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특' 일기/폭풍육아

[임아영 기자의 폭풍육아] 유치원 교사 1명이 7세 반 26명 돌봐…‘보육의 질’ 기대할 수 있을까

■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물려 오면’ 검색어가 많은 이유

두진이는 14개월 때, 이준이는 10개월 때부터 집 앞의 가정어린이집에 보냈다. 육아를 도와주시는 친정엄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수록 안고 들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원래 좋지 않은 엄마의 무릎이 아이들의 몸무게를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첫째는 출산휴가(3개월), 육아휴직(1년)을 마칠 때쯤 어린이집에 자리가 나서 보낼 수 있었고 둘째는 10개월 즈음에 보내야 했다. 한 번 순서를 내주면 1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대기 시스템 때문에 10개월에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미안했지만 아이가 잘 적응할 것이라 합리화하면서 죄책감을 희석시켰다.


 

블로그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다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한 번은 두진이가 22개월일 때였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옆자리 아이에게 손을 물렸다. 퇴근 후 이 모양으로 멍든 자국이 난 아이 손등을 보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한 번은 이준이가 17개월일 때였다. 어린이집에서 산책을 하다가 넘어져 상순소대가 찢어지고 살짝 이를 다쳤다.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나의 상황을 원망했던 건 두진이가 다쳤을 때랑 비슷했다. 다행히 두진이 7세, 이준이 23개월인 지금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

 

어린이집에서 다쳐도 어쩔 수 없었겠지
아이 둘을 키우며 어린이집 구조 알게 돼
화나는 건 사고 안 나길 바라는 사회구조

가끔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를 때리거나 학대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해당 교사에 대해 분노하는 댓글도 읽는다. 나도 그런 기사를 보면 분노한다. 그러나 ‘짧은 분노’ 후 그 분노가 무엇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싶어 우울해진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블로그에 종종 ‘어린이집 물려오면’ ‘아이가 물려’ 등등의 검색어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최근 든 생각. ‘어린이집에서 물리는 아이가 적지 않은 건 아닐까?’ 실제 ‘아이가 물려’라고 입력하고 들어온 걸 그대로 따라 들어가보니 어린이집에서 친구에게 물려온 아이들 이야기가 주르르 뜬다. 내 글이 제일 위에 떠서 블로그에 유입된 숫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오 마이 가드.’


 

처음 두진이가 옆에 누운 아이에게 물렸다고 했을 때는 어린이집에 정말 화가 났다. ‘도대체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를 어떻게 본 거야. 선생님들은 뭐한 거야.’ 부글부글 분노를 삭이며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혹시라도 생길 사고를 방지하겠다는 직업적(?) 습관 같은 거였다. 몇 년이 지나고 이준이가 상순소대가 찢어졌다고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을 땐 좀 달랐다. 이상하게도 어린이집에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겠지. 아이가 순간적으로 넘어진 걸. 내가 봤어도 다쳤을 상황일 거야.’


 

아이를 둘 키우면서 어린이집 구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어린이집 교사들이 얼마나 박봉을 받는지, 한국의 국공립 어린이집 비율이 얼마인지, 무상보육을 이야기하며 정치권과 정부가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이제 오히려 화가 나는 건 어린이집, 유치원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사회의 구조다.


 

 

■ ‘만 0세 3명’을 ‘교사 1명’이 돌보는 시스템이 가능한가

3월 두진이가 7세가 되며 유치원에서 제일 ‘형님반’이 됐다. 새로운 반에 들어가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하는 날. 입학식에 온 부모들이 뒤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서 있는 틈에서 문득 ‘얘들은 도대체 몇 명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세어 보다가 너무 많아 포기하고 나와 유치원 입구 공지문에 붙어있는 아이들 반 편성표를 봤다. ‘26명.’ 7세 26명을 한 선생님이 지도하는 게 가능할까. 만 5년을 조금 더 산 ‘천지분간 못하는 장난꾸러기’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제각기 딴짓을 하고 웃으며 장난을 치고 “선생님, 얘가요…” 여기저기서 난리다. ‘아, 7세에 벌써 26명이 한 반이라니.’ 아득했다.


 

둘째는 국공립어린이집 턱걸이 입소
하교 시키러 유희실 갔더니 40명 뒤엉켜
활짝 웃는 선생님들 표정은 지쳐보여


올해 이준이는 대기했던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연락을 받아 어린이집을 옮겼다. 두진이 더 어릴 때부터 보내고 싶어했던 곳이다. 20명을 뽑는데 대기 순위 20번째로 ‘턱걸이’로 입소 허가를 받아 가족 모두 기뻐했다. 두진이는 첫째라 다자녀 점수가 없어 대기 전화도 받지 못하던 곳. 이준이를 보내면서 약간 기대도 됐다. ‘나도 국공립 어린이집을 보내보는구나.’ 그러던 얼마 전 쉬는 금요일 아이를 하원시키러 어린이집에 갔다. 아이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경악’했다. 40여명이 유희실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 숫자 때문이었을까, 그들을 보며 활짝 웃는 선생님들 표정이 지쳐보였다.


