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추억은 누가 빼앗아갔나
엊그제 친정아버지에게 농담처럼 건넸다.
“아빠, 30대는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이 많아 늘 시간이 부족하고 육아에 집중할 수가 없네요.”
투정부리는 것처럼 느끼시면 어쩌나 했는데 아빠는 급 진지 모드.
“너희들 어릴 때는 주6일이라 얼마나 바빴는지. 일주일 내내 일하고 일요일에는 늦잠 좀 자고 싶은데 너희들이 깨워서 정말 괴로웠다.”
그 말을 듣고 “맞다. 왜 애들은 새벽같이 일어나지” 하며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는 두 아들들(6세+7개월)을 떠올렸다가 어린 시절 내가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 아빠랑 놀고 싶은데 아빠는 늦잠을 주무시고 나랑 동생은 일요 만화, 일요 드라마(<짝>,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이런 거) 보던 생각. 침대도 쓰지 않던 시절 요에 네 가족이 도란도란 티비를 보고 늦잠을 자던 풍경.
‘아 그립다’ 생각했지만 우리 아빠의 육아 시간은 누가 빼앗아갔나 생각하니 또 불끈.
어린 시절 아빠는 늘 바빴다. 잠들기 전에 아빠가 퇴근했던 기억은 손에 꼽는다. 하루는 아빠가 며칠째 연달아 회식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던 날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셨다. 과로였을 것이다.
아빠는 외손자인 두진이, 이준이가 태어난 뒤 변했다. 나에게는 그렇게도 엄하던 우리 아빠, 늘 강하게 커야 한다고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는 우리 아빠, 아파도 참아야 한다는 아빠 말을 듣고 끝까지 참다가 결국 병원에 실려갈 뻔한 열한살 딸을 데리러 왔다가 놀랐던 우리 아빠, 그렇게도 엄했던 우리 아빠는 손주들과는 얼마나 잘 놀아주시는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잘 놀아주시니 두진이는 할아버지랑 도둑놀이하기, 책 읽기, 같이 동네 뒷산에 가기를 참 좋아한다.
“아빠 왜 나랑은 그렇게 안 놀아줬어요?” 한 번은 농담을 던지니 민망한 듯 웃으신다. 엄마도 “너희 아빠가 너희 어렸을 때 이렇게 놀아줬으면 오죽 좋았겠니”라 하신다.
30대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놀아주기 힘들다. 회사에 매여, 일에 매여. 아빠도 그랬을 거다. 게다가 그때는 주6일 직장에 투신하던 시대가 아니었나.
첫째 육아휴직 후 복직했을 때 한번은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종종거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너를 보면 20여년 전 같이 일하던 후배 여직원이 생각난다"고. 그때는 그 직원이 칼퇴근하는 게 참 싫었는데 그 직원도 너처럼 아이 재우러 종종걸음으로 눈치 보며 퇴근했을 것 같다고. 이제 와서 그 직원에게 알게 모르게 눈치 줬을 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나는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라고 답했지만 아빠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아빠도 만약 일하는 딸을 두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는 주6일씩 직장에 인생을 투자했지만 IMF 때 명예퇴직했다. 이후 아버지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투신했지만 버려졌던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다. 그렇지만 시간은 흘러버렸고 아빠와 어린 내가 추억을 쌓을 시간도 사라져버린 뒤다.
아빠와 나의 추억은 누가 빼앗아갔나. 요즘 아빠가 손주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보며 새삼 울적. 더 울적한 것은 20여년이 지났지만 요즘 아빠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손주 보고 활짝 웃는 아부지.
한 출입처에서 일했을 때였다. 친해진 여자 직원이 해준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부장님이 여직원들 퇴근하고 나면 남직원들만 데리고 술 마시러 가요. 거기까진 좋은데 그 자리에서 중요 의사결정을 하고 다음날 출근하면 여직원들만 '어 이게 뭐지' 하게 되는 경우가 여러번인 거예요. 그래놓고 술자리에 빠졌다는 식으로 여직원들 뒤에서 험담하고..."
그 얘기를 듣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 간부는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여자 직원은 이런 말도 했다.
"아빠들이 그렇게 회사에 매여있으니 엄마들이라도 일찍 집에 가는 거 아녜요. 진보는 무슨 진보예요. 가부장 진보가 너무 많아요."
그때 들었던 생각. 회식자리에 끌려갔던(?) 남직원들은 좋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거다.
왜 우린 회사 직원들과 지내는 시간이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보다 긴 걸까. 어쩜 노동시간 단축을 바라는 것보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고 쓸데없이 퇴근할까 말까 눈치보는 시간만 없애줘도 삶의 질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쓸데없는 주말 근무와 주말 등산과 같은 이벤트도 제발 없애고. 이렇게 소진되는 시간이 많고 어차피 야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상 일할 때 대강대강 일하게 되고 생산성은 OECD 평균 이하인 것.
