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레토코 반도를 다녀왔다. 지면 제약으로 미처 나가지 못한 글과 사진을 여기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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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일본 홋카이도 시레토코 반도 원시림 속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사슴 두 마리가 무심히 노닐고 있다. 절벽 너머 왼쪽으로는 오호츠크해의 유빙이, 오른쪽으로는 눈 덮인 이오산(1563m)이 보인다.


시레토코 반도의 풍경


유빙(流氷)은 반도의 코끝을 간질이기만 할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러시아 아무르(헤이룽)강 하류에서부터 오호츠크해를 거쳐 1000㎞를 달려 오느라 힘에 부쳤던 탓일까.

북극 사진에서나 본 거대한 얼음덩이들을 북반구에서는 가장 남쪽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지역으로 떠났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동쪽 끝에 자리한 시레토코(知床) 반도. 북위 44도 언저리다. 수십 년 전에는 오로라도 발견됐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출국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유빙은 닿을락말락 ‘밀당’을 계속했다. 경향신문이 후원한 이번 ‘착한여행-세계문화유산 시리즈’를 주최한 착한여행사 나효우 대표는 현지에 미리 도착한 뒤 메신저로 “밤새 유빙을 밀고 오겠다”며 긴장섞인 우스개를 던졌다.

유빙의 속도는 바람세기의 10분의1 정도라고 했다. 도착한다 해도 날씨에 따라 녹아버릴 수도, 순식간에 흘러갈 수도 있다. 출발 당일 아침에야 유빙을 볼 수 있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매년 유빙 관측은 2월 중순부터 시작해 3월말 즈음까지 할 수 있었다. 올해처럼 도착이 늦어진 것은 1959년 유빙 관측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이란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유빙의 여로만큼이나 맞이하러 가는 길도 녹록치는 않았다. 역시 1000㎞를 헤아렸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국내선을 갈아타고 홋카이도 메만베츠 공항으로 이동했다. 다시 2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시레토코 반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샤리초(斜里町) 우토로 마을에 도착했다. 환승 시간을 포함해 거의 종일이 걸렸다. 

숙소에 도착하자 로비에는 ‘유빙의 천사’라고 불리는 클리오네(clione)를 수십 마리가 노닐고 있는 수족관이 있었다. 약 1.5㎝ 길이의 투명한 몸체를 지닌 이 작은 생명체의 모습에 빠져들어 피로도 잊었다. 클리오네는 이번 유빙 도착과 함께 수년만에 발견됐다고 했다.


숙소 수족관에서 놀고 있는 클리오네


■ 바닷물도 민물도 아닌 ‘유빙의 맛’

다음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유빙을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스킨스쿠버에 쓰이는 드라이슈트로 옷을 갈아입고 바닷가로 내려섰다. 바닷물은 온데간데 없고 셔벗 아이스크림 같은 유빙이 점령군처럼 들어차 있었다. 표면은 미장을 덜 끝낸 벽면처럼 울퉁불퉁했다. 간간히 드러난 유빙의 속살은 고대 지층처럼 얼음판이 층층이었다.

‘까드득까드득’ 묵직한 얼음덩이들이 서로 살을 부비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겉으로는 그저 얼어붙어 꼼짝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유빙 위로 올라서자 유빙 사이로 언뜻 바닷물이 출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유빙은 몸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아래위로 울렁였다. 디즈니 동화 <추위를 싫어한 펭귄>의 주인공 펭귄이 돼 막 깨지기 시작한 얼음조각 위에 선 기분이었다.

발밑의 유빙 한 조각을 뜯어내 맛을 봤다. 바닷물도 민물도 아니었다. 짠맛이 날듯말듯 아리송했다. 몽골, 중국, 러시아… 아무르강이 4000㎞를 흘러오면서 품었던 맛에 오호츠크해의 풍미가 더해진 셈이다.

이 독특한 맛의 유빙은 바다와 육지, 강과 바람의 만남으로 이뤄진 합작품이다. 아무르강에서 흘러온 신선한 민물이 오호츠크해로 흘러들면서 바다 상층부의 염분 농도가 낮아진다.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오호츠크해는 본래 수온이 낮은데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찬바람까지 더해진다. 이 틈에 저염분의 바닷물이 얼어붙으면서 유빙이 만들어진다.


여행팀의 한 참가자가 바다를 가득 메운 유빙 사이로 직접 들어가 유빙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다.


유빙과 유빙 사이, 얇게 얼어붙은 살얼음 위에 살짝 엎드리자 ‘쩍’ 하고 얼음이 갈라진다. ‘슬로우! 슬로우!’ 천천히 들어오라는 안내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밀어넣었다. 발이 닿지 않아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유빙 쪽으로 발을 올려차보자 단단한 촉감이 발에 와 닿았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실감났다. 전혀 춥지는 않았다. 눈높이로 수평선까지 펼쳐진 유빙을 바라보니 거대한 얼음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잠시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지만 드라이슈트는 내 몸 모양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장화까지 연결된 드라이슈트는 물샐 틈이 없었지만 장갑을 낀 손이 문제였다. 물에 들어갈 때도 ‘손을 들고 있으라’고 주의를 받았지만 어느새 물이 스몄다. 물기가 조금 닿았을 뿐인데 손이 얼어붙는듯했다. 갖고 간 카메라는 추위로 갑자기 배터리가 방전되며 작동 불능상태가 됐다.


■ 개발 안 했더니 젊은이 유입 더 늘어

‘착한여행’은 소비중심의 관광을 넘어서 방문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고 생각의 폭을 넓혀나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리즈 첫번때 시레토코 여행의 주제 역시 ‘관계’였다. 가급적 현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일정이 꼭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여행팀은 샤리초(町·한국의 읍면 단위에 해당)의 기관장인 바바 다카시(馬場隆) 정장(町長)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이 지역에 오는 한국 관광객들은 잠시 유빙만 보고 돌아가곤 한다. 바바 정장은 한국에서 온 여행팀이 시레토코의 자연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이 지역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한다는 얘기에 흔쾌히 시간을 내줬다.


시레토코 자연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바바 다카시 정장

“시레토코는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말로 ‘세상의 끝’이란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끝’이지만 자연을 아끼는 마음을 전파하는 데는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바 정장의 이같은 자부심은 바로 시민 스스로 이 지역을 지켜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홋카이도에서도 오지인 시레토코 반도에는 1910년대부터 외지인들의 개척이 이뤄져 왔지만 엄혹한 자연환경 탓에 1960년대 중반 모두 철수했다. 1964년 일본 정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긴 했지만 고도성장기였던 1970년대 부동산 투기 열풍은 이곳도 비껴가지 않았다. 과거 개척지를 사들여 대규모 휴양시설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맞서 1977년 샤리초는 시민들의 기부금을 모아 이 개척지들을 매입해 보존하고 나무를 심어 자연을 회복시키자는 운동을 펼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서 힌트를 얻었다. 한 사람당 8000엔(현재는 5000엔)을 내서 100㎡를 사들이자는 ‘시레토코 100㎡ 운동’의 시작이었다. 아사히신문이 이 운동을 소개하면서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가 뒤따랐다. 현재까지 6만6000명이 참여했으며 8억3600만엔의 기부금이 모였다. 매입한 토지는 471헥타르(ha)에 이른다. 바바 정장은 “결혼이나 출산 기념으로 100㎡를 사서 선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연 700건씩 꾸준히 신청이 들어온다고 한다.

반발은 없었을까? 한국에서도 자연환경을 보존하자는 주장은 개발로 경제적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지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바바 정장은 “갈등은 있었지만 꾸준히 설득했고 지금은 이렇게 보존된 자연 덕분에 농업과 어업도 지속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잘 보존된 자연이 관광자원화되면서 일거리도 늘고 외부 인구가 유입된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고 정착하는 경우도 많다. 바바 정장은 “일본 전체가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는 감소율이 적었다”고 설명했다. 샤리초의 인구는 1만2000여명밖에 되지 않지만 홋카이도에서 인구 감소율이 가장 적다.


‘시레토코 100㎡ 운동을 소개한 책자


■ 맨눈으로 보는 <동물의 왕국>

 지역 주민들의 환경보존 노력은 시레토코 지역이 2005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레토코는 바다와 육지의 생태계가 바로 맞닿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너비가 10~20㎞ 남짓한 좁은 시레토코 반도의 중심부에는 1500m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다. 불곰이 해안에서 산까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곳은 시레토코뿐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바다와 높은 산이 가깝다. 좁은 범위 내 산, 초원, 원시림, 바다 등 다양하고 풍요로운 환경이 밀집함에 따라 다양한 동물들의 서식환경이 갖춰진다.

 시레토코 자연의 특징을 설명할 때 유빙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찾아오는 유빙은 풍부한 식물성 플랑크톤을 전달해 준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동물성 플랑크톤과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물고기들은 각종 새들의 먹이가 된다. 그중에서도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산속 불곰의 먹이가 되고, 불곰의 배설물은 산과 들로 환원된다. 바다의 혜택이 연어를 통해 숲과 산으로 옮겨지는 셈이다.

