7월부터 주 52시간이 본격화되면서 야근한 다음날 오후 출근한다. 야근 다음날은 아이들을 유치원,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수 있게 됐다. 이준이를 먼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두진이와 손을 꼭 잡고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두진이가 말했다. “엄마랑 유치원 가니까 너무 좋다.” 이런 시간들이 조금만 더 늘어나길 바라는 게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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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커리어연금술사 2018.08.17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첫째 둘째 모두 돌도 되기 전에 어린이집을 보내서 미안한 마음이 아직 남아있어요ㅠ 부모의 시간으로 아이가 큰다는 말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ㅠ 아이돌보는/키우는 행복을 맘껏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구조가 원망스럽네요...

엄마 독감 걸리자 ‘돌봄의 외주’ 비상

친정아빠까지 동원해 겨우 한숨 돌려

예전엔 몰랐다, 돌봄 업무 이렇게 많은지

 

 

■ 독감 파동

 

친정엄마가 독감에 걸리셨다. 오 마이 가드. 엄마가 아프시면 모든 게 ‘정지’다. 게다가 지금은 두진이 방학 중인데. 이를 어쩌나. 엄마 상태를 걱정했다가, 바로 아이들 돌보는 일정 조정하는 문제를 걱정했다가, 회사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걱정했다가… 그 모든 걱정이 뒤섞여 지금 엄마 걱정을 하는 건지, 아이들 돌봄을 걱정하는 건지, 일을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괴감. 엄마가 아프셔도 엄마를 걱정하지 못하는 내 팔자. 엄마 미안해요.

 

두진이가 시작이었다. 지지난주 토요일부터 두진이가 독감 판정으로 타미플루를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독감 예방 접종을 해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동생은 괜찮겠느냐”고 묻자 의사선생님이 말끝을 흐렸다. “이미 동생한테 영향을 줬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되시면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게 하세요.” 주말 내내 마스크를 씌웠건만 이준이도 독감에 걸렸다. 게다가 친정엄마한테까지 옮기다니. 나도 가벼운 감기를 앓고 계속 기운이 없었다. 애들이 아프면 비상이다. 평소 할 일이 세 배 이상 늘어난다. 2~3일에 한번씩 소아과에 데려가야 하고 몸이 아픈 만큼 떼쓰는 것을 받아줘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픈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병을 앓고 이겨내면 되니까. 20개월밖에 안된 아이한테 너무한가? 한국은 그런 사회다. 아이의 독감에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했다가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아프니까 짠하다고 생각하며 아이 옆에 주저앉으면 어떻게 될까. 아이가 아파도 연차를 내기 전 수만번을 생각해야 하는 사회인데. 해야 할 일이 쌓여있어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회. 이준이가 타미플루를 먹고 난 뒤 10분 넘게 악을 쓰며 우는 바람에 소아과로 뛰어갔다. 타미플루를 먹으면 배가 아플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안도하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그런 사회 앞에 한숨을 쉴 시간도 없었다. 친정엄마가 편찮으시면 모든 것이 정지되기 때문에. 친정엄마에게 아이들 돌봄을 외주화하고 있는 내 상황에서 엄마가 아프다는 것은 엄마가 해주셨던 모든 일이 정지됨을 뜻한다. 일요일 독감 판정을 받고 타미플루를 먹기 시작하신 엄마. 잠시 엄마가 괜찮으신지 보러 갔다가 마음이 푹 꺼졌다. 아이들과 달리 독감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서인지 엄마의 상태는 심각했다.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엄마를 보고 다급해졌다. 엄마는 얼마나 아프실까. 아니, 당장 내일은 어떡하나.

 

김상민 기자

 

■ 돌봄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엄마 상태를 온전히 걱정하지 못하는 팔자인 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장 월요일에 어떻게 아이들을 돌볼 것인가. 두진이도 방학이고 이준이는 독감으로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상황인데. 일요일 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좀 나아지셨어요? 내일 제가 쉴까요?” 평소 같으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이 바로 나와야 우리 엄마인데. “쉴 수 있니?”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오전에 아이들을 돌보다가 오후에 친정엄마가 오시기로 했다. 남편은 지난주에 휴가를 사흘 쓴 터라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오전 내 아이들을 돌보는데 이준이가 얼마나 아픈지 계속 짜증을 부렸다. 엄마인 나도 이 짜증과 떼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이런 상태의 20개월짜리를 독감 걸린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나가는 게 맞나. 엄마가 점심 때 우리집으로 오셨다. 어제보다는 나아지셨지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구세주. “아빠가 지금 퇴근해서 오고 계신단다.” 결국 친정아버지까지 동원돼 아이들 ‘돌봄’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렇게 ‘돌봄 업무’가 많은지 몰랐다. 혼자 먹지도, 자지도, 걷지도 못하는 인간의 ‘아기’들을 돌보려면 24시간을 온전히 그 존재에게 내줘야 한다. 언제쯤 혼자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을까. 적어도 열 살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돌봄 업무가 긴지 몰랐다며 한숨을 쉬면서 깨달았다. 이 사회는 ‘돌봄’에 대한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터에서 시달리다 밤에 집에 돌아오는 아빠들도, 부부 중 한 명은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눈치 보며 칼퇴근을 하는 엄마들도 돌봄에 대한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을.

