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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타이밍

교황 프란치스코 누구인가 ①

8월 14일 교황이 한국에 오죠.

 

아시아청년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오는 교황은

솔뫼성지, 해미읍성 등에서 아시아 청년들을 만나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124위 시복식을 집전할 계획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세계화와 기아에 대한 비판 등

기존의 교황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전 최근

“일요일엔 일하지 마세요. 교회에 다니든 다니지 않든, 일요일에는 일하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십시오.”

라고 한 말씀이 참 와닿았습니다.

 

 

종교 담당인 전 교황이 방한하기 전까지 그동안 교황의 말씀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추기경 시절 나눴던 랍비 스코르카로 나눴던 대담,

교황 즉위 후 설교와 말씀을 담은 <복음의 기쁨> 등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최근 세보니 교황 관련 책이 30여권이 나왔더군요.

지금 세계 어떤 리더보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생각을 꺼내놓는 교황,

그의 한국 방문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깊은 의미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이죠.

그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딴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르고 싶어서입니다.

 

먼저 프란치스코는 누구일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출처 위키백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씨시(Assisi)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성인은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에 참여하는 등 모험적인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전쟁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중병도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서서히 깨닫고,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평소에 혐오하고 역겹게 느끼며 회피하던 나환자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를 진정 포옹하며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든다.

성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나병환자를 돌보고, 아버지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가 결국 아버지와 결별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를 기사로 만들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소송을 하게 되고, 프란치스코는 결국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모두 돌려주며 아버지 곁을 떠나 진정한 아버지 하느님께로 귀의하게 된다. 이때 주교앞에서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사건이 있게 된다. 벌거벗은 몸의 프란치스코는 그때야 말로 가장 자유롭고 순수한 상태임을 몸소 체험하며 꾸밈없이 사는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살게 된다.

 

 그 후, 망가진 성당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살다가 스물다섯 살에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복음의 영감을 받아,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으며, 성인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성인은 1224년 베르나 산에서 오상의 성흔을 받았으며, 그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지은 뒤 1226년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세시대의 암울한 가톨릭 교회에 큰 등불같은 존재였으며 지금도 그의 영성을 따르며 이 시대에 이어받아 영감을 얻으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는 종”, “무지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2의 그리스도”, “평화의 사도” “만인의 형제라고 고백한다.

   

 전세계적으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라고 불리우는 수도회가 많이 있으며, 한국에는 1937년 진출되어 현재 170여명의 성직자 수도자가 있다. 프란치스코성인의 정신을 따르는 그룹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뿐만 아니라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형제회까지 있고, 한국에도 작은 숫자이지만 진출되어 있다. 아울러, 프란치스코성인의 정신은 현재 개신교와 성공회에서도 큰 귀감이 되어 성인의 영성을 따르려는 그룹이 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 시대에 성인같은 성자가 태어나길 간절히 희망했다.

 

(작은형제회 조기영 신부님 자료 중)

 

 

 

 

예수회 출신인 현 교황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선택한 첫 교황입니다.

예수회 출신이 아닌 성인 중에 이름을 고른 것도 특이하죠.

그만큼 프란치스코 정신을 닮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 아닐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대기를 간단하게 정리해볼까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5남매 중 맏이로 아버지는 철도 회사 회계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양말 공장에서 청소와 사무 보조를 하고, 공업학교에 진학해서는 오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하다.

 

1953년 5월 21일 한 젊은 사제를 만나 영적으로 큰 감동을 받고 고해성사를 보며 처음으로 사제 성소를 깨닫다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하다. 이후 공동체의 결정으로 칠레에서 인문학의 기초를 쌓다

 

1963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 산미겔 산호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학위를 취득하다

 

1964~1966년 산타페 인마콜라다 대학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엘살바도르 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강의하다

 

1969년 12월 사제품을 받다

 

1970년 산미겔 산호세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학위를 취득하다. 스페인 알칼라 데 에네레스에서 제3수련을 하다

 

1973년 4월 종신서원을 하다

 

1973년 7월 36세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6년간 봉사하다

 

1980년 산미겔 산호세 대학 학장으로 재임하며 산미겔 교구의 파트리아르카 산호세 본당의 주임 사제로 봉사하다

 

1986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상트 게으로겐 대학에서 로마노 구아르디니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코르도바에서 고해 사제와 영성 지도자로 활동하다

 

1992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서임되다

 

1992년 6월 주교품을 받다. 사목 표어로는 "자비롭게 부르시니"를 선택하다

 

1993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총대리로 서임되다

 

1997년 6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의 부교구장으로 서입되다

 

1998년 2월 안토니오 콰라시노 추기경이 선종하며 대교구장으로 서임되다

 

2001년 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다. 아르헨티나 신자들에게 바티칸에서 열리는 서임식에 참석하는 대신 그 여행 경비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할 것을 부탁하다.

 

2013년 2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건강상의 사유로 교황직을 사임할 것을 발표하다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다. 가난과 평화의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선택한 첫 교황이 되다 

 

이해인 신부의 <교황님의 트위터> 236~237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