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262326535&code=960100
ㆍ“돈의 기능은 줄이고 ‘품’을 키우자… 우리 아이들 지식 외에 몸도 쓰게”
“갈 데 없는 소년이로구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가 ‘서원지기 소년’ 박성준씨를 처음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듣고 대뜸 던진 말이다. 박씨의 고민은 그 말 한마디로 푸근하게 감겼다.
4년 전 함박눈이 내리던 날 그가 서울 통인동 골목에 문을 연 길담서원이 25일로 생일을 맞았다. “다섯 돌이 될 때까지 길담서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로 했어요. 윤 선생이 선구자이셔서 모시게 됐죠.”
길담서원은 “21세기에 걸맞은 현대적 서원”이라는 꿈 외에 특별한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았다. 그저 “옹달샘을 파면 목마른 길손들이 찾는 식”으로 운영됐다. “자유롭게 찾아든 사람들이 어울리면서 놀랄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죠. 다만 영원히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24일 길담서원에서는 ‘구병이가 길담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69)의 강연이 열렸다.
<잡초는 없다> 등의 저서로도 유명한 윤 대표는 17년 전 국립대 철학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농사꾼이 돼 전북 부안에 변산공동체를 일궈냈다. 박성준 길담서원 대표(72)는 윤 대표의 형인 윤팔병씨와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지난해에야 처음 만났다. 무작정 윤 대표가 운영하는 서교동 ‘문턱 없는 밥집’을 찾아가 기다렸고 만남이 성사됐다. 그 시기 윤 대표 또한 박 대표를 만나고 싶었다.
윤 대표는 이날 강연 전 박 대표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박건웅 만화가가 그린 ‘사랑하는 사람에게’를 봤다고 했다. 박 대표의 부인인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한 선생이 광주교도소 수감 중일 때 하늘에서 갑자기 붉은 삐라가 쏟아지는 것을 보곤 죽었구나 생각했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어요. 북녘의 침공이 일어난 것이 분명한데, 맨 먼저 정치범부터 처단할 거라 생각했단 거죠.”
‘붉은 것’은 삐라가 아니라 진달래꽃이었다. 당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인 때였다. “계엄군이 광주교도소를 시민군의 시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장소로 쓰면서 헬리콥터를 띄웠기 때문에 꽃잎이 흩날렸던 거라 하더군요.”
윤 대표는 처음 박 대표를 만났을 때 “기분이 나빴다”는 얘기를 꺼내놨다. “저보다 훨씬 젊어 보이잖아요.” 1940년생인 박 대표는 1943년생인 윤 대표보다 3살이 위다.
“젊어 보이는 건 오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윤 대표의 농담에 박 대표는 “나이를 헛먹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라는 진지한 고백을 내놓았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그는 13년6개월의 옥고 끝에 1981년 출소했지만 실제 “사회에 돌아왔다”고 느낀 건 유학에서 돌아온 2000년 7월이라고 했다. 진보적 기독교 운동과 평화 운동에 큰 획을 그었지만 본인이 느끼는 사회생활 경험은 고작 “10여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윤 선생에게 지도를 받고 싶은 심정이죠. 배움의 열정이 늦은 나이에 샘솟아 오릅니다. 철학공부도 입문했고, 프랑스어 공부도 2년 전에 시작해 웬만큼 읽을 수 있게 됐어요.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할까.” 그 말에 윤 대표는 “이미 철인의 경지”라고 말했다.
지난달 박 대표는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 학생 20여명을 이끌고 변산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때 윤 대표에게 배워야겠다는 ‘강한 느낌’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지식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몸을 쓰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 대표의 강연 내용도 아이들이 중심이 됐다. “생명체가 생명체인 것은 자율성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식물들도 스스로 싹이 트고 열매를 맺잖아요. 사람만이 자율성을 짓밟습니다.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교사는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자기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니까 좀비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그는 “아이들이 머리 써서 공부하는 것은 하루에 2~3시간이면 충분하다”며 “우리는 10명 중 9명의 아이들을 머리 쓰는 일에 강요하고 있는데 과도하다”고 말했다.
아이들 공부뿐만 아니다. 노동은 또 어떤가. “지금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대량살상무기·유해색소를 만드는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잉여노동입니다. 삶에 불필요한 것을 생산하니까요. 상황이 이런데 단순히 같은 노동자라고 연대가 가능할까요. 그래서는 안되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건강한 도시노동자와 건강한 농민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죠. 도시노동자 중심의 정당은 한계가 있어요. 녹색당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길담서원이 나아갈 길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활동이란 야바위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경제활동이 아니지만 다른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대가를 받으면 경제활동으로 환산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행복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돈을 주고받는 것만이 행복이며 경제활동이라고 조장하는 겁니다.”
대안은 곧 ‘품’이라는 주제로 집약됐다. 온 세상을 뒤덮은 금융자본주의에 틈을 내기 위해 교환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을 줄이고 공동체 단위로 품앗이를 주고받는 활동을 꿈꾼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길담서원이 작은 공간이지만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키워나갈 것인지 그 본질을 품이라는 화두로 지적해 주신 것 같아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이 앞다퉈 내놓은 삶의 고민들에 대해 윤 대표는 “여기 오신 분들끼리라도 연대를 시도해 보라”는 숙제를 던졌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262326535&code=960100
ㆍ“돈의 기능은 줄이고 ‘품’을 키우자… 우리 아이들 지식 외에 몸도 쓰게”
“갈 데 없는 소년이로구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가 ‘서원지기 소년’ 박성준씨를 처음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듣고 대뜸 던진 말이다. 박씨의 고민은 그 말 한마디로 푸근하게 감겼다.