 유빙은 시레토코 해안선을 날카롭게 침식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자연스레 자연환경 보존에 탁월한 지형이 일궈지는 것이다. 유빙 위에서는 바다표범이 새끼를 키우기도 한다. 시레토코 세계유산센터에서 상영되는 영상물은 “시레토코는 인간도 생명의 고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가르쳐준다”고 소개한다.

 시레토코 세계유산센터에서 설명을 들은 여행팀은 직접 시레토코 원시림을 걸어보기로 했다. 수십 센터미터나 쌓인 눈 탓에 설피를 신어야 했다. 안내를 맡은 남녀 일본인 2명은 도쿄와 큐슈 출신이라고 했다. 둘 다 32살의 젊은 나이였다. 외지인의 유입이 많다는 바바 정장의 말이 떠올랐다.

 원시림 안까지 진입하자 시레토코 자연환경의 특징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스크림처럼 소담하게 눈이 덮힌 예쁜 언덕 너머에는 100m가 넘는 절벽이 가파르게 이어져 있었다. 절벽 너머 왼쪽에는 오호츠크해에서 떠내려온 유빙이, 오른쪽에는 바로 해발 1563m의 눈덮힌 이오산이 이어져 있었다. 절벽에 가닿은 넓은 설원에는 사슴 3~4마리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설원을 돌아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까마귀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안내자가 갑자기 여행팀을 멈춰세웠다. 죽은 사슴이 있는데 주변에 먹이를 노린 불곰이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주변을 살핀 뒤 곰이 없음을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가 봤다. 앙상하게 드러난 사슴 갈비뼈 사이로 여우의 얼굴이 희끗희끗 내비쳤다. 까마귀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동물의 왕국>을 맨눈으로 보는듯했다.

 원시림의 동물들은 사람들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처음 사슴떼를 보고는 환호를 질렀지만 서너 번 보고 나자 지겨울 정도였다. 불곰이 나무를 올라가기 위해 발톱으로 마구 할퀸 흔적도 발견했다. 산포도를 먹이 위해서라고 하는데, 200㎏의 곰이 4~5m의 나무를 타는 건 쉬운 일이라고 했다. 이곳도 한때는 불곰이 멸종 위기에 처했으나 서식환경이 회복되면서 개체수가 늘었다. 이제는 ‘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일 만큼 사람과의 접촉을 관리해야 할 정도다.


사슴 사체를 먹고 있는 여우


■ 소금사막을 보는 듯, 얼음바다

여행팀은 시레토코 반도를 어루만지듯 돌았다. 이번에는 시레토코 반도의 ‘서쪽 해안’인 샤리초에서 ‘동쪽 해안’인 라우스초(羅臼町)로 건너갔다. 본래는 반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둘 사이를 통과하는 산간도로가 있지만 눈 때문에 통제됐다. 봄이 되면 8m가 넘게 쌓이는 눈을 치우고 이 길을 개통하는 행사가 하나의 관광거리라고 한다. 도로 양쪽에 쌓인 ‘설벽’ 사이로 걷을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올해도 4월10일에 열린다고 한다.

차량 이동 중 잠깐 꾸벅 졸다 일어나도 설원은 끝없이 계속됐다. 사람 발자국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더 많아 보였다. 비슷한 모양의 단촐한 2층 단독주택들이 도로를 양쪽에 이어져 있었지만 똑같은 모양의 집은 단 한 채도 없었다. 덕분에 약간은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곧게 뻗은 침엽수 위로는 눈꽃이 피었는데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초를 꽂아놓은 격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탓에 제설차도 종종 길을 잃고 헤맨다고 했다. 가로등처럼 도로 위 공중에 표지판을 세워 차선 표시를 해 놓은 것은 그 때문이란다. 도로 곳곳에는 종종 눈이 많이 내렸을 때 대피할 수 있는 인공터널까지 만들어뒀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지만 체인을 걸고 다니는 차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행팀의 차량 운전을 맡은 나가요시씨는 “북해도의 눈은 물기가 적어서 체인을 안 걸고 다녀도 괜찮다”고 설명했다. 마치 밀가루 같은 눈은 털어내면 은백색 가루로 흩어졌다.

라우스로 가기 전에 홋카이도섬 오른쪽에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노츠케(野付) 반도를 들렀다. 지도상으로만 보면 마치 바다 위를 지나는 것처럼 표시될 정도로 가느다란 길이 바다쪽으로 내뻗어 있었다. 오랜 세월 퇴적된 토사가 만든 26㎞의 모래부리(사취·砂嘴)다. 본래는 바다였을 만 안쪽은 얼어붙고 눈이 쌓여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소금사막처럼 변해 있었다. 눈 사막 위로는 20~30마리의 사슴 떼가 뛰어다녔다.


노츠케 반도 앞 얼어붙은 바다의 환상적인 모습

노츠케 반도 앞 얼어붙은 바다의 환상적인 모습. 김종숙 선생님 제공.


■ 젊은 사람, 외지 사람, 바보

 라우스초 쪽으로 진입하자 같은 시레토코인가 싶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의 어촌이 나타났다. 이곳은 일본의 유명한 고급 가을연어와 다시마 생산지로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했다. 인구는 겨우 5000명 남짓이지만 어획량은 150억엔에 이른다고 했다. 샤리초 쪽은 해안이 절벽이어서 어업이 쉽지 않지만 이곳은 가능하다고 했다. 또 러시아령 쿠나시리(國後) 섬과의 사이에 깊은 수심의 바다가 존재하고 유빙이 녹으면서 풍부한 플랑크톤이 도달하는 것도 장점이다.

 샤리초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던 유빙도 없었다. 유빙이 없으니 새들에겐 먹이를 찾기 안성맞춤이다. 마을의 나무에는 횐꼬리수리와 참수리 한 무리가 동네 참새처럼 무더기로 앉아 있었다. 이곳 안내를 맡은 이케가미 미호(池上美穗) 라우스초 관광협회 사무국장은 “알람이 없어도 수리들의 울음소리로 깰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라우스는 육지에 서서 고래를 직접 관측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지역이기도 하다. 여름철에는 버스 두 대 길이의 거대한 향유고래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고래 외에도 1년 내내 돌아가며 쇠부리슴새, 올빼미, 범고래와 밍크고래, 바다사자와 물범 등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팀은 비록 고래는 없었지만 배를 타고 가까이서 수리들을 관찰했다.


라우스초 앞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찰한 수리들. 여행팀 김종숙 선생님 제공.

라우스초 앞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찰한 수리들. 여행팀 김종숙 선생님 제공.


 이케가미 사무국장은 삿포로 출신의 ‘도시 여성’으로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5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새출발을 모색하던 중 우연히 신문에 난 사무국장 모집 공고를 본 것이 계기였다. 우연히도 도시에서 힘든 일을 겪고 이곳에 오는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이케가미 사무국장은 그런 여성들이 이곳에서 재충전할 수 있도록 힐링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큰 관광회사들은 비용 문제로 라우스 지역까지 잘 찾지 않는다. 이케가미 사무국장은 지역에서 직접 어시장 투어와 어부 생활 체험 등의 관광상품들을 개발한다고 했다. 여행팀이 들은 식당에서도 최근 2명의 젊은 여성들이 만들었다는 여행사에서 ‘성게 알까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다. 

 이케가미 사무국장은 “자연환경이 열악한 곳이지만 역시 사람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냐고 묻자 “부모님까지 모시고 올 계획”이라며 웃었다.

 일본에는 지역을 바꾸는 사람은 ‘젊은 사람’, ‘외지사람’, 그리고 ‘바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가장 동쪽 끝 작은 마을 샤리초와 라우스초에서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내가 서 있는 곳을 한 번쯤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레토코 반도였다.


시레토코 반도의 유빙. 여행팀 김종숙 선생님 제공.


[참고기사] 경향신문 1994년 5월7일자

北海道「시레토코100㎡ 운동」

환경보전을 위한 세계新潮流 그 현장을 가다

천혜 秘境지킨「市民 땅사기 운동」

국립공원내 사유지 사들여 개발저지‥‥4萬여명 성금으로120萬평 보존



「시레토코(知床)에서 꿈을 사지 않으시렵니까」.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동쪽끝에 자리한 샤리초(斜里町)에서 벌이고 있는시민참여 자연복원운동의슬로건이다. 지난 77년에시작된 이 운동의 정식명칭은「시레토코 100㎡운동」. 시민들의 성금으로시레토코국립공원내의 사유지를 사들여 국립공원의무분별한 개발을 막자는취지의 이 운동에는 이미4만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했으며 그동안 사들인땅만도 4백㏊(약 1백20만평)가 넘는다.

성금 1계좌 8천엔

홋카이도 최대의 도시인삿포로(札幌)에서 기차를타고 동쪽으로 7시간 남짓을 가면 샤리초에 닿는다. 인구 1만4천명의 샤리초는 일본 최후의 秘境이라는 시레토코반도의 초입,오호츠크해를 마주본자리에 위치하고 있다.「시레토코」란 홋카이도 지역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의말로「이 세상의 끝」이란뜻이라고 한다.

