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특' 일기

여전히 엄마한테 독립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워킹맘이다 아직은. 아이를 둘을 낳고 복직을 3개월여 앞두고 보니 한국 사회에서 워킹맘으로 살 생각이면서 둘을 낳는 무모한(?) 선택을 했구나 싶다. 그래서 아직이다. 만약 버텨낼 수 없다면 수많은 여자선배들처럼 경단녀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 때문에.

 

그래도 나는 워킹맘들이 부러워하는 친정엄마가 백업해주는 워킹맘이다. “아영씨는 친정엄마 있잖아 걱정 없겠네”, “아 친정엄마 있어서 부러워요와 같은 말에 아무 할 말이 없는 부러운 워킹맘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든다. ‘우리 엄마는 행복할까.’

 

첫째를 낳고 복직했던 2014년에는 아이 걱정만 가득했다. 아이가 엄마 없는 긴 하루를 적응할 수 있을까, 어린이집에서 울지는 않을까, 퇴근이 늦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닌가 등등. 그런데 두 번째 복직을 앞둔 지금은 아이보다 친정엄마가 더 걱정이 된다. 아이들은 자주 울겠지만 또 적응하리라는 예상이 가능해서이기도 하고 친정엄마가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드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둘이 됐기 때문이다.

 

아들들과 하루종일 같이 있다 보면 혼미해진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다.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사고(?)치는 존재. 남편과 나는 주말에 둘이 아이 둘을 보면서도 전쟁이다, 전쟁,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구만을 되뇌는데 할머니인 우리 엄마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무릎은 버텨낼 수 있을까. 엄마는 무릎이 약하시다. 그렇다. 무릎 약한 엄마한테 아이를 맡긴 이기적인 불효녀. 그게 나다.

 

우리 엄마는 58년 개띠다. 전북 군산에서 명문여고를 다녔던 엄마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당시 잡지 <학원>의 학원문학상에 단편소설을 응모해서 입선하기도 했다. 분량이 200자 원고지 50매 정도였다고 하니 분량도 꽤 됐다고.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국립대만 보내준다고 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했다. 회사를 다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스물네 살 때부터 전업주부로 살았다. 나를 낳았던 건 스물다섯 살. 그래서 우리는 띠가 똑같다. 3년 뒤 아들을 낳았고 엄마는 아이 둘을 키우고 가사노동을 하며 나이가 들었다.

 

엄마의 리즈 시절. 왼쪽이 우리 엄마.

 

가끔 엄마가 1982년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나보다 더 열정적인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잘 살지 않았을까.

 

어릴 때 아빠와 엄마가 맥주 한 잔을 하는 날에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아영아, 엄마처럼 살지 마...”

그 말은 늘 슬펐다. 이제 엄마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마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슬픈 그 말보다 훨씬 더 자주 해주던 말은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해. 엄마는 아영이가 잘 해낼 것을 믿어였다. 어린 시절 엄마는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시험을 망쳤을 때, 심지어 입사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가 전해줬던 엄마는 아영이를 믿어라는 편지에 나는 늘 울컥하며 힘을 냈다. 이 말에 의지해 어린 내가 용기를 냈고 또 두려움에 맞서왔다는 걸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진다.

 

이제 그 말이 단순히 삶을 사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엄마의 소망은 딸이 전업주부인 자신과는 다르게 일하는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90년대 대다수 엄마들이 그랬듯이 딸이 자신보다 진취적인 모습으로 자라길 바랐다. 엄마가 꿈꾸는 딸의 모습은 커리어우먼이었고 엄마는 딸을 알파걸로 키우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결혼도 꼭 하길 바라셨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키우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길 바라신 거겠지.

 

나는 엄마의 소망대로 알파걸이 됐을까. 다만 엄마의 소망과 엇비슷한 일하는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선을 다한다고 뭐든 다 이룰 수 없다는 사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진실을 알게 될 만큼 성장했지만 동시에 나의 최선은 항상 온전히 나만의 노력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 성취에는 내 노력에 엄마의 뒷바라지가 더해져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던 것은 아이를 낳고서였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산후조리부터 아이를 키우는 것까지 엄마의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소망처럼 일하는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노동력에 의지해(노동력을 착취해)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온전히 나의 최선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자주 좌절했다.

