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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복직 후 한 달 ‘소진증후군’, 그리고 아빠

<복직 후 한 달 소진증후군’, 그리고 아빠>

 

어느 새 복직 후 한 달이 됐다. 816일에 복직했으니 정말 한 달. 출근하고 하루만에 감기에 걸려 복직을 실감했다. 심한 감기는 아니었는데 코가 막히고 목이 붓기 시작해 바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실감이 났다. '회사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4주가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평일에는 출근하고 퇴근하고 아이들 재우다 뻗었고 주말에는 각종 집안일을 챙기고 아이들과 놀다가 뻗었다. 한 달이 지나고서야 이렇게 끄적일 시간이 난다. 어제도 애들 재우다 뻗었는데 웬일인지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체력이 관건이다. 출근길 열심히 타지를 체크하고 출근하자마자 아침 보고를 하고 하루종일 보고를 하고 기사를 쓰다 보면 퇴근 시간이 넘어간다. 사실 이 일이 퇴근 시간이라는 게 명확하게 없어서 집에 와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기사를 살펴보고 메일을 체크하다보면 아 내가 복직했구나를 실감하곤 했다. 물론 아직 새로운 담당에 적응을 완전히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한 달 동안 오랜만에 일터로 나와서인지 계속 배가 고팠다. 한 번은 선배랑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고 났는데 양이 부족했는지 혼자 회사 아래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도 빵을 먹는 스스로를 보며 휴직 때보다 체력 소모가 커지긴 했구나싶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니 많이 적응했다. 이제 배가 많이 고프진 않다. ㅎㅎ

 

 

아이들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고 있다. 둘째 이준이는 무던해서인지 엄마가 출근할 때 곧잘 손도 흔들어준다. 복직 첫날 뭔가를 알았는지 서글프게 울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크게 울지 않았다. 자신의 분리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겠지 싶으면 너무 짠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적응을 해야 하니까 이준이도 나도. 그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종종거릴까봐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아직까진 수월하다. 종알종알 말이 많은 첫째 두진이도 잘 적응하고 있다. 물론 엄마 야근하는 거 싫어. 엄마 오늘도 회사 가?” 물어보긴 하지만... 뭐 울고불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걱정은 덜었다.

 

남편의 육아 부담은 늘었다. 아침에 친정엄마가 두 명을 다 등원시키긴 쉽지 않고 해서(첫째 유치원과 둘째 어린이집은 반대 방향에 있다) 남편이 두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한다. 내가 먼저 출근하고 나면 애들 밥을 먹이고 씻겨 옷을 입혀놓고 두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매일 두진이가 유치원에 일찍 안 들어가려고 해서 지각할까봐 뛰어다니느라 전쟁이다. 두진이는 친구들이 없는 유치원 교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매일 유치원 현관 앞에서 늑장을 부린다고 한다. 일찍 들어가게 하는 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데 아침마다 빨리 밥 먹어라, 빨리 들어가라 전쟁 전쟁.

 

제일 고생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리 엄마.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나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신다. 한두 줄 묘사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고생하고 계시겠지. 고등학생인 아들을 친정엄마가 다 키워주셨다는 홍보팀 차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말했다. “제 바이라인에는 언제나 엄마 이름이 숨어있죠.” 더 말하면 울적해지기만 하니까 여기까지.

 

그러다 이준이가 주초부터 장염에 걸렸다. 심하진 않은데 먹을 것을 가려야하다 보니 어린이집에 가기 어려워졌고 다시 아이는 할머니 차지. 엄마가 힘들지 않게 조율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잠시 짜증이 났다. 화가 나는 대상은 없는데 상황에 화가 나는 이상한(?) 상황. 두진이를 낳고 돌아왔던 회사 생활에서도 늘 겪던 일이다. 다행인 건 그때만큼 심하게 화가 나지 않는 것.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회사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다행히 감정 조절은 잘 되고 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슬슬 소진증후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피곤함이 잘 해소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한 달인데.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친정엄마의 헌신 덕분에 일을 하는 고마운 팔자에 일을 제법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긴 노동시간을 당해낼 재간은 없는 건지. 출퇴근 시간 포함해 하루의 절반을 회사를 위해 보내야 하는 일상. 화요일에는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잠시 아득해졌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자꾸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을까. 야근이 끝나고 지하철역을 나와 집으로 걷는 길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가는 수많은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퇴근했을까.’

 

어릴 때 아빠는 평일에 볼 수 없었다. 거의 내가 잠든 뒤에 아빠는 퇴근했고 주말에만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많다. 주말에는 가족이 같이 등산도 했고 점심에 라면도 끓여 나눠 먹었고 목욕탕에 넷이 가서 두 명씩 남탕, 여탕에 들어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래도 주로 남아있는 기억은 방학 때 엄마와 동생과 지내던 기억이다. 아빠는 늘 회사에 있었으니까.

 

그걸 원망했던 적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삶이었으니까. 6일 회사에 투신하고 토요일 오후 늦게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삶.

 

내가 회사원이 되고 나서야 아빠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사회부 경찰팀에서 일할 때 당시 팀 분위기 때문에 징그러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회식 자리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경찰 아저씨(?)를 보며 경찰 아저씨는 이 자리가 즐거울까생각하다가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도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것은 아니었구만요? 고생하셨네요...” 회식 자리에 앉아 있으며 계속 생각했다. 회사 일이라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며 영업도 하고 인간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고민했을 아빠의 삶에 대해.

 

아빠는 은행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다. 그날도 역시 내가 잠든 뒤 퇴근한 아빠가 화장실에서 피를 토했다. 그 소란에 깨서 화장실 타일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놀랐던 어린 나. 과도한 노동, 과한 회식 문화, 과로가 겹친 일이었을 게다. 그 장면은 너무 생생해서 내가 회사원이 된 뒤 소진된다고 느낄 때마다 떠올랐다. 더 슬픈 건 그렇게 소진되도록 부려먹었던 회사가 아빠를 버린 건 40대 중반이었다. IMF 때 명예퇴직한 아빠는 그 후로 20년을 계약직으로 사셨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일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 몰려온다.

 

애써 일이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나는 크게 다른 걸까. 복직 전 이게 제일 두려웠다. 회사 일 때문에 절반이 넘는 시간을 써야하고 주말에만 겨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삶. 그리고 그동안에 소진되어야 하는 쳇바퀴. 나는 엄마와도, 아빠와도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힘들어보였던 엄마, 아빠의 삶을 넘어서기는커녕 어떤 면에서는 더 나빠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한 취재원은 아이가 5살, 2살이라고 했다. 토요일에 아내 생일이었는데 금요일 저녁 약속이 생겨 갈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이 자리를 가지 않으면 멋훗날 내가 그 자리를 갔어야 했는데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이 자리를 나가면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내 생일인데도 새벽에 들어가면서 '이게 뭔가' 싶었다고. 후배는 말했다. "선배 전 일-가정 양립이라는 말도 이상해요. 가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요?" 아... 그러게 말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일 때문에 소진된다는 생각. 소진될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밀려날 수 있다는 생각. 늦게 퇴근하는 축 처진 어깨들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노동시간 단축을 말하는 게 뻔한 답인지 알면서도 멀고 먼 길이라는 게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