「시레토코 100㎡ 운동」을 관장하고 있는 샤리초 환경보전대책실의 가와조에 히데키(川副秀樹)자연보호계장은 이 운동이시작된 배경에 대해"개간에 실패한 국립공원내의사유지가 부동산개발회사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아이누족만이 살고 있던홋카이도에 본토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메이지(明治)시대때부터였다. 홋카이도에서도 오지인 시레토코반도에는 1910년대부터 개척의 손이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나시레토코반도에서 고구마옥수수 등 농작물을 수확하려는 개척민들의 꿈은 끝내이뤄질 수 없었다. 척박한토지와 엄혹한 기후조건으로 농지개간이 불가능해지자 60년대 중반 개척민들은모두 이 지역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72년 집권한 다나카(田中角榮)총리가「일본열도개조론」을 주창하면서 이 지역에도 부동산투기 열풍이 몰아치기시작했다. 대도시의 부동산개발회사들이 농지개간에 실패한 국립공원내 개척민 소유의 사유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샤리초는 町예산으로 사유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인구1만4천명의 町예산으로부동산개발회사의 대자본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앙정부의 환경청에 대해 사유지매입을 요청했으나 한번 개발이 시도됐던 땅은 자연보호를위한 매입대상이 아니라는이유로 거부되고 말았다.

언론보도 크게 기여

이런 상황에서 지난 77년 1월16일 아사히(朝日)신문의 칼럼「天聲人語」에영국의「내셔널 트러스트운동」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상자기사 참조). 이글에서 힌트를 얻은 당시町長 후지야 유타카(藤谷豊)씨는 한달여 뒤인 2월27일 기자회견을 열어「시레토코 100㎡ 운동」의시작을 알리고 시민들의동참을 호소했다.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사유지를 매입,농지개간으로 황폐화된 이 땅에 대규모 조림사업을 펼쳐 1백년 뒤에는 대삼림지대로만들겠다는 것이 후지야町長의 사업구상이었다.기부금은 1계좌 8천엔(100㎡)으로 하되 땅의소유와 관리는 町에서 맡고 기부시민에게는 매년9월 植樹祭에 참여하여나무를 심을 수 있게 했다. 후지야 町長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 한달이 채안된 3월24일 교토(京都)의 한 시민이 첫 기부자로참여하면서「시레토코 100㎡ 운동」은 순조롭게진행됐다.

가와조에 계장은"언론이 이 운동의 성공에 크게기여했다"고 회고한다. 운동의 아이디어를 제공한것은 물론 지난 79년 11월과 12월에 아사히신문이「天聲人語」란에 이 운동을두차례 소개한 후 참여시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85년 9월에는매입대상지 4백72㏊중 개척농민 소유분 3백56㏊를매입완료했으며 92년 7월에는 참여시민이 4만명을돌파했다. 가와조에 계장은"94년 1월말 현재 참여인원은 4만3천여명,기부금 총액은 4억5천만엔(약 36억원)을 넘어섰으며 매입대상토지의 88%(4백15㏊)를 사들였다"고자랑한다. 

샤리초는 지난87년 운동지역인 이와오베쓰(岩尾別)부근에「시레토코 100㎡운동 기념관」을 지어 이곳에 기부자4만여명의 명패를 국적별·지방별로 보관하고 있다. "기부시민중에는 왕년의 홈런타자 王貞治선수를비롯,최근까지 방위청장관을 지낸 아이치 가즈오(愛知和男)씨 등 유명인사가 적지 않다"고 취재팀을이곳까지 안내해준 北海道大學의 한국인 유학생 韓尙勳씨(동물학)는 귀띔해준다. 韓씨는 이 운동에 참여한 76명의 외국인중 유일한한국인이기도 하다.

기부자명패 기념관

기념관 바로 옆에는「시레토코자연센터」가 있다.지난 88년 샤리초가 건립,운영하고 있는 이 센터에서는 시레토코반도의 동·식물상에 대한 연구조사는물론 造林 등 자연복원사업,일반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관찰회 등을 벌이고 있다. 이 센터의 사무국장이자 동물학자인 나카가와 하지메(中川元)씨는"시레토코반도는불곰과 에조사슴 등의 서식지이자 참수리,흰꼬리수리의 월동지로 일본내에서는 보기 드문 야생동물의 낙원"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나카가와 사무국장은"일본 국립공원의 경우 공원관리는 환경청,산림관리는 임야청,도로관리는 건설성이 맡는등 관리주체가 복잡해 중앙정부에 의한 효율적 관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면서"이 때문에 대부분의자연보호운동은 해당지역의 지방자치단체가 주체가되어 끌어나가는 경우가많다"고 설명한다.

샤리초(斜里町)에서 글 朴仁奎기자 사진 權鎬郁기자


Posted by 누런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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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 일정은 캔디의 불치사였어요.

캔디는 14세기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습니다.

해발 465m에 자리 잡은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인데요.

인도의 잦은 침략에 남쪽으로 옮겨가던 싱할라 왕조는

14세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350여년 동안 이곳에서 고대 불교 문화가 꽃피었다고 하네요.

 

불치사는 전형적인 싱할라 건축 양식으로 분홍빛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모습이었습다.

 

 

 

캔디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라고 합니다.

불치사에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셔놓았기 때문인데요.

 

교복을 입은 아이들부터 백일이 갓 넘은 아기를 안고 오는 가족들, 고령의 노인들까지

스리랑카 곳곳에서 불치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부처님 치아 사리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같다"라는 답이 돌아오더군요.

 

부처님 치아 사리는 362년 인도 남부 칼링가 왕국에서 보내왔습니다.

당시 칼링가 왕국은 기근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국왕의 꿈에 부처가 불치(佛齒)를 스리랑카로 보내면 기근과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왕은 서둘러 불치를 스리랑카로 보냈습니다.

 

이때 불치는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 모셔졌고 매년 불치제를 올렸습니다.

이후 불치는 왕위 계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내전을 할 때도 왕은 치아 사리를 가지고 도망쳤고

치아 사리를 지닌 사람이 왕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대통령이 취임하면 불치사에서 취임 선서를 한다는군요.

 

 

 

치아 사리는 전각 3층에 모셔져 있고 7년에 한 번씩밖에 공개를 안 한다고 하네요.

3년 전에 공개했다고 하니 앞으로 4년 후에 친견할 수 있는 셈입니다.

 

치아 사리가 담겨 있는 사리함은

불치사 방장 스님, 전국 신도회장, 문화부 장관 등 3명의 관리자가

동시에 열쇠를 가져와야 열 수 있다고 하고요.

 

경비가 삼엄하겠죠?ㅎ

 

매년 여름 11일 동안 코끼리 200마리 등 위에 불을 켜고 퍼레이드를 하는

페라헤라(불치)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제가 떠난 뒤 며칠 후에 축제가 열린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전 볼 수 없었습니다.

 

 

 

 

 곳곳에서 절을 하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는 스리랑카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남방 불교의 부처님은 참 화려해 보입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겠죠.

 

 

 입구에서부터 꽃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꽃을 사면 이렇게 부처님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립니다.

 

 

 쭉 이어진 벽화가 뭘까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인데요.

벽화를 숫자대로 따라가면 석가모니의 일생을 파악할 수 있게 돼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꽃을 들고 절에 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아이들 눈이 참 깊고 예쁘죠?^^

 

 

 

밖에서 바라본 불치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일에도 절에 가는 모습입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불교가, 그리고 치아사리가 모셔진 불치사가 어떤 의미인지

막연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생경하면서도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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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에는 스리랑카에서 제일(?) 유명한 시기리야 궁전에 갔습니다.

 

시기리야는 사자 바위라는 뜻인데요.

사자의 모습을 한 절벽 위에 궁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200m 화강암반 정상에 누가 궁전을 지었을까요.

5세기 다투세나 왕의 장남 카샤파는

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우려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숩니다.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자신과 달리 동생은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요.

동생의 보복이 두려웠던 카샤파는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1년 후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이복동생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살하죠.

동생이 오는지 내려다보며 늘 불안해했던 왕은

동생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입구를 하나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상까지 계단은 1200여개입니다.

 

먼저 만난 연꽃.

저 멀리 보이는 바위가 '시기리야 궁전'입니다.

 

이렇게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요.

 

 

올라가니 이렇게 탁 트인 전경이 보입니다.

 

그리고 벽화가 나타났습다.

500명이 넘는 여인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훼손되어 18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네요.

1875년 우연히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살펴본 영국인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1500여년 전 그림인데도 생생하죠?

바위벽에 바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데요.

바위 표면에 점토를 바르고 그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릅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덮었습니다. 이렇게 그림판을 완성시켰다고 하네요.

 이렇게 훼손된 모습이 많이 보였어요.

 

 

 

 

벽화 밑에는 ‘거울벽’이 있습니다.

왕이 궁전을 떠난 후 스님들이 이곳을 사원으로 사용했는데요.

5~10세기쯤 일반인들이 순례하러 많이 왔다고 해요.

