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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함께하는 육아-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당신이 남편이라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

임아영

가끔은 결혼을 후회한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어렸을 때 누나인 나보다 남동생을 훨씬 환영하는 외가 분위기를 느꼈을 때처럼 위축되고 내 존재가 조금쯤 보잘것 없어 보일 때.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진 않잖아”라는 농담들을 들을 때 목소리를 높여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한국 사회의 결혼과 맞지 않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스물아홉에 연애를 시작해 서른에 결혼했다. 여름 끝에 연애를 시작해 겨울을 지나 봄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9개월 만이었다. 입사 동기니까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만큼 남편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들 3가지, 정치적 지향, 정서적 안정, 문학에 대한 대화를 모두 충족하는 파트너였다. 남편이 김수영의 책을 가져와 조곤조곤 얘기하던 어느 술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내가 꿈꾸는 결혼은 그런 모습이었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적 이슈에 같이 분노하지만 내가 단편적인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고 남편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될 때 내 의견을 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관계. 주말에는 공원을 함께 걷고 휴가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 삶을 꿈꾸는 관계. 여전히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마 안심이 되어서일 거다. 어떤 분노, 어떤 불안이 나를 휘감을 때 남편의 두꺼운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그럴 때면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는 여자, 성별 불평등의 상황에 놓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자, 거대한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불합리를 바꾸는데 더 열정을 느끼는 여자.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결혼으로 생겨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게 일이 너무 몰렸다. 당시 남편은 기획팀에서 일한다며 결혼 준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분명히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지원하고 백업하는 관계라면 절대 싫다고 했잖아.’

남편을 광화문의 한 밥집에 불러냈다. 일이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외롭게 둘 거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하며 성장하고 싶고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으며 당신을 백업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더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이런 결혼, 이런 결합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노력할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때의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지만 노력할게.’ 남편은 결혼 이후 늘 그랬다. 아무리 성평등적인 남편이라도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보니까. 성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온 삶이 다른데 같은 풍경을 보고 있긴 힘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도 남편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한다. “내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마 아영의 말이 맞을 거야. 소수자가 더 오래 생각하니까 아영이 더 많이 생각했기에 아영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같이 아이를 낳았는데 회사에서, 사회에서 나와 남편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분노한다. 장난스럽게 “남편 술 좀 마시고 해주고 남편 좀 풀어주라”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저는 후배가 아니예요?”라는 말을 던진 후였다. 아이를 낳고 몇년 동안 생각한 질문이었다. 왜 남자 선배들은 내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고되냐고 왜 내게는 묻지 않는가, 왜 남편이 술 못 마시는 것만 걱정하는가. 그때 남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싸움이 됐다. “왜 선배들과 싸워주지 않아?”라고 따졌다. 남편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야?” 남편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남편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그럼 결국 나는 ‘까다로운 내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원망한다.

며칠 후 남편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100% 잘 하진 못하겠지만, 아영 말 듣고 많이 생각했어... 앞으론 더 잘할게.”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구조에 무력한 개인들이 뭘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다고 남편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닐까.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닌데 자꾸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렇게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불안해질 때 남편은 말해준다. “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영은 길을 비틀어 만들어가는 사람.” 남편만큼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이 지지받아본 적이 없다.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남편이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연인이었고 지금은 부부지만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이기를.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짝꿍처럼. 우리의 관계를 한두 가지 명사로 규정하지 말자고 말이다. 우리 부부의 꿈은 퇴직하고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한달씩 살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손을 잡고 루체른의 어느 길을, 두브로브니크의 어느 길을, 프리토리아의 어느 길을 걸으며 풍경이 되고 싶다. 연재를 마치며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남편이라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말 고마워.”

 

2011년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혼여행이라는 정점을 지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 년 후에는 꼭 아이들과 다시 신혼여행지를 가보고 싶다.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황경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종종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 생활은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터지는 낡은 신혼집에서 출발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민 우리만의 공간에서 행복했다. 이른 저녁 퇴근해서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고 있으면 삶이 꽉 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고 첫째가 태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남자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 걸 느꼈다. 여자로서 아내는 가부장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꿰면서 괴로워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부분이 불편할 게 없었다. 물론 혼자 살 때처럼 내 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가끔 아쉽긴 했지만 그건 둘이 살기로 결심하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달랐다. 결혼에서, 육아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모두 전담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부모님을 챙기는 일도 아내 몫이 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첫째를 낳고 어느 날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예민했던 첫째는 잠을 푹 자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가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선이 막혀서 젖이 퉁퉁 부는 와중에도 아이에게 끝까지 모유를 먹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매주 이유식 메뉴를 고민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만들어 먹이고 하는 그 모든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아마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부분들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다고 했지만 늘 먼저 깨닫는 법은 없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한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는 일도 많았다. 나름대로 나는 또 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어느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처음에 빵이 10개 있었는데 A가 3개를, B가 7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10개의 빵이 주어졌다. 이때 A와 B가 똑같이 빵을 나누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전에 주어졌던 빵을 기준으로 다시 분배하는 게 옳은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남자들은 5대 5로 나누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그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들으니 명쾌해졌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난 아내에게 그런 남녀 간의 부조리한 위치를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늘 비겁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비겁자는 얼굴이 없죠. 늘 줄행랑 치고 뒤통수만 보이니.” 그랬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보통의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 가부장제는 공기와도 같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가만있어도 별 일 없이 편했다. 여성들 중에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온한 면에 기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뛰어나와 걷길 바랐다.

#육아휴직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과연 결심해서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회사의 분위기가 허용적이라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렵고 불편한 얘기를 부서장에게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봐 주셨던 장모님의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과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의 당위성을 늘 깨우쳐줬던 아내가 아니었다면 미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옷을 입은 형제. 세 살쯤 두 아이가 같은 옷을 입은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10년 전이나 대학생 시절 나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만큼 부끄러울 정도로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요즘 어떤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가당찮은 얘기다. 나는 영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그 과정을 같이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내 인생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아내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인생 탐험대다. 가끔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자고.(대신 남자는 자기가 하겠다는)

한밤중에 가끔 아내는 깨서 ‘남편 어딨어?’하고 찾는다. 내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다.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나를 찾아오는 아내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젊은 날, 육아에 지치고 너무나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고 짜증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럼에도 맥주 한 잔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순간들, 조그맣고 귀여운 첫째와 둘째를 껴안고 잘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보면 이 순간 모았던 반짝반짝한 보물들이 가득하길.

 

남편의 복직 전 여행에서 네 식구가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출처] 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부부 육아 일기 1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