 

그렇다면 외벌이 부부들은 행복할까. 늘 돌봄을 전담하는 쪽은 엄마다. 남성이 부양하고 여성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책임지는 가부장적 모델에서는 그렇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늘 적었고 한국은 그 격차가 크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것은 늘 여성이다. 그 밀려난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 가사노동과 육아를 담당하면 사회는 말한다. “놀면서 브런치나 먹으러 다니는 ‘맘충’ ”이라고. 돌봄노동을 노는 일로 치부하고 천시하는 사회. 그런데 한 번 돌아보자. 우리 모두 누군가의 돌봄으로 이렇게 자랐다는 것을. 그 돌봄이 ‘노는 일’인가?

 

 

반듯한 수건도, 늘 준비된 반찬도

엄마의 드러나지 않던 ‘그림자 노동’

어떻게 ‘노는 일’로 천시할 수 있나

 

■ 그림자노동으로 치부되는 돌봄노동

 

아이를 낳고 나서 친정엄마의 드러나지 않던 노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반듯하게 접혀있던 수건, 언제나 싱싱한 재료로 해주시던 반찬, “엄마 뭐 필요한데요”라는 말 뒤에 바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 그런 엄마도 우리 아이들을 봐주시면서 “놀면 뭐해, 애들이나 보지”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으면 이제 마음이 아프다. 왜 엄마들의 노동을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나. 아이를 키우기 위해 10년 전 퇴사한 아저씨를 최근 취재했다. “저에게는 묻지도 않아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한테 ‘너희 아빠는 회사 안 가니?’라고 묻죠. 백수냐고 돌려묻는 거예요.” 그림자노동인 돌봄노동을 경시, 아니 천시하는 사회.

 

“올리브영에서 버츠비 사기-장례식장-미술학원비 내기-운영위 회의-어린이집 서류 내기-마트에서 토마토 등 사기-인감증명서 발급-영유아검진 문진표-영유아검진.” 어느 쉬는 금요일 내가 메모한 내용이다. 오후 2시 두진이 유치원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4시에 아이들 영·유아 검진을 예약해놓은 날. 자꾸 볼이 트는 이준이 때문에 ‘버츠비’ 크림을 사야 했고, 선배 부친상 조문을 가야 했고, 토마토와 아이들 먹을 것을 사야 했다. 영·유아 검진을 받기 전에는 문진표도 작성해야 하는 등등등. 이렇게 목록화해놓지 않으면 한두 가지 빼먹기 때문에 아이를 낳고서는 늘 메모를 한다.

 

우리집 가사노동은 ‘행정’ 업무는 내가 하고 ‘청소 등 가사노동’을 남편이 맡는다. 어린이집, 유치원 전화 통로도 나다. 나는 매일 머릿속이 분주하고 남편은 휴일에 할 일이 많다. 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끝은 어디인가. 언젠가부터 남편이 집안일을 덜 하네, 더 하네 싸우지 않게 됐다.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하는 집안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자노동을 해결하기 위해선 기계를 들여야 한다. 건조기를 사고 만들어진 반찬을 주문하고 간편식을 사먹는 일상. 아이 얼굴은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보고 재우기 바쁜 일상. 맞벌이 부부들의 일상은 이렇다. 그래서, 행복한가?

 

 

돌봄의 시간을 뺏겨 고통이 되었을 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삶의 활력소

모든 부모가 돌봄의 행복을 쟁취해야

 

 

■ 돌봄의 행복을 모두가 누려야 한다

 

지난주 남편이 두진이 방학을 막아내기 위해 3일간 휴가를 썼다. 출근할 때마다 그날 ‘미션’을 줬다. 아이 방학숙제 도와주라, 빨래를 해놓으라 등등. 돌아와서 아이 방학숙제 책을 펼치니 아빠와 아이의 기록이 가득하다. 그림에 같이 색칠을 하고 동물 숫자를 세서 숫자를 적어놓기도 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도 애 보는 것보다 회사 가는 게 낫지 않아?” 돌봄노동은 고되니까. “아니, 아이랑 있는 것도 좋아.” 남편과 나는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돌봄노동을 ‘엄마’ 몫으로 가두니까 자꾸 돌봄노동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하고, 남편은 돌봄노동에서 ‘소외(?)’되니까 오히려 아이를 돌보고 싶다 하는 아이러니. 우리가 성별이 다르게 태어났으면 더 편했을까.

