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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사도세자 반역죄로 다스려질 가능성 충분했다”


글 황경상·사진 김문석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241941345&code=900308

ㆍ‘권력과 인간’ 펴낸 정병설 교수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세상을 향해 처음 내놓은 유명한 취임 일성이다.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는 오랫동안 ‘비운의 상징’으로 꼽혔다. 그런데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복수를 천명하는 듯한 이런 말을 했다니 숱한 역사적·극적 상상력이 나올 법도 하다.

<권력과 인간>(문학동네)을 펴낸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46)는 이 말을 섣불리 해석하기보다 전체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서 소개한 발언 요지는 오히려 ‘복수 의지’와는 반대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영조가 종통을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에게 받은 것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우선 뜻을 지켜야 한다. 사도세자를 복권시키자는 논의가 있다면 단호히 대처하겠다.” 실제 정조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상소를 올린 이들을 수차례 사형시켰다.

정 교수는 영·정조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사도세자의 죽음’임에도 이처럼 잘못 읽힌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지난 22일 연구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역사상 어떤 시점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날의 상황을 여러 사료로 재구성해서 찾아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추측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서 지난해 1년 동안 <한중록>을 소재로 연재한 내용을 엮은 결과물이다. 정 교수는 ‘반노론적 성향을 지닌 영민한 사도세자가 모함 끝에 죽었다’는 당쟁희생설과 ‘미쳐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 모두를 비판한다. 그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지만 직접적 사인은 아니다”라며 “영조는 사도세자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궁궐로 오려 했다는 말을 듣고 죽였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반역죄인이라도 세자를 죽일 수는 없다. 영조는 세자 폐위의 내용을 직접 써서 반포한다. 실록에는 없지만 일부 사찬 역사서에서 전하는 ‘폐세자반교’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조차도 이 글에서 “세자가 내관·내인·하인을 죽인 것이 백여명”이라며 “임금의 위험이 숨 쉴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는 실제 사도세자가 칼을 차고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갔다는 정황이 나오기도 한다. 정 교수는 “실제 반역을 했다기보다 증거도 없이 꼬투리를 잡혀 역적으로 몰리던 시대였으니 반역죄로 다스려질 가능성은 충분했다”고 해석한다.

정 교수는 세자의 성장환경을 보면 이 과정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어렸을 적 가끔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사도세자는 공부를 싫어하고 밥 먹기만 좋아한 뚱보였다. 영조는 이런 세자를 다른 사람 앞에서 꾸짖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났던 세자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아버지피해 도망칠 곳도 없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사도세자의 비행이나 반역 혐의에 관한 내용은 <승정원일기>에서도 모두 삭제돼 있다. 영조가 죽기 직전 정조가 상소를 올려 해당 기록을 세초하도록 청원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짙어진 까닭이 이런 정조의 ‘역사왜곡’ 때문이라고 본다. 정조는 거짓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드문’ 칭송을 모으고 불리한 말을 배격한 <사도세자 행장>을 썼다. 이것이 오늘날 당쟁희생설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쟁희생론을 널리 알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미 정 교수는 지난해 계간 ‘역사비평’ 봄호에서 이 소장의 책을 비판했고, 최근 이 소장은 책의 개정판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재비판했다. 이 소장은 정 교수가 사도세자 죽음에 앞장섰던 친정을 변호하기 위해 혜경궁이 쓴 <한중록>만을 신뢰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 교수는 <영조실록>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이재난고> <대천록> 같은 사찬 역사서와 개인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세자의 ‘광증’뿐만 아니라 당쟁희생설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도 그렇게 확인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되레 이 소장보다는 그에 앞서 비슷한 주장을 했던 주류 역사학계의 계보를 분석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된 학술적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못한 탓”이라고 말한다.

정 교수는 “섣불리 교훈을 얻어내기 위해 역사를 보다보면 왜곡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책에서 교훈을 찾자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그가 끌어내는 ‘최소 결론’은 “모든 권력은 위임받은 권력”이라는 생각이다. “권력을 한번 가지면 착각을 합니다.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이 일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독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걸핏 하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지만 대리청정으로 세자까지 권력하에 두려 했던 영조가 그렇고, 권력욕을 버리지 못해 망했던 혜경궁의 천정도 그렇다. 권력에는 친구도 외가도 처가도 없었던 그 시대 혹은 현시대 자체가 그렇다.

정 교수는 “이제 절대권력은 왕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나마 국민에게 있다”며 “경제든 정치권력이든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맡긴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늘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무능한 군주가 나라를 망쳤다면, 이제는 무능한 백성들이 나라를 망칩니다. 요즘은 경제권력이 문제인데, 재벌그룹의 재산이 어떻게 일가족의 것입니까. 어떤 권력도 대물림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소유권을 지나치게 절대적으로 만들고 있죠. 이는 이성계가 목숨 걸고 나라를 얻었으니 후손에게 대대로 나라를 줘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