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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폭풍육아

[둘이 함께 '반반육아'] 부모의 '불안' 다독이기

주왕산으로 가족 나들이 떠난 날. 아이들이 업어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스카프를 잡고 따라오라고 이끈다. 두 아들이 다루는 노하우가 느는 만큼, 육아의 불안감도 커진다.

 

▲덧셈 뺄셈 늦는다고…다그친 엄마, 아이가 어려움 겪을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생이 된 첫째는 얼마 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덟 살이 되고 학교 가면서 힘든 일이 많아졌어.” 아이가 가끔 이렇게 툭 말을 던지면 마음이 싸해진다. “왜? 뭐가 힘들어?” “글씨 쓰는 것도 힘들고 교과서 하는 것도 힘들어.” 수업시간이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직 10분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가 40분 동안 앉아 있으려면 힘들겠지. 뭐 하나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빠를 닮아 글씨도 꾹꾹 눌러쓰는 첫째를 보면서 이렇게 공들여 하면 힘들 텐데 속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던 터라 더 마음이 싸해졌다.

 

아이가 며칠 동안 수학익힘책을 나머지 공부로 들고 왔다. 유치원을 다니며 ‘엄마표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낸 우리 부부의 방침(?)이 무리였던 걸까. 영어도 8세에 노출을 시작한 결정이 잘못된 걸까. 의외로 영어는 흥미로워하며 할머니가 주민센터 수업에서 배워와 알려준 영어 뜻을 내게 묻기도 했다. “엄마, you have a good memory가 무슨 뜻인 줄 알아?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야.”

 

의외의 복병은 ‘빼기’였다. 덧셈·뺄셈은커녕 숫자 공부를 거의 해본 적 없어서인지 힘들어한다. 어린이날 서점에 데려가 아이가 좋아하는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을 선물로 사주면서 수학 문제집을 두 권 샀다. 퇴근을 하고서는 옆에 앉아 같이 수학 문제집을 푼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얼른 집에 가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다.

 

선행학습 없이 학교 보낸 게 무리였을까
숫자 공부 해본 적 없는 아이가 힘들단다
학교에선 놀이·점심시간만 좋다는데…

 

모든 아이가 빛난다. 우리 아이도 빛나는 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풍기 하나를 봐도 어디로 전기가 들어와 날개가 돌아가는지를 탐구하는 아이다. 12월생이라 조금 늦고 뭐든 꼼꼼하게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수학의 원리야 익히면 금세일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그럼 학교 다니면서 즐거울 때는 언제야?” “놀이시간이랑 점심시간.” 1학년은 2교시가 끝나고 30분간 놀이시간이 있다. “엄마도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점심 먹으러 다녔던 것 같아.” 아이를 다독이고 싶었다.

 

공부하며 집중 않는 아이에 화 내고…
다음날 만난 담임 선생님의 차분한 말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연습하면 돼요”

 

물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하품을 하며 딴생각을 하자 화가 났다. “집중 안 할 거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학도 국어도 안 해도 돼. 공부 안 해도 돼.” 단호한 말투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눈이 똥그래졌던 첫째는 엄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했다. 차분한 말이 돌아왔다. “어머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이가 이해력이 떨어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연습만 하면 돼요. 수학은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는 그대로다.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다. 덧셈·뺄셈을 못할 리가 없는데 다른 아이보다 늦다고 불안해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라니. 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면서도 나는 불안했다. 드라마에서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산재를 은폐하는 사업장에서 근로감독관이 활약해 문제를 풀지만 드라마는 판타지고 현실은 대부분 시궁창이다. “엄마, 나는 커서 버스기사 안될 거야.” 사장의 말도 안되는 지시에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운전하며 꾸벅꾸벅 조는 버스기사들의 장면이 지나간 뒤 첫째가 말했다. “버스기사는 잘못하게 되잖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말했다. “아냐, 기사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회사 사장의 잘못이야.” 허공을 맴도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웠다. 우리 아이는 커서 안전한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인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인가. 아이가 빼기를 못한다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아이가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마음 탓일 게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잘 살 수 있는 걸까. 사람값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를 갖는 것, 갈수록 이렇게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뭐 어때, 결과는 내 몫이 아니야.” 내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쿨한 내가 왜 아이들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지는가. 부모가 되고 보니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는 거였다. 인생이란 괴로움과 후회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내 아이는 그 괴로움과 후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불가능한 마음을 품고선 어떤 세상인가 올려다보면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한다. 남편에게 말했다. “부모가 되면서 사회를 다시 잘게 잘게 쪼개 먹는 느낌이야.” 어릴 땐 엄마가 비관적 전망을 말하면 화를 냈다. “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부모가 되어보니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자식이 어떤 일에 처했을 때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사회를 좀 더 잘 알게 되어서일지 모른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못 맞출까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지는 부모 마음
결국 그 불안을 가다듬는 게 숙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숙제는 불안을 가다듬는 것 아닐까.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 속에 자랐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야, 어떻게 살고 싶어? 무엇이 너를 즐겁게 하고 어떤 순간이 너를 두근거리게 하니.’

