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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폭풍육아

[맘편한 세상을 위하여]어쩌자고 둘을 낳았을까, 나는 사회에 속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오늘은 누가 나를 붙잡을까. 복직한 지 넉 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침 출근 준비할 때마다 걱정한다. “엄마, 오늘 쉬는 금요일 아니야?” 지난 금요일, 여섯 살 첫째는 엄마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실망했는지 입이 툭 튀어나왔다. 2주에 한 번씩 금요일에 쉬니 이번주 금요일에도 엄마가 쉬리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상상했던 거다. “쉬는 날 맞잖아.…” 우기기 시작하는 첫째. ‘울어버리면 어떡하지. 울면 끝장이다. 지하철에서 회사에 보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겠다 싶어서 피에로처럼 장난을 걸고 아이의 기분을 겨우 돌린 이후 현관 밖으로 나왔다.


 

내가 옷 갈아 입으면 회사 가는 줄 알고 
18개월 둘째, 내 무릎서 꿈쩍 안 해
결국 눈물 흘리는 아이 뒤로 현관 나서
 


 

■ 복직 넉 달 ‘출근이 너무 힘들다’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제 회사로 갈 수 있겠군’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이어졌다가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볼을 밤에나 만질 수 있겠군’이라는 서운함이 몰려온다. 도대체 이 묘사하기 어려운 감정은 언제까지 겪어야 할까. 언제쯤 아이들을 두고 출근하는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회사에서 일찍 돌아오면 나아질까.

어제는 둘째였다. 18개월이 갓 지난 둘째는 엄마가 회사 간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복직 첫날 서럽게 울었지만 그 다음날부터 쿨하게 손을 흔들어준 아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종종거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18개월이 지나면서 좀 달라지는 건지 요즘 부쩍 엄마를 찾는다. 어제는 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회사 가는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안아달라고, 자신을 두고 어디 가지 말라고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냥 엄마 무릎에 앉아 독차지하는 작전.


 

만화 <핑크퐁>을 보자는 제안에도 꿈쩍 않고, 그토록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에도 꿈쩍하지 않는 아이. 울릴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아이를 떼어놨다. 오전 9시30분에는 회의가 예정돼 있으니 어쩔 수 없어. 엄마 무릎에서 떨어졌다고 “엄마,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18개월 아기를 바라보며 나는 또 생각했다. ‘난 왜 아이를 낳았을까. 어쩌자고 둘이나 낳았을까.’


 

2012년 첫째를 낳고 2014년 복직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한 지 4년째다. 칭얼거리거나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하는 감정은 여전히 숙제다. 무뎌지면 될 텐데. 왜 이 감정은 무뎌지지도 않는지. 일하는 엄마의 천형 같은 것일까. 나는 어쩌자고 둘이나 낳았을까. 둘이나 낳았기 때문에 힘든 것만은 아닌데 요즘 내 후렴구는 이게 됐다. ‘나는 어쩌자고 둘이나 낳았을까.’ 돌아보면 아이를 두 명 낳은 여자 선배들은 거의 없다. “애들한테는 둘이 좋다”고 하면서, “아이가 둘은 있어야지” 같은 말들은 너무 쉽게 하면서 둘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은 주지 않는 사회. 첫째를 낳고서 그런 사회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둘째까지 낳은 나는 용감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회사에선 ‘반푼이’가 되었다고 느낄 때 
집안은 엉망이고 아이들은 나를 찾을 때
상상을 해본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상
 


 

■ 늘 사표를 품고 다니는 엄마들 

“우리는 늘 사표를 품고 다니잖아.” 

임아영 기자와 다섯살 큰아들.

임아영 기자와 다섯살 큰아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둘 낳은 선배가 말했다. 부정할 수가 없어 같이 웃으며 씁쓸해했다. 일을 좋아하는 것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는데. ‘회사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사회에서 나는 겁도 없이 아이를 둘 낳은 것이다. 야근하다가 선배의 말이 떠올라 퇴직금 검색을 해봤다. 월급만 입력하면 퇴직금이 산출되는 사이트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검색 결과를 봤다.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건가.’ 두근두근. ‘아니 이렇게 적다니. 더 다녀야겠구나.’ 이건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퇴직금에 대한 개념도 잘 몰랐던 스스로가 우스워 민망해졌다. 결국 또 생각은 근본적인 문제로 회귀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 죽겠는데 ‘나는 왜 회사를 다니는가’라는 질문. 

회사에서는 ‘반푼이’로 살고, 집에서도 성실한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을 여러번 들었다.

 

반푼이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결국 반푼이가 되었다고 느낄 때, 집안은 엉망이고 아이들이 나를 많이 찾았다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때 나는 상상한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상.