 

그들이 적어놓은 낙서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사진에서는 잘 안보이네요;;)

 

남아 있는 글씨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1600개가 넘는 낙서에서 1600명 이상의 순례자가 다녀갔음을 알 수 있는데요.

 

 낙서는 안 보이네요...;; (왼쪽 벽 부분이 겨울벽이예요)

 

 

 

거울벽을 지나면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쭉 이어지는데요.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계단을 계속 올라가야만 정상이 나옵니다.

정상에 오르면 1만5800㎡(4800평) 공간에 궁전 터, 수영장 터가 있습니다.

 

 터라는 게 분명하게 보이죠?

 

 

 정상까지 물을 끌어온 기법(?)이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라고 하네요.

곳곳에 수로가 보였습니다.

 

 

 

 

정상에는 또 카샤파 왕이 무희들의 공연을 감상했다는 돌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동생을 피해 도망친 왕이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해 궁전을 짓고 무희들의 공연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찍은 사자 발 사진.

원래 두 발 가운데 위에 사자 얼굴이 있었는데 망가졌다고 하네요.

 

 

물이 산 아래에서 이곳까지 공급됐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방법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수로만 그 흔적을 보여줍니다.

 

2000년 전 그들은 어떻게 바위 정상까지 벽돌을 옮겨 하나하나 쌓았을까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시기리야 궁전은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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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에 스리랑카 출장을 다녀왔는데 뒤늦게 포스팅을 올립니다...;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보석'으로 불리는 섬나라죠.

인도 대륙 끝에 자리하고 있어서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립니다.

 

북인도의 신할리족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꿔왔는데요.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극찬하기도 했고

아랍인들은 '보석의 섬'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신밧드가 보석을 찾아 떠난 섬 세렌디브가 바로 스리랑카라고 하네요.

 

저는 이곳에 경기도 부천 석왕사에서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기증받아

봉안하게 돼 동행 취재를 다녀왔는데요.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죠.

불교도가 전체 인구의 68%를 차지합니다.

기원전 247년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남방불교 문화를 발달시켜왔고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를 발전시켜온 인도와 달리 고대부터 불교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폴론나루와라는 도시에 먼저 갔습니다.

이 도시는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는데요.

 

인도의 잦은 침략에 싱할라 왕조는 수도를 포기했고 500여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 무렵 유적 발굴이 시작되면서 중세 불교의 역사를 볼 수 있게 됐다고 해요.

12세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위자야 바후 1세와 프라크라마 바후 1세 시대의 사원과 수도원이 남아 있었는데요.

사진으로 보실까요.

날씨가 참 맑았네요. 그때는 더웠습니다;;(그래도 다시 가고 싶은 이 마음은 ㅎㅎ)

 

 

 

 

 12세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들.

 

 

 

 불상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훼손된 것도 많았습니다.

인도의 침략, 전쟁 등으로 유적의 훼손이 많았다고 하네요.

 

 

  

 

 

 

갈 위하라는 부처상이 조각된 암반사원인인데요.

암반에는 큰 좌상, 동굴 안에 있는 작은 좌상, 입상, 와상 등 네 개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 5m에 이르는 큰 좌상은 눈을 감고 명상하는 모습으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공사 중이어서 ㅠㅠ 매우 아쉬웠습니다.

 

 

4개의 불상을 다 잡아보려고 했는데 실패! 

 

 

입상과 와상을 보실 수 있겠고요. 

 

그리고 눈을 감은 좌상! 

 

 

 

그리고 스리랑카에 불교가 유입된 곳, 미힌탈레로 갔습니다.

 

전설에는 부처님이 생전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고 전해지는데요.

역사로 기록된 스리랑카 불교사는

기원전 265년 아쇼카왕이 그의 아들 마힌다 스님을 파견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마힌다 스님은 스리랑카로 건너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12㎞ 떨어진 마시카산에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온 국왕 데바남피야 티사를 만나게 됩니다.

 

마힌다 스님은 티사 왕에게 설법했고 왕은 스님에게 감명받아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는 얘기죠.

미힌탈레는 바로 마힌다 스님이 티사 왕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왕은 스님에게 이곳의 68개 동굴과 승원(僧院)을 기증했고 당시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미힌탈레 꼭대기에 놓인 부처상.


3군데로 나뉘어 꼭대기까지 계단이 이어지는데요.

 

20여분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기원전 1세기에 세웠다는 칸타카 치티야의 불탑이 나타난다고 해요.

다시 계단을 더 올라가면 마힌다 스님과 티사 왕이 처음 만난 곳에 세웠다는 암바스탈라 대탑이 나타나고요.

언덕 꼭대기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모셔놓았다고 전해지는 마하세야 불탑이 있습니다.

 

위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노을이 일품이라고 하는데 저는 보지 못했어요.(시간 관계상...)

 

 

이렇게 험한 계단들을 올라가야 합니다...; 

 

 

취재진은 미힌탈레에 모셔놓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볼 수 있었는데요.

 

스리랑카에는 아직도 사리신앙이 많이 남아 있는 걸로 보이더라고요.

 

부처님의 진신사리, 아라한의 사리 등을 이렇게 귀중하게 두고

친견하는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색이 화려한데요.

자그마한 사리탑도 금색으로 휘황찬란합니다.

 

 

 

스님들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 

 

사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요.

실제 보면 그렇게 오색찬란하지는 않더라고요.

오색찬란은 후대에서 만들어낸 신화라고 합니다.

 

 

 

저도 3군데 중 제일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을 택해서 올라갔습니다. ㅎㅎ

반대편에 저렇게 사람들이 보이고요.

 

 

위에다 내려다본 전경 모습. 

 

 

 

 

산 아래에 가면

스님들이 쓰던 거대한 돌그릇, 수도 시설, 우물, 회의실, 법당터, 승가법이 쓰여 있는 비석 등이 남아 있습니다.

승가법이 적혀 있는 비석은 두 개인데요.

왕이 직접 승가의 대표자들과 상의해 승가법을 만들어 공포한 비석들로,

왼쪽에는 승가 재정의 투명성과 승가의 규율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승단에서 근무하는 스님과 재가자들의 월급과 채용, 해고 관리, 근무 자세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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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미국 뉴욕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제일 처음 일정은 9.11 Memorial Museum(9.11 추모 박물관)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요.

 

13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결은 다르지만 사회의 크나큰 상처를 어떻게 다독여왔는지에 대해서요.

몇 달 전 인터뷰했던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는 뉴욕 시민들의 자부심에 대해서 얘기를 들려줬었습니다.

어떻게 9.11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애써왔는지에 대해서요.

미국인들은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연방정부, 뉴욕시, 시민들 모두 힘을 합쳐 극복했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넉 달이 넘어 다섯 달에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엄청난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하고 극복해야 할까요...?

 

9.11 추모 박물관을 다녀온 소감은 '지독하다'였습니다.

13년 전의 그 하루에 대한 기록, 그 하루로 인해 생겼던 모든 일들을 다 기록하려고 한 것 같았어요.

그날 사망한 3000여명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오게 됐는지 등을

일일이 기록해놓았더군요.

WTC의 골조, 무너져서 생긴 흔적 등을 고스란히 보존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9.11 테러로 희생당한 343명의 소방관, 23명의 경찰들에 대한 추모 열기도 여전했습니다.

 

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까요.

 

아니, 더 근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할까요?"

 

 

 

 

 

 

박물관으로 가는 길 9.11 테러로 사망한 343명의 소방관들을 기리는 공간을 먼저 지났습니다.

소방관들이 어떻게 화염을 헤쳐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썼는지 저렇게 동판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소방관들을 추모하는 꽃도 이렇게 놓여 있었고 묵념하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해야겠죠.

 

우리는 세월호 참사 때 어떠했나 뒤돌아보게 됐습니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바빴던, 그리고 조직 해체론까지 나온 해경 생각이 났습니다.

 

아득해지더라고요.

 

 

 

 

 

343명의 얼굴들입니다.

 

 

조금 더 가니 WTC 건물이 붕괴한 자리에 만들어놓은 분수대가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541미터 높이의 '원 월드트레이드센터' 등 여러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분수대에는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살아남은 나무'입니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만났는데요.

 

사고 당시 쌍둥이 빌딩 잔해 아래 심하게 탄 채로 발견되었던 나무입니다.

엄청난 사고 뒤에도 살아 남은 이 나무는 '배 나무'라고 하네요.

 

 

나무를 자세히 보시면 사고 이전과 이후가 구분이 됩니다. 신기하죠?

 

 

그리고 드디어 박물관에 입장했습니다.

 

 

 

건물 골조 흔적입니다.

 

 

 

건물 흔적 하나하나가 이렇게 다 보존돼 있었어요.

 

 

 

생존자의 계단으로 불리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메모리얼 홀'이 나옵니다.

 

그 홀 중앙에는 참사 뒤 쌍둥이빌딩에서 가져온 '마지막 기둥'이 서 있습니다.

공사 현장 한 가운데에 세워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기둥이죠.

