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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타이밍

십대 그 찬란한 시절, 그리고 어긋난 관계

오쿠다 히데오 좋아하는 분들 많죠.

오쿠다 히데오가 <침묵의 거리에서> 1,2 라는 작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학생들의 학교 폭력을 다룬 작품인데요.

유머러스하게 사회를 풍자해왔던 그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학생들의 세계를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중학교 남학생들의 세계를 읽으면서 저는 쌩뚱맞게(?)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모든 게 엄마 시각으로 수렴됩니다. ㅎㅎ)

 

쉽게 가해자, 피해자로 나뉘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

그러나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잘 모르는 아이들.

그만큼 서툴기 때문에 상처주기 쉬운 어림, 그리고 여림.

 

제 중학교 시절도 떠올랐습니다.

이상하게 고등학교 시절만큼 중학교 시절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요.

추측컨대 아마 친구를 사귀는 것도, 공부를 하는 부담감도 어느 하나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도 저는 여자니까 소설 속 남자애들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경험한 적은 없었는데요.

남자애들의 세계는 정말 어렵고 피곤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소설은 한 소년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학교 운동장 콘크리트 도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 나구라 유이치.

사망 사건으로 학교는 발칵 뒤집히고 경찰 수사가 시작됩니다. 언론도 따라붙죠.

초기 수사 결과 나구라의 휴대폰에서 그가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부검 결과 나구라의 등에서 꼬집힌 흔적까지 발견됩니다. 경찰은 '사건'이란 확신 아래 가해자 4명을 수사하기 시작하죠.

 

소설은 경찰의 시각, 기자의 시각, 검사의 시각을 두루 보여주면서 학교 폭력이 어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보여줍니다. 사건일까, 사고일까 고민하는 기자, 사건이라는 확신 아래 수사를 하는 경찰, 경찰의 수사 과정과 결과를 고민하는 검사까지.

 

가해자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합니다.

자칫 눈이 찌푸려질 가해자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설득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의 솜씨겠죠.

 

피해자 가족들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절망 속에 빠집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심리를 그린 부분에서는 마음이 저릿했습니다.

 

 

 

2권부터는 나구라의 학교 생활이 자세하게 그려집니다.

그가 어떻게 친구들과 지냈는지, 그는 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됐는지까지.

 

소년의 죽음이 사건인지 사고인지는 결말에 가서야 밝혀집니다.

어떻게 보면 허탈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는데요.

 

결말로 가는 과정이 참 끔찍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계속 되새겨야 했죠.

두 눈 밖에 가지지 못해 자신의 뒷모습도 보지 못하는 존재.

열셋, 열넷 밖에 되지 않는 중학생들은 어설퍼서 더욱 서툴고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영화 <파수꾼>이 생각났습니다.

 

<파수꾼>에서도 한 소년이 죽습니다.

평소 아들에게 무심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뒤쫓기 시작하죠.
아버지는 아들의 서랍 안에서 아들의 두 친구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 친구들을 찾아가 보지만 둘 중 한 명은 전학을 갔고

나머지 한 명은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아버지는 계속 아들의 흔적을 찾습니다.

영화는 세 친구의 친했던 시간을 보여주며
서로의 미성숙한 소통의 오해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오는지 살핍니다.

우정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폭력이 되고 마는 상황과
오해로 인해 쌓여가는 상처까지.
서로가 전부라고 믿었던 세 친구들은 결국 안타까운 결말을 맞습니다.

 

 

 

 

 

 

십대 그 찬란한 시절의 관계는 <침묵의 거리에서>와 <파수꾼>처럼 연약합니다.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심을 전해야 하는지,

좋아해서 했던 말과 행동이 너무 쉽게 상대에게 상처가 되고

그게 상처가 되는 거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폭력은 더욱 깊게 스밉니다.

어른들은 그걸 쉽게 '학교 폭력'이라 부르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 그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찬란해서 잔인한 그 시기가 잘 지나가기를, 잘 버텨내기를 바래야겠죠.

 

저는 나구라가 외동아들이어서 더 친구와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소설 속 에이스케 등은 외동이지만 친구들과 잘 지내기도 하죠.

다만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타인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는 '사회성'을 잘 익히긴 상대적으로 어렵겠구나라는 당연한 진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둘째를 낳아야 하나'라며 심각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_-;;

 

나구라는 점점 외로워져서 가상의 형과 동생을 만들어 혼잣말을 하기까지 합니다.

참 마음이 아프더군요.

 

이미 십대의 시기를 지난 저는

이제 얼마 후면 십대를 맞을 아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게 당연한 인간들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후에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이 좀 덜 폭력적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아들에게 친구를 대하는 법, 세상을 사는 법을 설명하면, 그렇게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요.

