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작가가 쓴 <투명인간>. 많은 분들이 호평을 하길래 휴가 중에 읽으려고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한 마디로 흡입력있는 소설이었다. 휴가 중에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밤새 단숨에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투명인간'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만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공감가는 지점이긴 하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버림받은 이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한 번씩은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테다. 투명인간을 왕따, 소수자, 취약계층에 대입하는 것은 손쉬운 비유이고, 이제는 어쩌면 상투적 수법처럼 돼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에 숨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50대가 여당 지지율이 높잖아요. 그이들만큼 개발독재, 압축성장, 군사문화에 시달린 사람들도 없을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더 순응적이란 말이에요. 그런 결과로 점점 더 소외되고 상대적 빈곤, 불이익에 시달리고 그걸 다시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되는데도 말이죠. 소설을 쓰고 나니 논리적으로 진척된 건 없는데 감정적인 동조가 일어났어요. 근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착해 빠지고, 누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경향신문 2014-06-30 / 성석제 인터뷰 중
만수라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착해빠진, 일면 답답하긴 하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만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좋아한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88올림픽을 유치한 이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모든 선거에서 계속 여당을 찍어왔다"
이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나의 부모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비단 부모님뿐만 아니라 친지들, 친구들을 포함해 너무나도 착해빠진, 매력적인,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20대가 된 이후로 정치적 문제를 가지고 부모님께 거의 왈가왈부한 일이 없다.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오신 분들이기에 그 분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호 특별법이 좌초되는 사태를 보고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지난 휴가 때 술에 취한 김에 한 말씀을 드렸다. "애들 죽었는데 진상규명마저 못하게 하는 이들인데, 도무지 선거때만 되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1번만을 찍는 이 동네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어머니는 나의 격한 말투에도 씨익 웃으며 말씀하신다. "알았다, 인제 투표 안 할게"
말을 꺼냄과 동시에 괜히 말했다, 후회가 됐다. 부모님을 포함해 '1번만 찍는' 그 분들은 정말 순하고 착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들, 누구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주변을 챙기는 사람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좇는 사람들. 소설 속 만수 같은, 그런 사람들이다. 만수는 말한다.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그래, 이런 사람들이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
그 분들, 그 친구들은 왜 선거 때만 되면 무턱대고 1번만 찍어 왔을까.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를 욕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돈만 노리는 이들'이라며 저주에 가까운 유언비어를 서슴없이 체화하고 또 옮기면서도 여당이나 재벌, 부와 성공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소설 속 이런 구절은 가슴을 후벼판다.
"문제는 연탄이었다. 방의 호수별로 구역을 표시하고 들여놓은 연탄을 쌓아놨는데 슬그머니 한두장씩 없어지는 일이 잦으니까 매일 숫자를 세어보게 되고 서로를 감시하면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싸울 일이 더 많은 거였다. 그 연탄을 우리에게 팔아먹고 돈 많이 벌고 세금 많이 걷고 영원히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인간들하고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인간들끼리 머리 뜯고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었다."
언젠가 읽었던 인도 빈민가의 삶을 다룬 <안나와디의 아이들>처럼 가난한 이들은 세상의 권력층이나 지배층에게 날을 세우기보다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공격하고 심지어 서로 망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 일시적이고 알량한 이익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안나와디의 아이들, 348쪽)
진정한 투명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또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세상의 권력층, 지배층들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박터지며 싸우면서. 가끔 투명인간이 눈에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필요할 때만. "신체의 일부만 안 보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과 같은 경우부터 하루에 한두시간만 투명인간이 되거나 몇초만 지속되는 경우, 일년 삼백육십오일 몸의 모든 부분이 안 보이는 완전한 투명인간도 있다."
작가의 말대로 그런 순응의 결과는 "점점 더 소외되고 상대적 빈곤, 불이익에 시달릴"뿐만 아니라 "그걸 다시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된다"는 게 비극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 분들,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도, 이 세상도 없었다는 것을. 만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그냥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 그 착해빠진, 순수한, 매력적인 만수와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진즉에 망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투명인간이 돼 버린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만 똑똑한 놈'이라며 그저 증오를 퍼붓고 일방적인 비난만 한다고 뭔가 달라지는 건 있을까. 인제 심지어 개발독재, 압축성장, 군사문화에 별로 시달린 적도 없는,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것 같지도 않는 별로 착해보이지도 않는 요즘 대학생들조차 세월호 유족들이 있는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 앞에서 치킨을 뜯고 피자를 씹으며 설레발을 친다. 투명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가장 저급한 방법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그들조차 자신들이 투명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머잖아 깨달을 터다.
소설의 주제의식이 표현돼 있다고 볼 수 있는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쉬운 말이지만 어렵다. 성석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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