기둥에는 희망의 메시지와 희생자 사진이 함께 붙어 있었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로마 시인 버질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중 한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시간의 흐름이 결코 그대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리)'

 

9.11을 지켜본 뉴욕 시민들의 힘, 13년이 지나서 이 박물관을 만들어낸 시민들의 힘이

이 구절에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철골 구조물들.

 

 

 

 

위 아래 사진을 비교해보시면 2001년 9월 11일 이곳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이실 겁니다.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

 

 

 

생존자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따라 누군가는 올라오고 누군가는 올라오지 못한 것이죠.

 

 

 

 

 

희생자들 얼굴 사진을 모은 작품.

 

 

 

 

길게 이어진 '추모의 길' 끝에는 참사 당시 비행기와 충돌한 북쪽 타워

93~96층의 부러진 철근이 놓여있었습니다.

 

철근이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게 이상하더라고요.

이 녹슨 철근이 드높고 멋진 건물의 일부였을 겁니다.

북쪽 타워 맨 꼭대기에 있던 안테나도 부러진 철덩어리가 되어 돌아왔고

북쪽 타워에 있던 철근도 비행기와의 충돌 때문에 구부러진 채로 이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희생자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2983명의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WTC에 오게 됐고 남은 유족들이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한 명 한 명 기록해 놓았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던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9.11테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유입니다.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면 안 되니까. 반복할 수 없으니까."

 

 

사고 당시에 대한 기록도 섬세하고 꼼꼼했습니다.

 

사고 당시 기록을 타임라인으로 당일 오전 8시46분부터 1분 단위로 기록해 놓았고

사고 당시 거리의 사람들 모습, 잔해들, 거리에 남은 하이힐, 가방, 경찰차문, 소방차 일부를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나란히 세워져 있는 '자전거 5대'였습니다.

이게 여기 왜 있지? 했는데 알고 보니

참사가 일어난 이후 WTC 근처 자전거 세워놓는 곳에 '찾아가지 않는 자전거'였던 겁니다.

이 찾아가지 않는 자전거는 아마 WTC 안에서 희생된 누구들의 것이었겠지요.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시민들이 꽃다발 등을 가져다주며 '이름없는 희생자'를 추모했습니다.

그 자전거 5대가 박물관에 그대로 옮겨져 온 것이죠.

 

그을린 한 소방관의 장갑에는 'Thank You'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하려 애썼을 소방차입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려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How do we remember?"

"How are victims identified?"

 

이 두 가지 질문은 세월호 참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질문일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그리고 희생자들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요.

 

계간 <문학동네>에 박민규 작가가 이렇게 썼습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경제의 문제도 아니다. 한 배에 오른 우리 모두의 역사적 문제이자 진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 에밀레종의 실제 타종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 소리는 매우 슬펐으나 어떤 슬픔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나긴 여운을 간직한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철덩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밝혀낸 진실을 통해 커다란 종으로 만들고 내가 들었던 소리보다 적어도 삼백 배는 더 큰, 기나긴 여운의 종소리를 우리의 후손에게 들려줘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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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otor29.tistory.com 버크하우쓰 2014.09.30 2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 가득 하세요. ^^

7월 말 스리랑카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8월 교황 방한, 휴가 등등으로 이제야 올리네요.

 

 

먼저 맛봬기로 스리랑카 원숭이 사진!!

 

 

 

 

멀리서 원숭이가 보이길래 급히 찍은 사진입니다.

 

배에 뭔가가 보이길래 뭐지...? 했는데

 

 

 

 

 

 

아 꺄!! 아기 원숭이네요.

 

 

 

 

착 매달려 있는 아기 원숭이.

 

집에 두고온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원숭이들은 이렇게 모여 있었는데요.

 

 

 

 

저마다 자기 새끼들을 안고 있습니다.

 

 

 

 

또 한 마리의 엄마 원숭이가 아기 원숭이를 안고 있네요.

 

 

 

 

매달린 새끼 안고 걷기

 

 

 

 

젖 먹는 새끼 원숭이입니다.

 

 

정말 귀엽고 뭉클했습니다.

 

집에 있는 꼬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사람 애기도 엄마한테 하루종일 매달려 있지요.

그래서 떼어놓고 일하러 나온 엄마는 늘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복직 후 첫 출장

일주일 동안 처음 떨어져본 아들 생각을 하며

나중에 아들이 크면 이 사진을 보여줘야지, 그때 엄마가 원숭이를 보며 네 생각을 했단다 말해줘야지

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ㅎㅎ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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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성지 중심으로 돌아봤습니다.

 

먼저 신리 성지.

 

 

 

 

 

<신리 성지>

조선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우촌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41 041)363-1359

 

신리 성지는 1860년대 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으로 1865년 위앵 신부는 400여명 주민 모두가 신자라고 기록했다. 이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완전히 초토화된다. 교회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 42명인데 단일 마을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손씨 집성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신리에는 손씨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조선의 카타콤바(지하무덤)’로 불리는 이유다.

 

 

 

 

다음은 홍주 성지.

 

 

 

<홍주 성지>

충남 홍성군 고암리 552-11

 

홍주 성지는 공주의 황새바위 다음으로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기록상으로는 212명의 순교자가 있는데 이름 없는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정이었던 황일광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백정이라 가까이 갈 수도 없었던 양반들이 ‘형제님’이라 불러주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일광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다. 난 두 개의 천국을 봤다”고 말한다.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그도 홍주에서 순교했다.

 

 

 

 

 

마지막은 교황이 오셔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할 해미 성지입니다.

 

 

 

 

 

 

 

<해미 성지>

무명 순교자 생매장지

충남 서산지 해미면 성지1로 13, 041)688-3183

 

서산 해미 순교 성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해미는 내포의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들어선 군사요충지였다.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000여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부족해지자 관군들은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넣어 생매장했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유해 터에서 발견된 치아와 뼛조각들이 전시돼 있다. 놀라운 것은 어린이들의 치아도 많이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내동댕이쳐 죽였던 돌다리 ‘자리개돌’도 보존돼 있다.

순교자들의 재판을 했던 읍성의 동헌부터 해미 시내를 거쳐 유해 발굴터까지 1.5㎞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에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은 천주교주교회의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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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내포 천주교 성지에 1박 2일 동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내포 지역은

충남 서북부 당진·예산·홍성·서산 등을 포괄하는 지역을 말하는데요.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곳이자 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곳입니다.

이 지역을 돌아보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포'의 의미?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내포(內浦)라는 지명은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을 말한다. 내포는 예로부터 물과 통하는 지역이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천주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온 것도 지리적 여건 덕분이다. 프랑스 사제들은 바닷길을 따라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 지역에 천주교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 신자가 많았던 만큼 박해 피해도 컸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4년 보고서에 “잿더미에서 소생한 내포에 작은 신자 집단이 생겼고 이곳은 옛날 가장 혹심하고 잔인한 박해가 계속 일어났던 곳입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는데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교황은

솔뫼 성지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해미 읍성에서 폐막 미사를 집전할 예정입니다.

 

저는 6곳의 성지를 돌아봤습니다.

여사울 성지, 합덕성당, 솔뫼 성지, 신리 성지, 홍주 성지, 해미 성지 등 6곳입니다.

 

 

첫번째 여사울 성지입니다.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  041)332-7860

한국인 사제 1·2호인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집안에 복음을 전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2~1801)의 생가터다. 여사울은 서학이 학문 차원을 넘어 신앙으로 퍼져 나가는 ‘복음의 못자리’ 역할을 한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졌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는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때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했다.

 

 

 

두번째 돌아본 곳은 합덕성당입니다.

 

 

 

 

 

<합덕성당>

내포의 첫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

충남 당진시 합덕면 합덕읍 275  041)363-1061

 

합덕성당은 내포의 첫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이다. 현재 합덕리 주민 중 95%가 가톨릭 신자일 정도로 천주교 영향이 컸다. 김성태 주임신부(41)는 “예산, 당진 어느 동네를 가도 순교자가 있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1890년 양촌과 간양골에 파견된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 합덕성당과 공세리성당의 전신이 되었다. 1899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처음에는 한옥 성당과 사제관에서 시작했다. 제7대 페렝 신부 때 서양식으로 건축해 1929년 완성한 건물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다.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 합덕성당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관(洋館)'으로 불리며 합덕의 상징이 되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학교의 전신인 교리학교를 설립했고 고아들을 위한 성영회도 운영했다. 성장 사제관은 근대식 병원의 역할도 했다.

 

 

이후 합덕 성당부터 3.2㎞ 거리인 솔뫼 성지까지 이어진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안내판은 이 길이 순례길임을 알렸는데요.

물고기(익투스)는 천주교에서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한 시간여 걸어서 솔뫼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솔뫼 성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  041)361-5021~2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생가 터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에 원래 순례객이 많지 않은 때인데도 매일 100여명으로 방문객이 늘었다.

1836년 16세였던 김대건은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반년이나 걸어서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5년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다 이듬해 효수형에 처해졌다. 사제 생활 1년1개월 만이었고 이때 불과 스물다섯살이었다. 이용호 신부(47)는 “라틴어와 불어, 영어, 중국어까지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는 계급 사회였던 조선에서 만인의 평등을 꿈꾼 사상가였고 서세동점의 세계 정세를 간파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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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전 마지막 주말 경기 부천시에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가까워서 금방 다녀올 수 있었는데요.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볼만 하더라고요.