4년 전 함박눈이 내리던 날 그가 서울 통인동 골목에 문을 연 길담서원이 25일로 생일을 맞았다. “다섯 돌이 될 때까지 길담서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로 했어요. 윤 선생이 선구자이셔서 모시게 됐죠.”
지난해 처음 만나 지기(知己)가 된 ‘농부철학자’ 윤구병씨(왼쪽)와 ‘서원지기’ 박성준씨가 지난 24일 길담서원 개원 4돌 행사에 앞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지난 24일 길담서원에서는 ‘구병이가 길담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69)의 강연이 열렸다.
<잡초는 없다> 등의 저서로도 유명한 윤 대표는 17년 전 국립대 철학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농사꾼이 돼 전북 부안에 변산공동체를 일궈냈다. 박성준 길담서원 대표(72)는 윤 대표의 형인 윤팔병씨와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지난해에야 처음 만났다. 무작정 윤 대표가 운영하는 서교동 ‘문턱 없는 밥집’을 찾아가 기다렸고 만남이 성사됐다. 그 시기 윤 대표 또한 박 대표를 만나고 싶었다.
윤 대표는 이날 강연 전 박 대표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박건웅 만화가가 그린 ‘사랑하는 사람에게’를 봤다고 했다. 박 대표의 부인인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한 선생이 광주교도소 수감 중일 때 하늘에서 갑자기 붉은 삐라가 쏟아지는 것을 보곤 죽었구나 생각했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어요. 북녘의 침공이 일어난 것이 분명한데, 맨 먼저 정치범부터 처단할 거라 생각했단 거죠.”
‘붉은 것’은 삐라가 아니라 진달래꽃이었다. 당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인 때였다. “계엄군이 광주교도소를 시민군의 시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장소로 쓰면서 헬리콥터를 띄웠기 때문에 꽃잎이 흩날렸던 거라 하더군요.”
윤 대표는 처음 박 대표를 만났을 때 “기분이 나빴다”는 얘기를 꺼내놨다. “저보다 훨씬 젊어 보이잖아요.” 1940년생인 박 대표는 1943년생인 윤 대표보다 3살이 위다.
“젊어 보이는 건 오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윤 대표의 농담에 박 대표는 “나이를 헛먹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라는 진지한 고백을 내놓았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그는 13년6개월의 옥고 끝에 1981년 출소했지만 실제 “사회에 돌아왔다”고 느낀 건 유학에서 돌아온 2000년 7월이라고 했다. 진보적 기독교 운동과 평화 운동에 큰 획을 그었지만 본인이 느끼는 사회생활 경험은 고작 “10여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윤 선생에게 지도를 받고 싶은 심정이죠. 배움의 열정이 늦은 나이에 샘솟아 오릅니다. 철학공부도 입문했고, 프랑스어 공부도 2년 전에 시작해 웬만큼 읽을 수 있게 됐어요.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할까.” 그 말에 윤 대표는 “이미 철인의 경지”라고 말했다.
지난달 박 대표는 길담서원의 청소년인문학교실 학생 20여명을 이끌고 변산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때 윤 대표에게 배워야겠다는 ‘강한 느낌’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지식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몸을 쓰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 대표의 강연 내용도 아이들이 중심이 됐다. “생명체가 생명체인 것은 자율성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식물들도 스스로 싹이 트고 열매를 맺잖아요. 사람만이 자율성을 짓밟습니다.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교사는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자기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니까 좀비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그는 “아이들이 머리 써서 공부하는 것은 하루에 2~3시간이면 충분하다”며 “우리는 10명 중 9명의 아이들을 머리 쓰는 일에 강요하고 있는데 과도하다”고 말했다.
아이들 공부뿐만 아니다. 노동은 또 어떤가. “지금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대량살상무기·유해색소를 만드는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잉여노동입니다. 삶에 불필요한 것을 생산하니까요. 상황이 이런데 단순히 같은 노동자라고 연대가 가능할까요. 그래서는 안되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건강한 도시노동자와 건강한 농민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죠. 도시노동자 중심의 정당은 한계가 있어요. 녹색당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길담서원이 나아갈 길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활동이란 야바위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경제활동이 아니지만 다른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대가를 받으면 경제활동으로 환산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행복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돈을 주고받는 것만이 행복이며 경제활동이라고 조장하는 겁니다.”
대안은 곧 ‘품’이라는 주제로 집약됐다. 온 세상을 뒤덮은 금융자본주의에 틈을 내기 위해 교환수단으로서의 ‘돈’의 기능을 줄이고 공동체 단위로 품앗이를 주고받는 활동을 꿈꾼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길담서원이 작은 공간이지만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키워나갈 것인지 그 본질을 품이라는 화두로 지적해 주신 것 같아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이 앞다퉈 내놓은 삶의 고민들에 대해 윤 대표는 “여기 오신 분들끼리라도 연대를 시도해 보라”는 숙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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