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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같은 여행

교황이 방문할 내포 천주교 성지 ②

이튿날은 성지 중심으로 돌아봤습니다.

 

먼저 신리 성지.

 

 

 

 

 

<신리 성지>

조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우촌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41 041)363-1359

 

신리 성지는 1860년대 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으로 1865년 위앵 신부는 400여명 주민 모두가 신자라고 기록했다. 이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완전히 초토화된다. 교회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 42명인데 단일 마을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손씨 집성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신리에는 손씨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조선의 카타콤바(지하무덤)’로 불리는 이유다.

 

 

 

 

다음은 홍주 성지.

 

 

 

<홍주 성지>

충남 홍성군 고암리 552-11

 

홍주 성지는 공주의 황새바위 다음으로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기록상으로는 212명의 순교자가 있는데 이름 없는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정이었던 황일광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백정이라 가까이 갈 수도 없었던 양반들이 ‘형제님’이라 불러주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일광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다. 난 두 개의 천국을 봤다”고 말한다.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그도 홍주에서 순교했다.

 

 

 

 

 

마지막은 교황이 오셔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할 해미 성지입니다.

 

 

 

 

 

 

 

<해미 성지>

무명 순교자 생매장지

충남 서산지 해미면 성지1로 13, 041)688-3183

 

서산 해미 순교 성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해미는 내포의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들어선 군사요충지였다.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000여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부족해지자 관군들은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넣어 생매장했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유해 터에서 발견된 치아와 뼛조각들이 전시돼 있다. 놀라운 것은 어린이들의 치아도 많이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내동댕이쳐 죽였던 돌다리 ‘자리개돌’도 보존돼 있다.

순교자들의 재판을 했던 읍성의 동헌부터 해미 시내를 거쳐 유해 발굴터까지 1.5㎞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에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은 천주교주교회의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