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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콘서트]‘우리편’이라는 괴물 /최태섭(경희대 박사과정·문화이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2052103215&code=990000
경향신문 12월 6일자.

“쫄지마 씨바!”라는 말이 최고의 유행어로 자리 잡은 요즘이다. 그런데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게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떤 두려움들을 떨쳐낼 수가 없다. 물론 이 두려움의 대상이 집권여당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다름 아닌 ‘우리편’이다.

하나의 소동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진보성향임을 전혀 감추지 않는 영화평론가인 허지웅이 종합편성채널(종편)의 영화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욕설을 동반해 유감을 표명하며 ‘언팔로어의 심판’을 날렸고, 그가 <나는 꼼수다>(나꼼수)를 비판한 사실과 연관지어 “나꼼수를 비판하고 종편으로 간다”는 식의 스토리텔링도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시사in의 고재열 기자는 “조·중·동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에게 일벌백계의 교훈을 주기 위해” 허지웅에 대한 기괴한 비방을 이어갔고, 이에 허지웅이 고재열에게 대화를 시도하자 다른 누군가의 답변이 이어졌다. “독립투사는 일본 앞잡이와 대화 안 합디다.”

종편이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고, 거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을 보이콧하겠다는 개개인의 결심은 개인에게 맡겨둘 일이다. 문제는 허지웅에게 가해진 비난의 성격이다. 그는 평소에 진보적인 입장의 글들을 기고해왔다는 것과, 심지어 나꼼수를 비판했다는 이유 때문에 모종의 가중처벌을 받았다. 그를 옹호하거나, 현재의 비난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이들 역시 이 포화의 표적이 된 것은 물론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일개 진보적 영화평론가가 “국민 여동생 김연아”를 압도하며 욕을 먹어야 했다.



이제 상황을 단지 ‘열망이 과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반 FTA 집회에서는 다른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분열의 시도라며 공격받고, 참여정부의 공과를 거론하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여겨진다. 집단지성은 실시간으로 살생부를 업데이트하느라 여념이 없고, 정치는 점점 심판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어간다. 게다가 이번 사건을 두고 생각해보면 각종 ‘부역자’를 처단하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을 이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반MB연합에 반대하거나, ‘노동’ 같은 낡은 개념으로 통합에 재나 뿌리고 있는 ‘구’진보들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희망버스의 노동에 대한 놀라운 지지가 김진숙의 감격스러운 착륙 이후 마술처럼 사라졌듯이, 우리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이 유약한 연대가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실상 여기에서 ‘구’진보가 맡을 역할은 거의 정해져 있다. 우리편이라는 괴물은 그 ‘구’진보가 자신의 가치로 삼았던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는 한편, 그들이 가진 얼마 안되는 자원과 도덕성은 재물로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왜 곽노현을 믿지 못하냐며 진보의 도덕적 결벽증을 욕하던 우리편은, 영화평론가의 영화프로그램 출연에 부모님의 원수라도 만난 듯이 달려든다. ‘구’진보가 무관심 속에서도 풍파를 맞으며 쓸쓸히 지키고 서 있던 민주주의에 입성한 우리편은 왜 그렇게 비루하게 사냐며 ‘구’진보를 비아냥거리다가도, 조금이라도 몫을 주장할라치면 얼굴을 바꿔 이기적인 행태라며 엄중하게 비난한다. 결국 ‘구’진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변죽을 울리거나, 유일하게 허락된 땅인 크레인에 올라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 말고는 없다.



만약 스스로를 포함한 우리편의 안위가 정말로 걱정된다면, 이 괴상한 점령군놀이는 집어치워야 한다. 가르치려 드는 ‘구’진보의 자세가 가당찮다면 얼마든지 비판하고 욕해도 좋다. 그러나 부디 ‘구’진보의 실패담만큼은 꼭 기억해두기 바란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혼란스러웠던 지점.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준 글.
그러나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트위터를 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