남편은 '유럽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이를 낳고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까’ 애먼 남편한테 한탄을 많이 했다. 첫째를 낳고 복직했을 때가 남편과 다툼이 제일 심했다. 사내 커플인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남편과 내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첫째는 엄마를 더 많이 찾았고 엄마 없이는 잠도 못 잤다. 36개월까지 자다가 깨서 한 시간씩 우는 아이를 붙잡고 윽박도 지르고 같이 울기도 여러 번. 밤에 잠을 잘 못 자니 컨디션은 늘 바닥이었다. 친정에서 아이를 봐주다보니 온갖 감정노동과 시간 조율도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주 화가 났다.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짜증이 올라올 때마다 남편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당신은 편하잖아.”
회사 선배들은 내게 남편에게는 묻지 않는 질문을 가끔 했다. “밥은 잘 해줘?”, “집에 일찍 가야하는 것 아냐?” 같은 질문을 들으면 뒷목을 타고 열이 뻗쳤다. 같은 일을 하는데 왜 남편에게 밥을 해주냐는 질문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절대적 애정과 지지를 보이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꿈꿨던 ‘일하는 엄마’, ‘커리어우먼’의 환상은 잘못됐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와 남편은 같은 일을 하고 동시에 부모가 됐지만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어떤 선배들은 "남편 좀 놔줘", "남편 좀 그만 괴롭혀"라며 장난을 던지기도 했다. 장난이었지만 속으론 늘 속이 상해 퇴근해 애먼 남편에게 한풀이를 했다. 친정 아버지조차 "황서방, 요즘 술을 못 마셔서 괴롭지"라고 하시길래 "아빠, 나도 술 못 마신지 오래됐거든요!" 버럭 한 적도 있다.
이런 일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정도일 줄 몰랐을 뿐.
결혼한 이후 장난스럽게 늘 말했다.
“남편의 목표는 유럽 남자니까 한국 남자들을 기준을 잡고 이야기하지 마.”
육아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집안일도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가부장적인 남자들과 비교해서 집안일과 육아를 대충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남편은 과연 한국 사회에서 '유럽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한국 현실은 그대로인데 유럽 아빠를 강요하는 게 맞는 걸까.
둘째를 낳고 보건소에서 산후우울증, 아기 건강 등을 체크해주고 아기 돌보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전화가 왔다. 요즘 구청에 새로 생긴 주민 서비스인듯했다. 출장 나온 선생님이 이것저것 체크해보시더니 '양호'한 상태라면서 "남편이 잘해주나 봐요?"라고 말했다. 뭐라 답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은 덧붙였다.
"아빠도 산후우울증을 겪는거 아세요?"
아빠들도 아기가 태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겪으면서 우울증이 온다는 얘기였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축복이 맞지만 그 아기를 건사하기 위해 일상은 크게 변한다. 아기를 재우기 위해서 부모가 잠을 포기해야 하며 아기를 먹이기 위해 부모는 하지 않던 노동을 해야 한다. 그밖에 수많은 노동 노동 노동... 그 노동의 양은 예상치 못한 양이었다. 그리고 책임감. 아빠들의 산후우울증은 아마 일상의 변화 + 한국 사회 특유의 '가장 책임감'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주말에는 체력이 소진되어 눕게 되는 게 아빠 탓이겠나.
그러나 몸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육아 시간은 짧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육아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오는 특별한 경험이다. 아기에 맞춰 모든 일상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아기가 한번 웃으면 그 괴로움을 잊고 마는 특별한 순간들. 남편은 자주 "아이들이 크는 게 아쉽고 아깝다"고 말한다. 그렇다. 아이들은 열 살만 되어도 지금만큼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귀여운 꼬마들이 금방 굵은 목소리로 "아빠 밥 줘, 엄마 돈 줘" 이러겠지.
그러니까 이 특별한 순간들을 엄마 아빠가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추억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아이들은 열 살까지의 경험을 가지고 부모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온갖 육아서들은 말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시간을 같이 많이 보내라고. 그렇지만 왜 이 사회는 그 시간을 주지 않나.
내 남편은 우리 아빠처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냈다고 후회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빠와의 추억 쌓을 시간을 빼앗겼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빠와 다채로운 추억을 쌓기를 바란다. 문제는 참 간단하다. 쓸데없는 야근, 회식, 주말 근무, 주말 등산 이런 거 안 하면 된다. 그리고 근무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면 된다. 주6일 일하던 시대 주5일 도입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많았지만 주5일 되어도 망하지 않았다.
많이 일할수록 득보는 사람들이 누군가. 육아와 가사노동 문제를 가지고 남녀가 싸울 일이 아니라 힘을 합쳐 그 득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해야 한다.
“아빠와 추억 쌓을 시간을 확보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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