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라고?
아이들과 함께한 1년은 소중하다
첫아이를 낳고 복직한 2014년부터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다. 딸과 사위가 회사에 가면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 3~4시쯤 데려와 저녁밥을 먹이고 딸과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것은 친정엄마였다. 만 6년 반 아이를 기르는 동안 사회는 나를 ‘주양육자’라 불렀지만 아이의 ‘진짜 양육자’는 외할머니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양육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그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부랴부랴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지만 훌륭한 아빠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였다. 아이들을 낳고 1년씩 육아휴직할 수 있는 고마운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지만 정작 내가 키운 기간은 겨우 2년4개월뿐이었다. 첫째가 14개월 때부터 8세가 될 때까지 아이의 옆에 있었던 것은 나도, 남편도 아닌 ‘외할머니’였다.
저녁 약속을 안 잡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다
그 뒤에서 고생하는 건 ‘내 엄마’ 였다
지난해 12월 그런 엄마가 병원을 세 곳씩 다니자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무릎이, 이가, 어깨가 탈이 났다고 했다. 원래도 무릎이 약한 편이었는데 내 아들들을 돌보다 무릎이 더 나빠져 ‘어느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으냐’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엄마는 “원래 무릎이 안 좋았다. 네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늙으면 원래 무릎이 나빠진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돌보다 나빠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딱히 뭘 잘못한 것은 없지만 이 구조에서 비켜나 있는 그가 미웠다.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그러다 내가 많이 아팠다. 근무 중 열이 나기 시작했고 몸이 노곤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데 계속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겨우 마감하고 보고한 뒤 집에 가서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폐렴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 하나만 회사를 그만두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많은 여성들이 결국 가는 길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내 손으로 돌보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만두지 마라, 아영아. 네가 열심히 해온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기의 순간에도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돌봄 노동으로 엄마의 몸 곳곳이 상하자
구조 앞에서 무력한 우리는 크게 싸웠다
남편이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남편의 휴직을 결정한 건 그때였다. ‘할머니 육아’로 지탱되는 구조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서 점심만 먹고 하교할 것이었고 내 퇴근까지 7시간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마운 회사는 다시 남편의 6개월 육아휴직을 결정했고 남편이 휴직하자 집안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야 남편은 양육자의 위치에 겨우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것도 지속 가능하진 않다. 9월에 남편이 복직하면 친정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고마운 일이다. 또다시 나는 친정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것은 ‘행운’이다.
가끔 주변에서 “친정부모님께 감사해야겠다”는 말을 듣는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선의다. 그러나 듣는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고맙지 않다. ‘고맙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서다. 내 미안함, 내 죄책감을 ‘고맙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 일이지 내 부모님 일이 아니다. 나는 딸이 일을 유지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역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살기 힘든 서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의 호의를 역이용하는 것뿐이다. ‘미안하면 용돈을 많이 드리라’는 말도 유쾌하지 않다. 에너지를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젊은 우리가 할 일이다. 퇴근 후 지쳐 있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 ‘용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육아휴직한 후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생 나와 동생을 돌보고 손주들까지 돌본 엄마에게 찾아온 자유. 목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엄마 너무 즐거운 거 아녜요?”라고 놀리면 엄마는 대답한다. “얼마나 좋은지 아니.”
그러나 별수 없다. 이렇게 잘난 척 말해도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다. 주변에서는 그럼에도 그게 얼마나 행운이냐고 다들 거든다. 안다. 양가가 다 지방이어서 아이를 물리적으로 돌봐줄 수 없는 집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그러나 잊지 말자.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양육의 의무가 없다. 양육의 의무는 나와 남편에게 있다. 온 동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돌보느라 허리를 펼 수 없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할아버지·할머니 육아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결국 내 선택지는 ‘할아버지 육아’지만…
이런 ‘행운’에 기대서야 돌아가는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역차별이다
그런 가정에 대해서도 다들 손쉽게 말한다. “사람을 쓰라”고. 그러나 돌봄을 자기 일로 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 대학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를 돌봐주시던 장모님이 수술해야 하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다 썼고 육아휴직 기회가 남은 건 자신뿐인데 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어차피 1년 쉬어도 해결 안되니까 이모님을 고용해야지. 일을 쉬는 건 답이 아니야.”
