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1272131435&code=990340
24일자 1면에 151개의 명함판 사진이 실렸다. 한·미 FTA 비준안을 찬성한 국회의원들의 얼굴이다. 기사는 한 줄도 없다. 평소 같으면 그날의 주요 소식을 알리는 활자로 가득해야 할 지면에 느닷없이 사진을 들이민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전날 7개면에 걸친 경향의 한·미 FTA 관련 보도를 종합하면, “국민의 경제주권을 날치기로 넘긴 사람들이니 기억하고 선거에서 참조하자”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정치행위의 책임을 공적 주체인 정당이 아니고 인격체인 의원 개개인으로 돌리는 이런 새로운 시도가 저널리즘 행위로 갖는 의미는 무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 사건의 제목 달기 놀이를 해보자. 가장 건조한 제목을 달면 “여,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제목은 사실이지만 공허하다. 한·미 FTA의 현실이 빠져 있다. 사실상 언론의 침묵이다. 이런 언론은 무능한 언론이다. 아주 익숙한 또 다른 제목이 있다.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처리”. ‘강행처리’가 행위자에 대해 호의적이라면, ‘날치기처리’는 비판적이다.
문제는 비판의 준거가 처리 방식이지, 처리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역시 한·미 FTA의 현실은 빠져 있다. 이런 언론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보도의 목적이 돼야 할 정치적 현실을 보지 못하고 절차적인 규범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무지한 언론과 의도적으로 절차적 규범을 내세워 현실을 은폐하는 교활한 언론이다.
다음은 한·미 FTA의 현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정치적 입장까지 밝힌 제목이다. “ ‘미국 경제체제’ 날치기로 도입-한·미 FTA 여, 비공개처리, 야당·시민단체 격한 반발”. 한·미 FTA 비준안이 처리된 다음날인 23일자 경향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 제목은 한·미 FTA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드러내고 거기에 대한 신문의 입장까지 밝혔다. 여기에는 한·미 FTA의 현실이 있고 거기에 대한 신문의 평가가 있다. 하지만 한·미 FTA의 부정적 현실을 야기한 행위주체는 ‘여당’, 반발의 주체는 ‘야당’과 ‘시민단체’라는 탈인격화된 공적 주체로 전제된다.
이 구도에서는 공적주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기 어렵다. ‘나는 당론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다 이런 태도를 취하면 당이라는 공적 주체의 텅 빈 껍데기가 책임을 지게 된다. 실제로 인격화된 책임소재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권리의 순간에는 인격화된 개인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책임의 순간에는 공적 주체의 껍데기 뒤로 숨어버리는 정치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윤리적 책임은 인격화된 정치적 주체가 행위의 주체로 전제될 때나 가능한 것이다.
24일자 1면의 “한·미 FTA 비준안 찬성한 국회의원 151명”이란 제목과 151명의 사진은 ‘여당’이란 행위주체를 151명의 얼굴로 대체한다. (표결에 참여한 ‘여당’ 중에는 극소수 기권과 반대표도 있었다.) 탈인격화된 공적주체를 윤리적 책임이 부과되는 인격화된 개체로 치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연쇄적으로 ‘시민’이란 공적주체도 시민 개개인이란 인격화된 주체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 이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을 뽑은 것은 바로 나’란 사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진은 정치를 ‘인격화된 주체 없는 공적 과정’에서 ‘주체의 결단과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 바꿔 놓고 있다. 즉 여당 대 야당( 및 시민단체)의 대립 구도를 한·미 FTA 비준안 찬성 의원 대 이들을 뽑은 시민 개개인( 및 이들의 당선을 막지 못한 다른 시민 개인)의 구도로 돌려놓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현상을 주체들의 관계로 환원해서 보는 것을 ‘정치적인 것’, 객관화된 현상으로 보는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차이는 간단하다. 전자는 시민 개개인을 당사자로 가정하고, 후자는 구경꾼으로 가정한다. 전자는 시민 개인에게 실질적 권리와 부담을 동시에 주지만, 후자는 둘 다 주지 않는다. 한국신문의 정치보도는 정치를 직업정치인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객관화시켜 보도한다. 정치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하다. 경향의 1면 사진은 이 타성을 내려친다. 정치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자고 한다.
