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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누런돼지

아레티노 평전

 

아레티노 평전의 수많은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저널리즘의 원조'로서의 아레티노다.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가 없겠지만, 그 인상적인 그 부분을 기사에서도 좀 중점적으로 썼다. 비록 생각한 대로 제대로 쓰지는 못했지만...

아레티노는 글로 먹고 살면서, 심지어 비난을 무마하는 대가로 심지어 돈이나 선물까지 받아 챙겼다. 그럼에도 그는 독립적인 위치를 잃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가 자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 제안도 거절했다.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베네치아에 거주하면서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았다.

그가 돈을 벌어들인 것도 물론 부와 명성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1차적으로는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아레티노처럼 집안도 별로인데다 배운 것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재능으로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는 펜 하나만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유럽 최초의 인물이었다. 궁정이나 교회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글을 팔아 생활했다.

오늘날 기사를 무기로 광고와 바꿔먹는 언론사들이 많다. 아마 크든작든 어떤 언론사도 그런 광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레티노의 행동을 비난하기엔, 수세기나 지난 지금까지도 저널리즘의 아레티노의 방식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먼저 회의가 든다.

무엇보다 언론의 실질적 주인이 기업인 곳도 있고, 언론인 행세를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고, 정부가 실질적으로 언론사에 감놔라 배놔라 지휘하는데다, 심지어 국정원까지 파고들어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레티노가 누렸던 언론의 독립성마저 요즘은 유지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아레티노는 자신의 부와 명성을 사람들에 나눠주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그의 집을 드나들었고, 그 사람들은 또 아레티노가 군주와 고위 사제들을 '협박'할 수 있을 만한 팩트들을 던져주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언론사 제보의 시초였던 셈이다. 지금 사람들이 어떤 언론사를 그렇게 믿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수 있을지...

미천한 출생의 아레티노가 부와 명성을 누린 것은 어쩌면 바로, 그 독립성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에 나온대로 "권력을 이용하면서도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스스로가 또 하나의 권력이 되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어떤 세력과도 거리를 유지하고 할 말은 해 버린 지라 사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가 죽자마자 교황 같은 권력자들이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해 버린 것도, 그런 그의 저널리즘을 봉쇄하고 나아가 그런 저널리즘의 출현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2013-7-13

[책과 삶]통속작가서 문화 아이콘으로 되살아난 ‘르네상스의 괴짜’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아레티노 평전…곽차섭 지음 | 길 | 400쪽 | 3만원

 

서양 역사상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발명자. 한 줄의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든 저널리즘의 원조.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괴짜 논객 피에트로 아레티노(1492~1556)를 이르는 말이다. 르네상스를 다룬 책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수백년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단지 돈을 벌 욕심으로 음란한 책들을 쓰고 제후와 명사들에게 협박조의 편지를 보냈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통속작가”라는 비난에 묻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읽는 아레티노의 글맛은 오히려 각별하다. 1525년 무렵 벌어진 르네상스판 음란물 단속이었던 ‘체위 사건’에 대해 아레티노는 이렇게 일갈했다. “남자가 여자를 올라타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그대를 만든 것도 바로 이것이라네… 사실 가두어놓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손일 것이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도박을 하고, 선서를 하며, 고리(高利)를 놓고… 찢고 끌고 때리고 상처를 입히고 남을 죽이기까지 하기 때문이지.”


라파엘로의 제자였던 줄리오 로마노가 그림을 그리고 마르칸토니오가 판각한 ‘체위’는 남녀 간의 교합 장면을 묘사한 16장의 작품이다. 광장이나 교회에서까지 팔릴 정도로 널리 퍼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일로 마르칸토니오는 투옥되기까지 한다. 아레티노는 한술 더 뜬다. 적나라한 내용의 시 ‘음란한 소네트’를 지어 판화에 덧붙인 뒤 출간해버린다. 그림과 글이 합쳐진 서양 최초 포르노그래피의 탄생이다.

 

아레티노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재조명됐다. 그의 삶과 저작이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일면을 대변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삶과 면모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레티노의 숨결을 되살려낸 저자의 작업을 눈여겨볼 만한 이유다. 저자는 아레티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도덕주의’에 빠진 지나친 편견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엘리트 계급의 위선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상하층 문화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문화 아이콘”이라는 설명이다.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현실적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설파했다면 아레티노는 성과 섹슈얼리티에서 동일한 주장을 했다”고도 본다.

 

아레티노는 출신이 비천했다.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고 당시 식자층의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코끼리 유언장’이란 한 편의 글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키우던 흰 코끼리가 죽었는데, 이 코끼리의 유언이라는 형식을 빌려 교황 주변의 탐욕스러운 추기경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게 된 아레티노는 교황의 코르테자노(정신·廷臣)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레티노는 ‘음란한 소네트’ 사건에 휘말려 목숨까지 위협당하면서 당대의 유력자에게 몸을 의탁하는 코르테자노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 무렵 그는 독립적이고 강력한 공화국이었으며 인쇄와 출판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로 건너간다. 이후 30여년 집필에 열중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음란한’ 창녀들의 대화를 다룬 <6일간의 대화>처럼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을 빌려 쓴 사회풍자도 있었지만 기독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왕과 제후, 명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두 책으로 출간해 반향을 일으켰다. 후원을 구걸하는 편지도 있었지만 그들의 치부나 비밀을 들이대며 돈을 달라는 협박에 가까운 편지도 있었다. 이것이 출판되자 두 사람의 비밀은 만인이 아는 사실로 바뀌었다. 아레티노는 “불특정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빠른 시간 내에 특정 정보를 퍼뜨림으로써 생겨나는 권력”을 거의 처음으로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당대에 발달한 활판인쇄술을 이용해 현대의 신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공개적인 글로 압력을 가하는 아레티노의 행태를 ‘저널리즘의 원조’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어떤 정의감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돈과 명성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는 종종 글에서 비난한 사람들에게서 무마의 대가로 돈이나 선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레티노는 권력자에게서 이익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비상한 균형감각이 있었다. 심지어 교황도 어쩌지 못하는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아레티노는 권력자들에게 받아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써서 ‘자비의 은행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의 집에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군주나 고위 사제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호소해왔다. 그는 이를 적절히 이용해 다시 군주·제왕들과 서한을 주고받았다. 당대의 시인 아리오스토는 이런 그의 면모를 보고 “군주를 벌하는 채찍, 신이 내린 피에트로 아레티노”라고 말했다.

 

저자는 정교하면서도 즉흥적이고, 세련되면서도 통속적이며, 신랄하면서도 부드러운, 통상적 인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괴짜’의 모습이 아레티노에게는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르네상스인’이 보여주는 개성이 어쩌면 이런 괴짜들의 독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르네상스는 ‘천재의 시대’이기보다 ‘괴짜의 시대’라는 지론을 펼친다. 저자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나름의 처방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아레티노의 <6일간의 대화>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카스틸리오네의 <정신론>과 더불어 16세기 르네상스의 3대 저작으로 꼽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