그 회사 상사에게 묻고 싶다. 그건 아이를 돌봐본 적 없는 당신의 답 아니냐고. 아이의 1년, 아빠의 1년은 길다. 1년이라도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아빠의 양육 기회를 당신은 빼앗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정녕 당신이 좋은 상사이자 선배라면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아빠들도 자기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데 그렇게 변하는 속도가 더뎌서 미안하다”고.
<임아영기자 layknt@kyunghyang.com>
▲육아휴직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슈퍼맨’이 돼볼 수 없었을 것
요즘 둘째는 배변훈련 중이다. 기저귀를 차고 있으면 편한 마음에 계속 대소변을 거기다 볼까봐 아예 아랫도리를 벗겨놓거나 배변팬티를 입혀놓았다. 몇 번은 ‘쉬 마려워요’ ‘똥 마려워요’ 하면서 변기를 찾는 듯해 금방 하겠다 싶었다. 착각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발목과 손에 변을 묻힌 상태로 돌아다니는데 정작 ‘큰 덩어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잠시 동안 세 장의 배변팬티를 적셨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좀 되는가 싶다가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리셋이다.
생각해보면 첫째의 배변훈련은 장모님이 시작하셨다. 배변훈련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둘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첫째는 12월생이라 배변훈련이 더 어려웠다. 한두 달 뒤면 유치원에 가는지라 더 초조했다. 유치원에 가면 대소변을 가려야 한다는데…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장모님은 첫째를 어르고 달래셨다. 그때는 이 훈련이 이렇게 힘든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막상 육아휴직을 하고 내가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기저귀를 더 채워놓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처음 태어난 첫째를 받아 안았을 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뭔가 잘못 만져서 아픈 건 아닌지. 얼른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아이를 안겨드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게 된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때 갓 태어난 첫째를 안고 있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물론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더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갓 태어난 첫째를 안는 순간 겁이 나서
곁에 서 계시던 장모님에게 안겨드렸다
장차 육아를 맡기게 될 것이란 상징처럼
아이를 키우는 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물심양면으로 무한대의 도움을 주셨다. 공치사 한 번 하신 적이 없지만 늘 송구스러웠다.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을 보내지 못할 때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실 장모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지저분한 집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갔는데 온통 어질러진 좁은 집에서 피란민처럼 앉아 계시는 모습을 봤을 때도 송구했다. 우리 부부가 둘 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재우고 계실 때도 있었다. 쉬시는 것도 아니고 안 쉬시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계시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실 때 몹시 죄송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이 예전에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침도 잘 안 먹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시간 맞춰 데려가는 것은 젊은 나도 지치는 일이다. 데려다줬다 데려오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만보가 넘어가는 걸 보면서 왜 장모님이 짧은 거리임에도 차로 아이들을 등원시키셨는지 알게 됐다. 더구나 무릎까지 안 좋으신데.
육아휴직을 하고 죄송할 일은 적어졌다
대신 장모님의 노고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돌보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할머니를 찾는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잘 돌봐주셨는지 생각한다. 심지어 가끔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야단쳤다 싶을 때는 내가 돌보는 게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잘못하는 일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순간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기꺼이 맡아주신다고, 편하다고,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
일하는 시간과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삶을 지탱하는 축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다. 첫째가 네 살 때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우는 녀석을 두고 애써 뒤돌아서 출근한 적이 있다. 그때 시큰한 콧잔등을 만지며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지구를 구하러 간다고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할 만큼 내 일이 급하고 중요한 일인가. 아이가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만화 <미생>에는 ‘워킹맘’ 선 차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두고 정신없이 통화하며 출근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아이가 엄마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선 차장은 다시 뒤돌아와서 아이를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생활 때문에… 널 미루지 않을게!’ 이 부분은 왜 몇 번이나 봐도 가슴이 찌릿한지. 많은 부모들도 그랬을 터다.
품 속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랐다
부모의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게 지원하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다. 첫째는 어느덧 양치질을, 세수를 혼자 하더니 이제는 샤워도 조금씩 혼자 하고 몸을 닦고 나오는 일도 스스로하기 시작했다. 머리감기도 조금만 연습하면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작은 아기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욕조에서 씻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에게 온몸을 맡기고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보며 무한한 책임을 느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아마도 아주아주 잠시 동안 아이는 내 품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품에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부모와 보낼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부쩍 더워진 날씨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둘째에게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쳐주었더니 말한다. “아빠 손에서는 바람이 나와?” 둘째에게 아빠는 손에서 장풍이 쉭쉭 나오는 슈퍼맨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슈퍼맨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나는 행운아지만, 많은 아빠들도 이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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