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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아이처럼 부모도 성장합니다

왜 남성에게 생계부양,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강요할까요?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

임아영

아이들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 보고 있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사회가 여전히 여자인 나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건 10년 전 취업 때였다. 졸업반이던 시절 원서를 많이도 썼다. 50번까지 세고 더 세지 않았던 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들의 취업이 힘들다는데 민간 기업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서류 합격도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불합격 문자를, 불합격 메일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두려웠다.

 

밥 사주겠다는 동기를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앉아있었던 날이었다. 양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 동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가 명함을 주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울컥해서였다. 앞이 캄캄한 ‘두려움’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남자 동기들, 후배들의 ‘취직’이었다. 남자 동기, 후배들이 취직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민간 기업에서는 여자들을 원하지 않는구나. 뽑는다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양 자체가 적구나.’ 그러면서도 지금 어느 시대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자책했다.

 

 3년이 걸려 어렵게 취직했다. 회사에는 여자 선배보다 남자 선배가 항상 많았다. 딱히 #남녀차별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도, 사회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막은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여성들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서 깨달았다. 세상은 여자를 아이 돌보는 자로 규정한 뒤 일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이는 엄마가 봐야 잘 크지”라는 말을 다들 너무 당연하게 할 때 무력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키울 시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사회는 남편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이 둘을 낳으며 #육아휴직 을 2번 하면서 내가 시간을 쓰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성 외교부장관, #여성대통령 이 나온 사회에서 뭐가 불만이냐는 시각을 적지 않게 만난다. 아니다. ‘논쟁의 초점이 잘못돼서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곳들에 여성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됐지만 여전히 #절반 은 되지 못했으며 이 속도가 더딘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큼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이다. 여성들이 #임금노동#돌봄노동#이중 으로 떠안게 되면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남성들은 방관자가 된다.

 

회사 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 해야 하는 여성을 회사에서 덜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입사 12년차가 되니 이해가 된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다. 수익을 목표로 하는 회사에서 여성은 언젠가 회사 일을 딱 8시간만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니(8시간도 겨우 해낼 수 있는 인력이 되니) 8시간 이상 뽑아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갑지 않은 노동력이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남성은 #생계부양자 역할이, 여성은 #돌봄노동자 의 역할이 강화되며 불평등은 심화된다. 여성들이 20대 후반에는 고용률 83%대까지 오르다가 30대 후반에는 57%까지 떨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20대에도 30대, 50대 초반까지 남성의 고용률은 90%대로 비슷하게 유지되지만 여성들은 직장에서 살아남는 자와 살아남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사회는 이 여성들을 이렇게 분리한다. ‘워킹맘’과 ‘전업맘’이라면서.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첫째를 안아보고 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앞서 말한 ‘억울함’들이 조금은 해소됐다. 남편이 여성들의 영역에 들어와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내가 임금노동을 하는 구조가 되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됐다. 입사 동기인 우리는 남성의 육아휴직도 수용하는 좋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안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커녕 여성의 육아휴직도 꺼린다. 그런 사업장에서 여성을 채용하고 싶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하다. 야근이든 주말 근무든 해낼 수 있는 노동력을 원해서 아닌가? 도대체 지금은 몇 년인지, 2019년 아니었던가.

 

우리 부부는 동기이기 때문에 월급이 거의 같다. 군대를 다녀온 호봉 차가 있지만 크지 않다. 누가 육아휴직을 해도 사실상 한쪽의 월급에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보통 아내의 임금이 적다. 급여가 적은 쪽이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가정 경제로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다보니 쳇바퀴 돌듯 여성들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진다. ‘#성별임금격차 ’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OECD가 발표한 성별 남녀 임금 격차를 보면 한국이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컸다. OECD 평균이 13.8%였지만 한국은 36.7%나 됐다. 평균보다도 2배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는 거다. 성별 임금 격차가 30%를 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여성의 월평균 임금은 244만9000원으로 남성 평균 임금은 356만2000원의 68% 수준으로 고용률 격차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시간제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주로 여성이 일하면서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은 저임금 여성 노동자도 OECD 국가 가운데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여성 시간제 근로자는 197만1000명으로 전체 비정규직 근로자의 53.6%를 차지했다.

 

 #경력단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출산과 양육으로 회사를 그만뒀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재취업을 하는데 대부분 이전 직장보다 임금이 낮아지거나 비정규직이 된다. 2018년 기준 여성노동자 중 50.7%가 비정규직인 반면, 남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33.2%다. 아이 낳은 친구들은 가끔 자조한다. “왜 이렇게 버텨야 하나 싶지만 지금 그만두면 이만한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임신, 출산 등으로 일자리를 놓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답은 ‘성평등한 노동 시장’이다. 남성도 집 안으로 들어와 돌봄을 담당하고 사업장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시장이다. 임금 격차로 벌어지는 비자발적 퇴사들, 결국 여성이 돌봄의 의무를 더 지게 되는 악순환을 바꾸지 못한다면 취업 시장에서부터 여성이 더 불리한 상황을 바꿔낼 수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대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원치 않게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여성만 괴로운 게 아니다. 그 괴로움은 남성에게도 전이된다. 가부장의 짐을 짊어지고 팍팍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아들들은 팍팍한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아이들을 돌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기쁨을 일부가 독점하지 않는 사회, 엄마 아빠 모두가 시민-노동자-부모-개인의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그런 사회 말이다.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

황경상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언젠가 문득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런 거 없어.”