 

이제 봄입니다. 주말 나들이로 만화에 관심 많으신 분들에게 추천하는 나들이 장소~

<한국만화박물관>입니다. ^^

 

 

1. 어린시절 좋아했던 만화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 + 그리고 만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공간

 

 

 

3층 전시실로 가니 가장 먼저 70~80년대 만화방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티비 속 풍경을 만나는 것 같아 신나서 사진을 마구 찍었죠;;ㅎㅎ

'누런돼지'가 들고 있는 만화책과 실제 전시돼 있는 만화책 모두 '실제 만화책'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때부터 6.25 전쟁, 그리고 독재 시대까지의 만화의 역사를 두루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에 주로 실었던 4단 컷의 시사만화 등의 변화를 전시했던 공간이 눈에 띄었는데요.

80년대에는 시사만화 때문에 신문이 폐간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 등 언론 검열이 극심했던 당시 만화를 보기 위해서 신문을 사는 독자들도 많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쪽은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어요ㅠㅠ)

 

본격적으로 저의 향수를 자극했던 순정만화 코너! 이때부터 사진을 마구 찍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학원에 가면 볼 수 있었던 만화 잡지 <댕기> ㅎㅎ

 

 

 

 

 

 

 

가운데 보이시나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딸들>은 한 네 번 정도 읽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

전 신일숙 작가를 참 좋아했는데요. 중학교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로맨스를 좋아했습니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아시겠어요? ㅎㅎ

원수연 작가의 <풀 하우스>의 배경입니다. 라이더와 엘리가 살던 집이죠.

<풀 하우스> 모르면 친구들 대화에 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송혜교, 비 주연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었죠.

 

 

그리고 <궁>의 이신입니다.... ㅎㅎ

<궁>도 2006년 주지훈, 윤은혜 주연의 드라마로 리메이크됐었죠.

 

요즘은 웹툰의 시대죠.

누런돼지는 웹툰을 무지 좋아해서 네**, 다* 만화 섹션에서 안 보는 만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웹툰은 열심히 안 보게 되더라고요.

마음 졸이며 손 끝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던 만화책이 가끔 그립습니다.

 

이렇게 만화박물관을 한 번 죽 돌면 일제 시대부터 70~80년대 시사 만화, 90년대 순정만화, 현재의 웹툰까지 만화의 역사를 지켜보실 수 있을 겁니다.

 

 

 

 

 

 

2. 다양한 체험

 

4D 영화관도 있었는데요. 15분 정도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더군요.

15개월 기특님도 생애 첫 4D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무섭다고 울면 어쩌나 했으나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초롱초롱한 눈빛.....

역시 영상은 두 돌 이후에 친해지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ㅎㅎ

 

뽀로로 등 캐릭터를 직접 그려보는 체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일 재밌었던 것 크로마키 사진관이었는데요.

'크로마키'란 색조의 차이를 이용해 어떤 피사체만을 뽑아내어 다른 화면에 끼워 넣는 방법으로, 배경이나 인물을 촬영한 뒤 어느 하나를 분리해 다른 카메라에 옮겨 구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화 캐릭터들과 제가 한 사진에 담기는 거죠.

 

웹툰 <목욕의 신> 주인공과 함께 찍어보았습니다...ㅎㅎ

 

 

 

사진은 1000원에 살 수 있습니다.

 

 

 

 

 

 

3. 25만권을 소장한 만화도서관에서 즐기는 만화

 

나중에 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건 '만화 도서관'이었습니다.

25만권을 소장하고 있다는데요.

 

기특님이 만화를 볼 나이가 되면

함께 하루종일 만화를 보고 싶단 생각을 했죠.

 

 

 

 

 

더 좋았던 건 가기 전엔 모르고 갔지만

1층 로비 제2기획전시실에서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한국만화기획전 앙코르전'이 전시 중이었습니다.

3월 16일까지 한다고 하네요. 그 전에 가보시면 좋겠습니다.

 

 

 

 

 

*한국만화박물관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길주로 1

      (주차는 지상1층 96대, 지하1층 52대, 지하2층 76대 가능하고, 무료입니다.

      유모차 이용시 지하1층에 주차하면 편리합니다.주차장은 꽤 여유로웠습니다)

 

가는 방법 :

  • 7호선 삼산체육관역 하차, 5번 출구 (도보 3분 소요)
  • 국철 1호선
  •   부개역 하차, 2번 출구(삼산체육관 방향)로 나와 버스 이용

                       79번 한국만화박물관 하차 (10분 소요)

      송내역 하차, 2번 출구로 나와 북부역 광장에서 버스 이용

                       37번 한국만화박물관 하차(20분 소요)

                       87번 상동호수공원, 영상문화단지 후문 하차(25분 소요)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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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에는 다시 하노이로 이동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3시간 반 정도 이동하는데 정말 오토바이가 많더라고요.


    가이드가 베트남을 떠나면 '오토바이'만 기억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ㅎㅎ

    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도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북한에 수해가 났는데
    북한에 보낼 수해 물자를 사려고 태국산 쌀을 샀다고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쌀을 많이 생산하니 우리 쌀을 사면 어떻겠느냐'고 했는데 '안 산다'고 했고
    자존심 강한 베트남에서는 '한국산 오토바이 수입을 금지하라'고 했답니다.
    지금도 한국산 오토바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베트남은 농업이 발달한 나라로 쌀 생산량이 세계 5위권이고 수출은 세계 2위권이라고 하더라고요. 1년에 3모작까지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 자존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세계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이라는 나라 최강대국들과 물리적으로 싸워 그들을 차례로 물리친 나라는
    베트남뿐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방현석의 <랍스타를 먹는 시간>을 보고 베트남에 꼭 오고 싶었었는데.
    소설 속에서 잊지 못하는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책임을 묻지 않은 게 당신들에게 책임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나. 오해하지 말게. 그건 아직 당신네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라의 축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네. 당신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 수 있네. 가장 먼저 잃을 것이 인간의 품위고 그다음에 잃을 것이 나라의 품위겠지. 품위 따위를 생각하기에는 당신의 나라가 아직도 그렇게 가난한가.


    그들의 자존감은 누군가를 침략해 싸운 적이 없고
    침략해온 누군가를 모두 물리쳐 스스로를 지켜왔다는 것에서 온 것이겠죠.





    '대우굴삭기'를 보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의 어떤 대통령보다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유명하다더군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돼 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 지사장이었던 이화석씨가 도올 선생에게 설명해준 말인데
    베트남에서 김우중 회장의 '상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월남은 지금 날로 날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루가 달라지게 자산의 가치가 증대하고 있는 나라지요. 월남이 미국을 물리치고 난 후, 연이어 크메르 루즈를 제압했고, 중국과의 분쟁을 버티어 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안정적 기초를 만든 후 그들은 나라의 경제적 재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동분자들의 청산만으로는 나라의 모습이 갖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계시민으로서의 개방적 참여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말부터 쇄신이라는 의미의 '도이모이'(Doi Moi) 개방 정책을 펼치며 자아비판을 감행했지요. 그러나 월남당국이 도이모이를 외쳤어도 세계는 주춤했고 미국은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김우중이라는 큰손이었습니다. 김우중은 월남이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과감한 투자로 선수를 쳤고, 김우중의 투자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대만, 홍콩, 싱가폴,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의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고 뒤늦게 미국 등 서방의 투자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우중은 단순한 한국의 일개 기업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해있던 월남이라는 국가의 활로를 열어주고 적시의 과감한 투자자로써 월남경제를 활성화시킨 월남인의 은인이며 국민적 영웅입니다. 월남사람치고 김우중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이모이의 물꼬를 튼 최초의 사람으로서 월남정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며 세계적인 기업인이지요.(...)" -도올 김용옥 <앙코르와트·월남 가다> 中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내에서의 김우중 회장의 위상과 베트남에서의 위상.
    지금 김우중 회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드디어 호안키엠 호수에 도착했습니다.
    호안키엠 호수는 '검을 돌려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호수의 신에게 받은 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검을 돌려주려고 하자
    호수 밑에서 거북이 올라와 검을 물고갔다는 전설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하네요.

     

     

    호수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예비 부부들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호안키엠 호수는 아침에는 상쾌한 바람, 낮에는 시원한 나무그늘,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하노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라고 합니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면 옥산 사당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북쪽에는 중국이 있는데 북쪽의 상징은 '현무'죠. 현무는 거북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남쪽은 주작인데 주작은 봉황처럼 생겼다고 하죠. 베트남을 상징합니다.

    제가 발로 차고 있는 저 '상징물'은 거북 위에 봉황이 있는 모양입니다.
    베트남이 중국을 누르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거북의 머리를 발로 찰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차면 머리가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었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중국'이라고 합니다.
    한때 전쟁을 하기도 했고 지금도 남중국해에서 석유를 두고 다투고 있죠.
    가이드 설명으로는 역으로 중국이 베트남을 두려워하는 측면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베트남 역사를 잠깐 볼까요.
    도올 선생의 책, <앙코르와트·월남 가다>를 다시 인용해 봅니다.

