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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 일기/폭풍육아

[맘편한 세상을 위하여]‘돌봄’ 시간 안 내주는 사회…독감 걸린 엄마 걱정할 여유도 없네

엄마 독감 걸리자 ‘돌봄의 외주’ 비상

친정아빠까지 동원해 겨우 한숨 돌려

예전엔 몰랐다, 돌봄 업무 이렇게 많은지

 

 

■ 독감 파동

 

친정엄마가 독감에 걸리셨다. 오 마이 가드. 엄마가 아프시면 모든 게 ‘정지’다. 게다가 지금은 두진이 방학 중인데. 이를 어쩌나. 엄마 상태를 걱정했다가, 바로 아이들 돌보는 일정 조정하는 문제를 걱정했다가, 회사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걱정했다가… 그 모든 걱정이 뒤섞여 지금 엄마 걱정을 하는 건지, 아이들 돌봄을 걱정하는 건지, 일을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괴감. 엄마가 아프셔도 엄마를 걱정하지 못하는 내 팔자. 엄마 미안해요.

 

두진이가 시작이었다. 지지난주 토요일부터 두진이가 독감 판정으로 타미플루를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독감 예방 접종을 해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동생은 괜찮겠느냐”고 묻자 의사선생님이 말끝을 흐렸다. “이미 동생한테 영향을 줬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되시면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게 하세요.” 주말 내내 마스크를 씌웠건만 이준이도 독감에 걸렸다. 게다가 친정엄마한테까지 옮기다니. 나도 가벼운 감기를 앓고 계속 기운이 없었다. 애들이 아프면 비상이다. 평소 할 일이 세 배 이상 늘어난다. 2~3일에 한번씩 소아과에 데려가야 하고 몸이 아픈 만큼 떼쓰는 것을 받아줘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픈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병을 앓고 이겨내면 되니까. 20개월밖에 안된 아이한테 너무한가? 한국은 그런 사회다. 아이의 독감에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했다가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아프니까 짠하다고 생각하며 아이 옆에 주저앉으면 어떻게 될까. 아이가 아파도 연차를 내기 전 수만번을 생각해야 하는 사회인데. 해야 할 일이 쌓여있어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회. 이준이가 타미플루를 먹고 난 뒤 10분 넘게 악을 쓰며 우는 바람에 소아과로 뛰어갔다. 타미플루를 먹으면 배가 아플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안도하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그런 사회 앞에 한숨을 쉴 시간도 없었다. 친정엄마가 편찮으시면 모든 것이 정지되기 때문에. 친정엄마에게 아이들 돌봄을 외주화하고 있는 내 상황에서 엄마가 아프다는 것은 엄마가 해주셨던 모든 일이 정지됨을 뜻한다. 일요일 독감 판정을 받고 타미플루를 먹기 시작하신 엄마. 잠시 엄마가 괜찮으신지 보러 갔다가 마음이 푹 꺼졌다. 아이들과 달리 독감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서인지 엄마의 상태는 심각했다.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엄마를 보고 다급해졌다. 엄마는 얼마나 아프실까. 아니, 당장 내일은 어떡하나.

 

김상민 기자

 

■ 돌봄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엄마 상태를 온전히 걱정하지 못하는 팔자인 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장 월요일에 어떻게 아이들을 돌볼 것인가. 두진이도 방학이고 이준이는 독감으로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상황인데. 일요일 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좀 나아지셨어요? 내일 제가 쉴까요?” 평소 같으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이 바로 나와야 우리 엄마인데. “쉴 수 있니?”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오전에 아이들을 돌보다가 오후에 친정엄마가 오시기로 했다. 남편은 지난주에 휴가를 사흘 쓴 터라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오전 내 아이들을 돌보는데 이준이가 얼마나 아픈지 계속 짜증을 부렸다. 엄마인 나도 이 짜증과 떼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이런 상태의 20개월짜리를 독감 걸린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나가는 게 맞나. 엄마가 점심 때 우리집으로 오셨다. 어제보다는 나아지셨지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구세주. “아빠가 지금 퇴근해서 오고 계신단다.” 결국 친정아버지까지 동원돼 아이들 ‘돌봄’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렇게 ‘돌봄 업무’가 많은지 몰랐다. 혼자 먹지도, 자지도, 걷지도 못하는 인간의 ‘아기’들을 돌보려면 24시간을 온전히 그 존재에게 내줘야 한다. 언제쯤 혼자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을까. 적어도 열 살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돌봄 업무가 긴지 몰랐다며 한숨을 쉬면서 깨달았다. 이 사회는 ‘돌봄’에 대한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터에서 시달리다 밤에 집에 돌아오는 아빠들도, 부부 중 한 명은 일찍 돌아가야 한다고 눈치 보며 칼퇴근을 하는 엄마들도 돌봄에 대한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을.

 

그렇다면 외벌이 부부들은 행복할까. 늘 돌봄을 전담하는 쪽은 엄마다. 남성이 부양하고 여성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책임지는 가부장적 모델에서는 그렇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늘 적었고 한국은 그 격차가 크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것은 늘 여성이다. 그 밀려난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 가사노동과 육아를 담당하면 사회는 말한다. “놀면서 브런치나 먹으러 다니는 ‘맘충’ ”이라고. 돌봄노동을 노는 일로 치부하고 천시하는 사회. 그런데 한 번 돌아보자. 우리 모두 누군가의 돌봄으로 이렇게 자랐다는 것을. 그 돌봄이 ‘노는 일’인가?

