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은 엄마

임아영


 

두진이를 낳고 #초보엄마 였을 때였다. 엄마 몸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잠을 깨 울어버리는 아기를 두고 집 밖을 나오는 상상을 한 번씩 했다. 그 상상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왔지만.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 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을. 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 주말이면 나도 조금쯤은 쉬고 싶은데 아이들이 매달릴 때면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소리치게 된다.

어느 일요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내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엄마, 나도 책 읽어줘요.” 첫째는 왼쪽 어깨에 기대고 둘째는 등 뒤에 매달렸다. 24kg이 넘은 여덟살 첫째와 14kg이 넘은 만 35개월의 둘째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 아이들의 살이 무겁고 덥다. 점점 몸무게가 늘어나는 아이들의 몸에 눌리면 아이라도 매우 아프다. 나도 모르게 “그만 좀!”이라고 소리치고 나면 ‘엄마 갑자기 왜 그래’라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가도 후련하다. ‘엄마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마도 나 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고 싶으니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 말은 삼키고 만다.

엄마가 되고서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엄마 몸에 발 하나라도 닿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자는 나를 더듬어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아이들 덕분에 잠도 푹 자지 못하는 #좀비 가 되어가자 깨달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존재를 달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는 것이구나.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도 했지만 자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아이들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내 안테나가 아이들의 안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 #안고부비고싶은존재들 이 무거웠다가 멀어질까 다시 두려워지는 이 마음. 이 마음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구나.

두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를 잠자리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두진이는 언제쯤 혼자 자고 싶어?” 아직 동생이 어려서 네 식구 모두 함께 자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 혼자 자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두진이는 말했다. “엄마, 난 혼자 자기 싫어.” 의존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돼서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혼자 잘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엄마가 항상 같이 자줄 수는 없는 거야.” 두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물었다. “고학년은 몇 학년인데?” “10학년!” 풋 웃음이 나왔다. “10학년은 없어(웃음).”

이 얘기를 동네 엄마에게 전해주니 그 엄마는 말했다. “고1 때까지 같이 자겠다는 얘기네요.” 순간 변성기의 수염 난 소년이 떠올라 또 풋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소년이 엄마와 함께 잠들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따로 재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 부부, #시간거지 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그나마 엄마아빠 품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었다. 자는 시간마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내게 발차기를 하거나 등 밑에 발 집어넣기 기술(?)을 시전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버려 “제발!” 외친 적도 있지만 잠결에 아이들을 안아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운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깨서 새벽 혼자 운 날도 있었다. 커버리는 게 아까워서. 정말 이상하다. 이 변화무쌍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버겁고 아깝고 부담스럽고 잃어버릴까 두려운 이 감정 말이다.

얼마 전부터 두진이가 잘 때 팔베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엄마, 불편해.” 팔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아이가 팔베개를 하면 불편하다고 했다. 늘 왼쪽 팔엔 두진, 오른쪽 팔엔 이준이를 장착(?)하고 자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는데. 방전되는 휴대폰이 충전되는 것처럼 90, 95, 99, 100%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내 팔에서 떨어져 혼자 베개를 베고 자기 시작하다니. 허전했다. 팔베개를 하면 불편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였다. 그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것이 언제였냐는듯이 나는 그 건강한 신호조차 아쉬워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잠들었다.

킥보드를 수리하는(?) 둘째와 그를 코치해주는 첫째

 

그렇게 내 몸에서 분리되길 원했던 아이들은 이제 곧 자기 혼자 설 것이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했던 내 말들이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날들이 곧 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삶이 이런 것인지 잘 몰랐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결이 다른 이 마음. 아이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의 부드러운 볼에 뽀뽀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먼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 것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은 나를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이제야 나는 이 세상에 발딛게 된 기분이 든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연두색 새싹처럼 여리지만 어떤 색깔보다 예쁜 아이들의 유년, 그 #유년 을 바라보는 나와 남편의 젊음.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인생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은 아빠

황경상

요즘 첫째는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다. <수박 수영장> <메리> 같은 책은 내가 봐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아이와 등교를 하면서 안녕달 작가의 책에 대해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학교 도서실에 보니까 안녕달 아저씨가 쓰신 다른 책도 있더라고~ 이따 빌리러 가자!”

“작가님이 책을 한 권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권도 쓴다고?”

“그럼 작가들은 여러 권을 쓰기도 하지. 안녕달 아저씨도 한 권만 쓰셨을 리가 없지.”

“근데, 아빠. 안녕달 작가님이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잖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나는 그림책 작가님을 그냥 남자, 아저씨라고 생각했을까. 안녕달 작가님은 필명을 쓰시는데 책에도 간단한 소개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여성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성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고정관념 을 단숨에 깨 주었다.

 “아, 맞다. 그래, 그럼 우리 그냥 작가님이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중에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진짜 여성이셨다.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매일매일 배우고 깨닫는다.

집 주변 곳곳에는 형형색색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그 전에는 그 꽃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봄이 되면 그저 꽃이 피는가보다 싶었다. 아이들은 그런 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자 둘째가 말했다. “아빠, 꽃잎이 아프면 어쩌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들에게는 꽃잎 하나, 풀잎 한 줄기, 나무 한 그루도 다 소중하다. 소중한 것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이름을 알려줘야 하는데 나도 도리가 없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게 포털사이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렌즈 기능이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 속에 있는 꽃과 유사한 꽃을 백과사전에서 찾아서 보여주는데 제법 정확하다.

 

아이들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된 제비꽃

 

제비꽃, 꽃잔디, 데이지, #애기똥풀 … 나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면 아이들은 이름을 불러보며 즐거워한다. 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도 그저 다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중에 좀 생김새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달라 한다. 사진을 찍어보니 #쥐똥나무 라고 알려준다. 그때부터 이건 사철나무, 이건 쥐똥나무 하면서 구별하면서 다닌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는 작고 동그란 나무 열매를 모으면서 좋아하기에 확인해 보니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천지사방에 떨어져 있어도 이름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바짝 말라버린 나무열매를 땅 속에 심고 있기에 “그건 심어도 싹이 안 나, 이미 씨는 다 날아가 버린 거야”라고 말하자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영혼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만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을 다시 나는, 이 나이에 배운다.

아이들 덕분에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열매.

 

나무열매를 모으고 만들고 하면서 신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서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또 함께 데리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말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많이 놀았잖아요. 우리한테는 왜 그래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정말 우리는 밖에서 많이 놀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실내에서 놀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나 놀랍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리자 첫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수줍음이 많은가봐, 내 손으로 안 와.”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아이들의 말들은 정말 잊어버릴까봐 두려워 매일 메모장에 기록하지만 빠뜨린 게 구할이다. 육아를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 예쁜 말이 가슴에 꽂혀 다시 한 번 아이들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마음을 아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매일매일 풀어서 다듬는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배우고 얻는 게 더 많다.

“아들, 오늘도 잘 하고 와!”

학교에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가는 첫째에게 소리치자 데리고 있던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들이 뭐야?”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이놈아!”

아직은 가르칠 것도 많지만 말이다.

 

[출처] 부모로 성장한다고 느낄 때 [부부 육아일기 4화]|작성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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