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모음/누런돼지

“개발에 등떠밀린 도시민중, 그들의 저항이 도시의 본체”

글·사진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282157015&code=960201


ㆍ‘유체도시를 구축하라’ 저자 고소 이와사부로 내한

쇠를 찢고 두드리는 소리가 가득한 골목에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을 때쯤 작은 문패달린 입구를 발견했다. 서울 문래동 철재상가 골목에 자리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LAB39’다. 전시·포럼·콘서트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 실험실이라는 뜻의 ‘LAB’와 함께 이곳의 주소 ‘문래동3가 54-39번지’에서 39를 따온 이름이다.

지난 25일 이곳에서는 저서 <유체도시를 구축하라>(갈무리) 출간에 즈음해 방한한 고소 이와사부로(57)와 한국 사회운동가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1980년대부터 미국 뉴욕에 살면서 번역가·평론가·잡지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전 지구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해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에도 초기 준비단계부터 참여했던 고소는 “권력과의 대결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운동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존재가 권력을 받치고 있고, 우리 위에 권력이 기생하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물론 경찰과 싸우는 장면을 보면 같은 존재들끼리의 대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권력도 우리 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고소 이와사부로(오른쪽)가 지난 25일 서울 문래동 ‘LAB39’에서 열린 한국 사회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월가 점령’ 시위 참여 경험을 말하고 있다.

 

고소의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활양식, 즉 생활공간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자본주의는 사실 공격할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과 삶의 공간은 어느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재조직된다. 고소가 생활했던 뉴욕도 그랬다.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활기를 이끌었던 소호(맨해튼의 한 지역)는 차츰 상업화되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오히려 예술가들이 쫓겨나고 부유층의 주거지로 전락했다.

폭력적인 개발 속에서도 도시 민중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고소는 도시의 본체가 번쩍이는 빌딩과 도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도시 민중의 역동적 움직임 그 자체라고 본다. 이를 일본어로 시중 거리라는 뜻의 ‘지마타(巷)’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드시 가시적인 흔적을 남기지는 않지만 다양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 형성되는 공간”을 ‘유체도시’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한다. 시끌벅적하고 꿈틀대는 민중의 움직임을 ‘움직이는 신체’(流體)라 말하는 것이다.

도시의 공공 유휴공간을 무단 점거해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는 ‘스쾃’ 운동이 그렇고, 강연이 열린 문래동의 예술창작공간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과거 홍대와 대학로를 활성화시켰지만 높은 임대료 탓에 밀려난 예술가들이 새롭게 형성한 지역이다. 고소는 이번 ‘월가 점령’ 시위 또한 “생활을 지키고 공공성을 확보한다는 정신을 잇는다는 측면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스쾃 운동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말했다.

‘월가 점령’ 시위는 그 방식도 기존의 운동과는 판이하다. 전통적인 운동은 하나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실현하기 위한 일사불란한 행동을 강조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비판하는 성장지상주의의 작동 방식을 닮았다. 이번 시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든 형태를 거부했다. 무엇이든 총회(general assembly)를 열어 모든 이가 동등하게 발언하고 결정권을 지니게 했다.

“처음에 점령 시위에 참석한 기존 정치집단들은 집단의 대표만 발언권을 갖는 집회 형식을 하자고 했어요. 이를 거부한 이들은 따로 모여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두 총회 쪽으로 몰려들었죠.”

고소는 이런 ‘아래로부터의 정치’의 실험이 기존의 정당정치와 전혀 다른 어떤 계기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힘이야말로 “9·11테러 이후 힘을 잃어가던 분산된 다양한 운동들이 연관성이 생기면서 전반적인 사회적 기풍을 바꿔나가고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날 고소와의 간담회에 참석한 자립음악가 한받은 무분별한 재개발 저항의 상징이었던 홍대 앞 두리반 투쟁을 소개했다. 그는 “같은 동네 철거민들의 투쟁에서 음악가들의 미래를 예감했다”고 말했다. 주거공간 부족의 문제를 학내 텐트 노숙을 통해 알리고 있는 성공회대 노숙모임 ‘꿈꾸는 슬리퍼’의 대학생들은 “광장에서 소비되는 이슈가 아니라 일상공간에서 함께 공유하면서 진행되는 운동, 누군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소는 “각각의 운동들이 스스로의 존재 위기에서 조직화된 것 같다”며 “자본주의 위기가 당분간 끝나지는 않으리라 예상되는데 각 운동의 고유성과 그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월가 점령 시위대는 메이데이를 맞아 총파업을 결의했습니다. 노조의 파업만이 아니라 학교를 나가지 않는다든지 교통을 마비시킨다든지 하는 활동으로 자본주의 일상을 어디까지 멈출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자는 겁니다. 점령 시위를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잘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원래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