 

아니다. 돌봄의 시간을 빼앗기니 돌봄이 어려워진 게 문제다. 돌봄이 고통이 된 것이 문제다. 돌봄이 고통인가? 아침에 잠든 아이들이 침대에서 엄마가 있는 곳을 더듬다가 엄마 몸에 손이 닿으면 눈을 뜬다. 눈을 뜬 두진이를 먼저 꼭 안아줬다. “엄마가 어제 늦게 와서 얼굴을 못 봤네. 어제 못 보고 자니까 아쉬웠어”라며 애정 표현을 하고 나니 아이가 활짝 웃으며 품속으로 파고든다. 파고든 아이를 꼭 끌어안고는 생각한다. ‘1차 충전 중.’ 형과 꼭 안고 있는 엄마를 보자 이준이도 자기를 안아달라고 한다. “삼단 합체!”라고 외치면 두 아이가 내 품속에 파고든다. 두 아이를 꼭 끌어안고 생각한다. ‘2차 충전 완료.’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내 인생의 충전의 시간이 됐다. 이 안온한 시간들이 삶을 유지하는 힘이라는 것을 난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이게 행복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돌봄의 행복을 모두가 누려야 한다. 남편도, 나도 이 행복을 오래 누리길 바라면서. 모두가 돌봄의 시간을 쟁취해오는 미래를 또 꿈꾼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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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이라는 말이 숨기려는 것>


 한 언니의 글에서 “워킹맘이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다. ‘밖에 나가 일하는 엄마’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 언니가 ‘취업모’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저 임금노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 ‘워킹맘’이라는 단어에 숨은 가사노동과 육아에 대한 경시, 어쩌면 천시를 나도 몰랐던 건가. 한 국회의원이 ‘밥하는 아줌마’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화가 났다. 국회의원 정도 되는 여자는 밥하는 아줌마들을 무시해도 되나.

 

 두 번의 육아휴직 동안 ‘잘 쉬어’, ‘쉬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들으면 분했다. ‘쉬긴 뭘 쉬어. 하루종일 신생아랑 있어봐라’ 라며 입술을 꽉 깨물 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산 우리 엄마. 엄마는 두진이와 이준이를 봐주면서도 “놀면 뭐해. 손자들 돌봐주는 거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엄마가 놀긴 뭘 놀았어요. 나를 키우고 수많은 일들을 했잖아”라고 말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조차도 휴직하기 전 글을 썼었다. “이제 내가 성취라 믿어온 것들은 잠시 멈춰지겠지만”이라고.


 이 ‘성취’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좋은 회사 직원으로 살라’는 이 성취의 기준을 별생각없이 받아들였던 10대 20대의 나를 돌아보는 요즘, 그 성취의 기준이 흔들리는 요즘,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성취를 지향하라고 가르쳐야 하는지 헷갈린다.

 

 두진이가 일곱살이 되면 혼자 설거지하고 싶다는 소망을 그렸다.

두진이가 열심히 설거지하면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서 칭찬해주는 모습. 사진에 엄마는 없지만 할머니는 있다. 이 사진을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해야 하는 건지 나는 여전히 헷갈린다.

 


 아이를 낳고 난 내 시간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회사 와서 밥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해방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그런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렸다는 고백을 하는 중이다. ‘돌봄’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내 몸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돌보는 경험.

 

   주말에는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쓴다. 작은 존재를 돌보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작은 아이 기저귀를 갈고 졸리면 혼자 자지 못하는 둘째를 안고 어르는 이 ‘작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하루종일 그 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길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엄마의 노고를 새삼 되새기는 중이다.


 고3 때 새벽에 일어나 아침 일찍 학교를 갈 때 엄마는 늘 새 밥을 지어줬다. 내가 좋아하는 두릅을 데쳐주고 삼치를 구워줬던 엄마의 밥상을 ‘받고’ 학교를 가는 일이 당연했었다. 그런데 ‘임금노동’을 하는 나는 집안일을 다 ‘아웃소싱’한다. 빨래는 건조기에, 반찬은 ‘더반찬’ 배송에 의지한다. 아직 두 돌도 안 된 우리 둘째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사온 반찬’을 먹여 키운다. 나는 가끔, 아이들 밥상이 내가 먹었던 밥상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헷갈린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아웃소싱해야 하는 내 인생이 맞는 건가.


