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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같은 여행

베트남·캄보디아 여행기 #2. 하노이

이튿날에는 다시 하노이로 이동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3시간 반 정도 이동하는데 정말 오토바이가 많더라고요.


가이드가 베트남을 떠나면 '오토바이'만 기억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ㅎㅎ

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도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북한에 수해가 났는데
북한에 보낼 수해 물자를 사려고 태국산 쌀을 샀다고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쌀을 많이 생산하니 우리 쌀을 사면 어떻겠느냐'고 했는데 '안 산다'고 했고
자존심 강한 베트남에서는 '한국산 오토바이 수입을 금지하라'고 했답니다.
지금도 한국산 오토바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베트남은 농업이 발달한 나라로 쌀 생산량이 세계 5위권이고 수출은 세계 2위권이라고 하더라고요. 1년에 3모작까지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 자존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세계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이라는 나라 최강대국들과 물리적으로 싸워 그들을 차례로 물리친 나라는
베트남뿐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방현석의 <랍스타를 먹는 시간>을 보고 베트남에 꼭 오고 싶었었는데.
소설 속에서 잊지 못하는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책임을 묻지 않은 게 당신들에게 책임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나. 오해하지 말게. 그건 아직 당신네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라의 축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네. 당신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 수 있네. 가장 먼저 잃을 것이 인간의 품위고 그다음에 잃을 것이 나라의 품위겠지. 품위 따위를 생각하기에는 당신의 나라가 아직도 그렇게 가난한가.


그들의 자존감은 누군가를 침략해 싸운 적이 없고
침략해온 누군가를 모두 물리쳐 스스로를 지켜왔다는 것에서 온 것이겠죠.





'대우굴삭기'를 보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의 어떤 대통령보다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유명하다더군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돼 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 지사장이었던 이화석씨가 도올 선생에게 설명해준 말인데
베트남에서 김우중 회장의 '상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월남은 지금 날로 날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루가 달라지게 자산의 가치가 증대하고 있는 나라지요. 월남이 미국을 물리치고 난 후, 연이어 크메르 루즈를 제압했고, 중국과의 분쟁을 버티어 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안정적 기초를 만든 후 그들은 나라의 경제적 재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동분자들의 청산만으로는 나라의 모습이 갖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계시민으로서의 개방적 참여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말부터 쇄신이라는 의미의 '도이모이'(Doi Moi) 개방 정책을 펼치며 자아비판을 감행했지요. 그러나 월남당국이 도이모이를 외쳤어도 세계는 주춤했고 미국은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김우중이라는 큰손이었습니다. 김우중은 월남이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과감한 투자로 선수를 쳤고, 김우중의 투자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대만, 홍콩, 싱가폴,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의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고 뒤늦게 미국 등 서방의 투자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우중은 단순한 한국의 일개 기업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해있던 월남이라는 국가의 활로를 열어주고 적시의 과감한 투자자로써 월남경제를 활성화시킨 월남인의 은인이며 국민적 영웅입니다. 월남사람치고 김우중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이모이의 물꼬를 튼 최초의 사람으로서 월남정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며 세계적인 기업인이지요.(...)" -도올 김용옥 <앙코르와트·월남 가다> 中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내에서의 김우중 회장의 위상과 베트남에서의 위상.
지금 김우중 회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드디어 호안키엠 호수에 도착했습니다.
호안키엠 호수는 '검을 돌려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호수의 신에게 받은 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 검을 돌려주려고 하자
호수 밑에서 거북이 올라와 검을 물고갔다는 전설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하네요.

 

 

호수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예비 부부들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호안키엠 호수는 아침에는 상쾌한 바람, 낮에는 시원한 나무그늘,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하노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라고 합니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면 옥산 사당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북쪽에는 중국이 있는데 북쪽의 상징은 '현무'죠. 현무는 거북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남쪽은 주작인데 주작은 봉황처럼 생겼다고 하죠. 베트남을 상징합니다.

제가 발로 차고 있는 저 '상징물'은 거북 위에 봉황이 있는 모양입니다.
베트남이 중국을 누르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거북의 머리를 발로 찰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차면 머리가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었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중국'이라고 합니다.
한때 전쟁을 하기도 했고 지금도 남중국해에서 석유를 두고 다투고 있죠.
가이드 설명으로는 역으로 중국이 베트남을 두려워하는 측면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베트남 역사를 잠깐 볼까요.
도올 선생의 책, <앙코르와트·월남 가다>를 다시 인용해 봅니다.

"베트남은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의 모든 강대국을 물리적인 실력으로 연거푸 패배시킨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베트남 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처음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를 처절하게 무릎꿇게 만들었죠.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1만여명의 프랑스군은 꼼짝없이 항복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만방에 보여주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허연 선진국사람 프랑스 용사들이 자기가 지배했던 쪼끄맣고 까만 동영사람들에게 총을 들고 투항하는 모습은 당시 인류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죠. 46년부터 54년까지 불월전쟁(Franco-Viet Minh War)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자그맟니 14만8000명에 이르렀습니다. 호치민이 당시 프랑스군에서 뭐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프랑스군 1명을 죽일 때 너희는 우리군 10명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계산으로도 너희는 지고 우리가 이길 것은 뻔한 이치다.'

다음날로 제네바회의가 열렸고 17도선 벤하이강을 중심으로 잠정적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1956년 7월 20일에 거국적인 총선을 치르기로 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조.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거국적 선거에서 호치민이 이길 것은 너무너 뻔했으니까요. 결국 1955년 12월 남쪽에는 친카톨릭 친서방적 고딘디엠정권이 들어섰고 북쪽에는 호치민의 월맹정권이 들어섰지요.

