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 주도했던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또다시 젊은 세대가 한국정치 변화의 진원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하고 투표도 잘 안 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그들이 최근 들어 투표도 열심히 하고 복지와 분배 이슈를 지지하는 투표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현실 안주에 빠져있던 정치권과 정당체제 전반에 엄청난 충격효과를 불러왔고,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커다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왜 다시 적극적 시민으로 등장하게 되었나? 일시적인 현상인가 아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들 젊은 세대가 보여주고 있는 불만과 요구의 정치적 표출은 한국의 정당체제에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확실하다. 그동안 국가의 성장일변도 경제정책이 화려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가져온 부작용, 말하자면 고용증가를 동반하지 않는 성장, 실업 증가, 취업의 어려움, 정규·비정규직으로의 노동시장 양극화, 소득분배구조 악화 등은 자살률 증가, 출산율 급락과 같은 심각한 사회해체 효과를 만들어냈다. 성장과 그 부정적 효과라는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이러한 사회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바로 이러한 부작용을 전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제 젊은 세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기존의 성장정책이 갖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함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들은 정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현실의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직접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얼마 전 대구 가톨릭대와 목포대를 방문해 강연도 하고, 제법 많은 학생들과 만나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확실하다. 그동안 국가의 성장일변도 경제정책이 화려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가져온 부작용, 말하자면 고용증가를 동반하지 않는 성장, 실업 증가, 취업의 어려움, 정규·비정규직으로의 노동시장 양극화, 소득분배구조 악화 등은 자살률 증가, 출산율 급락과 같은 심각한 사회해체 효과를 만들어냈다. 성장과 그 부정적 효과라는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이러한 사회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바로 이러한 부작용을 전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제 젊은 세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기존의 성장정책이 갖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함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들은 정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현실의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직접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얼마 전 대구 가톨릭대와 목포대를 방문해 강연도 하고, 제법 많은 학생들과 만나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경향신문 DB
대구나 목포에서 학생들은 “지방대이기 때문에 취업기회를 잡기 위한 정보가 부족하”고 “토플영어를 준비할 수 있는 모임이나 기회가 제한적”이라는 애로를 공통적으로 말하면서 지방대학의 불리한 점을 토로한다. 대구에서와는 달리 목포대에서 내가 만난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알바 경험을 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렵고 중소기업은 밤낮으로 일해서 180만~200만원밖에 못받고, 그것도 2년 계약 비정규직인지라 한두달은 하겠는데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정규·비정규직 노동시간, 임금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목포대의 교수는 내게 사교육이 부족해서 영어가 문제이고, 지역경제의 낙후로 인해 취업에 구조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을 일러준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취업을 위한 노동시장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구조로 고통받고 있다.
첫째는 대학 서열화가 가져오는 불평등과 양극화이다. 이는 직업, 직능기술교육을 배제한 일반교육 중심의 대학제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것은 모든 사회경제적 직업, 직종이 단일한 위계구조로 배열돼있는 고용의 수요측면과 그에 상응해 스펙과 서열화된 대학에 매달리는 인력의 공급측면이 짝을 이루는 악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 구조는 가히 “1%를 위한 99%의 희생”이라는 말에 비유될 법하다. 왜냐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극히 소수의 취업과 성공을 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그 밑을 깔아주는 열패자의 지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요되는 개인적 희생과 사회경제적 비용이 얼마나 크고, 지방대생들의 좌절감이 얼마나 큰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는 하층 노동시장에 위치한 젊은 세대들이 대면하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양극화 문제이다. 고용에 대한 중소기업의 기여가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젊은 세대들, 특히 대졸자들이 중소기업에 취업하기를 희망할 수는 없다. 아무리 취업이 어렵다 해도 비정규직으로서 임금도 낮고, 고용조건도 나쁘고, 전망도 없고,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관련 기본법들도 효력을 갖지 못하는 하청 중소기업 취업에 삶의 미래를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소기업의 고용수요와 젊은 세대들의 취업희망 사이에 뚜렷한 불일치(mismatch)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왜 ‘안철수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실감했다. 대구에서나 목포에서나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정당 간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정당들이 대안 없이 너무 투쟁에만 몰두”하는데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한편, 안철수에 대해서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좌절에 공감하고,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준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안철수가 다른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난도와 다른 것은, 좌절감에 빠진 젊은이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하는 감성적 접근에서는 비슷하지만, 재벌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잘못된 생산체제, 젊은이들의 창의력을 억제하는 경쟁만능의 잘못된 사회 운영원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폐쇄적 계층화라는 ‘칸막이 사회’의 막힌 통로에 갇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삼포세대’임을 자조하면서 좌절감에 빠진 젊은이들을 향해, 이 사회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로 바꾸자고 말하는 그의 메시지는 강력했고 커다란 공감을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기존의 정당들은 마땅히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 시도했어야할 사회경제적 과제들에 무관심했고, 진보진영은 도덕적 우월성만 내세우며 공허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하면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남겨놓은 빈 공간을 ‘청춘콘서트’가 휘젓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안철수 현상은, 앞으로 그의 행적이 어떠하든 또 그것의 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 젊은 세대들의 자기발견과 정치적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
기성정당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은 예상대로였다. 대구의 학생들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현실 정치의 중심요소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나라당은 극심한 증오심에 사로잡혀있고, 민주당은 이 정부를 무조건 반대한다”고 양쪽 모두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가 돼도 같으니까 기왕이면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 찍을 것”이라는 현실론을 편다. 다른 한 학생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노동자이익을 대변하는지 의심스럽다. 투철한 계급의식을 갖는 진보세력이 없다”라고 불평한다. 목포대의 한 학생은 그래도 지지하는 당은 민주당이지만 “도덕성이 없다”고 말한다. “안철수의 이미지는 강하지만, 기업가 역할밖에 업적이 없고, 정당 지원이 없이 정치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데 동의하는 학생들도 여럿이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무척 성숙하고 균형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기성 정당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중심 역할을 부정하는 반정당의 무당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비전과 정책에서 차별성을 갖는 정당을 기대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이념정당을 기대하면서도, 진보의 객관성 결여와 공격적 언사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실 나는 학생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이해의 수준이 그렇게 높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가혹한 경쟁 일변도의 대학 사회에서 어떻게 그토록 이성적인 판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갑자기 한국정치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세대구도’, ‘세대갈등’, ‘2040세대’라는 말이 표현하고 있듯이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젊은 세대들이 안정적인 투표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통해 기성 정당체제에 외부적 충격을 가해 사회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립 축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낙후되고 기득이익에 안주하고자 하는 기성 정당체제가 개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대가 희망적 사고에 그치지 않고 실제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스스로 변하거나 아니면 변화를 강요할 수 있는 강한 충격이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대구와 목포에서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서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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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도 교수를 보면서 늘 한쪽이 불편했던 점이 적확히 지적돼 있는 글.
