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낳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나보다 진취적인 여성으로 키우고 싶었다. 가끔은 도망치거나 물러섰고 또 가끔은 불안해했고 때로는 눈치를 살폈던 나와는 다른,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 그런데 이게 웬걸. 아들이 태어났다. 둘째는 딸을 낳을 수 있겠지. 다시 임신했고 ‘봄봄’이라는 태명을 지으며 딸이길 소망했다. 또 아들이 태어났다. 이제 “아들들도 어릴 땐 예쁘다”며 ‘아들바보 엄마’가 됐다. 아들을 기르는 삶을 상상해보지 않았지만 아들들도 몹시 예쁘다. 내 자식이니까 당연히 예쁘겠지.
딸을 키워본 적이 없으니 딸을 키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늘 상상해왔다. 딸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장면을. “아이야, 너는 있는 그대로 소중해. 너를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
나는 30대가 되어서야 나를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그게 억울해졌다. 여자니까 늘 조심하라는 말을, 몸을 삼가라는 말을 들었다.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마라, 여자애들이 얌전하지 못하고 시끄럽다’ 같은 말을 교실에서 늘 듣는 한국 학교를 다녔다. 그럴 때마다 억울했지만 항의해봤자 더 크게 혼이 날 거라는 눈치는 있었다. 집에서도 남동생은 외박이 가능했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위험하니까. 딸에게 처할 위험에 대한 부모님들의 걱정을 이해했지만 그럴수록 부득부득 밤에 떠돌아 다니고 싶었다.
남동생이 있지만 큰 차별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들에 비해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같은 골목길의 할머니들 목소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외가 분위기에서, 제사 때 절을 하고 나면 원래 여자는 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들에서, 엄마와 작은엄마들이 절을 하지 않고 뒤에 물러나 있는 걸 보면서.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친구와 산부인과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엄마 친구는 이미 딸 둘을 낳았고 셋째는 아들을 낳고 싶어했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었다. “아들인가요?” 그 답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 어린 나는 생각했다. ‘배 속의 저 아이가 여자애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낙태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의 일이었다.
몇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보도를 지켜보며 깨달았다. ‘여자치고 나는 운이 좋아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아남았구나.’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들을 낳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번뜩 놀랐다. 이게 다행인가? 아들을 낳은 게 다행인가? 그 생각에 가 닿은 스스로에게 당혹스러웠다.
자연물을 이용해 만든 전남 순천시 ‘기적의 놀이터 1호 엉뚱발뚱’에서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다. 어린이들이 놀 때 다른 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번은 놀이터에서 한 남자애가 여자애에게 모래를 뿌렸다. 그 남자애 엄마가 말했다. “어머 어쩌나. 괜찮니? 네가 좋아서 그런 거야.” 여자애는 눈에 모래가 들어갔는지 울고 있었다. 여자애 엄마가 멀리 있었기에 아이의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화가 났다. ‘좋아서 그런 거라니.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행동은 못하게 가르쳐야지.’ 그 남자애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애에게 가서 말했다. “네가 좋다고 친구를 괴롭히면 안되는 거야. 친구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거야. 알겠니?” 오지랖이 넓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그 여자애의 울음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서 그런 거야.” 어릴 때는 ‘아이스케키’로 시작하지만 커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저지르는 수많은 장면을 살면서 겪었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자들도 말한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너도 좋았던 것 아니야? 싫으면 싫다고 진작 말하지. 이제 와서 왜 이래?” 유치한 드라마 대사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 그런 일상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울고 있는 여자애처럼 뭐라 말하지 못한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너는 좋으냐고, 싫지 않으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왜 그러냐고 다그치는 사회. 아이가 모래 뿌린 사소한 일로 너무 과한 결론에 가닿는 것 아니냐고?
폭력은 일상적이다. 아이들이 어릴 땐 더 노골적이다. 아직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들 사이에서 가끔은 인간의 본연적 폭력성을 엿본다. 둘째가 태어나고 기기 시작하자 첫째와 둘째 사이에 ‘다툼(?)’이 시작됐다. 둘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첫째의 장난감을 족족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첫째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첫째가 만들어놓은 신기한 블록과 자동차 장난감 행렬들을 용감하게 부서뜨렸다. 첫째는 그때마다 화가 나 둘째의 머리를 때리고 둘째는 ‘우왕’ 울음을 터뜨린다. 혼이 나는 건 늘 첫째. 첫째에게 이렇게 말한다.