 

3세인 이준이는 한 선생님이 5명을 돌본다. 쉴 새 없이 부딪치고 도망다니는(?) 23개월 된 아기들 5명을 한 명이 돌보는 시스템, 말이 되는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적해졌다. ‘선생님에게 아이를 잘 봐달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얼마 전 두진이 유치원 상담을 할 때였다. 담임선생님과 잘 먹지 않던 반찬이 나오면 낯설어하며 먹으려 하지 않는 두진이의 식습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말했다. “선생님, 두진이가 혀 끝에 음식을 대주고 막상 맛있다는 것을 알면 잘 먹는데요. 입에 넣는 데까지 오래 걸려요. 새로운 데 뛰어들려면 오래 걸리는 성격이잖아요. 선생님이 새로운 반찬도 맛있다고 잘 설명해주시면 아이가 먹을 수도 있거든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아이들 숫자가 26명이라는 게 생각이 났다. 선생님은 또 활짝 웃으며 새로운 반찬도 입에 대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설명하셨지만 집에 돌아오면서 ‘26명을 한 선생님이 지도하는 시스템에서 내가 무슨 부탁을 한 건가’ 싶었다.


 

초등학교도 한 반에 25~30여명
아이 적성에 맞는 교육은 불가능하다
아직도 말 잘 듣는 아이가 ‘모범생’이듯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정부 지침에 따라 교원 1인당 아이 숫자는 정해져 있다. 만 0세는 3명, 만 1세는 5명, 만 2세는 7명이다. 만 0세는 돌도 안된 아기다. 부모 둘이 봐도 벅찬 아기. 그런 아기 3명을 교원 1명이 돌보는 시스템이라니. 유치원에 다니는 만 3~5세는 급격히 늘어난다. 만 3세 17명, 만 4세 22명, 만 5세 26명. 이게 말이 되는 숫자인가? 이런 구조에서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아이가 털끝도 다치지 않게 봐달라고 이 사회가 요구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 ‘교사 1인당 아이 숫자’라는 근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초등학교에 가면 나아질까.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로 크니까 25~30명 정도는 한 반에 있어도 교사 1명이 지도할 수 있을까. 교사 1인당 아이 숫자라는 근본 문제를 풀지 못하면 보육도, 교육도 답이 없다. 아이들이 대규모 집단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 한 명 한 명 특성과 기질을 존중하며 아이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두진이가 어릴 때 어린이집에서 상담할 때마다 행동 전환이 느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두진이는 집중력이 좋지만 때론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눈돌리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행동 전환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집에서도 도와달라고 말할 때면 대규모 집단 생활을 어려워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밀어넣은 것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물론 집에서 돌보는 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 어린이집 전체 규칙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행동 전환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어릴 때는 한 반에 50명이 넘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는 오전·오후반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때에 비하면 나아졌을까. 그러나 대규모 집단 생활을 잘해내기 위해서 내가 배운 것은 이랬다. ‘튀면 안되고 어른들의 말에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말을 잘 듣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곳.’ 50명이 넘는 반에서는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유리하다. 어린 마음에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성장한 후에는 선생님 말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도 손을 들고 얘기한 적이 거의 없다. ‘말 잘 듣는 학생’이 유리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교사 1명이 통제하기 역부족인 상황에서 선생님들이 윽박지르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3월엔 애들을 잘 잡아야 돼’라는 말도 흔히 들었다. 물론 내가 학교 다니던 때보다는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집단 생활의 규모가 작아졌을 뿐 여전히 교사 1명이 아이들을 존중하고 지도하기 어려운 환경을 부정하지 말자. 교사들의 숙련노동으로 모든 걸 이겨나갈 수 있다고도 말하지 말자. 그것은 ‘기만’이다.


 

아동복지 지출 GDP 대비 1.1% ‘찔끔’
한국사회는 여전히 사람을 ‘수익’ 취급
교사 노동조건 개선해 줄 수 없는 건가


■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회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낸 국가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아동가족복지지출에 GDP 대비 1.1%밖에 쓰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2%, 선진국들은 3%까지 쓰기도 한다. 최근 육아정책연구소의 해외육아정책 동향에서 독일의 유치원, 어린이집 전문 일손이 부족하다는 자료를 봤다. 독일도 이런 문제를 겪나 신기해서 자료를 뜯어보니 아동 수가 늘어나는데 아동 대비 교사의 수를 맞추기 힘들어졌고 교사 부족 현상으로 유치원들이 정원 수를 줄여야 하는 상황까지 우려된다고 했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베르텔스만 재단이 2016년 발표한 이상적인 아동 대 교사 수를 반영하면 만 3세 이하의 경우 1대 3, 만 3세 이상은 1대 7.5인데 이 비율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는 10만명 이상의 교사가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만 3세 이하는 1대 7까지 올라가고 만 3세 이상의 경우 1대 26까지 올라가는데 어떻게 이리 다를까. 어린이집, 유치원, 나아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돌보고 지도해주길 바란다면 우리는 같이 말해야 한다.


 

선생님들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교사 1인당 아이 숫자를 줄여달라고. 국가가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말하려면 아이들을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줘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 아이 하나하나를 개별적 존재로 바라봐줄 시간이 생긴다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은 ‘숫자’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한다. 사람은 그 장부상 숫자 안에서 ‘비용’처리되거나 ‘수익’으로 남는다. 미취업자 시절 공무원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엎드릴 수도 없는 작은 책상에 다닥다닥 붙어서 생각했다. ‘한 반에 300명은 기본으로 넘는데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한 선배가 재수학원 구조가 여전히 그렇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민간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내가 과민해서일까.


 

세월호 참사 4주기다. 우리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회로 재구조화될 준비가 돼 있는가.

 

<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02049005&code=210100&sat_menu=A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