오늘날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취업을 위한 노동시장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구조로 고통받고 있다.
첫째는 대학 서열화가 가져오는 불평등과 양극화이다. 이는 직업, 직능기술교육을 배제한 일반교육 중심의 대학제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것은 모든 사회경제적 직업, 직종이 단일한 위계구조로 배열돼있는 고용의 수요측면과 그에 상응해 스펙과 서열화된 대학에 매달리는 인력의 공급측면이 짝을 이루는 악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 구조는 가히 “1%를 위한 99%의 희생”이라는 말에 비유될 법하다. 왜냐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극히 소수의 취업과 성공을 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그 밑을 깔아주는 열패자의 지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요되는 개인적 희생과 사회경제적 비용이 얼마나 크고, 지방대생들의 좌절감이 얼마나 큰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는 하층 노동시장에 위치한 젊은 세대들이 대면하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양극화 문제이다. 고용에 대한 중소기업의 기여가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젊은 세대들, 특히 대졸자들이 중소기업에 취업하기를 희망할 수는 없다. 아무리 취업이 어렵다 해도 비정규직으로서 임금도 낮고, 고용조건도 나쁘고, 전망도 없고,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관련 기본법들도 효력을 갖지 못하는 하청 중소기업 취업에 삶의 미래를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소기업의 고용수요와 젊은 세대들의 취업희망 사이에 뚜렷한 불일치(mismatch)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왜 ‘안철수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실감했다. 대구에서나 목포에서나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정당 간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정당들이 대안 없이 너무 투쟁에만 몰두”하는데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한편, 안철수에 대해서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좌절에 공감하고,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준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안철수가 다른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난도와 다른 것은, 좌절감에 빠진 젊은이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하는 감성적 접근에서는 비슷하지만, 재벌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잘못된 생산체제, 젊은이들의 창의력을 억제하는 경쟁만능의 잘못된 사회 운영원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폐쇄적 계층화라는 ‘칸막이 사회’의 막힌 통로에 갇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삼포세대’임을 자조하면서 좌절감에 빠진 젊은이들을 향해, 이 사회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로 바꾸자고 말하는 그의 메시지는 강력했고 커다란 공감을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기존의 정당들은 마땅히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 시도했어야할 사회경제적 과제들에 무관심했고, 진보진영은 도덕적 우월성만 내세우며 공허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하면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남겨놓은 빈 공간을 ‘청춘콘서트’가 휘젓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안철수 현상은, 앞으로 그의 행적이 어떠하든 또 그것의 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 젊은 세대들의 자기발견과 정치적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
기성정당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은 예상대로였다. 대구의 학생들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현실 정치의 중심요소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나라당은 극심한 증오심에 사로잡혀있고, 민주당은 이 정부를 무조건 반대한다”고 양쪽 모두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가 돼도 같으니까 기왕이면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 찍을 것”이라는 현실론을 편다. 다른 한 학생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노동자이익을 대변하는지 의심스럽다. 투철한 계급의식을 갖는 진보세력이 없다”라고 불평한다. 목포대의 한 학생은 그래도 지지하는 당은 민주당이지만 “도덕성이 없다”고 말한다. “안철수의 이미지는 강하지만, 기업가 역할밖에 업적이 없고, 정당 지원이 없이 정치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데 동의하는 학생들도 여럿이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무척 성숙하고 균형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기성 정당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중심 역할을 부정하는 반정당의 무당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비전과 정책에서 차별성을 갖는 정당을 기대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이념정당을 기대하면서도, 진보의 객관성 결여와 공격적 언사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실 나는 학생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이해의 수준이 그렇게 높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가혹한 경쟁 일변도의 대학 사회에서 어떻게 그토록 이성적인 판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갑자기 한국정치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세대구도’, ‘세대갈등’, ‘2040세대’라는 말이 표현하고 있듯이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젊은 세대들이 안정적인 투표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통해 기성 정당체제에 외부적 충격을 가해 사회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립 축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낙후되고 기득이익에 안주하고자 하는 기성 정당체제가 개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대가 희망적 사고에 그치지 않고 실제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스스로 변하거나 아니면 변화를 강요할 수 있는 강한 충격이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대구와 목포에서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서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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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도 교수를 보면서 늘 한쪽이 불편했던 점이 적확히 지적돼 있는 글.
진보정당과 진보 언론이 귀기울여야 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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