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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아이를 낳기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

<아이를 낳기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

 

화장실에서 같이 이를 닦는데 두진이가 말했다.

엄마 내가 칫솔을 여기 놓을테니까 엄마는 이쪽에 넣어.”

우리집 칫솔꽂이에는 6개의 칫솔을 꽂을 수 있다. 맨앞 왼쪽에는 자신이 꽂아놓을테니 그 바로 옆에 꽂아넣으라는 뜻이다. “알았어. 근데 왜?” 두진이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랑 사랑에 빠졌으니까.”

 

웃었다가 뭉클해졌다. 아이와의 대화는 늘 그렇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훅 들어오는 말들.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받으려면 일찍 자야 산타할아버지가 우리집을 건너뛰지 않으신다고 하니 일찍 자리에 누웠다.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두진아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뭔지 알아?”

핑크퐁에서 사자랑 사슴이 사랑에 빠져.”

핑크퐁 한글동요에서 사자랑 사슴이 사랑에 빠지는 모양이었다.

아니, 사랑에 빠진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 서로 좋아하게 되는 거?”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있는데 뭔가가 뜨듯해졌다.

 

곤히 잠든 아이를 두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트리 앞에 두고 이렇게 글을 쓴다. 잊어버릴까봐. 두진이는 오늘 이렇게도 말했다. 눈 오면 썰매를 타고 싶다고 해서 마트에 가서 썰매를 사러 다녀오는 차 안이었다.

엄마 눈이 또 올까?”

그럼~ 또 오겠지.”

한참 눈이 쌓였던 며칠간 친구들 썰매를 빌려 탄 모양이었다.

엄마, 얼른 눈 오면 좋겠다. 엄마랑 아빠랑 눈사람도 만들고싶어.”

그래 꼭 만들자.”

엄마 나중에 내가 운전하게 되면 엄마가 조수석 앉아.”

아빠는?”

아빠랑 이준이는 뒤에 앉으면 되지.”

속으로는 나중에 여자친구 생겼다고 엄마 차도 안 태워줄 거 다 안다했지만 이렇게 기록해놓는다.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썰매타는 아들 사진

 

대화를 할 수 있는 아들과의 재미는 점점 커지고 있다. 5, 내년에 7세가 되는 꼬마. 대화가 곤란해질 때는 역시 조를 때다. 오늘도 두진이는 계속 물었다.

엄마, 오늘은 무슨 요일이야?”

, 토요일이야.”

내일은?”

일요일이지.”

그다음날에는 회사 가?”

, 월요일에는 가야지.”

그럼 월요일이 되면 언제 토요일이 돼?”

월화수목금이 지나면 토요일이 되지. 토요일이 되면 또 엄마랑 아빠랑 신나게 놀 수 있어.”

아이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말했다.

주말이 되려면 오래 걸리잖아.”

오늘도 토요일이고 주말인데... 그 뒤 주말이 언제 올까를 걱정하는 아이를 두고 가끔은 먹먹해지고 가끔은 답답해진다.

 

얼마 전에는 아침에 취재 약속 때문에 마음이 너무 바빴다. 그러다가 아이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다. 안좋은 꿈을 꿨는지 좀 무서웠는데 안아달라는 말을 내가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동생한테 화내는 두진이를 오히려 혼냈고 두진이는 울기 시작했다. 잠깐 안아주면 됐을 일이었는데.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아이를 어쩌나 하다가 취재 약속을 오후로 미뤘다. 둘째를 낳고서 한 결심. 아이 옆에 있어줘야 하는 순간에는 아이 옆에 있어주기.

 

회사에 보고하고 오전만 두진이를 돌보기로 했다.

두진아 시계 봐봐. 작은 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면 엄마는 회사를 가야 해. 오늘은 오후에 취재하러 가야 해.”

고개를 끄덕이는 두진이와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비행기를 같이 만들자고 해서 열심히 설명서를 보고 레고 부품을 찾아 조립하고 있는데 아이가 자꾸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는 엄마, 아직 12에 안 갔어. 아직 10에 있어.” 처음에는 웃었다. “, 12가 되려면 아직 많이 남았어. 그때까지 신나게 놀자.”

