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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타이밍

존재가 빛이 나는 순간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입니다. 어떤 오후를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느지막이 일어나 '누런돼지'가 마감하는 날이라 아침을 차려주고 커피도 끓여줬습니다.
(ㅎㅎ 이렇게 말하면 제가 밥을 더 잘 챙겨주는 것 같지만 사실 반대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죠ㅋㅋ)

그리고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경향신문 '인터랙티브팀'이 낸 책인데요.
지난해 이 팀에서 경향신문에서 '알파레이디 리더십' 강연을 진행했고 그 강연을 묶어낸 책입니다.

첫 장이 손미나 전 KBS 아나운서가 한 강연 부분이었어요.
큰 기대 없이 책을 넘겼는데 그녀의 문장이 마음에 쏙쏙 들어와 이렇게 블로그까지 열어 글을 씁니다.
"아나운서에서 여행작가로 변신한 손미나"라는 제목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현실은 언제나 부족한 듯, 불안한 듯 느껴지는 법이거든요. 탈출하고 싶고, 나아지고 싶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생활을 하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고......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텐데, 제가 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용기를 내어 실천에 옮긴 것이죠.

저는 이 문장을 읽고 요즘 저의 생각을 표현해준 것 같아 마음이 울렸습니다.
삶이라는 게 항상 어딘가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다른 측면에서는 또 '견뎌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견딘다'는 것은 현실이 늘 부족하고 불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요즘 그래서인지 자주 '탈출' 혹은 '도망'을 꿈꿨습니다. ㅎㅎ 물론 실제로 그러진 못했지만요. 

그녀는 누구나 선망하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가졌었지만 10년차쯤 되면 그만두고 나가서 유학을 해야지, 계획표에 적어뒀었고 유학 시절 여행작가로 글 쓰시던 분이 특강을 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저런 일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인생에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며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순간의 마음을 기억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인 거죠.
그게 보통 사람들과 차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KBS 아나운서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도 그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도 많이 받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민도 많았습니다. 아나운서가 선망의 직업이라 하는데, 막상 그 안에서 경쟁하고 사랑받는 진행자로 살아남으려 애쓰면서 고민도 많았어요.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어요. 주7일 근무를 5년간 했어요. 떠나기 직전에는 '잠에서 깨어 직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하루만 있었으면'하고  밤마다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 제가 오랫동안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라디오 프로그그램을 진행했어요. 밤 프로이니 주로 심란한 사연이 올라옵니다. "죽을 것 같다"는 청취자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마음을 풀어 줘야 하니 저도 성심껏 "곧 헤쳐 나갈 거예요" 말해 주지요. 그런데, 나도 죽겠는데 누가 좀 위로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됐구나, 쉬어야겠다 싶었지요.

나에게 휴가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떠나야겠다고 생각해보니 제 자신이 어느새 약해져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저 혼자 힘으로 해온 일은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두려움도 많아지더라고요. 대학 시절 스페인에 갔을 때는 젊었던지라 겁이 없었는데, 그때는 여행조차 무서웠습니다.  

그녀는 두려움을 넘어 몰디브로 여행을 '혼자' 떠났다고 합니다. 거기서 만난 영국인 여성 의사와 말이 잘 통해서 7박8일을 함께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제가 방송사에서 일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그 친구가 듣고 있다가 "그래서, 행복하니(So are you happy?)"라고 묻는 거예요. 너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어요. 수영복 차림에 앞에는 인도양이 펼쳐져 있는데 거짓말은 못 하겠더라고요. 죽어도 입에서 "Yes!"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신가요?
손미나씨의 문장에 저는 지난해 5월이 생각났습니다. 지난해 5월쯤 저는 '행복하지 않아'라는 말을 매일 되새겼습니다. 일을 하고는 있는데 열심히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열심히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책을 읽을 시간도 나지 않는 업무 구조가 답답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역시나 '탈출'과 '도망'을 꿈꿨죠.  

그런데 '결혼'이 걸렸습니다.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결혼은 어쩌지.. 라며 걱정했습니다.
"여자 나이 서른"이었고 옆에서 엄마는 저를 볼 때마다 '결혼'을 얘기했습니다.
멋지고 '쏘 쿨'하게 "나는 결혼 같은 거 상관 않는 30대 커리어 우먼'이 되겠어!"하면 좋았겠지만
저는 결혼이 하고 싶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달려 오는 아내, 엄마, 며느리로의 책임감이 두렵긴 했지만
한 사람과 평생을 신뢰와 사랑으로 걸어간다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무한한 성장'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여자로 태어나 '엄마'가 되어 아기를 뱃 속에서 키우고 한 때 '내 몸'이었던 아이를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게 도와주는 그 과정을 꼭 겪어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래서 그 5월에 저는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지난해 가장 답답하고 힘들었던 시간, 제가 선택한 것은 '결혼'이었던 겁니다.