나는 이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보수담론이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라면 진보는 이를 교정하는 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4일자 1면 사진은 진보지로서 경향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을 넘어 객관화된 사건과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는 사회면을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기사작법에 대한 고민이 따라야 할 것 같다. 진정으로 정치적인 보도는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풀어내는 게 아닐까 싶다.
24일자 1면에 151개의 명함판 사진이 실렸다. 한·미 FTA 비준안을 찬성한 국회의원들의 얼굴이다. 기사는 한 줄도 없다. 평소 같으면 그날의 주요 소식을 알리는 활자로 가득해야 할 지면에 느닷없이 사진을 들이민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전날 7개면에 걸친 경향의 한·미 FTA 관련 보도를 종합하면, “국민의 경제주권을 날치기로 넘긴 사람들이니 기억하고 선거에서 참조하자”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정치행위의 책임을 공적 주체인 정당이 아니고 인격체인 의원 개개인으로 돌리는 이런 새로운 시도가 저널리즘 행위로 갖는 의미는 무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 사건의 제목 달기 놀이를 해보자. 가장 건조한 제목을 달면 “여,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제목은 사실이지만 공허하다. 한·미 FTA의 현실이 빠져 있다. 사실상 언론의 침묵이다. 이런 언론은 무능한 언론이다. 아주 익숙한 또 다른 제목이 있다.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처리”. ‘강행처리’가 행위자에 대해 호의적이라면, ‘날치기처리’는 비판적이다.
다음은 한·미 FTA의 현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정치적 입장까지 밝힌 제목이다. “ ‘미국 경제체제’ 날치기로 도입-한·미 FTA 여, 비공개처리, 야당·시민단체 격한 반발”. 한·미 FTA 비준안이 처리된 다음날인 23일자 경향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 제목은 한·미 FTA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드러내고 거기에 대한 신문의 입장까지 밝혔다. 여기에는 한·미 FTA의 현실이 있고 거기에 대한 신문의 평가가 있다. 하지만 한·미 FTA의 부정적 현실을 야기한 행위주체는 ‘여당’, 반발의 주체는 ‘야당’과 ‘시민단체’라는 탈인격화된 공적 주체로 전제된다.
이 구도에서는 공적주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기 어렵다. ‘나는 당론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다 이런 태도를 취하면 당이라는 공적 주체의 텅 빈 껍데기가 책임을 지게 된다. 실제로 인격화된 책임소재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권리의 순간에는 인격화된 개인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책임의 순간에는 공적 주체의 껍데기 뒤로 숨어버리는 정치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윤리적 책임은 인격화된 정치적 주체가 행위의 주체로 전제될 때나 가능한 것이다.
24일자 1면의 “한·미 FTA 비준안 찬성한 국회의원 151명”이란 제목과 151명의 사진은 ‘여당’이란 행위주체를 151명의 얼굴로 대체한다. (표결에 참여한 ‘여당’ 중에는 극소수 기권과 반대표도 있었다.) 탈인격화된 공적주체를 윤리적 책임이 부과되는 인격화된 개체로 치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연쇄적으로 ‘시민’이란 공적주체도 시민 개개인이란 인격화된 주체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 이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을 뽑은 것은 바로 나’란 사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진은 정치를 ‘인격화된 주체 없는 공적 과정’에서 ‘주체의 결단과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 바꿔 놓고 있다. 즉 여당 대 야당( 및 시민단체)의 대립 구도를 한·미 FTA 비준안 찬성 의원 대 이들을 뽑은 시민 개개인( 및 이들의 당선을 막지 못한 다른 시민 개인)의 구도로 돌려놓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현상을 주체들의 관계로 환원해서 보는 것을 ‘정치적인 것’, 객관화된 현상으로 보는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차이는 간단하다. 전자는 시민 개개인을 당사자로 가정하고, 후자는 구경꾼으로 가정한다. 전자는 시민 개인에게 실질적 권리와 부담을 동시에 주지만, 후자는 둘 다 주지 않는다. 한국신문의 정치보도는 정치를 직업정치인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객관화시켜 보도한다. 정치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하다. 경향의 1면 사진은 이 타성을 내려친다. 정치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자고 한다.
나는 이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보수담론이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라면 진보는 이를 교정하는 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4일자 1면 사진은 진보지로서 경향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을 넘어 객관화된 사건과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는 사회면을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기사작법에 대한 고민이 따라야 할 것 같다. 진정으로 정치적인 보도는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풀어내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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