10분이나 지났을까. 두진이가 다시 시계를 보러 나갔다. “엄마, 아직 12가 아니야. 근데 10보다 조금 위로 올라갔어.” 또다시 5분이 지나고. “엄마, 12가 안됐어~~” 신나게 뛰어들어오는 아이.

그렇게 세 번쯤 나갔다 들어왔을까. 두진이의 눈을 봤는데 묘한 불안이 읽혔다.

두진아, 엄마가 회사가는 게 그렇게 싫어? 12가 되는 게 싫어서 계속 나가는거야?”

이라는 단호한 대답.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첫 아이라서일 것이다. 두진이에게는 마음이 많이 쓰인다. 남편의 천성을 빼닮은 아이. 그래서 자꾸 안아줘야 할 것 같은 아이. 두진아, 엄마는 결국 엄마 욕심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엄마 욕심으로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이가 오히려 물었다. “엄마, 괜찮아?”

다른 사람이 울거나 슬퍼하면 안아줘야 한다고 했잖아.”

아이의 짧은 팔이 내 목을 끌어안아준다.

 

아이를 낳기 전에 일하는 엄마의 죄책감에 대한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전혀 몰랐으니까. 그리고 난 꽤 강하게 컸으니까. 엄살부리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는 일이 이렇게 거대한 일인 줄. 어릴때부터 아이를 좋아해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상상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평범했고 어쩌면 가부장적 질서를 별다른 의심 없이 수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고나서 신혼을 오래 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아이를 빨리 낳고 싶었다. 그렇게 결혼 4개월 만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니까 의심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일을 하는 삶이 가능한 줄 알았다. 병행이 어렵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친정엄마가 늘 아이를 키워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믿고 아이를 둘 낳은 건 어쩌면 진실.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두 가지다. 이렇게 아이를 낳으면 엄마의 체력을 축내게 된다는 것과 아이가 이렇게 나를 많이 찾게 될 거라는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인형을 돌보는 게 아니었는데. 어쩜 아이를 낳기 전에 이렇게 아이가 나를 찾게 되리라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을까. 가끔은 정말 별생각없이 아이를 낳았구나 싶다. 그러면서도 둘째를 낳은 건 육아휴직을 다시 해서라도 첫째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형제라도 있으면 바쁜 엄마의 공백을 서로 채워주지 않을까 싶어서.

 

행복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는 훨씬 많이 웃게 됐다. 여유도 생겼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들이 더 좋은 사회에서 자라게 되길 바라니까. 아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는 내 고민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니까.

 

어머니, 두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그 요구를 할 거예요.”

두진이 유치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진이가 유치원에서 잘 지내냐는 질문에, 당분간 금요일에 쉴 수 없게 되어서 하원할 때 엄마가 오지 못하게 된 것을 서운해한다는 이야기에.

 

어머니, 아이가 클 때까지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할 거예요. 그런데 두진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예민한 아이라면 저도 다르게 말씀을 드렸을텐데. 두진이는 자기 안에 집중하는 아이예요. 그리고 공백을 할머니가 잘 채워주고 계신 것 같아요.”

 

안심되서인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고 말았다.

,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일을 좋아하는데 말예요.”

 

회사 토요판에 맘편한 세상을 위하여’(http://ilovepig.khan.kr/277)라는 육아일기를 쓰게 됐다. 첫 회에 모두다 회사 인간으로 지치는 구조에서는 엄마들은 경단녀가 될 수밖에 없고 아빠들은 아이와 지낼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이렇게 계속 구조를 둬서는 아이를 키우기 어렵다는 글을 썼다. 댓글이 달렸다. 일을 그만두고 외벌이로 살면 된다고.

 

화가 났다. 나는 일을 좋아한다. 아이도 사랑한다. 둘다 좋아하고 사랑하면 안되는 건가. 아빠들도 일을 좋아하고 아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한 것 아닌가. 왜 우리는 이걸 욕심이라 매도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답이 없는게 아닌데. 답으로 가는 길이 어려우니까 누군가 희생하라고 하면 끝인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일하는 게 욕심이라고 말하는 사회인지. 이 정도였는지.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오늘도 이렇게 쓴다. 아이는 내일 일어나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고 행복해할 것이다. 그 행복한 미소를 얼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