    "베트남은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의 모든 강대국을 물리적인 실력으로 연거푸 패배시킨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베트남 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처음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를 처절하게 무릎꿇게 만들었죠.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1만여명의 프랑스군은 꼼짝없이 항복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만방에 보여주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허연 선진국사람 프랑스 용사들이 자기가 지배했던 쪼끄맣고 까만 동영사람들에게 총을 들고 투항하는 모습은 당시 인류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죠. 46년부터 54년까지 불월전쟁(Franco-Viet Minh War)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자그맟니 14만8000명에 이르렀습니다. 호치민이 당시 프랑스군에서 뭐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프랑스군 1명을 죽일 때 너희는 우리군 10명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계산으로도 너희는 지고 우리가 이길 것은 뻔한 이치다.'

    다음날로 제네바회의가 열렸고 17도선 벤하이강을 중심으로 잠정적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1956년 7월 20일에 거국적인 총선을 치르기로 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조.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거국적 선거에서 호치민이 이길 것은 너무너 뻔했으니까요. 결국 1955년 12월 남쪽에는 친카톨릭 친서방적 고딘디엠정권이 들어섰고 북쪽에는 호치민의 월맹정권이 들어섰지요.

    다음이 세계최강국인 미국입니다. 6·25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사적 비극을 통하여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소위 도미노이론이라는 것이 성립했고 이 터무니없는 무지스러운 이론에 따라 미국은 결국 프랑스의 바톤을 이어받아 월남에 개입하게 됩니다. 케네디정권(1961-63) 때 이미 본격적인 군사개입이 시작되었고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의 후보 골드워터가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들고 나오자, 미국민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개입으로 후퇴해야만 했던 악몽을 연상하면서 평화를 외쳤던 린든 비 죤슨을 뽑아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주의자로 가장했던 죤슨 대통령이 1964년 8월에 바로 통킨만에서 북폭을 시작한 것입니다. 5788개의 평화로웠던 북베트남의 마을 중 4000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모든 길과 철도와 다리가 파손되었습니다. 며칠 후(8월7일) 미 의회는 '통킨만 결의안'(Tonkin Gulf Resolution)을 통과시켰습니다. 여기서부터 20세기 세계사의 운명을 결정한 어마어마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기억하시죠! 1975년 4월 29일, 사이공 미대사고나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는 그 사진을! 미국은 완패했습니다. 미국은 확실하게 진 것입니다. 미국은 도미노이론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공식적으로 5만8183명의 미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력으로 이 세계는 다스려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인된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국이지요. 1979년 2월 크메르 루즈와의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국경분쟁에 있어서도 결코 중국은 월남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이라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의 최강국들과 물리적으로 싸워 그들을 차례로 물리친 나라는 월남밖에 없습니다
    ."(이화석)

    -이 지사장님의 말씀을 듣자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데오, 사실 아시아에서 물리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나라는 월남밖에는 없겠는데요. (도올)

    "일본의 경제력도 무서운 것이지만,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를 지배하는 확실한 인도차이나의 맹주이며 앞으로 수십년간은 전쟁 없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이화석)

    -베트남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겠네요.(도올)

    "그렇습니다. 개개인의 행동양식에 세계강대국드르이 압제를 이겨냈다는 자신과 자만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신용도 있고 성실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못사는 나라치고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주재하고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이화석)

    => 도올 김용옥 <앙코르와트·월남 가다> 中





    바딘 광장입니다. 호치민 주석이 잠들어있는 곳 앞의 광장인데요.
    1945년 8월혁명 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장소이고
    기념일이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이곳에는 호치민 주석의 사체가 방부 처리돼 사람들에게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호치민 주석은 사망할 당시 유언장에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주문했지만
    살아남은 정치인들이 이렇게 사체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이겠죠.

    저희가 갔을 때는 개관 시간이 지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호치민 주석은 정말 훌륭한 지도자였죠. 다시 도올 선생의 책을 인용해봅니다.


    -베트남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빈곤한 와중에도 강인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도올)

    “그 이유는 매우 단순명료한 것입니다. 호치민이라는 위대한 도덕적 리더십 아래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단일한 목적으로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죠. 호치민은 성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호치민은 평생 나라를 위해서만 살았고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통장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으며 그가 소유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두 칸짜리 초라한 집무실에 타이어를 기워만든 샌들이 있었을 뿐이죠. 후사가 없으니 군더더기 잡말이 생겨날 아무 건덕지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호치민은 단순한 게릴라 파이터가 아니라,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맹렬하게 민족주의적인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판티엩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지만 1911년 불란서 선박에 조리사 조수로 취직하여 넓은 세계로 뛰어 들었습니다. 미국의 보스턴·뉴욕,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의 각지를 항해합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정착해 살다가 파리로 옮겨 그곳에서 불란서 사회주의자들과 연분을 맺고 1920년에 결성된 불란서 공산당의 창립멤버가 됩니다.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인터내셔널에 참여했고 중국 광주로 파견됩니다. 그곳에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결성하지요. 그것이 결국 월남공산당으로 발전케 되지요. 1941년 꼭 30년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월남 전역을 장악합니다. 1945년 9월2일 그는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그가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지요.

    그 독립선언문은 미국독립선언문을 본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그러한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화석)


    -호치민은 통일을 보고 죽었습니까?

    “아니죠. 통일 6년 전 1969년 9월2일 오전 9시47분 하노이의 2층 집무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도 그가 눈을 감았던 그 소박한 침대를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치민의 위대성은 죽을 때까지 전쟁을 이기기 위하여 당면작전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국가대계를 위하여 교육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은 어차피 월남인민이 승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후의 국가 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란서와 미국과 기나긴 전쟁을 이끌면서, 그 어마어마한 폭탄세례의 와중에서도, 자그만치 5만 명의 젊은이들을 외국에 유학시켰습니다. 바로 이 유학생들이 오늘의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영어·불어·독일·만다린·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했고 한시를 자유롭게 쓸 정도로 한문에 달통했습니다. 이러한 한학의 기반과 서양학문에 통달한 그의 혜안이 그의 도덕적 인격과 미래의 통찰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30여년간 그의 리더십과 더불어 꾸준히 도덕화되어 온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베트남 역사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네이버 캐스트에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네요. 링크를 걸어두겠습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03

    호치민 주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리도 '호 아저씨'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여행에서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앙코르와트·월남을 가다>라는 책이 참 도움이 됐습니다.
    도올 선생이 2004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한 기록인데 한 번 읽어보세요. ^^




    한기둥사원에 가서 군인들이 훈련 중이길래 함께 찍어봤습니다.
    한기둥사원은 1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사원이라 '일주사'라고도 불리는데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고 하노이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코트를 입었는데 이제 다음날부터 캄보디아!
    후끈한 여름 날씨였는데요. 이제 캄보디아로~! ㅎㅎ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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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런돼지' '누런돼지 관리자' 부부는 지난 2월 6일부터 4박 6일간
    베트남 하롱베이와 하노이, 캄보디아 앙코르왓과 씨엠립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의 추운 겨울, 저는 너무나도 서울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추워서요. ㅎㅎ
    마침 저희가 베트남/캄보디아에 있었을 때는 서울이 심각한 '한파'였더군요.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ㅋ

    여행은 늘 '일상을 떠나는 일'이라 설레는 만큼
    새로운 곳의 낯섬과 그에 대한 적응 사이에서 '고생'도 생기기 마련이죠.
    저희 부부도 갑자기 맞댄 캄보디아의 더위에 몸이 한 번 놀라고
    석회질 물에 한 번 더 놀라 다녀와서 '장염' 등으로 고생 좀 했습니다.

    ㅎㅎ 그래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떠나고 싶은 게 인간의 뻔한 마음이라
    또 여행가고 싶네요. 여름휴가 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제대로 기록하지 못해
    이번에는 사진을 중심으로 기록해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날은 인천공항에서 씨엠립공항(캄보디아), 씨엠립공항에서 다시 하노이공항(베트남),
    또 하노이공항에서 하롱베이까지 버스를 타고 4시간여를 달리느라 다 써버렸습니다...


    그래도 씨엠립 공항에서 하늘이 너무 예뻐서 찍은 사진입니다.  

    둘째날부터 본격적 여행이 시작됐죠.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1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하롱베이의
    ‘하롱(下龍)’은 ‘용이 내려온 자리’라는 뜻이더군요.
    전설로는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은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3000여개의 그림같은 섬들이 있었고
    바다 위의 기암괴석도 신기했습니다.


    아름답죠?
    배를 타고 기암괴석을 계속 바라봤습니다.

    하롱베이는 '3無'라고 합니다.
    갈매기, 바다 냄새, 멀미가 없다더라고요.

    파도가 없으니 포말(물거품)이 없고 포말이 없으니 비린내가 나지 않고
    냄새가 나질 않으니 갈매기가 오지 않는답니다. 

