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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말의 빅뱅'에 접어든 녀석

"디지게 말 안 들어"

갑자기 쪼그만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웃길 수밖에 없다. 할머니가 한 말을 흉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 녀석의 말은 모방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맨날 잠 안 자고 더 놀려는 녀석에게 "내일 아침에 놀자"고 하면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게 말한다. "이제 자고 일어났으니깐, 하루 종일 놀자!"

36개월이 막 지난 두진이는 말이 엄청나게 늘었다. 최초 빅뱅 이후 물질의 종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처럼, 녀석의 언어구사 폭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한번은 퇴근하고 집까지 녀석을 데려다주신 장인어른이 다시 댁으로 돌아가시는데 "할아버지한테 안녕히 가세요, 인사해야지" 그랬더니 "수고했어요" 그러는 게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장인어른이 가시고 난 뒤 "할아버지한테 수고했어요가 뭐야" 그랬더니 "수고했으니깐 수고했다고 하지" 하고 따진다. 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배운건지...

장모님은 어느날 녀석을 유모차에 태우고 가면서 "펄펄 눈이 옵니다~" 노래를 불러줬더니, 녀석이 "노래는 어디서 배웠어?" 그러더란다. 쪼그만 게, 벌써부터 어른 머리 위에 있으려 든다. 어떤 때는 장인어른이나 장모님이 집에 자기를 데려다 주고 가실 때 "헐~ 가네"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말을 조심해야지;;

어린이집에서는 곧잘 상황에 따른 말도 배우는 모양이다. "낯선 사람이 '꼬추' 만지만 어떡하지?"하고 물으니 "안돼요!"라고 한다. 한 번은 마트에 갔다가 뛰어다니는 녀석을 카트에 앉혀놨더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 몸에 손대지 마~"하고 말한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두진아ㅠ



구글 카드보드로 뉴욕타임스의 가상현실 영상인 'Take Flight'를 보여줬더니 "밖이에요~ 보름달이 보여요"하면서 정말 좋아했다. 그 후 계속해서 보여달라고 떼를 썼지만, 하루에 한 번만 보기로 약속했다. 벌써부터 VR의 세계를 아는 녀석과,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야 이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내가 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아마도 사뭇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녀석이 말을 시작하니까 좋은 때가 더 많다. 오늘 아침에도 녀석은 내게 장난감 컵을 조심스레 쟁반에 받쳐 가져오더니 '커피 드세요, 아메리카노에요" 그런다. 한참을 웃었다. 두진아, 아메리카노를 먹어본 적도 없는 녀석이 언제 봤다고 아메리카노를 가져왔다고 그러니...

"엄마가 어린이집에 와서 참 좋았어"

어느날 아내가 두진이와 둘이서 잠들 무렵, 녀석이 베갯머리로 가만히 다가와 속삭이더란다. 그날 어린이집 하원을 할 때 엄마가 직접 갔더니 그게 그렇게 좋았던 모양이다. 아침에 내가 데려다 준 날은 할머니가 다시 데리러 오면 펑펑 울기도 한단다.

"귀엽게 생겼어"

두진이는 자려고 누운 엄마에게 뽀뽀를 하고선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두진아, 너에게는 아직 엄마아빠, 할머니할아버지가 온 세계의 전부겠지. 네가 보는 세상을 흉내내는 너의 말을 들으며 엄마아빠는 다시금 우리가 사는 꼴을 들여다보게 된단다. 좋은 말만 배울 필요는 없어.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