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그리워하는 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엄마>
2주 전인가. 일주일짜리 출장을 다녀왔다. 둘째를 떼놓은 첫 번째 출장. 첫째 때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그 기간이 둘째가 어린이집을 옮기는 적응 기간과 겹쳐 친정엄마는 고생을 하신 모양이었다. 새 공간에서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 둘째가 많이 울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이 모든 일에서 나는 항상 조정자의 역할일 뿐 실제 적응을 해야 하는 건 22개월짜리 아이이고, 적응을 도와야 하는 것은 이제 환갑이 되신 엄마다.
아이를 둘을 낳으면서 ‘조정자’의 역할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복직 후 마음이 크게 힘들진 않았다. 어차피 아이는 내가 없을 때 울 것이며 나는 그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울어도 그친다는 것을 알아서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첫째의 양육을 통해 배웠다. 이 포기가 어떤 점에선 긍정적이고 어떤 점에선 부정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여기서 그만. 그러나 확실히 첫째 때보다 전전긍긍하지 않게 됐고 여유로워졌다. 그렇게 복직한지 6개월이 지났다.
출장 때 매일 기사를 써야했는데 시차가 안 맞아서 아이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을 하기에도 벅찼다. 넷째 날인가 좀 적응을 해서인지 새벽에 기사 쓰는 것도 할만 하다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아이들이 갑자기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몽글몽글한 뺨에 뽀뽀를 하고 4등신의 둘째가 와락 안기고 둘째를 안은 팔에 일곱 살 첫째가 안기는 상상. 그때부터는 계속 휴대폰 속 아이들 사진과 동영상을 봤다. ‘아, 보고싶다.’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이었다.
"엄마, 얼마나 보고싶었는데..."라며 첫째가 품을 파고든다. 둘째도 노래를 부른다. ‘엄마 엄마 노래.' 둘이 합창을 한다. 첫째가 내 품에 파고 들며 ‘엄마 엄마’ 말하며 어리광을 부리면 둘째도 지지 않고 ‘음마 음마’ 말하며 내 목을 끌어안는다. 출장 전과 확연히 달라진 느낌. 두 아이 다 ‘엄마 보고싶었어.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알아?’ 말하는 것과 같은.
이럴 때면 내가 아이를 낳아 사랑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내게 사랑을 퍼붓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누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줬던가. 어떤 절대적이고도 맹목적인 애정을 받다가 문득 코가 막힌다. 내 엄마의 사랑이 떠올라서.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게 일생의 사명이었던 엄마처럼은. 가끔 엄마에게 나와 동생이 절대적 명제라는 것을 깨달으면 나는 아이를 낳아도 내 인생의 절대적 명제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는 그저 부모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그건 엄마가 주부여서가 아니었다는 걸. 내게도 아이들이 전부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엄마의 사랑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는다. 일하며 집중할 때는 아이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 회사로 이동할 때, 취재 장소를 옮기며 걸을 때는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난다. 야근 후 집에 돌아가면 휴대폰에 찍어둔 아이들 영상을 본다. 자고 있는 아이들을 옆에 두고서도 ‘보고싶어서.’ 가장 보고싶을 때는 역시 집으로 돌아갈 때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이들을 얼른 안아보고 싶어서.
‘보고싶고 그리운 아이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새삼 내가 아이들과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겠다. 한때 아이를 낳으면 내 인생의 연애가 끝난다고 생각했었다. 첫째를 낳은 조리원에서였다. 서툰 모유수유를 끝내고 아이를 트림을 시킨 후 옆에 뉘였는데 우연히 페북에서 브런치를 먹는 아이 없는 부부 사진을 봤다.
'나는 이제 남편과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없구나.’ 어떤 연애의 종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그 시절이 우스워질 정도로 아이들에게 몰입해있다. 늘 보고싶고 그립고 안고 있으면 행복한 존재들에게.
이 연애는 아이들이 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환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연애다. 그래서 이 연애에서 결국 약자는 나라는 것을 안다. 아이들은 결국 엄마보다 친구를, 엄마보다 배우자를, 엄마보다 자식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주 ‘균형’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일’과 아이들에 가까이 가야 하는 ‘육아’의 균형에 대해. 어느 정도 저울추를 움직여야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아이들과 일, 아이들과 나의 균형에 대해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전전긍긍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보고싶고 아이들과 가까이 있고 싶은 내 마음을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은 내려놓아야 하는 뻔한 진실에 대해서도.
