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특' 일기/폭풍육아

[임아영 기자의 폭풍육아]수술방 들어가는 아이..내 인생은 내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난겨울 어느 토요일 저녁. 20개월이던 둘째와 나 단둘이 집에 있었다. 남편이 방학을 맞은 첫째를 경북 구미 시댁에 맡기러 갔을 때였다. 빨래를 널어야 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둘째가 베란다 문 앞에 와서 문을 닫고 바로 잠갔다. ‘찰칵’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우리집 베란다는 베란다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돼 있다. 겨우 20개월이던 둘째는 문이 잠긴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 앞에 서서 엄마 얼굴을 들여다보겠다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준아, 문 열어야지. 잠그면 어떡해!” 내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지 마는지 아이는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알고보니 며칠 전 형아가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을 때 문을 잠그는 걸 본 것이었다. 일곱 살인 형아는 문을 잠그고 여는 게 능숙하니까 할머니를 가둬놓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20개월 둘째 장난에 베란다에 갇힌 나

아이는 울다가 집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나에겐 온갖 나쁜 상상들이 쏟아졌다

 

유리문 바깥에 아이 혼자 있다는 사실에 나는 ‘패닉’이었다. “이준아, 다시 돌려봐, 문을 다시 돌려봐!” 베란다에서 있는 힘껏 소리치니 아이가 잠금장치를 다시 돌려봤지만 아이 손가락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나중에 돌려보니 잠그는 건 쉽고 여는 건 어렵게 돼 있는 잠금장치였다. “이준아, 손에 힘을 꽉 주고 다시 돌려봐!”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이는 내 표정이 이상한 걸 느꼈는지 ‘잉~’ 하며 울려고 했다. “아냐, 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 침착하게 아이를 다독여야 했다. 그러다 잠시 후 아이가 문 앞에서 사라졌다. 엄마가 나오지 않으니 지쳤는지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 부모는 어떤 존재인가

그때부터였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 밖에다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요! 사람이 갇혔어요!” 어디에 갇히는 일은 나도 처음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아이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는 생각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준아, 이리와, 아가, 이쪽으로 와봐!” 보이지도 않는 아이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겁이 없는 둘째가 식탁 위에 한창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의자를 밟고 식탁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변기 물 가지고 장난 치다가 변기 속에 빠지면 어떡하지.’ 평소라면 하지 않던 상상이 쏟아졌다. 안방 창문을 깨볼까, 창문 밖에 매달려 거실 창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까 별의별 수를 고민했지만 창문을 깰 도구가 없었고 거실 창문으로 넘어가다 내가 1층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요즘 창은 방음이 잘되어서인지 아래층, 위층에서도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겨울이었고 저녁 때라 사람들이 밖에 아예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집은 14층. 단지를 걸어가는 두 사람은 내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냥 지나갔다. 속이 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아이가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셨다. “여기 좀 봐주세요. 사람이 갇혔어요. 아이가 혼자 있어요. 좀 구해주세요!” 나와 겨우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다시 외쳤다. “저희 집 비밀번호가 ****인데요. 좀 열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약 40분 만이었다. 아주머니 덕분에 나는 겨우 베란다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아이고, 아기 엄마가 얼마나 놀랐을꼬”라는 아주머니 말에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힘이 빠져버린 탓이었다. 다행히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는 40분 동안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놀았던 모양이다. 두려움인지, 안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아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무겁고 두려웠다. 엄마라는 자리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가 엄마가 될 깜냥이 되는가 자주 생각한다.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는 인형처럼 예뻐만 해주면 되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아이가 위험해질 때 끔찍한 불안감을 맞대면 ‘이렇게 큰 부담이라면, 부모가 되는 일이 이렇게 무거운 일인지 알았다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고나면 죄책감이 따라온다.

 

무작정 외쳤다 “여기, 사람이 갇혔어요”

다행히 이웃 덕에 나와 아이 안고 펑펑

엄마란 자리,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도토리 줍는 형제들.

 

■ 내게 아이의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다

최근 둘째가 수술을 했다. 간단한 탈장 수술이었지만 진단받고 검사받고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 한 달 넘게 ‘걱정과 조율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 수술의 위험 요인 등을 판단하는 동안 생기는 걱정과 수술로 생겨나는 수많은 ‘가정 행정 업무’를 조율하는 시간. 남자아이들의 경우 100명 중 1명에게 생긴다는 서혜부 탈장 진단을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100명 중 1명이 많긴 하지만 왜 하필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였지만 그다음에 따라온 생각은 ‘아, 할 일도 많은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난 어쩜 이렇게 불경한 엄마인지. 병원을 알아보고 검진을 예약하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피 검사를 하고 소변 검사를 하고 심전도 검사를 하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걱정을 늘어놓자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일을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자. 남편 걱정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다고.”