 “그래도 아버지가 했던 뭐 기억나는 말 같은 건 있을 거 아녜요.”

  “촌 사람들이 뭘, 임시 풀칠하기 바쁜데, 누가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살아라 그런 말을 해.”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한 분만은 아니셨다. 늘 시골집에 가면 “우리 깅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동네 슈퍼에 가서 빠다코코낫 과자와 콜라를 사 주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더 젊은 시절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나 일하러 나간다, 일어나라’ 그러셨지.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어. 똥장군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서 밭에 뿌려놓고 학교에 갔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집안 농사일과 군대 36개월, 그리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구하기 위한 분투였던 것 같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직업 구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아버지 시대라고 일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기사를 해 보겠다고 대형 면허를 따기도 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달랐을까.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할아버지가 일하는 논이 전부 우리 것인 줄 아셨다고 했다. 실제로는 다 남의 논을 부치는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오직 일밖에 모르셔야 했을 것이다. 장인어른도 비슷하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장인어른이 한창 일했던 1980년대, 1990년대는 #주5일 근무 시대도 아니었다. 주6일, 때로는 일요일까지 일하셨던 장인어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으면 ‘아버지들의 삶이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 장인어른도 IMF의 화살을 비껴가지 못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회사에 인생을 바쳤지만 그 회사는 노후도 보장하지 못했고 안전한 삶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장인어른은 끊임없이 일하셨다.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던 40대부터 6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말이다. 그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랫동안 한국의 남자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오랫동안 생계부양자로서 주어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를 쓰셨다. 1981년생 나라고 그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신혼 초, 갑자기 집주인이 전세 대신 월세를 달라고 했을 때 대신 전세금을 더 올려주겠다며 한참을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탓만도 아닌데 그때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걸 느꼈다. 내가 좀 더 수입이 많았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그러나 그건 괜한 혼자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한 섀도복싱이었다. 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 탓이 아니야, 함께 해결하자”고 했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혹시 남편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몇 년 동안 내가 대신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테니 한 번 해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편도 그렇게 해 줘야 해.” 물론 능력도 취향도 없는 내가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공상과학소설에 가깝지만, 그 마음만큼은 너무나 고마워서 마음속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부양자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나눠지겠다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상황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친구들 중에는 #맞벌이 도 있지만 온전히 생계를 남자인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도 있다. 육아휴직을 했다고 하면 “야, 그런 게 되냐?”라며 신기해하면서 부러워한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킬 때면 요즈음엔 자주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키는 아빠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데리러 오는 사람 중에 남자는 거의 없다. 모든 남성들이 육아를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남성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여전히 남성의 육아휴직이 희귀한 문화에서 ‘아빠 육아휴직’은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 생각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회사를 안 가게 되니 “회사 나오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는 “아직은 괜찮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회사 일보다 덜 힘들어서는 아니다. 두 가지 일은 너무 다른 종류의 일이라 비교하기 힘들다. 다만 만 10년이 넘게 회사를 다니며 이렇게 회사와 거리를 두게 된 지금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은 매우 소중하고 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며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지만 또 한편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늘 유쾌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시대, ‘이 일을 조금씩 모두가 나눠서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아내와 내가, 아이가 있는 다른 동료와 내가 일을 나눠서 한다면 우리는 훨씬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돌보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시간 말이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회사에 알렸을 때 한 여자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맙다”고 했다. 쑥스럽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말했다. “자신이 돌봄노동자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여자 후배에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맙겠어. 나에게 그런 남자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정말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을 거야.” 기껏 6개월 육아휴직으로 그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면구스러웠지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여성들이 얼마나 일터에서 고민이 많을지 이해가 됐다.

 

 아버지의 시대는 남성이 생계부양을 하는 #가부장적모델 의 사회였다. “아버지도 고생만 많이 하다가 갔지.” 아버지는 대화 끝에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말씀 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아마도 자전거를 타고 쓰러지지 않도록 무작정 페달을 계속 굴려야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많이 부빌 수 있는, 무작정 페달을 끝없이 굴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꿔본다. 우리 아들들의 시대에는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이 더 조화롭게 균형을 잡기를

 

[출처] 왜 남성에게 생계부양, 여성에게 돌봄노동을 강요할까요? [부부 육아 일기] 11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