저는 결혼이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인생이 더 재미 없어지거나 하면 어떡해요. 그게 사실 사람들이 결혼하기 두려워하는 지점이죠. 특히 2012년 한국은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가혹한 사회가 맞습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에 가득차 (ㅎㅎ)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상위에 두고 고민했던 세 가지를 당시 남자친구였던 '누런돼지'가 지니고 있는지를 따져봤습니다(잘 따져봐야 합니다 ㅎㅎ) 첫번째는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가, 두번째가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이 제일 찾기 어려운 부분이었는데요. "감정의 진폭이 큰 나를 상쇄시켜줄 수 있는 사람인가" ㅎㅎ 왠지 부끄럽네요.

당시 남자친구였던 '누런돼지'는 다행히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부족했더라도 결혼을 결심하지 못했겠지만 다행히도 누런돼지를 믿어 의심치 않아 저는 5월 말부터 5개월을 준비해 결혼을 했지요.

결혼하고 나니 행복한 순간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결혼 전 예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뉴스를 보거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가끔 무작정 싫은 정치인이나 구태의연한 상황을 함께 무자비하게 욕하기도 하지요 ㅎㅎ 같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남편이 밑줄 쳐 놓은 구절은 한 번 더 읽으며 적어두기도 하고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와 감독의 역량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감정의 진폭이 큰 저는 막 우울했다가도 남편의 말을 듣고 위로받고 막 화가 났다가도 남편의 말을 듣고 화가 났던 상황이나 대상을 이해하게 되지요. ㅎㅎ 네 결혼 잘 했습니다.

/제주도의 하늘.

그런데도 저는 문득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를 생각합니다.

손미나씨는 대학 후배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대학 후배가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좋은 직장을 왜 관두냐고 하니, 더 이상 안 되겠대요. 남들 보기에는 번듯한 직장이었거든요. "누나, 가슴이 뛰질 않아요." 그 한 마디에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후배는 '가슴 뛰는 일'을 찾아가서 지금 너무 잘 하고 있어요. 어느 순간 자기에게 오는 육감적 이끌림이 있어요. 그걸 꼭 붙잡으세요.

가슴이 떨리시나요?
고민이었던 '결혼'을 하고 나니 저는 또다시 다른 '떨림'을 찾는 기분입니다.
인간이란 원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손미나씨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도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안돼요. 어릴 적으로 돌아가 보세요. 자전거, 스케이트 배울 때 안 넘어지고 배울 수 있던가요? 그런데 왜 인생에서는 안 넘어지고 가려 하나요.

제가 한동안 일이 잘 되기 않아 "왜 이렇게 안 될까요?" 했더니 친구 어머니께서 "네가 인생을 모르는구나. 뜻대로 되는 건 거의 없어"라고 하셨어요. 그걸 알면서도 노력하기 때문에 삶이 가치 있는 것이죠.

(...)
인생은 1막짜리 연극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2만, 3막을 열 수 있어요.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하지만 같은 코스를 뛰는 건 아니죠. 누구에게나 '나만의 코스'가 있어요.


저는 오늘 손미나씨의 강연록을 읽고
'나만의 코스'를 뛰는 사람의 열정을 읽어 행복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넘어져 울게 되어도 다시 일어나 행복하게 달리는 삶.
직장 생활을 한 지 3년 5개월 정도 됐는데 언젠가부터 '가슴이 뛰지 않는다'며 열심히 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혼을 선택했을 때처럼 마음을 열심히 달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여행기를 쓴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으로서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달나라를 간들, 어디를 간들 똑같은 글이 나올 거예요. 나 스스로 성장하고 싶어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성장하는 삶을 살기 위해 여행기를 쓰는 그녀.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ㅎ

회사를 나와 지금 책을 쓰면서 살다 보니, 내가 나의 성장을 위해 어디로 여행할 것인지 선택하고, 내가 글을 쓰고, 제목을 짓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디자인하니 그게 좋더라고요. 방송사에서도 10년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나의 천직이었어, 하지만 지금의 작가라는 것도 나의 천직이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읽은 책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말'이 가장 많은 글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을 무작정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도 그녀의 용기를 배우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할게요.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by 누런돼지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