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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네 앞에서, 왜 나는 빨라지는가

엄마 화장품으로 탑쌓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황두진군


두진이를 대하는 내 손길은 늘 무심코 빨라진다.

아주 가끔이지만, 늦게 출근하는 날에 어린이집을 데려다 주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참견하고, 수다를 떨어대는 녀석과 상대하다보면 금세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목적지를 향하는 내 마음은 늘 조급하다. 꼭 시간을 맞춰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언제까지나 손을 잡고 정처없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밥을 먹일 때도 그렇다. 먹이다 보면 입에 든 밥을 다 삼키지도, 심지어 씹지도 않은 녀석에게 다음 숟가락을 떠서 입에 갖다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숟가락으로 푸는 밥의 양은 점점 늘어난다. 포크로는 반찬을 2~3개씩 한번에 집는다. 종종 채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밥과 반찬은 숟가락에서 낙하한다. 녀석이 도리질을 치면 밥과 반찬은 폭발한 포탄처럼 흩어진다.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씻기 싫어하는 녀석이 짜증내기 전에 얼른 마치려는 마음에서 손길이 급해지는 날도 있다. 물놀이에 심취해 씻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 노는 날도 급한 건 매한가지다. 거친 손길 탓에 녀석은 몇 번 내 손톱에 몸이 긁혔다. 발을 씻기려고 잡아 끌다가 녀석이 욕조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있다. 다 씻고 데리고 나오려다 문짝이나 벽에 머리를 부딪힌 적도 여러번이다. 칫솔질도 너무 세게 해서 아이가 양치를 싫어한다고 아내한테 핀잔을 받은 적도 여러번이다. 한 번은 칫솔에 피가 묻어 나온 적도 있다;;;

얼마 간은 내 행동에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못 느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왜 자꾸 두진이와 있으면 뭔가를 한 번에, 빨리 해치우려고 하는 걸까. 언젠가 두진이가 100일쯤 됐을 때인가... 아주 아기 때는,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잠시도 떼 놓기가 어려워서 더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보다가 무심코 이렇게 바꿔 보기도 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언뜻 보아야 예쁘다 / 잠깐 보아야 사랑스럽다 / 두진이가 그렇다.

두진이는 이런 나와 반대로 뭐든 느릿느릿하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 레고로 새를 한 마리 만들어 주면 '두 마리, 세 마리' 하면서 더 만들어 달라고 한다. 모래놀이를 하면서 빈 컵에 모래를 부어 '모래 주스'를 만들 때도 녀석은 버리고 먹고 버리고 먹고... 한 스무 번쯤 내게 주스를 주고서야 만족한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물론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하는 것은 대충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흔해빠진 일상이다. 게다가 그 무료한 일상의 행동들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면... 종이 한 장을 꽉꽉 채워야 하는 '빽빽이' 반성문 쓰기가 보여주듯,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은 어른들에게 일종의 형벌에 가깝다.

반대로 모든 게 처음인 아이는 뭐든 한 번 더 해 보고 싶다.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니, 이해하고 납득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무엇보다 아이에겐 소중하다. 한 번 더 엄마, 아빠의 눈길을 끌고 싶어 하고, 같이 있고 싶어한다.

한 번은 장난감에 빠져 노는 녀석이 칫솔질을 하자니까 너무 싫어하길래, '그럼 그거 다 하고 나서 양치하는 거야' 하고 말해 줬다. 그냥 지쳐서 거의 반은 포기한 채 한 말이었다. 근데 녀석이 5분쯤 지나니까 '인제 이거 다 했으니깐 치카치카 하자' 하면서 오는 게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꼭 안아 주었다. (물론 칫솔질을 막상 시작하자 또 떼를 쓰고 인상을 쓰긴 했지만...) 

예전에 구미 집에 갔을 때도 놀란 적이 있다. 녀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셨다. '이 녀석이 돈가스를 먹고 싶다고 떼를 쓰길래, 감기에 걸렸으니깐 다 나은 뒤에 먹자 하고 말로 이렇게저렇게 설득을 하니깐 진짜 알아듣더라'

요즘 녀석은 혼자 옷 입는 훈련을 하고 있다. 바지는 제법 혼자 입고 벗는데 아직 웃옷은 잘 입고 벗지 못한다. 머리에서 옷이 걸려 제대로 빼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웃옷은 내가 입혀주는 편이다. 한 번은 혼자 바지를 입느라고 용을 쓰고 있는 녀석에게 웃옷을 입히겠다고 머리에 넣으려고 하는데 녀석이 막 짜증을 냈다. '이따가~ 이따가~ 바지 입고~' 아... 내가 또 마음이 급했구나...

똑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아이와 어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뭐든 차근차근 기다려준다면, 아이에게 좀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면... 그 짧은 시간들이 아이의 삶에는 제법 긴 나이테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급하게 굴면서 이렇게 커라, 저렇게 자랐으면 하기보다 그 기다려주는 시간이 아마 더 소중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께 어린이집 선생님은 수첩에 이렇게 적어 주셨다.

"오늘은 두진이가 정리시간이 되었는데도 '정리 안 해' '정리 아니야' 그래서, 차분차분 설명을 해 주니 수긍을 하네요. 오늘 이해하고 납득하는 두진 모습 보며,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어젯밤 거실에서 한참 레고를 가지고 놀던 두진이에게 이제 자러 가자고 했다. 금방 들어오지 않아 뭐하나 하고 보러 갔다. 가지고 놀던 집을 저렇게 다소곳이 TV 앞에 올려놓더니 "안녕~ 빠이빠이~ 내일 만나" 하면서 나름의 작별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실 불을 끄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