 

 

반듯한 수건도, 늘 준비된 반찬도

엄마의 드러나지 않던 ‘그림자 노동’

어떻게 ‘노는 일’로 천시할 수 있나

 

■ 그림자노동으로 치부되는 돌봄노동

 

아이를 낳고 나서 친정엄마의 드러나지 않던 노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반듯하게 접혀있던 수건, 언제나 싱싱한 재료로 해주시던 반찬, “엄마 뭐 필요한데요”라는 말 뒤에 바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 그런 엄마도 우리 아이들을 봐주시면서 “놀면 뭐해, 애들이나 보지”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으면 이제 마음이 아프다. 왜 엄마들의 노동을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나. 아이를 키우기 위해 10년 전 퇴사한 아저씨를 최근 취재했다. “저에게는 묻지도 않아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한테 ‘너희 아빠는 회사 안 가니?’라고 묻죠. 백수냐고 돌려묻는 거예요.” 그림자노동인 돌봄노동을 경시, 아니 천시하는 사회.

 

“올리브영에서 버츠비 사기-장례식장-미술학원비 내기-운영위 회의-어린이집 서류 내기-마트에서 토마토 등 사기-인감증명서 발급-영유아검진 문진표-영유아검진.” 어느 쉬는 금요일 내가 메모한 내용이다. 오후 2시 두진이 유치원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4시에 아이들 영·유아 검진을 예약해놓은 날. 자꾸 볼이 트는 이준이 때문에 ‘버츠비’ 크림을 사야 했고, 선배 부친상 조문을 가야 했고, 토마토와 아이들 먹을 것을 사야 했다. 영·유아 검진을 받기 전에는 문진표도 작성해야 하는 등등등. 이렇게 목록화해놓지 않으면 한두 가지 빼먹기 때문에 아이를 낳고서는 늘 메모를 한다.

 

우리집 가사노동은 ‘행정’ 업무는 내가 하고 ‘청소 등 가사노동’을 남편이 맡는다. 어린이집, 유치원 전화 통로도 나다. 나는 매일 머릿속이 분주하고 남편은 휴일에 할 일이 많다. 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끝은 어디인가. 언젠가부터 남편이 집안일을 덜 하네, 더 하네 싸우지 않게 됐다.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하는 집안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자노동을 해결하기 위해선 기계를 들여야 한다. 건조기를 사고 만들어진 반찬을 주문하고 간편식을 사먹는 일상. 아이 얼굴은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보고 재우기 바쁜 일상. 맞벌이 부부들의 일상은 이렇다. 그래서, 행복한가?

 

 

돌봄의 시간을 뺏겨 고통이 되었을 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삶의 활력소

모든 부모가 돌봄의 행복을 쟁취해야

 

 

■ 돌봄의 행복을 모두가 누려야 한다

 

지난주 남편이 두진이 방학을 막아내기 위해 3일간 휴가를 썼다. 출근할 때마다 그날 ‘미션’을 줬다. 아이 방학숙제 도와주라, 빨래를 해놓으라 등등. 돌아와서 아이 방학숙제 책을 펼치니 아빠와 아이의 기록이 가득하다. 그림에 같이 색칠을 하고 동물 숫자를 세서 숫자를 적어놓기도 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도 애 보는 것보다 회사 가는 게 낫지 않아?” 돌봄노동은 고되니까. “아니, 아이랑 있는 것도 좋아.” 남편과 나는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돌봄노동을 ‘엄마’ 몫으로 가두니까 자꾸 돌봄노동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하고, 남편은 돌봄노동에서 ‘소외(?)’되니까 오히려 아이를 돌보고 싶다 하는 아이러니. 우리가 성별이 다르게 태어났으면 더 편했을까.

 

아니다. 돌봄의 시간을 빼앗기니 돌봄이 어려워진 게 문제다. 돌봄이 고통이 된 것이 문제다. 돌봄이 고통인가? 아침에 잠든 아이들이 침대에서 엄마가 있는 곳을 더듬다가 엄마 몸에 손이 닿으면 눈을 뜬다. 눈을 뜬 두진이를 먼저 꼭 안아줬다. “엄마가 어제 늦게 와서 얼굴을 못 봤네. 어제 못 보고 자니까 아쉬웠어”라며 애정 표현을 하고 나니 아이가 활짝 웃으며 품속으로 파고든다. 파고든 아이를 꼭 끌어안고는 생각한다. ‘1차 충전 중.’ 형과 꼭 안고 있는 엄마를 보자 이준이도 자기를 안아달라고 한다. “삼단 합체!”라고 외치면 두 아이가 내 품속에 파고든다. 두 아이를 꼭 끌어안고 생각한다. ‘2차 충전 완료.’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내 인생의 충전의 시간이 됐다. 이 안온한 시간들이 삶을 유지하는 힘이라는 것을 난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이게 행복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돌봄의 행복을 모두가 누려야 한다. 남편도, 나도 이 행복을 오래 누리길 바라면서. 모두가 돌봄의 시간을 쟁취해오는 미래를 또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