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특' 일기/폭풍육아

[임아영기자의 폭풍육아]그들의 불안을 알기에…‘스카이캐슬’ 속 엄마들에 공감할 수밖에

“위 아동은 초·중등교육법 제13조에 의하여 아래 학교에 배정되었사오니, 이 통지서는 취학할 초등학교의 예비소집에 참석할 때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야근 후 집에 돌아오니 탁자 위에 ‘취학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아, 꼬맹이가 벌써 ‘초딩’이 되다니. 아이를 낳은 게 엊그제 같은데 학부모가 되다니. 태어날 때 신장이 54㎝였던 아기는 이제 2배 이상 자라 120㎝를 넘어섰다. 이제 두 팔로도 안기 힘들어진 첫째가 가끔 31개월 된 둘째처럼 안아달라고 하면 곤란해진다.


 

“두진아 엄마가 안아주고 싶은데….” 못내 미안해져 잠깐 업으면 첫째는 “엄마가 힘들어하니 내려올게”라며 의젓하게 군다. 이렇게 의젓하게 굴 정도로 커버린 내 아이가 이제 ‘학생’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학생’이 된다는 게 너무 짠하다. 한국에서 학생이 된다는 건 적어도 내겐 ‘경쟁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겨우 만 6년1개월 산 어린이인데 ‘경쟁’이라니.


 

마냥 꼬맹이같던 첫째가 ‘초딩’이라니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지는 세상에서
아이가 클수록 내 가슴은 불안을 품는다


 

2012년 태어난 첫째는 예민한 아기였다. 많이 울었고 엄마 품을 떠나는 걸 두려워했다. “울지마 아가야. 엄마 여기 있잖아.” 조리원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아기를 내 배 위에 눕혀 재워야 했다. 아기는 엎드린 채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만 잠이 들었다. 조금만 떨어져도 비명을 지르듯 우는 아기를 안고 가끔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내가 너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마’ 했다. 그러다가 가끔 아이의 두려움이 내게 옮겨오면,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치면 나 역시 크게 울었다. 그러고 나면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안정을 줘야 하는 당신이 내게 이러면 어떡하냐는 듯이.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내 안에 불안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더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을 가다듬지 못하는 엄마인 것이 미안했다.


 

아이가 커 갈수록 아이 뒤의 세상이 비쳐 걱정이 더 커진다. 이제 군대에서의 사고를 봐도, 구조의 모순이 누적되고 누적돼 터져버리는 사건들을 봐도, 비정규직의 안타까운 죽음을 봐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졌다. 그 장애물들이 혹시나 아이의 인생에 드리울까 두렵다. 담담해지려고 호흡을 가다듬어도끔찍한 사고가 연상되는 사회다. 아니, 어쩌면 세상 자체가 그런 것일까. 어릴 적 엄마가 내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딸을 믿으라” 했는데. 엄마가 된 나는 작은 것에도 불안해한다. 부모가 담담하고 담대해야 아이가 굳게 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내 ‘가슴’은 자주 불안을 품는다.


 

■ 한국 사회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 사회에서 그 불안은 교육의 사다리 위로 올라갈수록 증폭된다. “두진이 엄마는 영어 안 시켜요?”라는 말을 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내 눈빛도 흔들릴 것이다.


 

친정엄마가 “다른 애들은 이것저것 많이도 하던데 학습지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실 때 “일곱살이 무슨 학습지예요”라고 대답하지만 주변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사교육 시장의 소비자가 됐다는 사실에 나도 불안하다. 초등학교에 가면 본격적인 선행 사교육 시장이 열릴 텐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초등학생이 되면 어차피 경쟁에 노출될 텐데 유치원 때까지는 그냥 마음껏 놀게 하고 싶다”고 대답해왔는데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시기가 온 것이다.

 

 

숫자 개념을 몰라도 ‘423탄’까지 이어진 책을 만든 아이. 책 내용을 설명하며 상상을 펼친다.

 

얼마 전 동네에서 첫째 유치원 친구 엄마를 만났다. 그는 이미 첫째 딸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보낸 ‘선배 엄마’다. 그는 내게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한글은 다 읽어야 하고 100까지는 셀 수 있어야 하며 10 이하의 숫자를 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학교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한글책을 몇 권 사주는 것 말고는 한글 공부를 시킨 적이 없는 나는 불안해졌다.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붙잡고 ‘숫자 놀이’를 하자고 재촉했다. “두진아 숫자 세보자. 엄마가 먼저 셀게. 일!” 아이는 놀이인 줄 알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이!” 100을 넘어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이는 130까지 세고 그만하자고 했다. 그 안도감이란…. 만 3~5세 교육과정을 잘 운영한 유치원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돌봄 공백이 전면화되는 초등학교 1학년
모두들 사교육으로 미리 배우는 구조에서
점점 더 커지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선배 엄마’의 조언이 절대 진실이라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오전 11시40분 하교, ‘돌봄 공백’이 전면화되는 초등학교 1학년. 그 공백을 채우는 것에 이제 아이 교육까지 더해질 것이다. “보육은 할머니가 해줄 수 있지만 교육은 할머니가 해줄 수 없어”라는 말이 횡행하는 사회다. 학교에 가서 다 배우면 된다고 공교육은 말하지만 모두들 사교육을 통해 미리 배우고 오는 구조에서 점점 더 학년이 올라가면, 중학생이 되면, 입시를 코앞에 두면 어떻게 될까. 나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역할에 학습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업무(?)까지 엄마가 짊어진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떤 포즈를 취하게 될까.


