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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너의 의미

아내가 며칠간 출장을 갔다 왔다.

물론 장모님께서 내가 일하는 낮에는 봐 주시기에 늘 절대적인 도움을 받긴 하지만,

두진이와 둘이서만 며칠 밤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갑자기 맥주 한 캔이 간절히 마시고 싶어서 두진이를 세발자전거에 태워서 데리고 가게에 가서 맥주를 사 왔다.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데 내 옆에는 비슷한 세발자전거를 끌고 가는 세 식구가 왔다.

뭔가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단지 맥주 캔과 진미 오징어가 손에 들려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맥주 몇 캔이 달랑달랑거리는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내 손이 왠지 부끄러웠다.

두진이는 눈만 꿈벅꿈벅하고 있었다.


일요일 낮에는 장인어른과 함께 근처 안양천을 산책했다.

두진이는 '하하호호' 들판을 뛰어다니고

아버님과 나는 한가롭게 노닐며 환담을 나누는

그런 풍경을 상상했다.


두진이는 역시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 녀석은 앞만 보고 가질 않는다.

길이 앞으로 쭉 뻗어있는데도 앞으로 뻗은 길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길섶의 꽃도 한 번 만져보고

돌도 한 번 들었다놨다, 던졌다가...

개미한테도 깊은 눈길을 한 번 줬다가

계단이 보이면 한 번 올라가기도 하고

강아지를 보면 '멍멍'하면서 아는 척도 한 번 하고

길밖 저 아래 펼쳐진 천변으로 내려가려고 하기도 한다.

제가 하고싶은대로 하지 못하게 하면 곧바로 떼를 쓰고 울음을 터뜨린다.

 

꽃에 관심을 보이는 녀석

 


난 앞으로 빨리 가지 않는 두진이가 답답했다

오늘따라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지팡이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땅을 쿡쿡 몇 번 찍으면서 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팔을 잡아끌고 앞으로 가자고 하면 한사코 뿌리친다.

내가 먼저 막 달려가면서 '두진아~'하고 부르면

조금 쫓아오는 듯 하다가 어느새 딴 곳을 보고 있다.


돌아가려고 자전거에 태우려고 했더니

발에 힘을 꽉 주면서 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집에 돌아가는 게 뭐가 그리 서러운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었다.

다시 길거리에 풀어주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논다.

하지만 그렇게 집에 가서는 하루종일 걸려도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을 간신히 안고서 진정시킨 뒤 조금 오다가 다시 자전거에 억지로 태워서 겨우 왔다.


녀석을 씻기고 침대에 눕혔다.

꽤 걸었는지, 아니면 고질적인 체력부족 탓인지

나는 피곤했는데 녀석은 아직 지지치도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1시간이 넘도록 잠을 안 자고 뒤척였다.

내 품에 파고 들었다가

'맴매'하면서 허벅지를 때리기도 한다.

젖꼭지를 만지면서 '찌찌'하기도 한다.

너도 젖꼭지 있잖아 하면서 쿡쿡 찔렀더니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다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진짜 자는지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기도 한다.

눈동자가 보이면 '그것 봐 안 자잖아'라는 생각인지 낄낄대며 웃는다.

 

어찌어찌 재웠다.

내 겨드랑이 사이에 착 감겨 있는 녀석....

이 작은 녀석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 주느냐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주면 표정은 엄청나게 밝아진다.

장난감 말을 탈 때도

발을 말 잔등 위에 올려서 일어나려는 위험한 짓을 하려다가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이것 해도 돼요?'

베란다에 나가 빨래를 널고 있으면 베란다 문을 비스듬히 열고 싱긋이 웃는다

'아빠, 나도 가고 싶어요'

녀석의 욕구, 욕망은 아주 작다.

그건 내가 손만 까딱하면 채워줄 수 있다.

물론 까닥,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젠가 두진이의 세계는 엄청나게 넓어질 거다.

아빠가 모르는 부분이 99%가 될 것이다.

아빠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은 0.1%도 안 될 것이다.

두진이가 앞으로 갔으면 하는 내 맘을 몰라주고 엉뚱한 길로 가는 걸 더 좋아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두진이는 아빠의 마음보다는 제멋대로 움직이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아빠가 필요없는 날이 오는 것도 금방이겠지.

왠지 섭섭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념에 잠겼다.

나도 이제 자야지 하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갑자기 두진이가 깨서 운다.

안아줘도 잘 진정하지 않고 막 자지러진다.

아, 내가 잠시 한가한 생각을 했구나....

아직 두진이는... 아빠가 절대적이다.

 

그래도

언젠가 수십 년 뒤 나는,

두진이가 빼곰히 베란다를 열고 나를 보면서 '아빠' 하고 웃는 장면이

내내 그리워서 맥주를 사러 또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난 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한 중년의 이웃 어른은 두진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우리 집에도 이런 애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되면 얼마나 서글퍼질까.

그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또 맥주가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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