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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같은 여행

교황이 방문할 내포 천주교 성지 ①

 

지난주 내포 천주교 성지에 1박 2일 동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내포 지역은

충남 서북부 당진·예산·홍성·서산 등을 포괄하는 지역을 말하는데요.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곳이자 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곳입니다.

이 지역을 돌아보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포'의 의미?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내포(內浦)라는 지명은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부분’을 말한다. 내포는 예로부터 물과 통하는 지역이라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천주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온 것도 지리적 여건 덕분이다. 프랑스 사제들은 바닷길을 따라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 지역에 천주교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 신자가 많았던 만큼 박해 피해도 컸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4년 보고서에 “잿더미에서 소생한 내포에 작은 신자 집단이 생겼고 이곳은 옛날 가장 혹심하고 잔인한 박해가 계속 일어났던 곳입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는데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교황은

솔뫼 성지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해미 읍성에서 폐막 미사를 집전할 예정입니다.

 

저는 6곳의 성지를 돌아봤습니다.

여사울 성지, 합덕성당, 솔뫼 성지, 신리 성지, 홍주 성지, 해미 성지 등 6곳입니다.

 

 

첫번째 여사울 성지입니다.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  041)332-7860

한국인 사제 1·2호인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집안에 복음을 전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2~1801)의 생가터다. 여사울은 서학이 학문 차원을 넘어 신앙으로 퍼져 나가는 ‘복음의 못자리’ 역할을 한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졌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는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때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했다.

 

 

 

두번째 돌아본 곳은 합덕성당입니다.

 

 

 

 

 

<합덕성당>

내포의 첫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

충남 당진시 합덕면 합덕읍 275  041)363-1061

 

합덕성당은 내포의 첫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이다. 현재 합덕리 주민 중 95%가 가톨릭 신자일 정도로 천주교 영향이 컸다. 김성태 주임신부(41)는 “예산, 당진 어느 동네를 가도 순교자가 있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1890년 양촌과 간양골에 파견된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 합덕성당과 공세리성당의 전신이 되었다. 1899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처음에는 한옥 성당과 사제관에서 시작했다. 제7대 페렝 신부 때 서양식으로 건축해 1929년 완성한 건물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다.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 합덕성당은 지역 사람들에게 '양관(洋館)'으로 불리며 합덕의 상징이 되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학교의 전신인 교리학교를 설립했고 고아들을 위한 성영회도 운영했다. 성장 사제관은 근대식 병원의 역할도 했다.

 

 

이후 합덕 성당부터 3.2㎞ 거리인 솔뫼 성지까지 이어진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안내판은 이 길이 순례길임을 알렸는데요.

물고기(익투스)는 천주교에서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한 시간여 걸어서 솔뫼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솔뫼 성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  041)361-5021~2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생가 터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에 원래 순례객이 많지 않은 때인데도 매일 100여명으로 방문객이 늘었다.

1836년 16세였던 김대건은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반년이나 걸어서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5년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다 이듬해 효수형에 처해졌다. 사제 생활 1년1개월 만이었고 이때 불과 스물다섯살이었다. 이용호 신부(47)는 “라틴어와 불어, 영어, 중국어까지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는 계급 사회였던 조선에서 만인의 평등을 꿈꾼 사상가였고 서세동점의 세계 정세를 간파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