 

■ ‘아빠표 한글’은 없으면서

인기 드라마 <SKY(스카이)캐슬>은 ‘학습 매니저 엄마’가 극대화되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아이의 학습을 컨설팅하고 지원하는 전면적인 매니저의 역할을 도맡는 상류층 전업주부. 그는 전업주부지만 가사노동은 입주도우미에게 외주를 준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만큼은 살아야 하니까!”라며 두 주먹에 힘주는 그는 수십억원이 드는 ‘학습 코디’까지 고용해 딸의 서울대 입성에 매진한다. 그런 그에게 원조 대치동 ‘돼지엄마’(입시 정보나 공부법 등과 관련해 정보력이 뛰어난 엄마)인 시어머니가 말한다. “중심은 엄마인 네가 쥐고 있어야 해.” 아이의 성적이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아이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습을 컨설팅하는 매니저 엄마. 소름 끼친다.


 

‘아빠표 놀이’는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
엄마는 아이의 ‘학습 매니저’가 된다
그저 담담하게 사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드라마 속 아빠들은 하나같이 권위적인 ‘가부장’이다. 짐짓 아이 성적에 ‘쿨’한 척하지만 아이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엄마 탓’을 하는 가부장. 남자들은 거들먹거리며 퇴근 후 옷을 아내에게 건네고 아이 성적에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탓한다. 드라마를 빨려들어가듯 보면서도 뒤끝이 쓰다. 2000년하고도 18년이 지난 세상에서 여성은 여전히 자녀를 백업한다. 가사노동을 외주 줄 수 있는 소득을 지녔어도 공부는 전적으로 ‘엄마 책임’이다. 경쟁이 격화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들이 쓰는 전략은 새치기를 해서라도 자녀를 ‘톱’으로 올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톱’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톱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그 세계에서 추방될 것이다. “네가 나한테 인정받을 마지막 기회야.” 남편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는 그에게 그렇게 말한다.

 

과연 의미 있는 역할인지 의심스럽지만 이 사회에서 엄마는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엄마인가, 사회인가. ‘엄마표 한글’ ‘엄마표 수학’ ‘엄마표 놀이’까지 있지만 ‘아빠표’는 하나도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서 남편과 일을 분배해도 사회가 엄마의 일을 강조하면 결국 내 일이 늘어나는 구조. 공교육의 몫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몫이 되는 구조에서 엄마의 역할은 기이하게 늘어난다. 가사노동을 외주 주거나 기계에 맡겨도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은 이상한 쪽으로 확장되는 사회.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아이의 학습 매니저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의 성적보다는 아이의 관심사에 귀 기울여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떠넘겨진 역할을 혼자 떠안지 않겠다. 남편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가 어떤 흥미와 적성을 지니고 있는지 대화하고 싶다.’ 이렇게 다짐해도 불안이 교묘하게 파고든다. 부모는 그저 한발 앞서 걷는 사람일 뿐이고 세상은 빨리 변하며 아이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것,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힘을 내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 ‘스카이캐슬’ 속 괴물 엄마는 왜 호응받는가

말은 쉽다. 초등학교에 가면 영어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압박에 더 전방위적으로 노출될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이 3학년부터 시작한다 해도 이미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배워오는 시대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잘 모르겠다. 모든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원한다. 그 행복의 모습이 어떤 모양이냐가 다를 뿐이다. 임금 격차가 크고 비정규직을 차별하며 기술직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적다면 당연히 행복의 모습은 더 단조로워진다. <스카이캐슬> 속 엄마들이 호응받는 이유는 이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다양한 행복을 상상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양한 행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은 지속적 대화를 나누는 힘
답을 알지만 선택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는 답을 모른다. 다만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다잡을 뿐이다.

만화 <출동! 슈퍼윙스>에 빠져 있는 첫째는 요즘 매일 슈퍼윙스책을 만든다. 1탄부터 423탄까지 나왔다. 100을 넘는 숫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이가 설명하는 책 소개에서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을 듣는다. "엄마, 남극 세종기지는 있잖아~.” 세계를 여행하는 만화를 보는 아이는 세계를 탐험 중이다. 아이가 어릴 때 마트 문화센터를 다녔다. 소근육 경험을 다양하게 해주고 다양한 놀잇감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취지였다. 독박육아의 괴로움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그 돈이 아깝다. 외부 환경보다 집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첫째는 문화센터에서 자주 위축돼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놀고 싶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고교 교사인 친구가 말했다. “부모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지만 중·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아이들과 대화를 하지 않더라고.” ‘공부 못하면 큰일 난다’는 대화만 하게 되는 구조라면 대화를 피하게 되지 않을까. 정말 중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가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힘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답을 안다. 그러나 답을 선택하기 어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