 

‘나는 어떤 엄마인가.’ 자주 나의 ‘엄마됨’에 대해 생각한다. 엄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고 기질적으로 강한 편이다. 엄살 피우는 것도, 엄살 피우는 것을 보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도 난 엄한 엄마다. 감정을 읽어주는 자상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늘 마음이 급하다. 잘못한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데에도 내가 가진 시간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아이가 수술을 한다는 소식에도 ‘해야 할 일’을 목록화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또 생각했다. ‘나는 어떤 엄마인가.’

 

가끔은, 정말 가끔은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무게가 버겁다. 어쩜 이렇게 여전히 이기적일까. 그러다 천성이 걱정 많은 아이인 첫째에게서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볼 때면 나를 다시 다독인다. ‘아이들을 낳은 건 내 선택이야. 이 아이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야.’ 성스러운 모성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아이를 낳은 이후 계속해서 ‘나’와 ‘엄마가 된 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단숨에 나보다 아이들을 중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냉정한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이들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봐주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이런 나지만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내가 ‘엄마는 맞구나’ 생각이 든다. 아이 수술 과정에서 눈물이 난 건 딱 한 번이었다. 둘째가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작은 오른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을 때까지도 괜찮았다. 수술대에 앉은 아이가 바늘을 빼고 싶다며 칭얼댔지만 칭얼대는 아이 앞에서도 침착했다. “이준아, 수술하고 나면 이제 다시 병원 올 일이 없을 거야.” 수술센터에서는 아이 수술 부위를 표시하고 이름, 생년월일을 확인한 뒤 바로 마취를 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마취약이 들어가면 바로 정신을 잃어서 고개가 꺾이니 엄마가 등을 안아주라고 했다.

 

아이 탈장 수술에도 ‘할 일’ 목록화하며

냉정한 엄마 같다는 생각에 미안하지만

아이가 위급 상황 처하는 건 견딜 수 없어

 

마취약이 들어가던 10여초. 정말 신기하게 아이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이 꼭 감기지 않았다. 실눈을 뜬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언젠가 내 배안에 살던 아이, 왠지 계속 이어져 있던 끈이 잠시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고 나왔는데 자꾸 혼잣말이 나왔다. “눈을 완전히 감겨줬어야 했는데.” 이제 내게 아이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두 시간여의 수술 시간 동안, 베란다에서 나와 아이를 다시 안아보던 순간처럼 다시 아이를 안아보기만을 기도했다. 그저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 엄마도 엄마가 되어간다

이제 엄마가 된 지 만 5년9개월이 지났다. 딱 그 정도만큼 나도 엄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게 될 때, 이제 내 인생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여전히 나는 성격 급한 엄마지만, 가끔은 아이의 일보다 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이제 내 양 어깨에 아이들을 메고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아득할 때도 많다. 아이들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을, 빛나는 순간부터 주저앉는 순간까지 다 지켜봐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겁게 다가올 때면.

 

어깨 위의 아이들 무게 버겁다 느끼지만

어느새 아이의 ‘안녕’만을 바라게 되는

딱 만5년9개월 만큼의 엄마가 되어간다

 

빠른 일처리를 지향하는 나라는 인간에게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육아’라는 일이 찾아왔을 때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정해진 순서대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겨우 50여㎝의 키로 태어난 작은 아기가 온 힘을 다해 내게 의지할 때, 내 24시간을 저당잡히는 것이 괴로웠지만 아이의 웃음 한 번에 괴로움을 날려버릴 때,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가지 않고 엄마인 나에게 매달릴 때, 아프거나 힘들 때면 더더구나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내 몸에 의지하는 어린 것을 보면서 열달간 한 몸이었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내 품은 아이들을 품어안기에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이들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나를 볼 때 딱 5년9개월만큼 내가 나아지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세상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엄마는 언제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편지를 내게 전해줬다. 아이들을 지켜봐주는, 넓은 품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그때의 엄마 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딱 그만큼만 아이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엄마가 항상 뒤에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도 엄마가 된 지 10년이 지나면, 20년이 지나면 조금씩 더 넓어지겠지, 아이들도 그런 엄마에게 조금 더 기댈 수 있겠지, 라고 믿어보면서. ‘전적으로 네 편인 사람.’ 엄마가 되고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