    정말 오랫동안 배를 탔는데도 멀미를 하지 않아 신기했습니다.



    기암괴석 사이에 배가 떠다니고 있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여객선들이 다투어 가는 모습이 꼭 한산도 앞바다로 몰려드는 왜군의 배들 같다.
    물론 내가 탄 배는 거북선처럼 의젓했다'고 적었더군요. (<앙코르와트·월남 가다> /도올 김용옥>

    누런돼지도 명량해전 당시에 울돌목이라는 좁은 물길로 들어오는 왜구의 배들 같다고 하더라고요.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다"라고 하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저는 누런돼지의 말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ㅎㅎ)


    가다보니 섬 밑의 작은 구멍을 통해 그 안으로 통통배를 타고 들어가는 체험도 있었습니다.
    누런돼지는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돼지>에 나오는 장면이 연상됐다고 합니다.
    붉은돼지의 기지가 섬에 난 구멍을 통해 들어가야 하거든요.
    참고로 아래 그 장면을 추가했습니다.
    비교해 보세요. 

    누런돼지는
    섬 안에는 이런 아늑한 모래사장은 없었지만
    섬 구멍을 통해 어떤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치 붉은돼지가 된 마냥 신났다고 합니다.
    ㅎㅎ
    (누런돼지는 정말 '붉은돼지'를 좋아합니다. ㅎㅎ)
    *참고 '누런돼지'를 관리하게 된 사연  http://ilovepig.khan.kr/2


    중간에 내려서 과일들도 구경했고요. 탐스럽죠?



    수상 가옥의 모습입니다.
    빨강 바탕에 노랑색 별 모양의 베트남 국기가 보이죠?
    1976년 7월에 통일국가의 국기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베트남 독립운동 당시에는 빨강은 '혁명의 피와 조국의 정신',
    노랑색 별 다섯개의 모서리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 군인의 단결'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통일 이후에는 별은 베트남 공산당의 리더쉽을, 붉은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국기의 뜻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당시 가이드에게 들은 말로는 별이 호치민을 상징한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펼쳐지는 섬들과 기암괴석.
    계속 이어지는 풍경에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배에 있던 작은 계단에 앉아서 이 풍경들을 바라보는데 '신선놀음'하는 것 같아서
    저희 부부는 발을 올려두고 "지금 이대로"를 되뇌었습니다.


    티톱 전망대도 올라갔습니다.


    티톱이라는 사람은 소련의 우주비행사 출신 군인이라고 합니다. 
    인도차이나 전쟁 때 군사 고문으로 베트남에 왔었다고 합니다.
    호치민이 소련에 공부하러 갔을 때 친한 친구이기도 했는데
    군사 고문으로 왔을 당시 하롱베이를 보고 정말 아름다웠다고 느꼈는지 이 섬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호치민은 섬을 줄 수는 없고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해서 '티톱 전망대'가 됐다고 하네요.

    전망대 끝까지 올라가서 찍은 하롱베이 전경입니다.
    원래 하롱베이는 안개가 끼는 등 날씨가 안 좋은 날이 많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저희가 간 날에는 날씨가 좋아서 저렇게 좋은 풍광을 많이 찍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진으로 구경해 보세요.
     

      




    그리고 석회동굴입니다. 엄청난 크기더군요.
    전쟁할 때 군수 물자도 저장하던 곳이라고 했는데 실제 보니 그 정도로 매우 컸습니다.



    귀신처럼 나와서 신이 났습니다 ㅎㅎ


    배에 내려서 저녁을 먹고 나니 밤이 됐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일행이었던 5살짜리 남자 꼬마아이가 베트남 여자 꼬마아이를 만나더니
    금방 뛰면서 친해지더라고요.


    아이들은 정말 국적도, 민족도 상관없이 어울려 놀더군요.
    어른인 저는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새삼 나는 나이가 들었구나' 했습니다. ㅎㅎ

    첫날 여행은 이렇게 끝.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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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talgi21.khan.kr 딸기 2012.03.04 2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넘 재밌다! 나 원래 여행기 잘 안 읽는데, 누런돼지네 여행기는 사진들이 많아서 재밌네.
      일본에도 놀러와라. 둘이 주말에 하루만 휴가내서 목욜밤~일욜밤 다녀가면 되잖아.
      도쿄에 오면 숙식제공해줄게~~

      • Favicon of https://ilovepig.khan.kr 누런돼지 관리자 2012.03.04 2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선배~~~ 안 그래도 선배 블로그 올리신 글 보고 댓글 남긴다는 게 까먹었어요. 잘 도착하셨군요!!^^ 일본 가면 정말 좋은데 ㅎㅎ 선배 돌아오시기 전까지 도전해보겠습니다~~ 웹상에서 자주 봬용^^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돌아온 ‘누런돼지 관리자’입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11월 중순이 되었네요.

    ㅎㅎ 떠나기 전에 스카이다이빙한 소감은 꼭 남기겠다고 했었죠?

    네. 저희 호주에서 스카이다이빙하고 돌아왔습니다. ㅎㅎㅎ
    저희가 여행 간 도시는 케언스(Cairns)인데요. 케언스는 호주 퀸즐랜드 주의 작은 항구 도시입니다. 열대우림, 북부 퀸즐랜드의 산호 지대를 볼 수 있는 곳인데요. 저희도 그레이트배리어리프에서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왔습니다. 아, 근데 지금은 스카이다이빙 얘기를 하려고 했었죠.

     

    저는 높은 곳을 즐기는 타입입니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걸 동경;; 바이킹타는 것 완전 좋아하고 번지점프가 꿈입니다 ㅎㅎ)

    반면 황 기자는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ㅎㅎ 이 이벤트는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디데이는 11월9일! 저는 아침부터 신이 났습니다.
    오전 10시30분. 호텔 앞에서 스카이다이빙 업체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러 갔습니다.
    저희 부부까지 총 10명이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스카이다이빙은 1만4000피트(4200미터 정도) 상공에서 수직 낙하하는 겁니다.
    물론 혼자 뛰어내리는 건 아니고요. 숙련된 조교(?)와 함께 떨어지는 겁니다.
    사실 조교가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거고 저는 짐짝(?)처럼 함께 떨어지더군요. ㅎㅎㅎ
    한 3000미터 정도 수직 낙하하다가 1000미터쯤 남으면 낙하산이 펼쳐지면서 천천히 낙하하게 됩니다.


    저는 매우 신난 표정이죠?ㅎ
    반면... 황 기자의 표정은 다릅니다.


    하하 근심에 차 있죠. ㅋㅋ 뒤에 보이는 비행기가 저희가 탈 그 비행기입니다.



    뛰어내릴 준비를 마친 저희입니다.



    저랑 함께 뛰어내린 조교한테 몇 번이나 스카이다이빙을 해봤느냐고 했더니
    3000번 정도라고 하더군요. ㅎㄷㄷ
    하늘에서 저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기가 내 사무실이예요”
    저는 좀 부럽더군요. 그래서 아주 촌스런 영어로 답했습니다. “I envy you” (ㅡㅡ;;)




    이제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조종사를 빼고서는 12명이 탔는데 꽉 차던 비행기였는데요.
    상공으로 죽 올라가니 역시나 귀가 멍멍해지더군요.

    하늘을 계속 비행하다가 착지 지점으로 돌아와 한 커플(초보-조교)씩 뛰어내리기 시작합니다.
    이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황 기자가 뛰어내리고 제가 마지막에 뛰어내렸습니다.
    오오 그 이후는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상공이 매우 추웠다는 것과 혼이 나갈 만큼 빠르다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낙하산에 매달려 있더군요.
    하늘에서 바라본 땅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ㅎㅎ 소감이 너무 간단하죠. 그치만 다시 못할 경험, 신혼여행 때 아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끝나면 너무 서운하겠죠. 황 기자가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찍었냐고요? 조교의 손목에 아주 작은 카메라를 장착해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찍어줍니다.
    물론 돈을 내야겠죠. 아주 비쌉니다;;;;

    그래도 한 번 보세요. 매우 재밌습니다. 바람이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좀... ㅎㅎㅎ

     









     

    Posted by 누런돼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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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okjungmin.khan.kr Sci-Borg 2011.11.18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와!!!! 경상 표정 지못미.ㅋㅋㅋㅋㅋㅋ 보는 내가 다 심장이 콩딱콩딱.ㅋㅋㅋ

    2. 2011.11.19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Favicon of http://arrogance.tistory.com xogo 2011.11.28 05: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우와아아아!!!! 스카이다이빙이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나너무나 하고싶은건데 악악..
      완전부럽네요 ㅠㅠ
      그런데 하나..
      저기가 office라고 말씀하시는 저분은 늘 일처럼 하시니 (카메라구도까지도 섬세히 신경을 다 쓰시는걸 보니)
      이젠 면역이되어 즐겁지 않으실까요? ㅋㅋ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상 너무 즐겁게 잘봤습니다^^

    4. Favicon of http://leegoeun.khan.kr 이고은 2011.11.28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기자의 수심에 찬 표정, 넘 웃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