“두진아, 엄마는 이준이가 맞아서 속상한 게 아니야. 두진이가 때리는 사람이 되는 거 정말 싫어. 때리는 건 정말 나쁜 거야.” 동생을 때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때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누군가를 괴롭히는 행동은 ‘폭력’이라는 것.
그렇지만 나도 헷갈린다. 때리는 건 나쁜 것,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자식이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가 된다면. 첫째는 일반 남자애들과 달리 활동적이지 않다. 몸싸움을 좋아하지도 않고 겁이 많다. 장난을 많이 치는 남자애들이 우리 아이를 밀칠 때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떠오르는 생각. ‘두진아 너도 밀어!’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들들이 남고에 간다면, 군대에 간다면. 아들들을 낳고 그런 상상을 자주 하게 됐다. 얼마 전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주의 깊게 봤던 이야기는 군대 내 괴롭힘 에피소드였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 후임병을 괴롭히는 이야기. 전형적인 구도다. 권력을 가진 자의 괴롭힘이 군대에서 벌어진 것뿐. 그런 장면을 볼 때 나는 이게 우리 아들들에게 벌어지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여자로 살며 겪었던 폭력성과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성이 크게 다를까라는 의문도 따라온다. 크든 작든 권력을 가진 자들이 휘두르는 폭력.
나는 평생 여자로 살았다. 한국에서 남자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 남을 괴롭히는 행동은 폭력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길러주고 싶은 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폭력에 대응하고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응법은 무엇일까.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몸짓에서 약자들에 대한 공감이 없다는 것을 엿볼 때 가장 절망스러웠다. 그 약자가 여성일 때는 수많은 기억들이 딸려 올라왔다.
‘미투’ 열풍에서 더 이상 참지 않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오랜 폭력에 참아왔던 목소리들. 한국 여성의 99%가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들. 공감한다. “남자는 그렇게 해도 돼, 남자니까 괜찮아”라는 게 여전히 용인되는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한 결과다. 여성들에게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대해왔을 뿐. 센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추행은 더욱 추하지만 일상의 자잘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타격을 줬을 폭력도 적지 않았으리라.
딸들을 아무리 진취적으로 키워도 아들들을 키우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 아들은 다르게 키우는가. 왜 아들이 친구를 괴롭히는 행동을 해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가. 아들들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부터 키워야 한다. 설령 너는 재밌더라도 다른 사람이 싫어하면 멈추도록 하는 것,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 그게 시작 아닐까.
첫째가 내년에 학교에 간다. 점차 부모의 목소리 외에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질 것이다. 초등학교 남자애들이 음란물에 나오는 단어를 장난처럼 따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래도 소소한 실천을 한다. 아이에게 장난감 총을 사주지 않고, 폭력적인 만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 장난감 총으로 노는 건 결국 쏘고 쓰러지는 재미인데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걸 놀이로 배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를 대변하는 편과 악의 무리가 싸우는 만화는 일부러 피한다.
그런데 보여줄 만화가 몇 개 없다. 싸우지 않는 애니메이션들 <뽀로로> <폴리> <타요> 등등에서도 불편한 장면이 많다. 남자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다수이며 여자 캐릭터가 소수이고 주변인인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아직도 소년 목소리로 등장하는 뽀로로는 호기심이 가득해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역시 소년 목소리인 에디는 기발한 생각으로 발명품을 만들어내는데 귀여운 소녀 목소리로 나오는 루피는 친구들에게 줄 쿠키를 굽고 자신이 만들어준 음식을 맛없어 하면 속상해한다. 아니, 루피는 친구인가, 엄마인가. 왜 친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가.
이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가르치면 ‘네, 그렇군요’라고 받아들일까. 성별의 차이를 차별로 치환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라고 말하면 ‘아, 그렇군요’ 할까. 여전히 교과서에서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아빠는 양복을 입은 모습이 눈에 띄고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설거지는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정해져있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 사회다.
아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아들 엄마가 되어야 할까. 그래서 ‘미투’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한다.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 아니다. 크고 작은 권력을 무기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회, 성별에 따라 고정된 삶을 살지 않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시작이다. 이런 삶이 해방시키는 것은 딸만이 아니다. 쓸데없이 무게를 지고 살아야 했던 아들들의 해방이기도 하니까. 내 아들들이 각자 그 존재로 사랑받을 수 있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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