 

 

오쿠다 히데오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상상력임에 분명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자기 성찰, 상상력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단어들입니다.

 

찬란한 십대의 시절 같은 봄날이 옵니다.

이 봄날에 <침묵의 거리에서>와 <파수꾼>을 추천해봅니다

 

 

 

 

[책과 삶]‘왕따게임’의 진실… 100%의 악도 정의도 없다

▲ 침묵의 거리에서 1·2…오쿠다 히데오 지음·최고은 옮김 | 민음사 | 각권 376쪽, 344쪽 | 각권 1만2000원

한 소년이 학교 운동장 은행나무 아래 있는 콘크리트 도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다. 그의 이름은 나구라 유이치. 학교는 발칵 뒤집힌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언론이 취재 경쟁을 벌인다. 수사 결과 소년의 등에서 꼬집힌 자국이 여러 개 발견되고 친구들이 그에게 보낸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강압적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네 명의 학생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 수사를 받는다. 나구라를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오쿠다 히데오(사진)가 학교폭력 문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공중그네> <면장선거> 등의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특유의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그려온 그가 이번에는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학교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다. 유머는 줄어들었지만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감과 인물들에 대한 공감 가는 심리 묘사는 여전하다. 그는 중학생들의 학교폭력 실상을 꼼꼼하게 다루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는 도중에 일본 시가현에서 소설과 유사한 중학생 자살 사건이 일어나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얼핏 소설은 ‘나구라를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결말을 알고 나면 “100%의 악도, 100%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작가의 말)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경찰, 검사, 기자, 담임 선생님, 가해자 부모, 피해자 부모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기자는 ‘사건일까, 사고일까’에 관심을 갖고, 경찰은 사건이라는 확신 아래 수사를 지속한다. 피해자 부모는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을 저지른 학생들을 처벌해달라고 요구하는 반면, 가해자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가 망가질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모임까지 만든다. 인간이란 두 눈밖에 가지지 못해 자신의 뒷모습도 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새삼 실감난다. “인간이란 원래 제 주변밖에 관심이 없는 법”(1권 87쪽)이고 “당사자들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할 말, 그리고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1권 366쪽)는 소설 속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소설은 냉정하지만 차분하게 보여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권은 나구라의 학교 생활이 어떠했고 어떻게 죽음까지 가게 됐는지를 그린다. 그러나 1권에서 어른들이 구분한 것처럼 소설 속 중학생들은 손쉽게 가해자, 피해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가해자로 지목됐던 4명 중 에이스케와 겐타는 실제 나구라를 지켜주려고 한 적도 있었고 실제 나구라를 많이 괴롭힌 사람은 가해자로 지목되지 않은 이노우에였으며 3학년 선배들마저 나구라를 괴롭혔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왕따’였던 나구라도 1학년 후배들을 괴롭힌 적이 있고 여자친구들을 때리기도 했다. 폭력은 먹이사슬처럼 연결되고, 또 꼬여있다. 다들 자기보다 약한 상대한테 분을 풀었다.

중학생은 그런 시절이다. 찬란해서 잔인하다. 학교폭력을 당하고도 부모와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는 열세 살, 열네 살 중학생들의 사정은 간단치 않다. “중학생들은 의지할 사람이 없다. 부모와 교사는 그들과 사는 곳이 다르다. 영양이 코끼리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표범에게는 못 당한다.”(2권 18쪽) 그들은 그들의 질서에서 산다. 그들의 세계에서 왕따는 ‘게임’이다. 그들의 질서를 어긴 나구라는 점차 고립되어갔다. 그 과정에서 포목점 아들이라 유복했고, 유복해서 가질 수 있었던 값비싼 테니스복, 최신형 스마트폰, 게임기 등이 친구들의 질시를 받았다는 것을 그의 부모는 몰랐다. 그저 하나뿐인 아들이라 귀하게만 대해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됐고, 그래서 오히려 혼잣말을 할 정도로 외로워졌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구라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들 자기 입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나구라를 감싸줬던 겐타와 에이스케도 결국엔 나구라에게서 포카리를 빼앗아 먹었고 이노우에와 3학년 ‘날라리’들은 나구라의 집에서 옷을 빼앗았으며 여자 동급생을 때린 나구라에게 화내던 도모미는 “멍청이, 죽어 버려”라고 말했다. 다른 욕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나구라의 등을 꼬집었다. 여자애들마저. 친구들은 체구가 작고 운동신경이 둔한 나구라가 지붕에서 은행나무로 뛰지 못하자 “뛰어라, 뛰어라”라고 외친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구라의 장례식 때도 울지 않았다.

이제 소년은 없고 다들 죽은 소년은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만을 생각할 뿐.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일까. 그래도 나구라가 죽은 7월1일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작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과 상상력임에 분명하다고 저는 믿습니다.”(작가의 말)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