 

최선을 다 하면 된다고 나를 키운 엄마는 남자아이들과 경쟁해서도 뒤지지 않고 오히려 더 잘 해내는 딸을 늘 응원해줬지만 그것은 잘못된 꿈은 아니었을까. 언론에서 알파걸의 실패같은 기사를 쏟아내면 동의하면서도 씁쓸했다. 가부장적 구조로 점철돼 있는 결혼과 육아에서 나는 영락없이 실패한 알파걸이었다. 나와 남편은 같은 일을 하고 동시에 부모가 됐지만 절대 같을 수 없었다. 지금 난 궁지에 몰리면 알파걸 같은 소리 집어쳐라며 화내는 서른여섯 살이 되었다.

 

지난 겨울 군산 외할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가벼운 교통사고가 났다. 엄마와 나는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트럭이 멈추지 못했고 그를 본 나는 피했으나 엄마가 피하지 못했다. ‘하는 소리가 나는 그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아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생각이 들었을 때 깨달았다. ‘엄마를 두고 나 혼자만 피했구나.’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는데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트럭을 운전하던 아저씨가 뛰어나왔고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넘어진 엄마는 크게 다치지 않아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병원으로 이동해 검사를 했지만 머리 등에 큰 이상이 없었고 서울로 돌아와 서울 병원에서 엄마는 물리치료를 오래 받았다.

 

군산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그 짧은 시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나를 위해 내 새끼들을 봐주고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다 해주는데 난 엄마를 두고 혼자 피했구나.’ 괴로웠다. 만약 엄마가 크게 다쳤다면 그 죄책감은 어땠을까. 지금도 그날 생각을 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엄마를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난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개를 젓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자식들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 내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고 싶었다. 지금도 똑같다. 내 인생을 자식들에게 전부 줘버리고 싶지 않다. 그런데 엄마인 나는 내 자식들에게 전부 내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내 일상은 내 엄마의 인생을 착취해야만 굴러간다. 그게 내 딜레마이고 죄책감이다. 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개인으로 일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렇게 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평생 나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온 시간을 나눠준 친정엄마를 착취해야 한다는 것.

 

손주병이라는 신조어는 이제 신조어가 아닐 정도로 할머니들의 손주육아가 보편화됐다. 아이를 봐준다면 시증조할머니라도 필요하다는 농담을 할 만큼. 엄마한테 엄마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전쟁이다. 제일 부러워하는 할머니는 손주 안 보는 할머니.

 

한번은 엄마가 웃으면서 놀이터에 나오는 할머니들끼리 하는 농담을 들려줬다. “할머니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어. 5~6시에 퇴근해서 해방시켜주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며느리나 딸로 둔 할머니가 1계급, 6~7시에 퇴근하는 공무원들 엄마가 2계급, 8~9시에 퇴근하는 일반 직장인들은 3계급, 11~12시에 퇴근해서 애도 못 재우는 딸과 며느리를 둔 할머니가 꼴찌야.”

 

내 경우 3계급이었다. 웃으면서 들었지만 마음이 쓰렸다. 육아를 혼자 감당하지 못할 거면서, 엄마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아이를 키울 거면서 나는 왜 아이를 낳았을까. 슬프게도 꽃보다 더 예쁜 아이를 보면서도 가끔 이 생각을 했다.

 