 그렇지만 난 여전히 내 일을 좋아한다. 회사 가는 것이 좋고 회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좋다. ‘82년생 김지영 세대’들은 다 그럴 것이다. 자기를 증명하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런데 합계출산율이 1.06명을 찍을 것이라는 시대에 나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평일엔 친정엄마의 ‘돌봄노동’ 의지해 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엄마에게 미안한 ‘죄인’ 신세지만 또 친정엄마의 ‘돌봄노동’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늘 안도한다.

 

    운이 좋아서다. 서울에 계시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흔쾌히 돌봐주겠다고 하는 ‘운’ 말이다. 그래서 난 가끔 내가 쓰는 글이 두렵다. 친정엄마를 착취해 일을 유지하는 내 상황이 도와줄 가족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어떤 엄마들을 속상하게 만들까봐.


 그런데 왜 엄마들만 자꾸 일이냐, 육아냐를 선택해야 하나. 왜 엄마들만 ‘전업맘’, ‘워킹맘’으로 구분하나. 맞춤형 보육 논쟁 때 어린이집에 보내는 전업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에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는 하루종일 아이만 돌봐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아이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경단녀’들은 아이에게 속박된 신세로 늙어야만 하나. 공부를 하든, 취업준비를 하든 자기 시간을 가지면 안되나. 정말 답답할 때는 친구를 만나 커피숍에서 브런치를 먹으면 안되나.

 

   육아휴직 중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친정엄마가 바쁘실 때라서 치과 예약을 두 번 미루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몸에 달라붙어있는 이 작은 아기 때문에 내 이 치료도 못 받는 게 ‘엄마의 신세’다. 그마저도 엄마가 아이를 봐주셔서 난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가끔 ‘워킹맘의 성공 서사’를 읽는다. 대부분 ‘할머니 육아’ 덕분에 끝까지 갈 수 있었던 얘기들이다. 어떤 회보에서 워킹맘이 자식 대학 잘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을 읽을 때는 울적했다. 할머니 덕분에 아이를 키우고 결국 엄마가 아이의 적성을 파악해 학원을 고르고 ‘서포트’해 대학을 잘 보내는 이야기, 개인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답답했다. 이제 난 그런 성공 서사가 지겹다. 내 아이들에게 이 구조에서는 이렇게 사는 게 유리하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1500원짜리 커피를 사 먹었다가 어떤 ‘남자’들이 자기를 ‘맘충’이라고 욕하는 걸 듣는다. 토요판에 일하며 아이 키우다 소진된다고 글을 쓰니 ‘외벌이하며 아껴쓰라’는 댓글이 달렸다. 여자들은 일하러 나오면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비난받고 집에 있으면 ‘논다’고 비난받는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전업맘은 ‘논다’고 말하고 워킹맘은 ‘죄인’이 되는 세상이니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거다.


 입사 동기인 남편과 나는 월급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누가 그만둬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을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가끔 헷갈린다. 남성은 나가서 일하고 여성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가부장적 모델’을 버린 국가들이 출산율 반등에 성공했다. 엄마들만 전업맘, 워킹맘, 경단녀로 구분하는 사회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암담한 미래 뿐이다. 돌봄노동을 아빠와 엄마가 함께 할 수 있어야, 아빠가 돌봄노동을 할 수 있도록 집에 일찍 돌아와야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배우자보다 임금이 낮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활기차게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길. 하루종일 회사에서 시달리느라 아이 얼굴도 못 보는 한국 남성들도 일찍 퇴근해 아이하고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소망해본다.


 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된 “워킹맘이라는 표현이 정말 싫다”는 말을 했던 언니는 밖에서 보기엔 ‘전업주부’다. 임금노동을 하진 않지만 수많은 활동을 한다. 임금노동보다 의미있어보이는! 아이를 공동육아로 키우면서 선생님을 하고 아이 초등학교 교육도 공동육아처럼 시키고 싶어 학교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정치하는엄마들’이라는 공동대표로도 열심히 뛰고 있다. 그가 쓴 발제문, 토론문을 보면 어떤 전문가가 쓴 글보다도 훌륭하다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활동들이 ‘돈’으로 치환되지 않을 뿐. 지난해 만난 사람 중 가장 빛나는 사람, 응원한다는 말로 이 글을 마친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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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니 2018.01.24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읽었어요 같은 육아맘이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혹시 죄송하지만 티스토리 초대장 보내주시면 안되나요?
    01194358693@hanmail.net
    티스토리 하고픈데 초대장이 있어야 한대요ㅠ부탁드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