그런데 말이다. 왜 엄마들만 반푼이가 되어야 하나. 왜 엄마들만 반푼이를 견디지 못해 사표를 품고 다녀야 하나. 아이를 낳고 가장 많이 했던 말. ‘나는 속았구나’였다. 이 사회에 나는 속았다. 공교롭게도 ‘82년생 김지영’처럼 82년생인 나는 어릴 때부터 남자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작은 차별의 에피소드들은 내게도 있었지만, ‘노력하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다’는 큰 줄기의 메시지에는 차별이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스펙’의 남자들은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나는 통과하지 못할 때. 아, 이 사회는 여자를 여전히 재생산의 도구, 육아 전담자로 보고 있구나.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좋은 남자와 결혼하면 그 문제는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회는 그대로인데 둘이 고군분투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육아를 분담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남편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경력이 끊기지 않았고 나는 육아휴직을 2번이나 해서 2년의 경력이 빈다는 걸 되새기며 그를 부러워하는 내가 미워질 때. 이 사회에 속았다고 억울해했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 ‘여자는 집에서 가사노동도 하고 육아도 해. 그리고 돈도 벌어.’ 여자도 동등해질 수 있다는 거짓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면서 돈도 버는 ‘워킹맘’들은 소진 상태고 결국 육아를 도와줄 주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집으로 돌아간 ‘경단녀(경력단절여성)’ ‘전업맘’들은 상실감에 휩싸인 상태다. 

 

다음 생애 남자로 태어날 거야 내뱉으며 
힘든 ‘구조’ 원망할 때 아이의 위로가…
‘회사인간’ 강요 받은 남편이 안쓰러웠다
 

■ 왜 다들 회사인간으로 살아야 하나 

처음에 아이를 낳고서는 남편처럼 살고 싶었다.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날 거야” 같은 말을 내뱉으며 육아를 내가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원망할 때 아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엄마, 사랑해.” “엄마, 힘내.” “엄마, 우울해?” 아이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던 어느 순간 모든 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다들 일이 중요하다고만 말해왔나. 왜 회사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고만 주입시켰나.

 

밤 11시 반 야근 후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 보내준 아이들 사진을 본다. 같이 목욕하는 여섯 살, 두 살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며 웃고 있다. 아, 얼른 들어가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싶다. 아이를 낳고 이 아이들 덕분에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친정 엄마가 어린 내게 너희들뿐이라고 했던 것이 자꾸 생각난다. 나는 정말 자식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아 아등바등 ‘일하는 엄마’가 되었는데. 너희들이 어느 새 사는 힘이 되었다. 부정할 수가 없다. 내 행복은 퇴근해 아이들의 볼을 비비고 잠든 아이들을 안고 충전하는 시간.

아이가 주는 행복을 깨닫고 보니 대한민국 남편들이 안쓰러워졌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회사인간’으로 살라는 사회에서 오히려 남자들이 육아의 행복을 빼앗긴 것은 아닐까. 여자들만 속은 것이 아니다. 남자들도 속았다. 아이의 뺨을 만지는 행복을 모든 사람이 깨달으면 ‘일하는 시간을 줄여달라’고 폭동을 일으킬까봐 그런 건 아닐까. 부모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는 글을 쓰자 댓글이 달렸다. “ ‘집에 가고 싶다’ 고딩들 학교에 9시, 10시까지 잡아 놓고 직장인들 회사에 잡아 놓고. 제발 집에 좀 가자.” 그래, 아이가 있는 부모들만 ‘회사인간’으로 고통받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다가 내 양옆에 누운 첫째의 오른손과 둘째의 왼손을 잡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두 살인 둘째의 손보다 여섯 살인 첫째의 손이 커지는 건 너무 당연한데 그 손이 커지는 시간에 엄마가, 아빠가 얼마나 함께해줬나 싶어서. 금방 둘째도 첫째처럼 자랄 텐데 시간은 아깝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너무 짧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싶다, 최대한 늘리고 싶다. 아이들 옆에 누운 나는 늘 꿈을 꾼다. 

사회가 육아 행복 뺏으면 출산율 안 올라 
이 간단한 걸 정치권은 왜 모르는지
힘들다 말하고 연대해 해결 방법 찾아야
 

 

■ 우리 세대 서사는 달라져야 한다 

올해 통계청 조사에서 가정보다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크게 감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2011년 관련 항목 조사가 시작된 후 일을 우선시한다는 응답이 처음으로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 다들 견디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일과 아이를 견주며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 일과 아이를 양팔 저울에 매달고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한다면 출산율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엄마들이 그 책임을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국가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아이를 돌보는 행복을 빼앗으려 하면 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육아가 힘든 일이 되어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 간단한 걸 왜 정치권은 모를까. 소득 상위 10%에는 아동수당을 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모습을 보며 누가 저들에게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칼을 쥐여줬나 화가 났다. ‘모두의 아이’다. 아직도 이 사회는 아이들을 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선배 세대의 서사는 ‘버티는 것이 이긴다’였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서사는 버텨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손을 잡고 연대해 말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합시다. 그 정도도 얘기 못하고 지쳐 떨어져 나가는 건 우리 모두의 손해니까요. 우리 함께 버텨요. 혼자 이 악물지 말고.”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081737005&code=210100#csidxa011f4d74424dac91940df99cee7dc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