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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면서 가장 흥겨웠던 장면은 결혼식 장면이었다. 사진 속의 바로 이 장면이 아니라 비오는데 사람들이 막 쫓아가는 장면들을 음악과 함께 봐야 하는데... 어쨌든 지금까지 본 결혼식 장면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왜 이영화 사진이 등장했는지는 뒤에 나옴;;;

 

 

두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니 결혼하기 훨신 전부터

나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줄로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떤 자신감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도 뭐 그리 나쁜 편은 아니잖아... 라고 자위하면서

뭐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아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하도 극악무도한 아빠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소설을 봐서 그랬을까;;


그냥 아이에게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진 않더라도

좋은 음식을 골라 먹여주고 괜찮은 옷도 사 입혀주고

그렇게 하기 위해 성실히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많은 의무와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면서

두진이가 좀 더 크면 내가 가진 알량한 지식들을 얻는데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들을 들려주며

스스로 현명한 길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괜찮다 싶은 책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면서

언젠가 두진이가 이 책을 보면 얼마나 재밌어할까 하는 헛된 망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두진이가 나오고 나니

내가 그렇게 좋은 아빠였느냐 생각해 보면

거의 백점 만점에 10점도 얻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

자지러지게 울며 때를 쓰는 아이의 엉덩짝을 가볍게 몇 번 치는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아이가 자고 있으면 제발 1시간이라도 더 잤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았다.

'잠들면 천사'라는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그런 아이와 지난 주 금요일 오랜만에 하루 종일 놀아줄 기회가 있었다.

마침 휴무인데 아내와 휴일이 겹치지 않아서 혼자 아이를 봐야 했던 것이다.

전날부터 살짝 걱정이 됐다. 과연 괜찮을까.

이 놈이랑 뭘 하면서 놀지... 물놀이를 좋아하니까 물을 가지고 놀아볼까...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그려보기도 하고...

검색창에다 '18개월 아기와 놀기'를 쳐 보기도 했다.

최근에 요놈이 야외에서 많이 놀면 밤에 잘 잔다는 경험칙을 깨달았는지라

'18개월 아기와 야외활동'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종이상자를 접어서 꽃을 만드는 마술을 부리는 등

거창한 것들 뿐이어서 뭐 내가 할 만한 마땅한 건 없었다.


대망의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왔고, 나는 그냥 뭐 하던대로 했다.

밥을 먹였고, 낮잠을 재웠고, 또 밥을 먹였고,

베개로 비행기를 태우면서 같이 잠시 놀아줬다.

오후 늦게는 엄마 일하는 데 가 보자 그러면서

지하철을 타고 아이와 함께 회사를 가 봤다.

서울광장에서 아이를 풀어 놓고 뛰어다니도록 했는데 생각만큼 뛰놀진 않았다.

그러기엔 날이 너무 더웠다. 잠시 있어보니 내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이는 더위도 타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다행히 서울도서관 지하의 시민청은 시원했다.

두진이는 시민청 천장에 붙어 있는 종이비행기에 관심을 보였다.

번쩍 들어서 가까이 보여줬지만

아빠가 키가 작아 절대 거기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눈치였다.

어떡하지 하다가, 옆에 쌓여있던 전단지 하나를 집어들고 종이비행기 제작에 착수했다.

그런데 영, 종이비행기 접는 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모양은 비슷하게 낸 것 같은데... 아무리 접어도 비행기는 날지 않았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아이를 겨우 단도리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검색했다.

음... 생각보단 어렵지 않아 다행이었다.

비행기를 날려주니 아이는 그 비행기를 쫓아 꺄르르 하면서 달려간다.

휴.


그렇게 금, 토 이틀간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물론 토요일은 아내와 함께 봤지만.

겨우 하루 놀아줬을 뿐인데, 아이는 내게 곧잘 '아빠'하면서 달려든다.

물론 이 녀석은 문짝이나 자전거를 보면서도 '아빠' '아빠' 한다.

아직 아빠가 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향미 이모 등등에 이어 다섯 번째 이하의 순위이자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나에게 조금의 관심은 보이는 듯 했다.

 

급기야 지난 일요일 밤엔 더웠는지 뒤척이며 보채던 두진이가

'아빠' '아빠' 하면서 우는 게 아닌가.

'엄마'하면서 운 지는 벌써 옛날옛적이지만

'아빠' '아빠' 하면서 우는 건 처음이었다.

요 녀석... 싶어서 안아줬다.

겨우 이틀... 아니 하루 같이 보냈을 뿐인데...

 

녀석은 잠들기 싫어서 밖으로 나가 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말도 못하는 녀석이 얼마나 괴로울까. 세상에 뭐든 들어주지 못하랴.

하지만 나는 두진이를 안고 나가는 척 방문 밖으로 나섰다가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눕혔다.

두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빠'를 찾았던 녀석은 곧바로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테다;;;

그래도 자는 건 양보하기 어려웠다 ㅠ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여운이 길게 남았던 건 <어바웃 타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이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부자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즐거운 한때를 만끽하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바닷가에서 함께 뛰어놀던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두 사람은 해변가를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논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아내와 두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는데 혼자 숨죽이면서 울었다.

앞으로 주인공은 그 아버지와의 추억을 밑천 삼아 인생을 견뎌나가지 않을까.

 

바로 이 장면이다... 뛰어노는 모습 사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아버지와 놀던 사진이 유난히 많다.

쪼만한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참 많이도 가셨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걸 잘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건도 그렇지만, 아이랑 논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세상 모든 부모와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만 내가 아이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