엄마한테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키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엄마와 아이 양육 문제 또는 가사노동 문제로 다툴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괴로웠다. 아이도, 일도 포기하지 못하는 욕심 많은 딸. 딸의 욕심 때문에 엄마의 체력을 축내고 엄마의 시간을 훔친 기분. 죄책감은 엄마의 힘든 얼굴을 볼 때 제일 심했고 죄책감이 쌓이는 만큼 사회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였다. 왜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모나. 누가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모나. 그런데 원망할 대상이 없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라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첫 번째 복직 후였던 2014년과 2015년이 제일 힘들 때였다. 일과 아이에 치여 매일이 피곤했고 전세가 오르는 속도에 기가 질려 어떻게 하면 서울을 떠날 수 있을까만 생각했던 때. 밤에 잠을 못 자고 한 시간씩 경기하듯 우는 큰애를 안고 있다가 결국 지쳐 바닥에 내려놓고 나도 울면서 끔찍해했다. ‘이 일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 번은 엄마가 집에 김치 있냐고 물으셨다. 당시 식사 담당은 남편이었기에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가 엄마가 그런 것도 모르냐고 하시는 바람에 대판 싸웠다.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일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셨을까. “엄마, 둘 다 잘 할 수 없어. 집안일은 포기했어.” 냉정한 말과 상처 입혀버리겠다는 말투, 그리고 모진 말들. 수많은 모녀의 사이가 그렇듯 우리도 그랬다. 못돼먹기론 대한민국 1등인 난 엄마 마음을 상처 낼 수 있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주워 담지 못해 괴로워하는 다툼을 반복했다. 엄마를 다치게 하면 결국 내가 다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일상에서 엄마의 노동력을 착취해 아이를 기르는 팔자, 언제 해야 할지 모르겠는 빨래들과 내가 하면 잘 먹지도 않는 아이 반찬을 걱정하며 회사 발제에 스트레스 받는 일상. 회사 일에서라도 애엄마라는 티는 절대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데 아이를 포기할 순 없잖아 라며 엉망진창인 집안을 합리화하던 일상. 그런데 김치라니. 김치가 있는지 없는지 까지 내가 알아야하나. 따박따박 엄마를 향해 따졌지만 엄마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나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한테 풀고 나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 자괴감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날들. 그저 떠나고 싶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떠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아이를 내 손으로 기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가끔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결혼은 해야지, 서른 전에는 해야지, 서른엔 해야지, 결혼했으면 아이는 낳아야지, 안 낳았으면 이 이쁜 것을 봤겠어?” 결혼을 꼭 해야 하고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고 말했던 엄마 세대가 수용했던 가부장적 질서. 그 질서를 21세기의 나는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했고 아니 벗어날 생각이 없었고 결혼 생활도 일도 잘해낼 수 있다고 착각했다. 착각을 한 건 나였으면서 아이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게라고 했던 엄마의 말들이 떠오르면 괜히 원망스러웠다. 엄마 세대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 세대의 질서를 부정하면서 부정하며 살아가기 두려워했던 나는 그랬다.

 

그러면서도 당연한 듯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했다. 이제 첫째가 54개월이 됐으니 엄마의 육아 노동도 만 45개월을 지나는 중이다. 그동안 엄마의 몸은 내 자식 때문에 얼마나 축났을까. “엄마 운동 열심히 해요. 그래야 우리 애들 다 봐주지라는 농담을 건네는 내 입은 언제나 쓰다.

 

친정엄마한테 돈을 많이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말자. 아무리 돈을 많이 드려도(돈을 많이 드리지도 못하지만) 엄마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손주가 웃는 걸 보고 엄마가 잠시 행복해진다 해도(손주는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했다) 그건 정말 잠시고 육아는 엄청난 육체노동인데 왜 환갑을 앞둔 우리 엄마가 그 노동을 감내해야 하나. 그저 딸이 일을 계속 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데 내 일은 엄마를 위해 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

 

엄마가 내 일을 응원해주는 것이 행운인 사회에서 엄마의 시간을 빼앗아 내 새끼들을 기르는 이기적인 딸. 복 받은 팔자다. 이 죄책감으로 일과 육아를 유지하는 내 팔자가 복 받은 팔자라니. 여성 노동력을 착취해서 아이를 기르는 구조에 분노하지만 결국 엄마한테는 아무 할 말이 없는 팔자.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고 아이를 기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마 내가 아이를 기르는 동안에는 힘들겠지.

 

엄마, 내 사주에 엄마 복이 있대요. 사주는 정말 잘 맞네요. 엄마 복으로 내가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요. 스무 살 땐 엄마한테 독립해서 멋진 여자로 사는 게 꿈이었는데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엄마의 힘을 빌지 않으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이들도 제대로 기를 수 없어서. 그래서 내 일의 성과가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 바이라인에는 언제나 엄마 이름이 겹쳐져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기자를 했으면 나보다 더 잘 했을 텐데. 고맙습니다. 어버이날이라 공개적으로 한 번 말해 봐요. 그리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