그러다가... 엄마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출장 후 아이들이 내 얼굴을 부비고 어리광을 부렸다는 얘기를 전하자 친정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을 때다. 애들이 널 좋아해서 좋겠다.” 그 말에는 어떤 회한이 묻어있었다. 나와 동생은 이제 엄마아빠를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 커버렸다. 삼십대 중후반이 된 어렸던 나와 동생은 이제 엄마아빠 손이 없어도 세상을 살 수 있는 나이가 됐다.
'한때 나도 엄마아빠에게 지금 우리 아이들처럼 사랑을 퍼부었겠지.'
내 아이들도 언젠가 나처럼 부모 손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연애는 점차 상대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사랑하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 연애가 될 것이다. 아이들은 나보다 친구를, 나보다 배우자를, 나보다 자식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허전함은 얼마나 클까. 물론 뿌듯함이 같이 찾아오겠지만. 외로움이 담긴 친정엄마의 표정을 볼 때면 내 미래를 엿보는 기분이 든다.
그제서야 나를 길렀던 엄마아빠의 마음을 짐작한다. 아이를 기르게 되어서야 엄마아빠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 철없음도 떠오르고.
한편 나를 온몸으로 돌봤던 엄마아빠가 이제는 내가 보살펴야 할 존재가 됐다. 결혼할 때 어떤 선배가 얘기해줬다. “30대는 황금기야. 아이들은 어리고 부모님이 아직 건강하시지. 그 시간을 즐겨. 40대가 되면 아이들이 속썩이기 시작하고 부모님이 아프기 시작하셔.” 이제 내가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간다. 어느 새.
부모님이 아프시기 시작하는 시기가 우리 부부에게는 조금 빨리 찾아왔다. 재작년 시아버지가 큰 수술을 하셨고 지난해에는 방사선치료를 받으며 항암을 하셨다. 아버님이 수술을 하시던 날 예상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남편은 결국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지 않아 계속 불안해하고 있을 때 겨우 5개월이었던 둘째가 ‘킁킁’ 소리를 내며 계속 울었다. 밤에 진료를 보는 소아과에 갔더니 후두염이라는 진단.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밤새 숨을 잘 쉬는지 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고 나는 ‘킁킁’ 소리를 내면서 자는 5개월짜리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일어섰다, 좁은 집을 돌아다니다를 반복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아이가, 아니 아버님이 잘못되실까봐 두렵기도 했지만 내게 절대적인 존재였던 부모가 늙어가는 것이 서럽기도 했다.
다행히 아버님은 이제 괜찮으시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백내장 수술을 하게 되셨다. 백내장 수술은 요즘 수술도 아니라고 하지만 나를 키웠던 아빠가 내 어릴 적 할머니가 했던 수술을 똑같이 하신다는 게 서글프다. 안대를 하고 있는 아빠 모습을 보는게 어색하다. ‘아빠도 늙었구나.’ 아빠는 언제나 내게 휴가 때 계곡 물에 흘러내려갔던 내 샌들을 계곡물 속도보다 빠르게 달려가서 주워왔던 ‘슈퍼맨’인데. 아빠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고 나는 마흔을 바라보게 됐다. 샌들을 주워왔던 아빠는 지금 나처럼 삼십대였는데. 사람은 다 늙고 약해진다는 걸 쉽게 이야기하지만 부모가 늙고 약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쉽지 않다.
언젠가 나도 엄마처럼 이 시절을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젊은 나와 남편, 어린 아이들, 그리고 옆에 계셨던 부모님들까지. 아이들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보며 지금 엄마처럼 허전해하고 서운해 하겠지. 아이들을 낳고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오늘 하루의 소중함을 새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언젠가 아이들의 뺨에 마구 뽀뽀했던 이 시절, 아이들의 달큼한 냄새에 취했던 이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엄마에게 쑥쓰러움을 감추고 말한 적이 있다. “엄마, 아이를 낳고 뭐가 제일 좋은지 알아요? 엄마를 많이 이해하게 돼서 좋아요.” 그 말 뒤에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부모를 이해하게 된 게 늦은 만큼 내 곁에 오래 계셔주세요.’
''기특'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됐다> 발간 소식 (2) | 2018.09.29 |
---|---|
어린 시절 나와 화해하게 될 때 (4) | 2018.06.03 |
워킹맘이라는 말이 숨기려는 것 (1) | 2018.01.21 |
아이를 낳기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 (4) | 2017.12.23 |
아이가 다치면 마음이 무너진다 (8) | 2017.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