다음이 세계최강국인 미국입니다. 6·25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사적 비극을 통하여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소위 도미노이론이라는 것이 성립했고 이 터무니없는 무지스러운 이론에 따라 미국은 결국 프랑스의 바톤을 이어받아 월남에 개입하게 됩니다. 케네디정권(1961-63) 때 이미 본격적인 군사개입이 시작되었고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의 후보 골드워터가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들고 나오자, 미국민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개입으로 후퇴해야만 했던 악몽을 연상하면서 평화를 외쳤던 린든 비 죤슨을 뽑아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주의자로 가장했던 죤슨 대통령이 1964년 8월에 바로 통킨만에서 북폭을 시작한 것입니다. 5788개의 평화로웠던 북베트남의 마을 중 4000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모든 길과 철도와 다리가 파손되었습니다. 며칠 후(8월7일) 미 의회는 '통킨만 결의안'(Tonkin Gulf Resolution)을 통과시켰습니다. 여기서부터 20세기 세계사의 운명을 결정한 어마어마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기억하시죠! 1975년 4월 29일, 사이공 미대사고나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는 그 사진을! 미국은 완패했습니다. 미국은 확실하게 진 것입니다. 미국은 도미노이론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공식적으로 5만8183명의 미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력으로 이 세계는 다스려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인된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국이지요. 1979년 2월 크메르 루즈와의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국경분쟁에 있어서도 결코 중국은 월남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이라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의 최강국들과 물리적으로 싸워 그들을 차례로 물리친 나라는 월남밖에 없습니다
."(이화석)

-이 지사장님의 말씀을 듣자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데오, 사실 아시아에서 물리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나라는 월남밖에는 없겠는데요. (도올)

"일본의 경제력도 무서운 것이지만,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를 지배하는 확실한 인도차이나의 맹주이며 앞으로 수십년간은 전쟁 없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이화석)

-베트남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겠네요.(도올)

"그렇습니다. 개개인의 행동양식에 세계강대국드르이 압제를 이겨냈다는 자신과 자만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신용도 있고 성실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못사는 나라치고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주재하고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이화석)

=> 도올 김용옥 <앙코르와트·월남 가다> 中





바딘 광장입니다. 호치민 주석이 잠들어있는 곳 앞의 광장인데요.
1945년 8월혁명 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장소이고
기념일이면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이곳에는 호치민 주석의 사체가 방부 처리돼 사람들에게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호치민 주석은 사망할 당시 유언장에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주문했지만
살아남은 정치인들이 이렇게 사체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이겠죠.

저희가 갔을 때는 개관 시간이 지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호치민 주석은 정말 훌륭한 지도자였죠. 다시 도올 선생의 책을 인용해봅니다.


-베트남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빈곤한 와중에도 강인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도올)

“그 이유는 매우 단순명료한 것입니다. 호치민이라는 위대한 도덕적 리더십 아래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단일한 목적으로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죠. 호치민은 성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호치민은 평생 나라를 위해서만 살았고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통장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으며 그가 소유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두 칸짜리 초라한 집무실에 타이어를 기워만든 샌들이 있었을 뿐이죠. 후사가 없으니 군더더기 잡말이 생겨날 아무 건덕지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호치민은 단순한 게릴라 파이터가 아니라,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맹렬하게 민족주의적인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판티엩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지만 1911년 불란서 선박에 조리사 조수로 취직하여 넓은 세계로 뛰어 들었습니다. 미국의 보스턴·뉴욕,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의 각지를 항해합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정착해 살다가 파리로 옮겨 그곳에서 불란서 사회주의자들과 연분을 맺고 1920년에 결성된 불란서 공산당의 창립멤버가 됩니다.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인터내셔널에 참여했고 중국 광주로 파견됩니다. 그곳에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결성하지요. 그것이 결국 월남공산당으로 발전케 되지요. 1941년 꼭 30년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월남 전역을 장악합니다. 1945년 9월2일 그는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그가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지요.

그 독립선언문은 미국독립선언문을 본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그러한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화석)


-호치민은 통일을 보고 죽었습니까?

“아니죠. 통일 6년 전 1969년 9월2일 오전 9시47분 하노이의 2층 집무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도 그가 눈을 감았던 그 소박한 침대를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치민의 위대성은 죽을 때까지 전쟁을 이기기 위하여 당면작전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국가대계를 위하여 교육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은 어차피 월남인민이 승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후의 국가 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란서와 미국과 기나긴 전쟁을 이끌면서, 그 어마어마한 폭탄세례의 와중에서도, 자그만치 5만 명의 젊은이들을 외국에 유학시켰습니다. 바로 이 유학생들이 오늘의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영어·불어·독일·만다린·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했고 한시를 자유롭게 쓸 정도로 한문에 달통했습니다. 이러한 한학의 기반과 서양학문에 통달한 그의 혜안이 그의 도덕적 인격과 미래의 통찰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30여년간 그의 리더십과 더불어 꾸준히 도덕화되어 온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베트남 역사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네이버 캐스트에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네요. 링크를 걸어두겠습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03

호치민 주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리도 '호 아저씨'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여행에서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앙코르와트·월남을 가다>라는 책이 참 도움이 됐습니다.
도올 선생이 2004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한 기록인데 한 번 읽어보세요. ^^




한기둥사원에 가서 군인들이 훈련 중이길래 함께 찍어봤습니다.
한기둥사원은 1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사원이라 '일주사'라고도 불리는데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고 하노이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베트남은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코트를 입었는데 이제 다음날부터 캄보디아!
후끈한 여름 날씨였는데요. 이제 캄보디아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