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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모든 순간

화이트데이-연애의 시뮬레이션


화이트데이입니다. 어떤 밤을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좀전에 퇴근해서 집입니다. 오늘 저녁 약속이 취소돼서 일찍 들어왔습니다.
'누런돼지'도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지난주에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오늘이 '화이트데이'인지 기억도 못 하고 있었는데
새삼 약속이 취소되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 그 '데이'를 깨닫고
감기인 아내를 집에 두고 술을 마시는 남편을 살짝 원망했습니다.(코감기에 훌쩍거리고 있거든요;;)
ㅎㅎ

그런데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남편은 아침 출근 직전에 이미 선물을 줬습니다.
나름 '서프라이즈'라며 식탁에 어색하게 선물을 내려놓더군요.
(저는 사실 식탁에 내놓기 전, 제가 일어나자마자 작은 방 책상에 선물을 펼쳐놓은 걸 봤습니다;;ㅎㅎ
어설픈 누런돼지...그런데 아마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아침에 선물을 주는 '공격'을 펼친 걸지도 모릅니다.
은근 꼼꼼합니다...ㅎㅎ)



꼼꼼한 누런돼지가 얼마나 고심해서 샀을지 예상되는 선물이었습니다.
이 선물을 사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를 들어가 이것저것 따져봤을 장면이 상상이 됐습니다.
그 장면을 생각하며 마냥 마음이 고마웠어요.

편지를 읽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퇴근하는 길, 약속 때문에 늦는 누런돼지에게 서운해 하는 마음은 뭘까요?
저도 원래 약속이 있었고 게다가 저는 발렌타인데이 때 선물은커녕 초콜릿도 주지 않았는데 말이죠.
ㅎㅎㅎ 부끄럽습니다... 너무 간사하네요. ㅡㅡ;;



언젠가부터 저는 연애나 결혼이 '시뮬레이션'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배우는 시뮬레이션.
그게 영화든, TV 드라마든, 연애 소설이든, 웹툰이든 뭐든.
우리가 자연스럽게 행하는 연애의 관습이라는 게
미디어를 통해 배우는 시뮬레이션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요.

사귄지 100일이 되면 이벤트를 하고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챙기고, 매달 14일마다 돌아오는 무슨무슨 기념일을 챙기고 서로의 생일도 챙겨줘야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꼭 함께 있어야 하고 등등등.

결혼하기 전에 여자는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죠.

TV 드라마에서는 (재벌) 남자가 레스토랑을 빌려 (서민) 여자에게 노래를 부르며 "결혼해줄래요"를 외치거나
(업체에서 협찬받았을 게 분명한) 다이아반지를 내밀며 여자에게 끼워주죠.

제가 결혼할 때도 친구들은 제게 물었습니다. "프로포즈는 받았어?"
ㅎㅎㅎ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촌스럽게 프로포즈는 뭐... 내가 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말했습니다.


머리로는 저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뜸을 들이면서 프로포즈를 하지 않는 '누런돼지'에 대한 원망이 서서히 커져갔죠.

미디어를 통해 주입받은 시뮬레이션이 연애의 진정성과는 크게 상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시뮬레이션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누런돼지'는 결국 결혼식 이틀 전인가에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신혼집에 데려와서 (이미 혼수로 사서 설치해뒀던) TV에 손수 만든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ㅎㅎ 늦었지만 영상을 보며 감동한 후에야 원망이 가라앉았죠.

                   (영상과는 상관없는 사진입니다. /정선 레일바이크를 타며 덜덜 떨던 겨울의 사진.)


머리로는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 같은 게 상술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애의 시뮬레이션에 맞추는 게 편한 이 심정은 뭘까요.

이십대 초반 저는 여자친구들끼리 모여서
남자친구가 뭘 해줬다, 무슨 선물을 줬다, 그런데 그래도 뭐가 맘에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대화를 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막연히 그런 대화란 연애의 진전성을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런데 연애의 진정성이라는 게 뭘까요?
이십대 후반을 거쳐 서른하나가 된 지금은
시간이 오래 지났고 그 시간만큼 쌓인 실패의 경험을 통해 연애의 진정성에 대해 잘 알게 된 걸까요?
또 결혼을 했으니 연애에 대해서는 잘 알게된 걸까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연애'에 대해 검색해봤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이라고 되어 있네요.

'애틋하다'는 말이 참 낯서네요.
연애의 시뮬레이션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상대가 해주는 일에 대해 집중하게 되겠죠.
상대가 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애틋'해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연애'라고 부를 수 없는 거겠죠.

상대에 대해 '애틋'해질 수 있는 것.
아끼는 사람이 아프다면 하루종일 신경쓰며 걱정하는 것, 아끼는 사람의 기쁨에 내가 먼저 기뻐하는 것, 아끼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 그런 것이 '애틋하다'는 것 아닐까요.


결혼을 해도,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 공부해야 하나봐요.

오늘은 이렇게 다시금 깨달았으니 '누런돼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도 구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