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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

읽기만 하면 애들이 잠드는 책이라고?


책을 구입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빨리 읽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읽기만 하면 애들이 잠자는 책이 있다고?"

눈에 쏙 들어오는 신문광고였다. 아이를 둔 집이면 다 한 번쯤 아이를 재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셨겠지만, 두진이는 유난히도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아이였다.

아이를 재우고 싶다는 어른들의 욕망은 물론 '휴식시간'을 얻고자 하는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마도 대부분이지만.... 아이가 잘 자지 않으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또 제때 일찍 자지 않으면 성장호르몬 분비가 잘 되지 않아 성장발육에도 좋지 않다는 사실이 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엄마, 아빠가 일하고 들어오면 8~9시가 다 되기 때문에 두진이는 필사적으로 30분이라도 더 엄마, 아빠와 더 놀고 싶어했다. 아침이 되면 또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녀석은 퇴근하는 아빠를 보자마자 '레고로 집 만들자'하고 외치고, 마지 못해 잠자리에 누울 때도 '잠 실컷 자고 내일은 하루종일 놀자' 하고 다짐하듯 내게 말한다. 

늘 안쓰러워 좀 더 놀아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11시를 넘겨 12시가 다 될 때도 많았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서도 한참을 뒤척이면서 엄마 아빠를 발로 차고,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다가, 이불을 다른 것으로 덮어달라고 했다가,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가 하면서 잠이 쉬이 들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읽어주기만 하면 잠든다는 이 마법의 책 '잠자고 싶은 토끼'에 대한 이야기는 내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재우고 싶어 하는 어른과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모두 행복하게 해 주는 책이 아닌가. 이미 한 방송사의 기자가 이 책을 읽어주면서 아이를 재우는 실험을 해 본 뒤 동영상을 올렸는데, 아이는 집중하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30분 정도 내로 잠들었다. 음... 어쨌든 조금은 효과가 있는 셈이군... 그런 생각에서 이 책을 꼭 구입하리라 마음먹었다.

일단 실물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교보문고에 들를 일이 있어서 책을 찾았다. 그런데, 책이 비닐로 싸여 있었다. 만화책도 19금 도서도 아닌데 웬 비닐... 마침 견본 도서도 없어서 도무지 책 안의 내용을 볼 수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이, 설마 책 따위가... 상술이겠지... '세계 출판 역사를 다시 쓴 기적의 책' 하는 선정적(?) 문구 역시 다소 신뢰도를 저하시켰다. 책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왔다.

그러고 나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 같은 팀 후배가 "교보문고에서 그 책 한 번 본 적 있는데 하품 얘기, 자는 얘기 위주로 돼 있어서 진짜 효과가 있겠던데요"라고 말해 다시 마음의 불을 당겼다.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하려고 하니 하루가 걸린다고 해서 급한 마음에 교보문고 바로드림 서비스를 이용해 책을 구매했다. 1만원 남짓, 이 돈을 투자해 아이를 편안하게 재우고 어른도 편안해질 수 있다면야... 책을 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다. 진짜, 이 책을 읽어주면 잠든다 말이지... 빨리 읽어주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집에 도착해 아이를 씻기고 잠자리에 누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이미 시계는 11시를 넘어 있었지만 녀석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워낙에 책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새로운 '토끼책'을 사 왔다고 하자 금세 흥미를 보였다. 자, 아빠랑 토끼책 읽자... 잠자리에 누워 책을 봐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녀석은 계속 앉아서 보기를 고집했다. 어쩔 수 없이 앉은 것도 아니고 누운 것도 아닌 비스듬한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순순히 책에 집중했다.

"저 또한 한 아이의 부모로서 아이들이 평화롭게 잠들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그리고 평안한 저녁 시간을 보내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자 서문을 읽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어서 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세요... 

'이제부터 졸린 이야기를 해 줄게'

책은 첫줄부터 노골적으로 잠들기를 권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지만 너무 솔직담백하지 않나... 그런 걱정이 살짝 됐지만 계속 읽어나갔다. 두어장 읽었을까... 두진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보기에 글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페이지 모두 그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읽어주다가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자꾸 줄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외국어를 번역한 것이라 한국어 문투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좀 많았다. 파란 부분은 강조하고 녹색 부분은 나지막하게읽어주라는데 강조와 나지막이 사이에서 내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성질 급한 녀석이 갑자기 책장을 제 멋대로 뒤로 넘기려고 했다. 그림을 찾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녀석은 아무래도 글자보다는 그림이 더 흥미가 있었다. 어서어서, '토끼 나오는 그림'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책에는 그림이 몇 장 없었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금세 책이 마지막으로 치달을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아이를 달래서 이야기를 다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 반쯤 읽었을까, 하품 아저씨가 등장할락말락 하는 정도에 오자 녀석이 갑자기 하품을 크게 한 번 했다... 헉... 너무 신이 나서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고 책을 계속 읽었다. 과연 녀석은 책을 읽다가 잠이 들 것인가... 

눈이 거물거물거리던 녀석은 갑자기 "목말라요~ 목말라요.." 하면서 물을 찾았다. 물통을 입에 대어 주자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셔대더니 갑자기 녀석은 새로 정신을 차린 듯했다. '엄마 토끼는 어디갔어요?' 하면서 책 내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책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녀석은 내가 읽어주는 이야기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멋대로 책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힘을 쭉 빼라는 문구를 읽어주자 팔과 다리를 치켜들며 오히려 더 힘을 주기도 했다 ㅠ

결국 첫 시도는 헛수고로 돌아갔다. 헛수고일 뿐 아니라 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녀석은 이제 불을 끄고 자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토끼책을 읽자고 칭얼댔다... 잠은 자지 않았지만 책 자체는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아내는 '아이고, 차라리 그냥 재우지... 돈을 만원이나 쓰고 무슨...' 하면서 혀를 찼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책은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돼야 아이들에게 좀 먹힐 성싶다. 세 돌 무렵인 두진이에게는 이른 책인 것도 같았다. 물론 책은 2세~9세라고 적혀 있었지만... 책은 이튿날 출근할 때 할머니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손에 들려주었다가 한 1~2주쯤 실종됐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가져온 책을 틈날 때마다 자기 전에 읽어주고 있다. 아이에겐 모르겠는데 어른에겐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다 내가 먼저 졸려서 반쯤 멍한 상태에서 읽은 부분을 또 읽고 잠꼬대 비슷한 헛소리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읽다가 내가 너무 졸려서 '두진아 도저히 아빠가 졸려서 안 되겠다' 하면서 책을 머리맡에 두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잠들었다. 잠자다 눈을 떠 보니 녀석이 내 옆에 붙어서 침을 한 바가지나 흘리며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음... 약간 책이 효과는 있었나... 바로 잠들진 않더라도 잠드는 분위기 조성은 해 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요즘에도 틈날 때마다 계속 읽어주고 있는데, 아직 책을 읽는 도중에 잠드는 모습은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녀석이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