 

이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려면 사람이 도구로 취급받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가장 아득하다. 이 아득함이 몰아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이 세상에 아이들을 내놓았다는 게.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실컷 놀게 못 해줬나…자책한 아빠, 모든 위험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때는 자주 자전거형 유모차에 태운다. 녀석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지만, 아직 체력이 약한 녀석은 집에 끝까지 오지 못한다. 중간에 안아달라고 칭얼대기 마련이다. 안아주면 녀석을 바라보며 호흡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맞다, 힘들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져서 조금만 걸어도 팔이 뻐근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훌쩍 커버린 녀석은 이제 유모차는 안 타려고 하는데 다행히 자전거형 유모차는 잘 타려고 했다.

 

유모차 타고 집에 가는 둘째를 보며
말 건네는 아주머니 “걸어야 좋아요”
약하게 키운 건 아닌가 마음 무거워진다

 

어느 날도 자전거 유모차에 태워서 오는데 어떤 중년의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만지면서 사물을 느끼면서 가야지 지능이 잘 계발된대요.” 아마도 꽤나 큰 녀석을 자전거에 태워서 가는 모습이 마뜩잖게 보였나보다. “네,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그날따라 짐도 많아서 낑낑대며 가는데 불쑥 화딱지가 났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지나쳐 갔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둘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다들 걸어서 등·하원을 한다. ‘이 녀석, 너무 약하게 키우는 거 아닌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원래도 불안이 많은 성격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나다. 첫째 아이가 갓 태어난 모습을 보고서는 ‘혹시 만졌다가 팔뚝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10초 정도 안았다가 다시 장모님께 건네기도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걱정들이 실타래처럼 끊어지지 않고 풀려나와서 뭉게뭉게 부풀어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아이를 낳으면서 공부 걱정은 안 할 줄 알았다. 잘할 거라 믿었다기보다는, 공부보다 세상에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매달리기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막상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걱정을 놓지 못한다. 처음 참관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이는 좀체 선생님의 말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선생님이 하라는 건 하지 않고 몸을 비비 꼬기만 했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하는 ‘꼰대’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학년 꼬마가 집중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아이들을 실컷 뛰어놀게 해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한다. 두 녀석은 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녀온 뒤 놀이터에서 놀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일찍 들어간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엄마는 벌써 4시간째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해주고 있었다. 다 커서 아이들끼리 놀면 괜찮지만 어린 아이들은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벌서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저녁 먹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하는 시간이 다 늦어져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해주는 그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벌써 두 발 자전거 타는데
보조 바퀴 달고도 페달 겨우 밟는 첫째
몸 쓰며 놀게 해주지 못해 그런가 자책

 

나는 조금만 춥거나 덥거나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곤하면 슬슬 ‘집에 가자’는 신호를 아이들에게 보낸다. ‘아빠 힘들어’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바깥 놀이가 늘 고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째의 친구들은 벌써 자전거를 보조바퀴도 떼고 타는데, 녀석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 페달도 겨우 굴린다. 줄넘기도 아직 서툰 것 같다. 본인도 그게 조금 속상하다는 뜻의 말을 언뜻 내비치기도 한다. 역시 밖에서 몸을 쓰면서 노는 걸 많이 못해줘서 그런가. 또 자책한다.

 

부모는 늘 무한책임이다. 한 엄마는 아이가 이마에 모기가 물렸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제대로 못 봤다는 식으로 얘기해 속상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맞다, 정말,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지만, 뭔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 모든 게 다 내 책임인 것만 같다. 안 해주려고 안 해준 게 아닌데…. 가진 게 많아야 불안이 많다는데, 별로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세상에 제일 중요한 보물단지를 껴안게 됐다.

 

아이들은 강요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부모는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라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세상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오면 그때는 무력감을 느낀다. 얼마 전 첫째가 다니는 학교에서 석면 제거 공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반대 여론이 조성된다고 하자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관련 정보를 찾다보니 부실 공사도 생각보다 많았다. 만에 하나 공사 후에 석면이 0.00001%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아이들이 마신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왜 석면이라는 게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걸까. 그래도 잘 감시하고 믿을 만한 업체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학부모들의 반대로 끝내 공사는 무산됐지만 아이는 앞으로도 내가 미처 몰랐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배를 타는 일에 아무런 경각심이 없었던 것처럼. 플라스틱 남용이나 기후위기 문제처럼 뻔히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 예상되지만 무력감만 느껴지는 미래도 있다. 결국은 다시 생각한다. 우리 아이만 모든 불안과 위험을 비켜나가 자라기를 바라는 건 허망하다는 사실을.

 

육아책을 보면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한다고 해서 절대 아이들이 그 말대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부모는 그저 저렇게 살면 좋겠구나 하는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황경상기자 yellowpi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